▲비운의 황태자, 이맹희 |
[에너지경제 최석재 기자] ‘비운의 황태자’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이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뒤로 한 채 14일 이국 땅에서 쓸쓸하게 삶을 마감했다. 2013년 폐암이 전이돼 투병생활을 하던 중 중국 베이징의 한 병원에서 별세했다. 삼성가(家) 장남으로 태어나 삼성그룹 총수가 될 뻔 했던 이맹희는 과연 삼성가의 문제아일까 아니면 희생양이었을까.
이맹희는 호암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장남으로 한때 후계자로 떠올랐다. 1960년에 이맹희는 삼성전자와 삼성물산, 제일제당, 신세계, 제일모직, 중앙일보 등 17개 주력 계열사 임원으로 활약했다. 1966년 5월24일 한국비료가 사카린 2259포대(약 55t)를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오다 적발됐고, 이 사건으로 호암은 은퇴하자 이맹희가 삼성그룹 경영을 맡은 것이다.
그러나 경영실적이 저조해 경영에서 배제됐다고 한다. 호암은 1986년 펴낸 자서전에서 "장남 맹희에게 그룹 일부의 경영을 맡겨보았다. 그러나 6개월도 채 못돼 맡겼던 기업체는 물론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본인이 자청해 물러났다"고 기술했다.
이맹희는 이에 대해 1993년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서 "6개월이 아니라 7년이고, 물러난 것은 기업이 혼란에 빠져서가 아니라 몇 마디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며 "(가족들이) 부산의 어느 양심 없는 의사를 찾아가 당시 돈으로 300만원을 주고 내가 정신병이라는 의사 소견서를 받아냈다고 한다"고 적었다.
재계에는 이맹희가 삼성그룹 후계구도에서 밀려난 것은 아버지 호암과 심한 갈등 때문이란 얘기도 흘러 다닌다. 1969년 차남 이창희 전 새한그룹 회장이 삼성 비리를 고발하는 탄원서를 청와대에 냈을 때 이맹희가 탄원서 제출의 주범이라고 호암이 의심을 했다는 것이다.
이후 이맹희는 개인적으로 제일비료를 세웠으나 실패했고, 1980년대부터는 몽골과 중국 등 해외를 떠돌며 생활했다고 한다. 1994년에는 부인 손복남씨가 안국화재 지분을 이건희 삼성 회장의 제일제당 주식과 맞교환하면서 CJ가 탄생했으나 이맹희는 경영 일선에 직접 나서지 않았다.
그러다 세간의 이목을 받은 건 2012년 2월 호암이 생전에 제3자 명의로 신탁한 재산을 동생 이건희가 몰래 단독 명의로 변경했다며 9400억원 규모의 재산을 인도하라며 소송을 제기하면서다. 법원은 상속 회복 청구권 소멸시효가 지났고 재산의 동일성을 인정할 수 없다며 1·2심 모두 이건희 손을 들어줬다. 패소 후 이맹희는 "소송을 이어나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족 간 관계라고 생각해 상고를 포기하기로 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