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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路] 응답하라, 2016년 대한민국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16.01.06 13:08

유재형 에너지환경산업부 부장

▲유재형 에너지환경산업부 부장

[에너지환경신문 유재형 기자] 역대 정권이 내건 구호는 앞으로 진행될 사업과 예산 쓰임의 바로미터다
. 정부가 내건 실현 목표를 통해 민간은 그 맥락을 잃고 투자를 진행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 구호 속에 숨은 맥락을 찾아야 할 때도 있다. 가령 이명박 정부가 내건 저탄소 녹색성장은 친환경사회를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지만 사대강 사업이나 습지 매립, 부실 에너지 외교와 같은 논란거리를 남겼다.

창조경제 역시 미래먹거리나 발전 원동력을 찾는다는 뜻을 담았지만 숨은 그림처럼 잡히지 않는 개념을 찾고자 한 동안 혼란스러웠든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사대강 사업과 같은 환경파괴 논란에 대비해 구호를 저탄소 녹색성장을 내걸었다는 말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득보다는 실이 많았다는 점에서 아쉬울 따름이다.

현 세대는 개발이전의 사대강 모습을 기억한다는 점에서 그나마 다행이다. 앞으로 한반도 내에서 나고 자랄 후세대는 근원적인 자연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아쉬움은 금액으로 보상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다.

개발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올바로 된 녹색사회에 대한 정립이다. 녹색과 성장의 균형을 생각하고, 권력이 놓치고 있는 친환경의 개념을 받아들여야 할 때이다.

사실 개인의 삶에 적용한다면 친환경 사회는 소비를 줄이는 삶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에너지 사용량을 줄이고 욕망을 억제하는 것에서 검소한 삶을 완성하게 된다.

그러나 산업을 부흥한다는 측면과 갈등을 피할 수 없다. 그래서 개인의 덕목일 뿐, 국가적 과제로 발전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숲 속 오두막집에서 명저 월든을 남긴 헨리 데이빗 소로우나 평생 무소유를 실천자 법정 스님의 경우처럼 자발적 가난에 힘쓰지는 못하더라도 현 세대가 겪는 환경적 고충에 대한 책임감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지난 연말 전 지구적 흥행요소였던 파리 기후정상회담에서 논쟁이 붙은 사안이 의무였다. 탄소발생량 억제 노력을 자발적인 것으로 둘 것인가, 구속력을 가진 의무화 영역에 둘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었다.

탄소 배출을 통해 경제발전을 이룩한 일부 선진국 진영으로서는 짊어져야 할 감축 책임을 저개발 국가와 나누고 회피하고 싶은 게 속마음이었다. 그래야 자신들에게 주어진 할당량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진국 진영의 주장은 즉각 반발을 쌌다. 환경문제에 있어 통용되는 제 1원칙인 오염자부담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원칙을 한국사회에도 엄격하게 적용할 필요가 있다. 책임지지 않은 국책사업, 성과 없는 예산 투입에 대한 무책임이 이어지는 현상은 바람직하지 않다.

오염자 부담의 원칙은 국민들에게 표로써 신뢰를 구한 역대 정부와 정당이 책임감을 가지고 처리해야 할 문제다. 과거 정부의 일이라는 이유로 연속성의 가진 정당의 대표와 의원들이 짊어져야 할 의무를 방기한다면 헛된 구호만 난무하는 사회가 될 것이 뻔하다.

지금 전 국토가 케이블카 설치 문제로 시끄럽다. 이 문제 역시 한 세대가 개발의 수혜를 입고자 벌이는 사업이나 후 세대에게는 환경적 부담일 수밖에 없다. 개발이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의무가 있는 다음 세대에게 현 세대가 벌이는 이기적 개발은 녹색성장이나 창조경제의 모습이 아니다. 현 세대의 환경적 의무를 게을리한 이기적 모습으로 비칠 것이 자명하다.

그런 면에서 개발 이전의 오늘로 돌아가자는 논의는 많은 교훈을 던지고 있다.

산업화에 의한 탄소배출 이전의 사회, 과소비 조장 이전의 사회, 사대강 개발 이전의 사회, 대기오염 이전의 사회로 돌아가는 데는 개발 비용 이상의 노력과 자금이 필요하다. 결국 환경적으로 진화한 사회는 개발 이전으로 돌아가는 데 기술과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지금 우리 세대에 불고있는 응답하라 1988’ 열풍은 현실이 잃어버린 순수성에 대한 갈구를 보여주고 있다. 복잡할 것 없이 정치는 국민을 위하고, 사회는 정의롭고, 기업은 공유의 가치를 바랄 진 데 뭔가 꼬여있고 권모술수가 가득한 기존 드라마에 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응팔의 스토리 전개는 분명 매력적 일 수 밖에 없다. 즉 잃어버린 것에 대한 향수는 현 세대가 지향하는 바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는 무엇을 얻고자 무엇을 파괴하고 있는지, 응팔 열풍에 기대여 묻고 싶다. 이 모든 것을 오염시킨 장본인은 당신이며 우리들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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