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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근영 기자(부국장) |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펜싱에 ‘투셰(touche)’라는 말이 있다. 공격이 성공했을 때 외치는 말이 ‘투셰’다. 누가? 찔린 사람이. 그렇다. 투셰는 ‘찔렀다’가 아니라 ‘찔렸다’라는 뜻이다. 펜싱에서 채점을 할 때는 득점한 사람이 아니라 실점한 사람이 손을 들고 점수를 준다. 이게 펜싱의 법도다. 모순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투셰는 많이 외칠 수록 좋다. 내공이 쌓여 무공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찔렸다’, ‘졌다’라고 외치는 순간 자신의 무능과 실수를 깨닫게 된다는 얘기다. 물론 어느 시기까지만 그렇다.
20일. 신고리 3호기가 상업운전에 들어갔다. 우리나라의 스물 다섯 번째 원전이다. 상업운전은 모든 시험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전력을 생산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일종의 면허증이다.
이제 막 상업운전을 시작한 신고리 3호기는 2077년까지 60년 동안 전기를 생산하게 된다. 설비용량이 자그마치 1400MW나 되니 생산전력량도 어마어마하다. 연간 약 104억kWh. 부산과 울산 경남지역 전체 전력의 12% 정도를 책임지는 양이다.
전력도 전력이지만, 신고리 3호기 상업운전은 특별한 한 가지가 더 있다. 이 원전이 우리가 사상 처음 수출한 아랍에미리트 바라카 원전의 실제 모델이라는 것이다. 바라카 원전은 원자로 증기발생기 터빈 등 주기기는 물론이고 웬만한 보조기기도 모두 ‘한국산’이다. 원자로냉각제펌프와 계통제어시스템 등 아주 일부 설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메이드 인 코리아’라는 얘기다. 자국 사정으로 좀 지연되고 있지만, 바라카 원전은 앞으로 2년 후면 상업운전에 들어간다.
놀라운 일이다. 불과 40여년 전, 원전 불모지였던 대한민국이 반세기도 채 지나기 전에 원전 수출국 반열에 올랐다는 건 거의 기적이다. 피겨의 김연아, 수영의 박태환에 견줄 만한 엄청난 성과다. 세계적인 원자력 전문가인 장인순 전 원자력연구원장이 "한국에게 원전은 하늘이 내려준 축복"이라고 말한 것은 ‘무’에서 창조한 ‘유’임을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반원전과 탈원전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괴변’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변변한 부존자원 없이 허리가 잘린 대한민국에 원전은 오아시스와 다를 바 없었다. 더구나 그 ‘오아시스’를 지을 수 있는 국가는 세계 220여개 중 열 손가락 안팎이고, 수출까지 가능한 국가는 7∼8개국에 불과하다. 그 어렵고 대단한 일을 대한민국이 해냈고, 또 해내야 한다.
안타까운 건 원전을 보는 국민들의 날 선 시선이다. 원전비리가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지진이 그 자리를 꿰찬 채 사정 없이 할퀴고 있다. 그러잖아도 원전 반대를 외치던 사람들에게 경주 지진은 호재(?)가 됐고, 겨우 허가를 받은 원전(신고리 5·6호기)의 건설은 물론이고 가동하고 있는 원전마저 정지하라고 여기저기를 들쑤시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설상가상이라고, 원전이 지진으로 폭발해 수백 만명이 희생을 당한다는 내용의 영화까지 개봉돼 수백만명의 관람객을 끌어 모으며 원전을 궁지로 내몰고 있다. 기가 딱 막힌다. ‘영화는 영화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믿고 싶지만, 이 또한 부질 없는 기대라는 생각에 가슴 한 구석이 싸할 뿐이다. 이게 현실이니 부정할 수도 없다.
홍두승 서울대 교수는 사용후핵연료공론화위원장 때 "국민 대다수가 요구하면 원전 가동을 중단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원전도 결국 국민을 위한 국가의 설비다. 원전은 사업자의 소유물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공용설비다. 안전하다고 항변만 한다고 국민들의 시선이 고와질 리 만무하다.
투셰. 국민들의 칼날 같은 시선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잔뜩 벼린 시선에 찔려 ‘졌다’라고 말해야 한다. 찔려서, 졌음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국민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적어도 안전성 지적에 대해서는 말이다. 그게 원자력이 살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