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린트
  • 메일
  • 스크랩
  • 목록
  • 글자크기
  • 크게
  • 작게

[전문가기고] 여름 날 아스팔트 위의 얼음

이경찬 미래헌법연구원장

에너지경제ekn@ekn.kr 2017.01.04 10:54:32

 
.


순조(1800~1834년 재위) 연간의 기록을 보면 기근 때문에 살던 땅을 떠나 이리저리 떠돌다 굶어 죽는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무료급식소인 구휼소를 만들자는 조정의 의논이 나온다. 그런데 그 논의가 장소문제로 첨예하게 갈린다.

원로대신들은 말한다. "우선은 굶어죽는 백성을 구제하고, 나아가 백성이 살던 땅을 함부로 떠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농촌에 구휼소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젊은 대간들이 발끈하여 반박한다. "아닙니다. 농촌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기근에 지친 백성은 모두 도시로 몰려와 농촌은 텅텅 비어 구휼소는 저잣거리에 만들어야 합니다." 이 논쟁의 끝은 결국 조정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끝난다. 그저 지방관들이 알아서 잘하라는 식으로 결말을 맺는 것이다.

사실 조선은 국가시스템이 이렇게 형편없는 나라는 아니었다. 19세기 조선 역사를 들여다보면 자연재해의 빈발로 기근과 전염병으로 온 나라 백성이 고통을 당했다는 기록이 자주 나온다. 그러나 자연재해와 기근이 19세기에만 유독 많이 발생했던 것은 아니다. 그 이전에도 자연재해는 빈발했다. 하지만 자연재해로 기근이 발생하면 국가가 비축해 두었던 곡물을 농촌에 빌려주어 기근을 면하게 하고, 그 다음 해 빌려주었던 곡식을 회수해 흉년에 대비하는 ‘환곡(還穀)’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여 18세기 영·정조시대는 기근 때문에 나라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경제시스템이 무너지면서 조선은 기근에 대처할 능력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뜬금없이 19세기 조선의 경제시스템 붕괴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순조실록에 실려 있는 이야기가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과 너무나 닮아있기 때문이다. 조선에 환곡이라는 경제시스템이 있었듯이 대한민국에도 재정정책과 통화 및 금융정책을 통해 경제성장과 안정을 추구하는 시스템이 있다. 우리 헌법 역시 119조에 이러한 경제시스템이 작동되어야 함을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스템의 운영을 담당하는 실무 공무원들은 이 시스템이 언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작동되어야 하는지를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알고 있다. 일반 국민들이 보기에는 몹시 복잡하고 난해해 보이지만, 실제 경제 콘트롤 타워에 몸담고 있는 공무원들의 머리, 아니 몸은 언제 확대재정을 해야 하고 언제 통화량을 늘려야 하며 언제 이자율을 조정해야 하는지를 본능처럼 알고 있다.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보면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도약했던 시기는 항상 경제부처 실무공무원들의 ‘본능’에 의해 경제가 운영됐을 때임을 알 수 있다. 반대로 실무 공무원들의 본능이 정치적인 이슈에 압도됐을 때는 언제나 어려움을 겪어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이런 실무 경제관료들의 본능에 의하여 운영돼야 할 나라의 경제 시스템이 붕괴해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실무자들은 언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건만, 정작 실무자들이 만든 자료에 따라 결정하고 책임을 감당해 주어야 하는 사람들은 정치적 부담으로 시스템을 스스로 붕괴시키고 있다. 유일호 기획재정부장관은 경기 활성화정책에는 공감하면서도, 재정정책이 아니라 한국은행이 담당하는 이자율과 통화정책에 의해 경기활성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에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통화정책이 아니라 재정정책에 의한 경기활성화가 바람직하다고 맞서고 있다. 모두 내가 책임지지 않고 남이 해주기를 바라는 심사다. 마치 구휼소를 농촌에 두느냐, 도시에 두느냐를 놓고 싸우는 격이다.

국민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이들은 순조 연간의 조정 대신들처럼 입씨름만 계속하다가 결국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순조 연간의 대신들이 "목민관이 알아서 잘 처리하라"고 말했듯이 이들은 "시장에 맡긴다"는 말로 자기들의 무능과 무소신을 덮으려 할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경제시스템은 붕괴되어 가고 국민의 살림살이는 뜨거운 여름날 아스팔트 위에 놓여 진 얼음덩이처럼 녹아갈 것이다.

기재부 장관도, 한은 총재도, 그 어느 누구도 그 얼음덩이를 냉장고로 옮겨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괜히 얼음을 옮기다가 실수로 떨어뜨려 얼음이 산산조각 나 버리느니, 차라리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녹아버린다면 ‘최소한 내가 책임질 일은 없지 않겠는가’라는 심산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 이 기사를 공유해보세요  
  •  
  •  
  •  
  •  
  •  
  •  
  •  
  •    
  • 맨 위로



 
배너
이미지

카드뉴스

+ 더보기
[카드뉴스]
[카드뉴스] [카드뉴스] '살충제 달걀' 한 방 정리!...전수조사 오늘 마무리, '살충제 계란' 구별법은? [카드뉴스] 영수증 속 환경호르몬, '비스페놀A'의 습격...사용 금지될 수 있을까? [카드뉴스] 8월 15일 '광복절'...독립을 노래한 항일음악가 '한형석(한유한)' [카드뉴스] 여름철 피서지 '몰래카메라' 주의보...몰카 범죄, 근절될 수 있을까?

스포테인먼트

0 1 2 3 4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