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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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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러 '3각 경협'에 들뜬 블라디보스톡 밑작업 분주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18.06.20 07:44

[동북아 슈퍼그리드에서 해답을 찾다] ④ 북방경제협력의 핵심,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가다
남북 관계 해빙무드 타고 가스 철도 협력 중심지로
관광 문화교류 이미 활발
러, 경제특구 육성 계획


▲2012년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회담 개최 당시 건설된 ‘금각대교’. 블라디보스톡 번영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사진=이종무기자)


[블라디보스톡(러시아)=에너지경제신문 전지성·이종무 기자] "블라디보스토크은 전기는 물론 철도, 가스, 해운 등 남·북·러 에너지 경제협력의 핵심 요지로 부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11일 블라디보스토크 국제공항에서 만난 현지 가이드 유승호(42)씨는 기대에 차 있었다. 유 씨는 블라디보스토크는 물론, 우수리스크, 하바롭스크 등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만 16년째 거주하고 있다. 최근 한국의 부동산 대부가 시장분석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를 다녀가는 등 향후 남북관계 개선을 염두에 둔 물밑 움직임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실제 공항에서는 정장차림의 한국인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극동러시아 지역은 지리적으로 우리나라와 러시아는 물론 북한까지 포함한 남·북·러 협력을 추진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 받는다. 북핵 문제가 해결되고 남북 경제협력 분위기가 조성될 경우 에너지는 물론 운송망, 제조업, 서비스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협력이 기대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인구 60만의 소도시다. 1860년부터 러시아 정부가 동방개발을 위해 국민들을 대거 이주시켰지만 개발은 다소 더딘 편이었다. 다만 2012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개최 이후부터는 꾸준히 외자유치와 자체 도시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다. 도시 곳곳에는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섰으며 곳곳에 공사가 한창이었다.

우리 기업들의 진출도 활발하다. 공항에서 시내로 진입하는 길목에는 ‘LG다리’라고 불리는 고가 차로가 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이하 코트라)에 따르면 LG는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시스템 에어컨의 80%를 점유하고 있다. 최근에는 경제협력의 근간이 되는 인적·문화적 교류가 빈번하다. 블라디보스토크 국제공항 입국장을 들어서자마자 현지 택시 기사들이 어설픈 한국어로 인사하며 다가왔다. 현재 블라디보스토크에는 한국인들이 ‘발에 치인다’고 할만큼 많다. 시내 곳곳에서 심심치 않게 한국어 간판과 메뉴판을 볼 수 있다. 시내 중심가와 유명 식당, 상점들에 들어가면 한국인지 러시아인지 헷갈릴 정도다. 남·북·러 경제협력이나 최근 정세와 무관하다. 지난해부터 여러 여행 방송을 통해 비행기로 2시간 거리에서 이국적인 정취를 느낄 수 있다는 점과 부담없는 비용 등으로 관광지로 급부상 했기 때문이다.

물론 블라디보스토크에 거주하고 있는 러시아인들은 많은 한국인들의 방문과 지리적 이유로 남북한 관계와 경제협력 등에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 남-북-러 전력망연계·경제협력, 북미 정상회담으로 탄력받나?


▲12일 러시아의 국영 텔레비전 채널 로시야 1(Россия -1)는 블라디보스톡에서 ‘러시아의 날’과 ‘북미정상회담’에 대해 보도했다. (사진=이종무기자)


블라디보스토크 방문 이틀째인 12일은 마침 러시아 연방 설립기념일(러시아의 날)이자 북미정상회담이 개최되는 날이었다. 국경일을 맞아 이 지역의 대표 명소인 해양공원에 취재를 나온 러시아 국영방송 관계자는 북미정상회담 개최와 이로 인한 남·북·러 경제협력 관련 질문에 "북미정상회담으로 북핵문제 해결과 함께 미·러 관계도 완화될 것이란 기대감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러시아 정부가 블라디보스토크 등 연해주 지역을 통해 러시아와 북한, 한국, 중국과 에너지 협력은 물론 국제적 경제특구로 육성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8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동방경제포럼에서 "북한이 꼭 협력하지 않더라도 일단 북한을 통하지 않고 한·러 간에도 할 수 있는 사업을 하자"는 방침을 세웠다. 북방경제협력위원회는 나인브릿지 정책의 일환으로 올 초 북유럽 슈퍼그리드 순방, 노바텍을 방문해 야말반도 프로젝트에 대해 집중 논의하는 등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동북아 슈퍼그리드는 몽골과 러시아의 풍부한 에너지자원을 이용해 생산한 전력을 역내 전력 수요가 높은 국가(한국·중국·일본)에 공급하는 계획으로 1990년대 후반 러시아의 ESI와 한국의 KERI(전기연구원)가 최초로 제안했다.

한국과 러시아의 전력망 연계 논의는 20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해 6월 상트페테르부르크 세계경제포럼에서 러시아 국영 전력기업이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4기가와트(GW)의 전력을 수출하는 계획을 발표했으며 한·러 양국 기업 간 전력 연계 양해각서가 체결됐다. 러시아 측은 같은 해 9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동바경제포럼에서 북한의 나선 특구로 15∼40MW의 전력을 공급하는 계획을 밝혔다.

2016년 동방경제포럼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극동러시아 지역의 에너지 인프라 개발과 일본, 북한, 한국으로의 전력 수출 등을 위한 아시아 ‘에너지 슈퍼링’을 제시한 바 있다. 같은 해 한국전력과 일본 소프트뱅크, 중국 국가전력망공사, 러시아 전력기업 ‘로세티(Rosseti)’ 등과 다국간 송전망 연결 사업에 대한 타당성 조사를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하기도 했다. 이후 2017년 러시아 동방포럼에서 발표된 문 대통령의 전격적인 제안과 함께 최근 한반도 정세의 급격한 변화에 힘입어 한층 뜨거운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현지 반응을 살피기 위해 지난해 동방경제포럼이 열린 극동연방대학교를 방문했다. 극동연방대학은 2012년 APEC 회담 준비를 계기로 문을 연 대학이다. 러시아 전체에서도 명문대학이며 블라디보스톡 지역에서는 최고의 대학이다. 학생과 직원수만 3만여명에 달한다. 2015년부터는 매년 9월 초에 동방경제포럼이 개최돼 다른 러시아 대학들에 비해 열흘 정도 더 방학 기간이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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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보스토크 최고 대학인 극동연방대학에는 많은 한국인 유학생들이 재학중이며, 남-북-러 경제협력에 대한 많은 관심을 지니고 있다.(사진=이종무기자)

한국인 유학생도 많다. 러시아어과 유학생 최기하 군(26)은 "북미정상회담이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러시아학생들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며 "특히 블라디보스톡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깝고 피부로 와 닿는 지역이기 때문에 러시아 내에서도 동북아 정세에 가장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이어 "블라디보스톡은 다른 러시아 대학들과 달리 정식으로 한국어과, 한국경제학과가 있어 한국에 대해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다"며 "특히 최근에는 한국 관광객도 많아 한국과의 철도연결에도 관심이 높다"고 말했다.

경영학을 전공하고 있는 알렉산드르(22세)는 "러시아정부에서도 한국과 수산물 가공, 에너지 분야 협력에 관심이 있다"며 "특히 한국에 가스와 석유를 수출하려면 파이프라인을 만들어야 하는데 극동지역을 통과하기 때문에 이 지역의 에너지 가격도 낮아질 수 있어 교류가 활발히 이뤄지길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극동연방대학교 학생 알렉산드르(22세)는 남·북·러 협력은 한반도는 물론 러시아 극동지역의 경제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었다.(사진=이종무기자)


러시아는 석유협력개발기구(OPEC)국가들 외에 최대 산유국 답게 저렴한 주유소 가격을 자랑한다. 국내에서 사용하는 석유 전량을 수입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러시아는 석유 수입을 하지 않는다. 경유, 휘발유로 구분돼 있는 우리나라와 달리 휘발유만 해도 92등급, 95등급, 98등급 등 3∼4종류가 있다. 숫자가 높을 수록 고급인데 최고급 휘발유인 98등급의 리터당 가격이 45루블, 한화 800원 정도로 우리나라 일반 휘발유 가격의 절반에 불과했다. 블라디보스톡은 유전지대와 먼 곳에 있어 러시아 내에서도 기름값이 가장 비싼데도 이 정도다.

▲러시아 국영 정유업체 ‘엔엔까’. 러시아는 세계최대 산유국 중 하나 답게 다양한 석유제품과 저렴한 가격을 자랑한다. (사진=이종무기자)



◇ 지난 20년 동안 실체 없던 한·러 협력, 기대감 넘어 '구체적 계획' 세워야

이처럼 최근 무르익고 있는 남·북·러 관계와 경제협력 논의의 역사는 오래됐지만 아직까지 실체가 없다는 지적이 있다. 이에 따라 앞으로 신중한 계획수립과 추진이 요구되고 있다. 2000년 6·15 정상회담 직후 푸틴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한 것이 2000년 7월 19일이었다. 김정일 당시 위원장이 모스크바를 방문한 것이 2001년 7월 6일, 푸틴 대통령과 함께 남북철도연결을 통한 시베리아 철도 연결 사업에 대한 공동성명을 냈다.

그 이후에는 이명박 대통령시절에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당시 러시아 대통령과 가스관을 연결해 러시아 가스를 100억 큐빅메타씩 2015년부터 30년 동안 도입하겠다는 협약을 체결해 상당히 기대가 됐었다. 모든 것들이 북핵문제로 인해 중단이 됐던 것이 사실이다.

다만 지난 12일 북미정상회담으로 걸림돌이었던 북핵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졌다. 이에 미·러 간 관계도 좀 더 완화될 것이란 기대감과 함께, 미·러 간의 정상회담 가능성도 논의돼 북방경제협력위원회가 훨씬 더 구체적인 사업을 할 수 있는 주변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이 21일 러시아를 공식 국빈방문한다.

최근 남·북·미 관계 개선으로 부활의 조짐을 보이는 남·북·러 전력 연계망 프로젝트도 동북아 슈퍼그리드 구축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고 있다. 한반도의 육로를 통한다면 해저케이블 건설이 최소화되는 등 슈퍼그리드 구축을 위한 보다 우호적인 환경이 조성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과도한 기대감을 경계하는 시선도 있다. 현지사정에 정통한 고위 외교관계자는 "한국 정부와 언론에서는 당장이라도 철도, 가스관이 연결될 것처럼 말하지만, 러시아는 굉장히 장기적인 안목으로 에너지와 경제협력 사업을 진행하기 때문에 우리도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국전력공사에 따르면 구체적인 실무회담이 이뤄지고 있는 중국과 달리 러시아와는 아직까지 초기단계의 공동연구만 진행되고 있다. 중국 산동반도와 한국의 서해안 사이를 해저케이블로 연결하기로 결정된 것과 달리 아직 러시아와는 어떤 방식으로 어느 지역을 통해 연결될지 정해진 바가 없다.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극동지부연구소의 빅토르 라린 아시아태평연구센터장. (사진=라린 박사 제공)


블라디보스토크에 위치한 러시아과학아카데미 극동지부연구소의 빅토르 라린 아시아태평연구센터장은 "연해주 주정부도 동북아 슈퍼그리드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전력망이 연결된다면 지역경제 활성화에 보탬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아직 러시아의 로쎄티, 한국의 한전이 계획을 완료하지 못한 상황이며 만약 연결된다고 해도 블라디스보스토크는 후보지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 이유에 대해 라린 박사는 "블라디보스토크는 지리적으로 인접했지만 반도이기 때문에 오히려 하산 지역이 더 유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라린 박사는 한·러 경제협력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그는 "한·러 관계가 상대적으로 정치분야의 교류는 양호하지만 경제는 여전히 냉량한 게 지금의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현재 한·러 경제협력은 주요 파트너국 중 8위이고, 외국인직접투자(FDI)는 러시아 전체의 0.5% 수준에 불과해 개선이 필요하다"며 "극동지역의 수출물량 또한 기존에는 한국향으로 약 52% 수준을 차지하며 상대적으로 높았지만 최근에는 이마저 점차 감소세"라고 대책마련을 주문했다. 이어 "무엇보다 한·러 협력수준은 2011년 수준에서 정체돼 있으며 수출품목 또한 70%가 석유 등 에너지품목이라는 점도 문제"라며 "경제협력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제일 먼저 특정분야를 선정해 가시적 성과를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시 현지에서 만난 러시아에 정통한 무역 전문가 또한 "러시아 정부와 기업은 구체적인 사업계획제시가 있어야 적극적으로 협상에 임한다"며 "지난 20년 동안 러시아와의 경제협력이 말만 무성할 뿐 실제로 진척된 것이 없었던 점을 고려해 치밀하게 전략을 수립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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