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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을 가다] 금호아시아나 사옥 26층, 고개 숙인 박삼구 회장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18.07.05 09:51

▲4일 오후 서울 광화문 금호아시아나사옥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서 박삼구 회장, 김수천 아시아나항공 사장 등이 사과 인사를 하고 있다. (사진=에너지경제신문)



대한민국 청와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광화문 현판에 쓰인 글씨도 읽을 수 있다. 세종대로 사거리를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작게 보인다. 남쪽에는 남산. 팔을 뻗으면 N서울타워가 손에 잡힐 듯하다.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금호아시아나 사옥 26층에서 바라본 서울 풍경이다. 풍수지리는 잘 모르지만 ‘이 곳이 명당이구나’ 싶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은 ‘큰 일’이 있을 때 이 곳 대회의실에서 기자들과 만난다. 2009년 회장 직을 내려놓는다고 발표할 때도, 지난해 금호타이어 인수를 포기한다고 선언할 당시에도 그랬다. 어떤 악재 앞에서도 자신감 있는 표정과 말투를 유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금호타이어를 놓으며 ‘그룹 재건의 꿈’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그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달랐다. 아시아나항공은 4일 오후 5시 금호아시아나 사옥 26층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기내식 대란’에 대한 해명의 시간을 가졌다. 박 회장은 자리에 착석하기도 전에 사과부터 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모든 것에 대해 죄송합니다." 그가 꺼낸 첫 마디다. 경직된 표정이었다. 취재진들은 박 회장의 주름진 미간을 한참동안 바라봐야 했다.

그는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협력업체 사장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얘기를 꺼내며 연이어 사과의 뜻을 전했다. 시장에서 떠도는 의혹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해명했다. "비지니스 하는 사람이 좋은 사업 파트너를 찾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항변하며 LSG와의 불화설은 사실이 아니라고 일축했다. 현장의 열기는 뜨거웠다. 카메라 셔터가 연신 터지는 탓에 마이크를 통해 흘러나오는 박 회장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 날선 질문과 질타에도 박 회장은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대한항공의 수장인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떠올랐다. 조 회장은 조현민 전 대한항공 전무의 ‘물벼락 갑질’ 논란이 시작되고 열흘이 지나 사과문을 발표했다. 이메일을 통한 입장문이었다. 조 회장을 보기 위해서는 검찰 포토라인 앞으로 가야했다. 박 회장은 한진그룹의 ‘성의없는 사과’를 의식한 듯했다. 대부분 질문에 직접 답했고, 충분한 설명을 곁들였다. 함께 자리한 김수천 아시아나 사장은 ‘기내식 대란’의 처리 현황과 향후 대책 등을 언급할 때만 마이크를 들었다.

태도도 달랐다. 박 회장은 "지난 1일 중국 청도에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착공식이 있어 참석했고, 3일에 귀국했다"고 두 차례 이상 강조했다. ‘기내식 대란’이 터지고 사흘이 지나서야 기자회견을 연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명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박 회장은 아시아나 직원들이 익명 채팅방을 통해 집회를 준비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그는 "직원들이 그런 얘기 할 여건이 된 것은 당연하고 좋은 것"이라며 "직원들의 불만을 수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우리가 잘못한 것은 당연히 책임 져야 하지만 당장 책임질 일이 있고 두고두고 그래야할 일도 있다"며 "지금은 책임이 문제가 아니라 사태를 수습하는 것이 먼저"라고 단언했다.

진행이 100% 매끄러웠던 것은 아니다. 박 회장은 차녀인 박세진 상무가 금호리조트 상무로 참여했다는 말에 깔끔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박세진 상무는 경영 경험 없이 40세의 나이에 상무로 발령받아 ‘낙하산 논란’에 휩싸인 상태다. 박 회장은 "최근 여성분들이 사회진출을 많이 하고 있고, 제 여식도 사회생활을 시키기 위해 염두에 두고 있었다"며 "금호리조트가 그룹으로 봐서 비중도 작고 중요도도 높지 않아 훈련을 하고 경영공부도 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그룹을 개인 소유물로 생각하고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발언으로 읽힌다. 박 회장은 "아들이나 딸이나 지탄받는 일을 한다면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고 덧붙였지만 뒤끝이 개운치는 않았다.

흥망성쇠를 거듭했던 금호아시아나그룹이 또 한 번 위기에 봉착했다. ‘명당’ 자리 광화문 본사 사옥도 외국계 운용사에 매각하기로 한 상태다. 어쩌면 이날 기자회견이 26층 대회의실에서 박 회장과 기자들이 만나는 마지막 자리였을 수도 있다. 기내식 대란 수습을 위해 직접 나선 박 회장이 회사의 구원투수 역할을 해낼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에너지경제신문=여헌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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