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호수 밑바닥에 묻어둔 과거가 다시 날 찾아왔다
"잊었어? 내가 너의 저승사자란 걸!
넌 영원히 어둠 속에 갇히게 될 거야."
성큼 다가온 하나의 강렬한 장면. 어둠 속에 웅크린 아이의 잔상이 배수영 작가의 손가락 끝에서 이야기로 탄생했다. 인생에 드리운, 상처로 얼룩진 슬픈 인연이 그려내는 섬뜩한 메디컬 미스터리 《햇빛공포증》이 몽실북스에서 출간된다.
경비행기 조종사 한준은 연인을 만나러 가던 중 엘리베이터에 갇히는 사고를 당한다. 구조대가 도착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몸에 쏟아진 강렬한 햇빛에 엄청난 고통과 정체 모를 기시감을 느낀 그는, 혼절하여 병원으로 실려 간 뒤 햇빛공포증이라는 희귀병을 판정받는다. 한준의 담당의 주승은 최면 치료를 통해 한준이 잊고 있던 유년기의 끔찍한 기억을 되살리고 치료가 거듭될수록 살아나는 과거의 악몽 때문에 한준은 점점 더 공포 속으로 내몰린다.
기억의 고통 속에 갇혀 버린 한준이 진정제의 여파로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어느 날,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나타난다. 며칠간 식음을 전폐해 수척해진 한준의 몸을 정성스럽게 닦이고 옷을 갈아입힌다. 화장실에서 물을 받아 와 머리까지 감겨 주던 남자는 말한다. "제기랄, 이러다 정들겠어. 그런데 말이지, 너무 감동받진 마. 좀 친해졌다고 생쥐를 유리관에서 꺼내 주는 과학자는 없거든." 남자는 쿡쿡 웃으며 한준의 몸을 말끔히 닦아 내는데….
한준은 무겁게 가라앉는 눈꺼풀을 끌어올리려 애썼다.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한준의 의식이 돌아온 것을 눈치채고 성큼 다가왔다.
"이제 슬슬 문이 열릴 때가 되지 않았나? 너무 오래 닫혀 있었어."
다정하면서도 오싹한 목소리. 한준은 귓바퀴에 와 닿는 입김에 몸서리를 쳤다.
"걱정 마. 내가 열어 줄게."
가운을 입은 남자는 즐거운 듯 웃음을 삼키며 한준의 머리에 연결된 장치의 버튼을 눌렀다. 삑 소리를 내며 모니터가 켜졌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손이 한준의 다리에 주삿바늘을 찔러 넣었다. 수척한 한준의 볼에 경련이 일었다. _본문 중에서
소설은 한준이 엘리베이터에서 쓰러져 정신병동에 갇히고 알 수 없는 기억의 악몽에 시달리는 가운데 믿고 의지하고 싶은 존재에게 오히려 냉대당하는 ‘현재’와, 어린 한준이 엄마에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학대당하며 조금씩 그리고 지속적으로 무기력해져 가는 ‘과거’가 교차하며 나타난다. 한준은 최면 치료를 통해 보게 되는 기억이 과거의 자신이라는 것을 알지 못할 만큼 상처받고 고통스러운 유년기를 견뎌 오면서 ‘살기 위해’ 그 기억을 모두 지워 버렸다는 사실을 마주한다. 또한 잊어버린 동시에 늘 힘겨운 무의식의 언저리에서는 그때의 기억에 매여 있었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과거를 까맣게 잊는 것이 아니라 도망쳤던 그 기억과 다시 조우하는 일이었음’을 깨닫는다. 과거의 약하고 어린 한준은 기억에서 도망치는 것으로 자신을 구했지만 성인이 된 현재의 한준에게 ‘기억은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터널’인 것이다.
또한 한준이 조금씩 과거와 마주하는 동안 곁에서 맴도는, 얼음같이 차갑고 저승같이 어두운 무채색의 인물이 있다. 모든 것을 잃고 긴 시간 한준만을 생각하고 기다려 온 또 다른 인물이 한준에게 불길한 손길을 서서히 뻗쳐 오고, 한준을 영원한 어둠 속에 가둘 계획에 착수한다.
"내가 원하는 건… 너의 과거와 현재가 모두 등을 돌리게 하는 거야. 널 과거의 기억 속에 가둘 뿐만 아니라, 너로 하여금 현재를 의심하게 만드는 거지. 연인까지도 말이야. 너를 둘러싼 세상은 결코 안전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을 심어 줄 거야. 넌 영원히 외로움과 공포라는 감옥에 갇혀 있게 될 거야. 네가 영원히 어둠 속에 갇혀 사회에서 고립되는 것, 난 그걸 원해!" _본문 중에서
두 사람이 물러설 곳이 없는 벼랑 끝 싸움으로 엎치락뒤치락하는 가운데 치닫는 마지막 장까지 끝을 예측할 수 없는 반전으로 《햇빛공포증》은 더욱 긴장을 놓을 수 없는 흡입력이 가지고 있다. ‘햇빛공포증’이라는 대단히 낯설고 참신한 소재를 통해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주제인 어둠과 상처에 대해 깊이 탐구한다. 섬뜩하고 강력한 스토리에 휘몰아치듯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작가가 과연, ‘누구나 자신만의 어둠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삶의 이면을 얼마나 깊이 읽어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받은 우리가 원하는 것은 여전히 ‘살아가는 것’임을 얼마나 슬프게 적어 내려간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독자 자신의 심연과 닮아 있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작가는 개인의 가슴속 깊이 묻어둔 어둠, 공포, 두려움과 같은 것들을 깊이 탐색한다. 어둠 속에 오래 있어 본 사람은 안다. 어둠에게 눈이 있다는 걸. ‘빛은 만물을 세상에 드러내지만, 어둠은 검은 날개로 만물을 가리운다’는 걸. 그리고 작가가 전하는 우리가 터널을 통과할 수 있는 선명한 출구는 다음과 같다. ‘통과의례를 행하듯 엄숙하고 간절하게 뛰어’들라는 것.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상처를 뛰어넘은 것이다. 개인의 내면, 그리고 삶을 지배할 것 같은 섬뜩한 손길들은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 대면할 때 힘을 잃는다는 묵직한 메시지가 치밀하고 절묘하게 올여름 우리를 찾아온다.
"링 위에서 눈을 감으면 안 된다고 말이야. 스텝과 펀치의 호흡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상대방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으면 싸울 수가 없다고 그렇게 지적을 당해도, 한동안은 계속 고개 숙이고 얼굴 가리기 바빴지. 그러다가 어떤 선배랑 붙었는데, 흠씬 두들겨 맞다가 너무 쪽 팔려서 이대론 안 되겠단 생각이 드는 거야.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고개를 쳐들고 노려봤지."
"그래서 어떻게 됐어?"
"선배와 눈이 마주친 순간, 선배도 나와 똑같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알았어. 그걸 깨달으니까 덜 무서워지더라. 어쩌면 내가 이길 수 있겠단 생각도 들었고." _본문 중에서
작가 배수영
《햇빛공포증》을 쓰면서 행복했고 동시에 절박했다. 그토록 집필에 매달린 이유는 삶에 의미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를, 내 삶을 좋아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이요 고행이었다. 속에 있는 것들을 모두 끄집어내어 정제된 언어로 다듬고 공을 들이는 작업은 뻐근한 허리와 침침한 눈 못지않게 희열과 보람을 안겨 주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내 속에 살고 있던 ‘것’들과 처음으로 대면하고 깜짝 놀라는 과정이었다. _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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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가 주최한 문학상에서 수필 부문 우수상을 수상하며 동시에 수필가로 등록되었다. 해마다 협회지에 수필을 기고하며 중·장편의 소설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