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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여의도 증권가 전경. |
[에너지경제신문=나유라 기자] "(라임자산운용의 환매 중단 사태에 대해) 주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단답형으로 꼭 선택하라고 하면 운용사(라임) 책임입니다."(2월 20일 국회 정무위원회 업무보고에서 윤석헌 금융감독원장)
"총수익스와프(TRS)도 운용사와 증권사가 맺은 일종의 계약인 만큼 계약관계에 대해 당국이 맞다, 틀리다 말하기 어렵습니다."(2월 19일 금융위원회 2020년 업무계획 간담회에서 은성수 금융위원장)
라임자산운용이 환매를 중단한 사모펀드에 대해 TRS 계약을 맺은 증권사들이 딜레마에 빠졌다. 대신증권은 신한금융투자, KB증권, 한국투자증권을 대상으로 투자자들보다 먼저 자금을 회수하지 말라고 요청했지만, 이들 증권사들은 회수 권리를 행사하지 않으면 배임죄에 걸릴 수 있는 만큼 쉽게 결정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이를 두고 금융권에서는 라임자산운용의 환매 중단 사태의 책임은 ‘라임자산운용’에 있는 만큼 이번 사태의 화살을 판매사나 TRS 계약 증권사 쪽으로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 TRS 계약 증권사, '자금회수' 가닥
24일 금융권에 따르면 라임자산운용과 TRS 계약을 맺은 신한금융투자, KB증권, 한국투자증권 등 3사는 대신증권이 요구한 자금회수와 관련해 법률적인 근거 등을 꾸준히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대신증권이 발송한 내용증명에 법적인 구속력이 없는데다 자금을 회수하지 않으면 배임에 해당할 소지가 있는 만큼 해당 증권사들은 일단 회수를 강행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전해졌다.
TRS란 증권사가 증거금을 담보로 잡고 자산운용사 대신 자산을 대신 매입해주면서 그 대가로 수수료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상의 대출이다. 자산운용사 입장에서는 TRS를 이용하면 펀드 설정액보다 큰 규모의 자산을 운용하면서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 증권사는 펀드 만기 때 선순위로 자금을 회수하고, 투자자들은 나머지 대금을 분배받는다. TRS는 사모펀드 활성화 등 자본시장의 혁신성을 제고하고 투자자들에게 안정적이면서 높은 수익을 제공하기 위해 도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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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라임자산운용처럼 해당 펀드에 큰 손실이 발생했을 때는 투자자들에게 그 손실이 전가된다는 점이다. TRS 계약을 맺은 증권사들은 펀드 만기 때 다른 투자자들보다 먼저 자금을 회수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라임자산운용와 증권사들은 환매 중단 모펀드 4개와 모펀드에 투자한 자펀드들에 대해 약 7000억~8000억원 규모의 TRS 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전해졌다. 신한금융투자가 가장 많고 KB증권, 한국투자증권 순이다. 환매가 중단된 라임자산운용의 전체 자펀드 173개의 판매액이 총 1조6700억원인 점을 고려하면, 증권사들이 TRS 계약을 이유로 자금을 회수할 경우 투자자들은 큰 손실을 입게 된다.
◇ 투자자 손실 이해하지만...미회수시 '배임' 딜레마
대신증권이 이달 12일 해당 증권사를 대상으로 내용증명을 발송한 것은 바로 이 ‘투자자들의 손실’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차원이다. 대신증권은 신한금융투자, KB증권, 한국투자증권 등 3사를 대상으로 라임자산운용의 펀드 정산 분배금을 일반 고객들보다 우선 청구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만일 해당 증권사들이 라임자산운용 펀드로부터 우선해서 정산분배금을 받고, 이로 인해 대신증권 고객에게 추가적인 손실이 발생할 경우 해당 증권사에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통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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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자산운용. |
내용증명을 받아든 증권사들은 딜레마에 빠졌다. 라임자산운용의 펀드 자금을 증권사들이 회수할 경우 투자자들이 대규모 손실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단순히 ‘도의적 책임’을 이유로 자금을 회수하지 않으면 ‘배임’ 분쟁에 휘말릴 수 있어 쉽게 결정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물론 TRS 계약을 맺은 증권사 3곳은 원칙적으로는 비상장사이나, 한국금융지주(071050), 신한지주(055550), KB금융(105560) 등 모회사가 상장사인 만큼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을 경우 ‘배임’ 이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은 위원장이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TRS 이슈와 관련해 "운용사와 증권사가 맺은 계약이다"고 선을 그은 점도 무조건 증권사에게 부담을 감수하라고 강요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국내 한 증권사 관계자는 "증권사는 주식회사이고, 주식회사에는 다양한 주주들이 있다"며 "주식회사는 주주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존재하는 만큼 단순히 다른 개인투자자들의 도의적인 책임을 고려해 마음대로 계약 관계를 바꿀 수 없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라임자산운용과 증권사가 체결한 계약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며 "계약은 곧 신뢰인 만큼 개인투자자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고려해 이를 마음대로 바꾼다면 해당 금융사 입장에서 져야 하는 부담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 "라임사태로 금융사도 피해...책임전가 부당" 목소리도
일각에서는 라임자산운용의 환매 중단 사태와 관련해 모든 책임을 TRS 계약을 맺은 증권사나 판매사 쪽으로 전가하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금감원 조사 결과 라임자산운용이 펀드를 운용하는 과정에서 투자 대상인 IIG 펀드에 대해 부실을 은폐하는 등 운용상 심각한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는 점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투자자들이 자신들의 보상 규모를 극대화하기 위해 책임의 화살을 판매사나 증권사로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해당 펀드를 판매한 금융사들이 라임 사태의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것도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윤석헌 금융감독원장도 이달 20일 국회 정무위 업무보고에서 라임사태의 주 책임자는 ‘라임자산운용’이라고 지목한 바 있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한 금융권 관계자는 "일부 불완전판매를 일삼은 판매사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금융사들은 라임자산운용의 환매 중단 사태로 직, 간접적으로 피해를 보고 있다"며 "라임자산운용이 펀드 손실 금액을 보전해줄 수 없는 상황을 인지한 투자자들이 자신들의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화살을 애꿎은 금융사들에게 돌리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