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로 북극해의 빙하가 녹으며 북극항로가 열리고 있다. 북극항로는 한국에 아주 특별한 기회를 선사하고 있다.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은 유럽으로 수출하기 위해 남중국해, 말라카해협, 수에즈운하를 거쳐 약 2만km를 가야 한다. 하지만 북극항로를 이용하면 동북아 국가들의 경우 1/3이 줄어든 1만5000km면 갈 수 있다. 세계 최대 제조지역과 세계 두 번째 경제지역과의 만남은 그만큼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의 발전을 이끌 수 있다. 한국은 북극항로에서 아시아 지역의 첫 번째 관문에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점은 무궁무진하다. 그 중의 가장 큰 이점으로 에너지 허브가 꼽힌다. 에너지 허브 개념은 기본적으로 항로를 오가는 선박에 연료를 충전해주는 사업을 말하는데, 이것을 넘어 에너지 중간저장 및 트레이딩 중심지로 발전할 수 있고, 여기에 물류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세계 경제의 핵심지역으로 거듭나게 된다. 김태유 서울대 산업공학과 명예교수는 최근 에너지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극항로는 한반도가 에너지 허브로 될 수 있는 기회이자, 지정학적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문명사적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 싱가포르 이은 제2의 아시아 에너지허브 가능성 세계에는 3대 에너지 허브가 있다. 미국의 걸프만, 유럽의 네덜란드, 아시아의 싱가포르이다. 에너지 허브는 기본적으로 항로를 오가는 대형선박들이 연료를 충전(bunkering)하는 곳이지만, 항로의 중간거점으로서 물류, 제조, 금융 등 전방위적으로 모든 산업이 함께 발달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문명의 산실로서 세계 최고 선진국으로 도약할 기반이 된다. 한국은 북극항로의 아시아 관문에 위치하고 있어 에너지 허브 기회를 맞았다고 김 교수는 분석했다. 그는 “항로를 이용하는 배들은 연료를 충전해야 한다. 연료를 충전하려면 벙커링 시스템이 필요하다. 말라카 해협에 위치한 싱가포르는 리콴유 전 총리가 그것을 간파하고 에너지 허브를 유치하면서 금융 허브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라며 “한국은 북극항로의 아시아 관문에 위치하고 있어 에너지 허브 구축이 가능하고, 에너지는 산업 원료로도 쓰이게 되기 때문에 첨단산업 경쟁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부·울·경이 에너지 허브가 되면, 싱가포르의 성공을 넘어서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은 탄소중립 정책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석유, 가스 중심의 에너지 허브산업이 맞지 않을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이에 김 교수는 탄소중립과 에너지 허브는 별개이기 때문에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탄소중립과 재생에너지는 우리가 가야할 길은 맞지만, 이것으로 우리가 국제 경쟁력을 확보할 수는 없다. 예컨대 미국의 사막에 설치된 태양광 발전소는 우리보다 2배 이상의 효율을 보이기 때문이다"라며 “벙커링과 석유화학은 탄소중립으로 커버할 수 없는 영역이다. 결국 청정연료(수소, 암모니아)도 LNG를 이용해야 하기에 에너지 허브는 좀 더 글로벌한 시각에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근공(近攻)'만 있던 한국, 드디어 '원교(遠交)'를 만났다 북극항로는 한국에게 에너지 허브 기회뿐만 아니라 원교의 대상까지 제공한다는 게 김 교수의 관측이다. 김 교수는 “한반도는 수천 년 동안 병자호란, 임진왜란, 일제강점 등 수많은 침략을 받았다. 이것은 우리 민족이 못나고 약해서가 아니라 지정학적 불리함 때문"이었다며 “한반도에는 그동안 중국과 일본 같은 근공의 대상만 있었지 원교의 대상이 없었다"고 분석했다. 원교근공(遠交近攻)은 먼 나라와 힘을 합쳐 이웃 나라를 협공한다는 사자성어로, 삼십육계에 나오는 전략이다. 한반도는 이웃 중국과 일본의 근공에 대항하여 원교할 나라가 아예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북극항로가 열리게 되면 한국도 드디어 원교를 시작할 수 있게 된다는 게 김 교수의 진단이다. 그 대상은 러시아와 미국이다. 그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이 끝나게 되면 심각한 경제 침체에 직면할 것이다. 러시아는 갖고 있는 것이 석유, 가스 자원밖에 없기 때문에 이걸 팔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 마침 북극항로로 한국과 러시아 간의 교역 여건이 훨씬 좋아졌다. 한국은 이 기회를 잡아야 한다"며 “미국은 오바마 정부 때 아시아로 회귀전략(Pivot to Asia)을 했고, 트럼프 1기 정부 때 본격화했다. 한·중·일이 근공 관계라면 한·미·러는 원교 관계가 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특히 한국과 러시아 간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중일은 산업 정합도가 굉장히 높다. 경쟁이 치열해 승패가 결정될 수 밖에 없는 '근공' 관계다. 특히 최근에는 중국한테 디스플레이, 배터리 등 첨단산업까지 모두 뺏기고 있다"며 “그러나 러시아와는 산업이 상호보완적이다. 러시아는 석유, 가스, 광물과 식량자원이 풍부하고 기초 과학을 갖고 있다. 반면 한국은 자원이 빈약하지만 전자, 배터리, 반도체 등 러시아에 없는 첨단 산업을 갖고 있다. 양국은 아주 훌륭한 '원교' 관계가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그렇다 해도 현재 러시아와 가장 가깝게 지내는 나라는 중국이다. 수출이 막힌 러시아의 에너지를 중국이 대부분 사들이면서 서로 윈윈(win win)하고 있고, 국제외교에서도 미국에 맞서 서로 비슷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지만 김 교수의 생각은 다르다. 러시아는 근본적으로 중국을 경계한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은 러시아와 가장 긴 국경을 맞대고 있다. 지금 잠시 전략적으로 협력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사이가 좋을 수 없는 근공 관계"라며 러시아가 중국을 견제하고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사례를 소개했다. 그는 “중국은 동해를 거쳐 태평양, 북극항로로 나가는 것이 숙원이다. 항구를 빌려 바다로 나간다는 염원을 차항출해(借港出海)라고 한다. 현재 중국이 동해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루트가 두만강인데, 두만강에 북러를 잇는 낡은 철교가 하나 있다. 그런데 그 철교가 워낙 낮아 대양을 항해하는 큰 배는 지나가지 못한다. 이 철교 하나가 많은 것을 시사한다"고 설명했다. 최근 북한이 러우 전쟁에 지원병을 보내면서 양국은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했다. 북한이 침략을 받으면 러시아가 참전할 수 있게 됐다. 이를 가장 싫어하고 못마땅해 하는 나라가 중국이라고 김 교수는 진단했다. 이미 북한과 동맹 관계인 중국은 동해로 진출하기 위해 북한을 이용할 계획인데, 북한이 러시아와 손을 잡게 되면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러시아는 일본과 북방섬을 두고 영토 분쟁 중이다. 유일하게 한국하고만 아무런 분쟁이 없었다"며 “최근 러시아도 한국에 엄청난 호감을 표시하고 있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2024년 6월 19일)하기 직전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국이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지원하지 않을 것을 높이 평가하며 관계 개선을 기대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우리는 그 뜻을 이해하고 이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러시아와 가스관 설치 재추진해야 현재 러시아는 미국과 반대 진영에 있다. 러시아와 싸우고 있는 우크라이나는 미국의 절대적 지원을 받고 있어 사실상 러시아 대 미국의 싸움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전후 러시아와 외교 및 교역이 가능한 것일까? 김 교수는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미국의 최종 목표는 중국의 도전을 제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한테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밖에 기회가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는 기간이다. 중국이 더 이상 미국에 도전할 수 없게 되면, 미국은 중국을 우선 하고 한국은 찬밥 신세가 될 것이다. 한국은 지금 기회를 잡아야 한다. 러시아와의 교역도 이런 차원에서 미국의 묵인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러시아와 교역의 일환으로 가스관 건설을 다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메르베데프 시절 남북러 가스관 건설이 추진됐으나, 결국 이루지 못한 바 있다. 이를 회상한 김 교수는 “당시 러시아가 이를 제안했으나, 한국이 거절한 셈이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가스관이 북한을 거쳐 오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게 당시의 생각이었다"며 “이것은 가스관 경제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러-우 전쟁 중에도 가스관은 운영되고 통관료도 정상 지불됐다. 가스관은 절대 안전하다. 즉, 남북러 가스관이 설치되면 우리로서는 저렴한 연료 확보는 물론이고, 러시아와 원교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에 훨씬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신라 3국 통일 이후 천년만에 찾아온 원교 '러시아·미국' 김 교수는 끝으로 한국에 천년만에 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기 위해서는 정파를 떠난 대승적 국론 통일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조그마했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원교 대상인 당나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로 한국에 원교 대상이 없었는데 이제야 원교 대상인 러시아와 미국이 나타났다"며 “비스마르크(독일 전 수상)는 '행운의 여신이 다가왔을 때 옷자락을 잡는 게 진짜 정치'라고 말했다. 진보든 보수든 합심해서 북극항로 선점과 거점항구 확보의 기회를 반드시 잡아야 한다. 이것이 내가 이번 인터뷰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라고 말했다. △서울대 공대 학사 △미 웨스트버지니아대 대학원 경제학석사 △미 콜로라도 CSM 대학원 경제학박사 △아이오나대 조교수 △1987년~2005년 서울대 공대 자원공학과 교수 △2002년~2003년 한국자원경제학회장 △2003년~2004년 대통령 정보과학기술수석보좌관 △2006년~2008년 국가에너지위원회 위원 △2006년~ 서울대 공대 산업공학과 교수 △서울대 기술경영경제정책전공 명예교수 △해양수산부 북극항로 자문위원회 위원장 윤병효 기자 chyybh@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