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여기, 여기에 색깔이 칠해진 동, 층, 라인들은 임대입니다. 아무래도 임대동이나 임대 세대가 섞인 동보다는 다른 매물이 낫죠" 지난달 초 올림픽파크포레온(올파포)단지 내 상가 부동산 공인중개업소 관계자의 말이다. 벽에 붙어 있는 단지 배치도에서 유독 분홍색으로 짙게 칠해진 세대가 무슨 의미인지를 묻자 나온 말이다. 임대 세대를 분양 세대들과 구분하기 위해 색깔을 칠해 놨다는 의미다. 둔촌주공 아파트를 재건축 해 2024년 입주한 올림픽파크포레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세대 수가 1만 세대가 넘어 전국에서 가장 대규모 아파트 단지다. 총 1만2000 세대 중 1046세대가 임대주택이다. 산술적으로도 1000세대를 넘는 임대주택 가구 수만으로도 왠만한 대단지 아파트 못지 않는 규모를 자랑한다. 그런데 일선 부동산 현장에선 '임대 세대' 표시를 해 놓고 고객들에게 임대 세대가 공급돼 있는 동은 피하라는 조언을 해 주고 있었다. 입주민 중 10%에 가까운 주민들이 임대 세대에 거주하면서 조합원 및 일반분양 세대, 매매 거래 입주자들과 같은 공간인 '올파포' 단지 내에 거주하고 있지만 정작 그 이면엔 '보이지 않는 차별'이 이뤄지고 있었다. 현재 서울에서 재건축이나 재개발 등 도시정비사업을 통해 노후 단지 및 지역을 신축 아파트로 건설할 경우 전체 연면적의 최소 10% 이상을 임대 주택으로 공급해야 한다. 보통 임대 주택이 전용면적 30~40㎡(10평대)의 초소형 규모로 지어지는 만큼 세대 수 기준으로는 15% 이상이 임대 주택으로 지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올파포는 10평대의 소형 세대를 일반분양 물량으로 많이 공급하면서 임대 주택 의무 인센티브가 적용됐지만 그럼에도 상당수 세대는 임대주택으로 지어졌다. 올파포는 겉으로 보기엔 임대 세대와 일반 세대를 구분하기 힘들다. 특정 개별 단지에 임대 세대 1000세대를 몰아넣지도 않았고, 특정 개별동이 임대동으로 구분돼 있지도 않는다. 같은 동에 조합원 세대와 일반분양 세대, 임대 세대가 섞인 '소셜믹스'가 적용된 단지이기 때문이다. 특히 서울시는 2021년부터 재건축·재개발 단지에서 임대주택을 특정 동이나 저층에 몰아넣지 못하도록 하는 '소셜믹스 원칙'을 의무화했다. 2020년 이전까지만 해도 서울의 재건축 재개발 아파트는 일반적으로 '임대동'을 따로 둬서 특정동에 임대 세대를 모두 몰아넣고, 커뮤니티 시설 이용 등을 제한하거나 주차장과 출입구를 따로 배치하는 등 차별을 뒀다. 서울 중구 만리동 '서울역 센트럴자이'가 대표적인 경우다. 만리2구역을 재개발해 2017년에 완공된 이 단지는 총 14개동으로 구성돼 있는데 유동 맨 마지막 번호의 114동은 다른 13개 동에서 멀리 떨어져 단지 맨 왼쪽 구석 끝부분에 지어져 있다. 언뜻 보기에도 기형적인 단지 구조로 구성돼 있다. 임대동 114동 주민들은 13개동이 사용하는 단지 정문 출입구와 주차장도 이용하지 못한다. 임대 세대는 오직 114동 전용 출입구로만 다녀야 하고, 지하주차장 역시 메인 주차장이 아닌 114동 전용 지하 주차장만 이용할 수 있다. 13개동이 모여있는 구역에 마련돼 있는 커뮤니티 시설 역시 임대 세대는 이용할 수 없다. 개포주공3단지를 재건축 해 2019년에 입주한 강남구 '디에이치 아너힐즈'의 상황도 비슷하다. 전체 23개동 가운데 유독 임대 세대인 2개 동만 저층으로 지어져 대로변과 맞닿은 외곽에 배치돼 있다. 고동색, 회색, 하얀색 3색으로 전체 단지의 색감 컨셉을 통일시킨 나머지 21개동과 달리 이들 2개동은 검은색 단일색으로 마감돼 있다. 얼핏 보면 상가동처럼 보일 정도로 외관 자체가 전혀 다르게 보일 정도다. 이렇게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임대동과 일반동을 구분시키고 심지어 실거주에 있어 차별까지 하는 주체는 바로 조합이다. 정비사업 시행자인 조합들이 단지 건설 단계에서부터 임대 세대를 구분하고, 입주 후에도 시설 이용 여부 등을 놓고 차별을 조장하자 서울시는 결국 소셜믹스 정책을 의무화 했다. 이에 따라 2021년 이후 지어진 서울 재건축·재개발 아파트는 외적으로는 임대 세대와 일반 세대를 구별하기 힘들어졌다. 문제는 여전히 임대 세대들에 대한 보이지 않는 구분과 차별 등이 행해진다는 것이다. 입주자카페 내에선 임대 세대가 몇 층, 몇 호인지 정보를 공유하는 글들이 나돈다. 내년 1월 입주를 앞두고 지난달 말 사전 점검을 마친 서울 송파구 신천동 '잠실 르엘'이 대표적 사폐다. 이 아파트 입주자 카페는 요즘 요즘 임대 배치표로 내부가 시끄럽다. 잠실 미성·크로바 아파트를 재건축 한 이 아파트는 입주장을 맞아 단지 외곽에 위치한 104, 105, 107, 108동 예비 입주민들 사이에서 특정층이나 특정라인이 임대 세대가 맞는지 묻는 수요가 부쩍 늘었다는 후문이다. 사건의 발단은 이들 외곽 동에 거주하게 될 일반분양자와 조합원 세대 간에 층, 라인 배치를 놓고 분쟁이 일어난 것이다. 대로변 소음이나 분진으로부터 자유롭고 외부 뷰가 세대 내부에 조망되는 고층 세대를 조합원들이 독점하면서 일반분양자들이 불만을 표한 것이다. 이 와중에 임대 세대는 과연 몇 층, 어느 라인에 배치돼 있는지 파악해야 된다고 일부 예비 입주자들이 문제 제기를 했고, 이 과정에서 임대 세대의 배치 현황이 내부적으로 공유된 것이다. 일부 임대 세대가 선호도가 높은 호수에 배치돼 있는 것으로 드러나자 어떤 입주민들은 왜 이렇게 좋은 층에 임대 세대가 들어가 있는지 항의하기도 했다. 소셜믹스 단지에서 임대 세대를 특정하는 것이 현행법상 불법은 아니다. 지금도 왠만한 서울의 신축 대단지 아파트 인근의 부동산 중개업소를 방문하면 단지 주민들이 아닌 외부인들도 얼마든지 해당 아파트 단지 내에서 임대 세대가 몇 동, 몇 층, 몇 호에 들어가 있는지 파악 가능하다. 단지 내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은 임대 세대를 파악하는 것이 훨씬 더 쉽다. 회원으로 가입돼 있는 입주민 카페나 커뮤니티를 통해서 어떠한 노력을 들이지 않고, 클릭 몇 번만으로 임대 세대를 특정할 수 있다. 이렇게 조합원들이나 일반분양 주민들간에 세대 배치를 놓고, 임대 세대에 대해 노골적인 차별 발언을 내뱉고 있지만, 정작 임대 세대 주민들의 목소리는 그 어디에서도 찾기 힘들다. 서울 재건축·재개발 아파트는 대부분 고가 아파트다. 강남3구나 마용성(마포·용산·성동) 등 서울 한강벨트 아파트는 수십억 이상에 거래되는 초고가 아파트다. 매매 거래 계약을 통해 신고가를 찍고 입주하는 일반 세대 주민들이 보기에 임대 세대는 자신들이 사는 고가 아파트에 '거저 사는' 사람들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초고가 아파트 단지 내에 거주하는 임대 주택 세대 역시 거주를 위해 상당 수준의 비용을 지출한다. 최근 임대 세대 관련 분란이 일어난 잠실 르엘의 경우 임대 세대 일부가 임대 주택 규모로는 대형 평수에 해당하는 전용 59㎡(24평)로 공급됐다. 잠실 르엘 임대 세대 24평은 주로 신혼부부전용 장기전세주택(미리내집)으로 공급됐는데, 이 미리내집 24평의 전세금은 8억원에 달한다. 잠실 르엘 일반 세대 24평 평균 전세금인 12억원 수준에 못 미치지만 임대 주택 거주 비용으로는 초고가에 해당한다. 전세금 8억원이면 서울 내 비강남권 왠만한 신축 아파트 24평 전세가 가능한 수준이다. 임대 주택 세대도 주택법에 근거해 정당하게 거주 비용을 지출해 같은 단지에 살고 있는 입주민들인 셈이다. 일부 고가 아파트 임대 세대는 다른 단지의 전월세 수준의 임대료를 지출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임대 세대 입주민들은 이런 논란에서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일반 세대의 은근한 차별에 속앓이만 하면서 자신을 감춘다. 반면, 저렴한 비용을 들여 같은 단지에서 고품질의 주거 혜택을 누린다는 시각도 있다. 특히 소셜믹스 의무화 정책으로 서울 유명 재건축·재개발 신축 아파트에서 공식적으로는 임대 세대를 실거주 측면에서 차별하기도 어려워진 측면도 크다. 임대 세대 주민으로 추정되는 한 올파포 주민은 커뮤니티에 “30억원에 팔리는 이 아파트에서 월세로 살려면 최소 100만원에서 200만원 이상을 내지만 임대로 들어오면 월세로 수십만원 정도의 임대료만 내고 거주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익을 보고 있다"면서 “일반 세대에 비해 훨씬 저렴한 돈 내고 같은 아파트 주민으로 묶이는데 일반 세대 주민들이 뭐라 하든 신경쓰지 않는다. 나만 편하면 그만"이라고 글을 올리기도 했다. 올파포 단지 내 상가에 위치한 R 부동산 공인중개소는 “어짜피 올파포 등 강남3구 유명 아파트 임대 세대 주민들은 대부분 신혼부부 등 젊은 30대 주민들이 많다. 이들은 자산이나 소득은 낮아도 강남에 오래 거주해 가점이 높아서 들어온 경우가 대부분으로 강남 키즈도 상당수"라고 말했다. 이어 “이런 경우 임대 세대 차별에 위축된다기보다, 자신들이 싼 돈을 들여 일반 세대와 같은 이득을 누리니 좋은 것 아니냐고 만족하고 사는 사람도 많다"며 “겉으로 보는 것과 달리 일반 세대 주민들도 임대 세대 주민들이 30대 신혼부부들이 많아 단지 내 분위기가 더 밝고 활기차진다고 반기는 이들도 많다"고 전했다. 임진영 기자 ijy@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