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럽연합(EU)에 이어 호주까지 중국 견제라는 명목으로 대규모 정부 보조금을 통해 청정에너지 제조 역량을 구축하고 있다. 한국 기업들이 이들 지역에서 사업을 하려면 현지에 직접 제조공장을 지을 수밖에 없어 관련 품목의 직접 수출이 감소하는 것은 물론, 국내 투자 및 고용도 쪼그라들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5일 외교부 글로벌에너지협력센터에 따르면 호주 정부는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과 반도체법을 벤치마킹한 '호주산 미래법'(Future Made in Australia Act)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세부 내용은 이달 중순 연방 예산안 발표 때 나올 예정인데, 법의 취지는 호주에 풍부한 천연자원, 핵심광물, 수소, 태양광 기술을 동력 삼아 글로벌 청정에너지 강국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총 120억달러 규모의 보조금을 지원해 태양광, 수소 등 청정에너지 산업의 제조 역량을 강화할 계획이다.
보조금이 지원되는 솔라 선샷(Solar SunShot) 프로그램을 보면 법의 목적이 잘 드러나 있다. 호주 정부는 자국에서 생산된 태양광 모듈에 대해 와트당 모듈생산크레딧을 산정해 메가와트 기준으로 2026년부터 최장 10년간 분기별로 보조금을 지급한다. 분야는 ROUND1(태양광 모듈)과 ROUND2(소·부·장)으로 나뉜다. ROUND2는 폴리실리콘, 잉곳·와이퍼, 셀, 유리, 알루미늄 프레임, 인버터, 재생 및 재활용 등 태양광 전 밸류체인을 포함한다.
호주 정부는 이를 통해 △자국 내에 태양광 밸류체인 및 제조 역량 구축 △모듈 제조 혁신 및 자동화 구축 △모듈 제조 장벽 완화 △지속가능한 태양광 제조역량 확보 등의 효과를 노리고 있다.
호주의 태양광 수요는 2023년 5GW, 2030년 15GW, 2050년 50GW로 대폭 늘어날 예정이다. 하지만 작년 기준으로 태양광 패널 자급률은 약 1%에 불과하다. 작년 호주의 태양광 관련 총 수입액 21억7331만달러 가운데 중국 수입액은 20억722만달러(92.4%)이다.
이를 두고 블룸버그통신은 “호주가 수십년간 이어온 무역과 투자에 대한 자유시장주의 기조를 철회하고 보조금 전쟁에 뛰어들겠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청정에너지 산업의 보호무역주의 바람을 일으킨 건 미국이다.
미국 바이든 정부는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반도체법'을 제정해 배터리, 반도체, 재생에너지, 수소, 핵심광물과 같은 첨단과학 및 청정에너지 산업에 필수적인 제조 역량을 자국 내에 구축하고 있다. 이를 위해 수백억 달러의 정부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이 보조금을 받기 위해 국내외 기업들이 미국에 수천억 달러를 투자해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올해 하반기부터 시행에 들어갈 예정인 유럽연합의 '탄소중립산업법'은 관련 기업을 미국에 뺏기지 않고 중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제정이 추진되고 있다. 유럽연합은 이 법을 통해 2030년까지 관련 기술의 제조 역량을 40%까지 끌어 올릴 계획이다.
법의 적용 대상인 '탄소중립 전략기술'은 △태양광 및 태양열 △육상 및 해상 풍력 △배터리 및 저장 △히트펌프 및 지열 에너지 △전해조 및 연료전지 △지속가능한 바이오가스 및 바이오메탄 △탄소 포집, 사용 및 저장 △전력망 등이다.
미국, 유럽연합, 호주는 세계에서 청정에너지 산업이 가장 발달한 지역이다. 이들이 청정에너지 밸류체인을 자국 내에 직접 구축함에 따라 수출로 먹고 사는 우리나라로서는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무역협회 수출입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태양전지(HS CODE 8541) 관련 수출액은 2017년 61억8942만달러를 정점으로 이후 계속 감소해 2023년에는 38억7822만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대표적 태양광 기업인 한화솔루션의 태양광 매출액이 2017년 3조4147억원에서 2023년 6조6159억원으로 증가한 것과 대조적이다.
마찬가지로 작년 우리나라의 배터리 셀(HS CODE 850760) 수출액은 전년보다 0.9% 감소한 약 9조9000억원을 기록했지만, 같은 기간 배터리 셀 3사의 총합 매출액은 전년보다 30% 증가한 69조3510억원(LG에너지솔루션 33조7455억원, 삼성SDI 22조7083억원, SK온 12조8972억원)을 기록했다.
국내 청정에너지 분야 기업들의 매출은 쭉쭉 성장하고 있지만 대부분이 해외 직접생산에서 발생하면서 관련 품목의 국내 수출은 감소하는 디커플링 현상이 벌써부터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삼일PwC 경영연구원은 작년 5월 발표한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가져올 변화' 보고서에서 “글로벌 경제 패러다임이 '저비용·고효율' 중심에서 과거의 '비효율적 안보 중시의 시대'로 회귀하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 산업금속의 공급과잉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이라며 “중국 내 생산 캐파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중국 이외 지역의 생산 캐파 증설은 향후 중국의 공급과잉 유발 가능성이 있다. 현재의 트렌드라면 적어도 5년 후에 공급과잉의 역사를 반복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또한 보고서는 “한국 기업들이 미국을 중심으로 첨단 제조 분야에 대한 해외 제조업 투자 발표가 이어지고 있다. 대기업들의 미국 투자 집중으로 국내 투자가 줄어들 경우 첨단 제조 산업의 국내 생태계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다"며 “국내외의 균형 있는 투자가 필요하며, 국내 투자를 유인하기 위해 인센티브 대책이 필요해 보인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