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대란에 대응하는 정부가 '의대 정원' 대신 '내년도 예산'을 의료계와의 협상 카드로 제시하고 나섰다. 의료 현장에 주는 영향이 10년 뒤에나 뚜렷해지는 의대 문제보다는 당장 긴급한 이슈에 대응할 수 있는 '현금'을 테이블 위에 올린 셈이다. 다만 정부와 의료계 모두 분명한 협상 창구를 정리하지 못한 채 '말 잔치'를 반복하고 있어, 이런 제안이 근시일 내 실효를 거두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은 26일 오전 용산 대통령실 국무회의에서 “보건의료 분야를 안보·치안 등 국가 본질 기능과 같은 반열에 두고 과감한 재정투자를 하겠다"며 “정부와 의료계가 하루빨리 머리를 맞대고 협의해야 보건의료 분야 재정 지출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내년 예산 편성도 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보건의료 분야를 우선순위에 둬야 하므로 건강보험 재정에만 맡겨서는 안 되고, 정부 재정을 과감하게 투자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대통령실은 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보고한 내년도 예산안 편성 지침에도 필수 의료 지원이 처음으로 재정투자 중점 분야에 포함됐다고 전했다. 윤 대통령은 특히 이날 오후 충북 청주 한국병원 의료진과의 간담회를 가진 뒤 참모진에게 “내년도 의료예산을 함께 논의할 것을 의료계를 향해 제안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정부는 이미 발표한 의대 정원과 관련해서는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차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2000명 증원' 후속 조치를 5월내 마무리하겠다"고 못을 박고, “의대 교수님들 단체에서는 대화 조건으로 '2000명 증원'(조정)을 말하는데, 지금은 조건을 따지기보다는 전공의들의 조속한 복귀와 진료 정상화가 우선"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정부와 의료계는 이런 부분에 대한 논의를 이어받을 '창구'조차 마련하지 못한 상태다. 여당인 국민의힘에서조차 4·10 총선 전면에 나선 인사들이 정부를 향해 제각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 경기 공동 선거대책위원장인 안철수 경기 분당갑 후보는 이날 범사회적 의료개혁 협의체 구성과 '2000명 의대 증원' 정부안 재검토 등을 중재안으로 제시했다. 당 지도부보다 한발 앞서 구체적인 안을 내놓은 것이다. 인천 공동 선대위원장인 윤상현 동·미추홀을 후보도 페이스북에서 지도부를 향해 “작금의 민심을 대통령실에 정확히 전하고 중재에 나서야 한다"며 “지금은 민심을 따라야 한다. 민심이 당심보다, 윤심보다 더 중요하다. 민심이 천심"이라고 지적했다. 의료계 역시 전공의, 의대 교수, 대한의사협회(의협) 등의 주장과 생각이 각각 달라 '대표성' 있는 단일 협상 창구를 마련하지 못한 상태다. 교수들이 '중재자'를 자처하며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모색하고 있지만, 전공의들을 대표하는 단체인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은 침묵하고 있다. 사직한 인턴 류옥하다 씨는 “정부가 교수들과 대화하겠다는 건, 노조가 사직했는데 사측 대표이사를 만난 것과 다름없는 일"이라고 꼬집었다. 특히 의협에서는 이날 제42대 회장으로 뽑힌 신임 회장이 강경한 '대화 조건'을 내세우며 투쟁 노선을 예고했다.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 회장 출신인 임현택 당선인은 “필요하다면 전공의 대표·의대 교수들을 충분히 포함해 정부와의 대화 창구를 만들겠다"면서도 “조규홍 복지부 장관과 박민수 차관 파면, 의대 증원에 관여한 안상훈 전 사회수석 공천 취소가 기본이고 대통령 사과가 동반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또 “면허 정지 처분 보류 등은 협상 카드 수준에도 들지 못한다"며 의대 정원을 오히려 축소해야 하고 필수의료 패키지도 백지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안효건 기자 hg3to8@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