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반도체 대전이 국가 간 대항전으로 확대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해외에서는 자국 반도체 기업들에 대한 막대한 현금 지원에 나서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외국과의 산업 발전 수준이 다르고 형평성과 반기업 정서 등의 문제로 정부가 주저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5일 업계에 따르면 반도체에 대한 기술 패권 경쟁은 자국 반도체 산업에 대한 정책적 지원 경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반도체의 중요성은 2018년 이후 촉발된 미국과 중국 간의 패권 전쟁으로 강화됐다. 생성형 인공 지능(AI)를 기반으로 한 시스템 반도체의 성장성 전망에 따라 미국과 일본, 중국 등 세계 주요국들은 선두주자 지위를 확보하고자 적극 대응하고 있다.
한국경제인협회 관계자는 “미국은 68조원, 유럽연합 62조원, 중국 101조원, 일본은 매년 10조~20조원에 달하는 보조금을 자국 반도체 기업에 지급하는 등 적극적인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미국은 자국 내 첨단 반도체 공장을 건립하는 삼성전자에 64억달러 상당의 보조금을 현금으로 지급하기로 했고, 이 외에도 인텔 85억달러·대만반도체제조(TSMC) 66억달러 등 막대한 지원을 약속했다. 일본 역시 반도체 산업 회생 차원에서 TSMC에 구마모토현 공장 부지와 1조2080억엔 수준의 보조금을 제공하기로 했다.
이처럼 세계 각국이 세금을 투입하며 반도체 기업 유치에 총력을 다하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대기업에 대한 특혜 시비와 반기업 정서 탓에 투자액의 15%를 세액 공제해주는 정도에만 그치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와 관련, 지난 14일 오전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세종 청사 기자실에서 차담회를 갖고 국내 반도체 기업들에 대한 보조금 지급 검토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지난 7일 고동진 국민의힘(강남 병) 의원이 국정감사 질의를 통해 “반도체 특별 회계를 도입해야 하는데 산업부의 대응은 매우 실망스럽다"고 언급하자 안 장관은 “어떻게 재원 마련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관계 부처와 협의를 이어가고 있다"고 답변했다.
전세계적으로 보호 무역주의 기조가 강화되고 있고 보조금 지급이 대세가 됨에 따라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는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상황에서도 '자유 무역'을 의식해 정부가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들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주저하면 안된다고 입을 모은다.
앞서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제임스 브랜더는 '전략적 무역 정책'론을 제시했고, 불완전 경쟁 시장에서 정부 개입의 정당성을 주장한 바 있다.
관세청에 따르면 반도체 산업의 수출 비중은 2021년 25.0%, 2022년 23.9%, 2023년 20.7%로 집계됐다. 때문에 적기에 보조금을 지급하면 국가 경쟁력 확보에 효과적일 것이라는 게 재계 중론이다. 산업과 기업 경쟁력 제고의 골든 타임을 놓치면 비 가역적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에서다.
올해 2분기 기준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TSMC 62.3%, 삼성전자 11.5%, SMIC 5.7%, UMC 5.3%, 글로벌 파운드리 4.9%, 화홍그룹 2.1%로 나타났다. 인텔은 11조원에 가까운 보조금을 미국 정부로부터 받았지만 경쟁사들과의 기술 격차를 메우지 못해 최근 대규모 인력 해고와 파운드리 분사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 반도체산업협회(SIA)와 보스턴 컨설팅 그룹(BCG) 보고서는 2032년 세계 반도체 생산 능력 순위 측면에서 중국이 21%로 1위를 차지하고 한국 19%, 대만 17%, 미국은 14% 순으로 뒤따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특히 첨단 공정을 비롯, 10나노미터 이하 한국 반도체 생산 점유율은 2022년 31%에서 2032년 9%로 급락할 것이라는 경고도 나왔다.
한경협 관계자는 “타 산업과의 형평성·재정 건전성 고려도 중요하지만 세계 경쟁에서 뒤처질 경우 반도체 산업 재선점에 있어 애로사항이 매우 커진다"며 “정부 불용 예산이 연간 11조원에 달하는 만큼 이를 바탕으로 한 직접 보조금 재원을 마련하는 등의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