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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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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인사이트] 중대재해처벌법,‘안전’이 안보인다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22.01.05 09:39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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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교수


요즘만큼 산업현장에서 안전이 핫한 주제로 부각된 적은 없는 것 같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이 이달 27일로 바짝 다가온 가운데 대기업을 중심으로 걱정이 잔뜩 커진 모양새다.

문제는 중대재해처벌법 관련 논의가 형사처벌이라는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데 집중돼 있고, 그러다 보니 안전문제에 문외한인 로펌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형식적 법기술이 실질적 안전을 밀어내고 안방을 차지하고 있는 형국인 셈이다.

안전에 대한 높은 관심 속에서 안전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지만, 이것이 안전역량 향상으로 이어질지 많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처벌 회피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하는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대책은 실종되고 보여주기에 좋은 단기처방 일색이 될 가능성이 크다. 도전적이고 많은 시간이 요구되는 중장기적인 대책은 시도될 가능성이 약화될 수 있다.

게다가 산재예방의 기본법인 산업안전보건법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있는 부작용이 확연히 눈에 띄고 있는 것도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정부부터 중대재해처벌법을 억지로 부각시키기 위해 산업안전보건법은 구체적인 안전조치만을 규율하고 있는 한낱 ‘기술법’이라고 격하시키면서 산업안전보건법에 대한 무관심을 부채질하고 있다. 산업안전보건법이라는 밑돌을 빼 중대재해처벌법이라는 윗돌을 괴는 꼴이다.

산업안전보건 주무부처가 산업안전보건법을 이렇게 엉성하게 이해하고 있다면 전부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일명 ‘김용균법’)으로 규범력이 땅으로 추락한 산업안전보건법은 그 존재감이 더욱 희미해질 것이라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전부개정 산업안전보건법으로 법을 형해화시키고, 급기야는 중대재해처벌법이라는 ‘이념법’ 제정을 불러온 주범이 정부의 산업안전보건에 대한 무지와 무능이었다. 이젠 그것도 모자라 엄벌이라는 극약처방에 의존하고 기초체력에 해당하는 예방기준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접근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중대재해처벌법 자체만으로도 많은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법 집행기관의 산업안전보건에 대한 몰인식과 진정성 부족이 난마처럼 꼬인 현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을까 우려된다.

중대재해처벌법에서도 규정하고 있는 안전보건관리체계는 단기간에 구축될 수 있는 게 아니다. 가뜩이나 안전보건관리체계에 대한 인프라도 척박한 상태이다. 더구나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기본사항부터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이런 상태에서 수범자들에게 몽둥이를 들고 당장 결과물을 만들어내라고 몰아붙이면 수범자들은 형식적인 법준수로 대응할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 대기업은 하는 척이라도 하고 있지만, 사망사고가 대부분 발생하고 있는 중소기업은 무엇을 해야 할지 난감해하거나 눈만 꿈벅거리고 있는 상태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의 가장 큰 문제는 의무주체의 혼돈이다. 하청노동자에 대한 안전조치와 관련하여, 예컨대 중대재해처벌법에 따르면 재해발생 시 재발방지대책의 수립의무는 원청이 이행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르면 이 의무는 하청이 이행해야 하는 것으로 규정돼 있다. 두 법 간에 의무주체가 충돌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중대재해처벌법 내에서조차 조문 간에 의무주체가 충돌된다. 안전조치의무와 보호대상이 동일한 상황에서 어떤 조항은 ‘사업장’을 실질적으로 지배·운영·관리하는 ‘원청’에게 의무를 부과하고 있는 반면, 다른 조항은 ‘장소’를 실질적으로 지배·운영·관리하는 위치에 있는 ‘하청’에게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정부의 중대재해처벌법 해설서조차 가장 기본적인 이 문제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 않다. 현장에서 궁금해 하는 사항에 대한 설명은 하지 않고 정부의 희망사항을 제시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고 비판받는 이유이다. 입구에서부터 어느 길로 가야 할지 헷갈리게 길을 만들어 놓고, 기본적인 안내조차 하지 않은 채 무작정 들어가라고 윽박지르는 건 무책임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기업에게 온통 책임을 떠넘기고 정부가 해야 할 시스템 개선이나 인프라 조성에는 무관심하기 짝이 없다. 책임의 외주화에 급급해서는 하청노동자의 재해예방은 요원한 일이 된다. 지금까지 엄청난 행정비용을 쏟아붓고도 하청노동자 보호에 갈지자 행보를 반복하고 있는 이유를 냉철하게 되돌아봐야 한다.

새해에는 분위기와 감성에 휩쓸리는 구시대적인 산재예방행정이 아니라 과학과 이성에 근거한 선진적인 산재예방행정을 기대해 본다. 지나친 기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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