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인물] 융합적 사고로 미래전략 ‘담금질’…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엑시트 없는’ 승부사

[이달의 인물] 융합적 사고로 미래전략 ‘담금질’…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엑시트 없는’ 승부사

고려아연은 지난해 8월 한미 정상회담 기간 중 세계 최대 방위산업체 록히드마틴과 게르마늄 공급·핵심광물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첨단 무기와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핵심 광물에 대해 중국 의존도를 극단적으로 낮추려는 미국 정부의 '탈 중국 기조'에 완벽하게 올라탄 맞춤형 행보다. 특히 올해 2월의 쾌거는 미국 트럼프 행정부 내무부와 테네시주 정부가 대규모 인프라 사업의 환경영향평가 등 연방 인허가 일정을 대폭 단축해 주는 'FAST-41' 제도 도입 업무협약(MOU)을 전격 체결하면서 고려아연의 '크루서블 프로젝트(Cru..

[윤석헌 시평] 디지털금융 전환과 국내은행의 혁신

은행의 혁신이 관심사다. 지난 정부에선 과점수익이 비난의 대상이었다면, 새 정부에선 생산적 금융, 포용금융 요구로 공격 방향이 바뀌었다. 특별한 위험부담이나 역할수행 없이 고수익을 벌어드리는 소위 '천수답 경영'이 비판의 핵심이다. 선진경제 문턱에 오른 한국경제가 필요로 하는 중개서비스를 저비용 자금과 유능한 인재를 갖춘 은행이 제공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최근 디지털금융은 IT기술 발전을 배경으로 지급결제의 신속함과 편리함을 크게 개선했다. 이어서 스테이블코인 등으로 자금을 이체하고 은행 등 중개기관 도움 없이 대출, 투자, 트레이딩을 추진하는 탈중앙화금융(DeFi, 디파이)으로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은행의 독과점적 영향력을 우회하려는 노력이 기술발전을 배경으로 전통금융의 울타리 밖에서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은행 등 중개기관 도움을 배제하는 디파이는 유동성 불일치, 상호연계성, 과다한 레버리지, 충격흡수장치 부재 등 온갖 위험 노출로 곧바로 안정성에 문제가 생겼다. 테라루나 사태가 비근한 예다. 결국 중앙화 거버넌스 요구가 다시 생겨나는데, 국제결제은행(BIS)은 이를 '탈중앙화 환상'이라 불렀다.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금융은 지급결제, 신용창출, 규제감독, 예금보험 등 제도적 발전을 이룩했으나, 시장의 불확실성과 탐욕은 금융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고 위기를 초래했다. 이제 온라인 상에서 한 번의 클릭으로 거액의 자금이 빛의 속도로 이전하는 상황에서 시스템 위험이 다시 증가하면서 금융에 대한 신뢰를 뒤흔들고 있다. 현재 국내에선 전통금융과 디지털금융을 연결하는 원화 스테이블코인(stablecoin) 법제화 논의가 한창이다. 그러나 해외에선 중앙은행디지털화폐(CBDC)와 더불어 토큰화예금(TD) 및 예금토큰(DT) 등 다양한 선택지가 논의되고 있다. 여기서 디지털화폐의 선택은 국내금융이 전통금융을 토대로 디지털금융으로 지속가능 발전하여 금융혁신을 이루는 경로이고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두 가지가 핵심으로 보인다. 첫째는 안정성 확보다. 스테이블코인은 명칭과 달리 담보자산 내용물에 따라 가치변동이 발생한다. 게다가 혁신 추구를 위해 발행 자격을 확대 허용하면, 금산분리 원칙의 훼손이 가능하고 해외 투자자 참가 시에는 통화주권 상실도 우려된다. 둘째는 혁신을 담보하는 중개기능 확충이다. 스테이블코인은 원화, CBDC, 자산 등을 100% 예비하므로 런(run)의 우려는 없지만 그만큼 중개기능(신용창출)이 제약된다. 반면, 토큰화예금(TD)이나 예금토큰(DT)은 은행의 안정성을 토대로 부분지급준비방식을 사용하므로 신용창출 제약을 완화하는 장점이 있다. 어떤 선택이 바람직할까? 금융은 안정이 핵심이며, 중개역할 확충 또한 한국경제 현실에서 소홀하기 어렵다. 따라서 은행이 주도하는 TD나 DT 발행이 바람직해 보이는데, 다만 이러한 선택은 은행의 독과점 구조를 강화하여 국내은행의 중개서비스 혁신 요구에 배치된다는 문제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남은 탈출구는 은행이 스스로 혁신하거나 또는 금융당국이 관련 제도 개혁을 이끄는 것이 아닐까. 만약 이런 탈출구를 피한다면 은행 주도 디지털화폐 및 국내금융 혁신에 대한 기대는 오래 가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은행의 혁신과 개혁 방안을 살펴본다. 첫째, 은행은 고객에 대한 중개서비스 제공에 적극 나서야 한다. 국내은행은 비이자이익이 미미한데, 이마저도 고객서비스와 무관한 유가증권 매매익과 평가익이 주다. 비용과 노력이 들더라도 고객에 대한 금융서비스를 적극 확대해야 한다.둘째, 생산적 금융 촉진 과정에서 금융위원회는 은행의 BIS비율 산정시 위험자산에 적용하는 위험가중치 조정 방안을 제시했다. 부동산대출은 하한을 높였고 주식보유는 가중치를 낮추었다. 그런데 방향은 맞지만 은행의 행태가 바뀔지 의문이다. 금융소비자보호법 이후 늘어난 은행의 책임회피용 행정업무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셋째, 은행권의 담보인정비율(LTV) 규제를 다시 강화하여 은행의 주담대 시장 점유율을 낮추고, 파킹통장 활성화로 비은행 주담대 시장 경쟁력 제고에 나서야 한다. 디지털금융 안정성 확보를 위해 전통금융 하부구조 이용이 필요한 상황에서 은행의 혁신과 개혁은 국내금융산업 혁신의 지름길로 보인다. 윤석헌

[박영범의 세무칼럼] 28만 영세 체납자, ‘부활의 사다리’ 놓이나

고금리와 고물가, 내수 부진의 삼중고 속에서 결국 '폐업'이라는 최후의 선택을 한 영세 사업자들. 이들에게 가장 가혹한 것은 '과거의 세금'이다. 국세청이 역대급 규모의 구제책을 가동한다. 이번달부터 시민 500명으로 구성된 '국세 체납관리단'이 전국 각지의 체납 현장을 누비며 옥석 가리기에 나선다. 이번 조치는 체납 세금 독촉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징수 능력이 없는 이들의 세금을 면제하여 경제활동 현장으로 복귀시키는 '생계형 체납자 납부 의무 소멸 특례제도'의 성공적인 시행이 자리 잡고 있다. 국세청은 이달부터 활동할 일반 시민 500명을 '전화·방문 실태 확인원'으로 신규 채용했다. 이들은 3월부터 10월까지 8개월간 한시적으로 운영되며, 2024년 말 기준 국세 체납자 133만 명 전원을 대상으로 실태조사를 벌인다. 이들의 주 목적은 징수독려와 '실태 파악'이다. 확인원들은 체납자의 거주지와 사업장을 직접 찾아가 실제 거주 여부, 가족관계, 생활 수준 등을 면밀히 파악한다. 가장 중요한 역할은 '영세 체납자 납부 의무 소멸 대상자 실태조사서'를 작성하는 것이다. 조사서는 향후 국세 체납 탕감 여부를 결정하는 핵심 자료로 활용된다. 1인당 최대 5,000만 원까지 세금 납부 의무를 소멸시켜 준다. 다만 법에서 정한 요건이 구체적이므로, 세 가지를 모두 충족해야 한다. 첫째 대상 세목은 종합소득세(농어촌특별세 포함)와 부가가치세, 그리고 이에 부수된 가산세와 강제징수비에 한정된다. 또한 해당 체납액은 2025년 1월 1일 이전에 발생한 것이어야 하며, 소멸시효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금액이어야 한다. 둘째 폐업 및 소득 요건은 실태조사일 이전에 모든 사업을 폐업한 상태여야 한다. 최종 폐업일이 속한 과세 연도를 포함해 직전 3개년의 평균 사업 수입금액(매출액)이 15억 원 미만인 영세사업자가 대상이다. 셋째 처벌 이력이다. 최근 5년 이내에 '조세범 처벌법'에 따라 처벌받은 사실이 없어야 하며, 현재 범칙 사건 조사가 진행 중이어도 안 된다. 특히 과거(2018~2019년)에 시행됐던 영세 개인사업자 체납액 소멸 특례를 적용받았던 사람은 이번 혜택에서 제외된다.올해부터 시행하는 제도로 약 28만 명이 3조 4천억 원 규모의 혜택을 볼 것으로 추산된다. 1인당 평균 약 1,200만 원의 '세금 족쇄'를 푸는 셈이다. 대상 영세 체납자는 1단계로 현장 조사 협조이다. 이달부터 체납관리단이 연락하거나 방문할 경우 피하지 말아야 한다. 문을 걸어 잠그거나 연락을 끊으면 '은닉 재산이 있다'는 의심을 사 정밀 추적조사의 타깃이 될 수 있다. 2단계는 경제적 빈곤을 증명해야한다. 본인이 가진 재산이 강제징수비(체납 처분비)에도 못 미친다는 점이나, 현재 수입이 최저생계비 수준이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소명해야 한다. 마지막 단계는 신청 시기 준수이다. 소멸 신청 기간은 2026년 1월 1일부터 2028년 12월 31일까지다. 신청서를 내면 국세청은 국세체납정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6개월 이내에 탕감 여부를 통지한다. 이번 특례 제도는 '성실 납세'라는 조세 원칙과 '영세 납세자 경제 재기'라는 복지적 가치 사이에서 정부가 고심 끝에 내놓은 고육지책이자 결단이다. 실패를 겪은 이들이 신용을 회복하고 다시 창업이나 취업 시장에 뛰어들어, 훗날 건실한 납세자로 돌아오게 만드는 '선순환의 마중물'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bienns@ekn.kr

[기자의 눈] 차액가맹금 분쟁, 프랜차이즈산업 성장 자양분 되길

프랜차이즈 산업의 수익 모델이 흔들리고 있다. 올해 초 대법원의 판결이 나온 한국피자헛의 차액가맹금 반환 소송 여파다. 대법원은 지난 1월 가맹계약서에 명시되지 않은 차액가맹금은 부당이득에 해당한다며 한국피자헛에 215억원을 반환하라는 확정판결을 내렸다. 해당 판결 이후 많은 로펌들이 가맹점 집단소송 전담팀을 꾸리면서, 업계에서는 줄소송에 대한 부담감을 내려놓지 못하는 분위기다. 가맹 본사와 점주 간 갈등이 큰 시국이지만, 놀랍게도(?) 프랜차이즈(franchise)의 어원은 '자유'와 '특권'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현대적으로 해석하자면 '특정 구역 안에서 본사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 정도가 될 것 같다. 사실 따지고 보면 프랜차이즈의 본질은 '규모의 경제'에 있다. 프랜차이즈 본사가 대량구매를 통해 원자재 매입 단가를 낮추고, 가맹점주에게 원자재를 시중가보다 싸게 공급할 수 있어야 경쟁력이 생긴다. 만약 가맹점에 시중가보다 비싸게 공급해서 차액가맹금을 많이 수취한다면 이는 프랜차이즈의 본질인 '규모의 경제'에 역행하는 것이다. 가맹점에 납품하는 상품, 원부재료 등에 마진을 추가로 얹는 차액가맹금 논쟁이 답답하기만 한 이유다. 본사만 탓하는 것은 아니다. 본사의 정책이 점주 본인 마음에 안 든다며 재료를 마음대로 사입해 쓰거나, 이익을 좀 더 내보겠다고 본사가 제시한 매뉴얼을 지키지 않는 것은 명백히 브랜드 가치를 훼손하는 행위다. 그런 일탈 행위는 다른 점주들에게도 해가 된다. 맥도날드는 맥도날드 형제가 창업했지만 맥도날드의 세계화를 이끈 것은 프랜차이즈 권리를 사들인 레이 크록(Ray Kroc)이었다. 그는 헨리 포드의 자동차 공장에서 영감을 얻은 '햄버거 생산 라인'과 함께 어느 지점에서도 반드시 정확하게 똑같은 음식을 정확하게 똑같은 방식으로 제공하는 '표준화 정책'을 도입했다. 이는 통상 한 끼를 위해 드는 금액의 절반 가격에 맥도날드 햄버거를 제공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본사와 점주가 상생할 때 소비자도 그 과실을 얻을 수 있다. 한국의 프랜차이즈가 하나의 산업으로 발돋움하는 데에는 1997년 IMF 외환위기가 계기가 됐다고 한다. 한국프랜차이즈협회가 발족한 것도 1998년의 일이다. 지금 업계에 위기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오히려 이 시기가 산업을 더 견고하게 성장시키는 자양분이 되기를 바란다. 정희순 기자 hsjung@ekn.kr

[이슈&인사이트] AI는 협력자인가, 파괴자인가?

앤트로픽이 기업용 AI 도구인 '클로드 코워크'를 출시했다. 이 도구는 법률 검토, 계약 분석, 영업, 마케팅, 재무 데이터 분석 등 복잡한 업무를 AI가 자율적으로 실행할 수 있게 해주는 AI 에이전트다. 이 도구가 나오자 시장은 소프트웨어 및 IT 서비스 비즈니스 모델을 근본적으로 위협할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인건비 기반으로 수익을 내는 IT 아웃소싱 기업들과 사용자 수에 따라 요금을 받는(SaaS) 기업들의 매출이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공포(SaaSpocalypse)에 소프트웨어 및 IT 서비스 기업들의 주가가 폭락했다. 이 충격파는 소프트웨어 기업들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시장은 AI 충격에 취약한 소프트웨어 기업들에 자금을 대출해준 민간 신용 펀드들의 리스크가 커졌다고 판단하였고, 민간 신용 시장의 대표 주자인 Blue Owl의 주가가 10% 이상 급락하였다. 즉, AI가 소프트웨어 산업을 붕괴시켜 그 산업에 자금을 댄 민간 신용 회사까지 연쇄적으로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공포가 시장을 휘감은 것이다. 이 사건 이후 미국 시장의 화두는 AI disruption(파괴)가 되었다. Citrini Research의 '2028 글로벌 인텔리전스 위기'같은 소설에 가까운 보고서 마저 나오고 있어 AI disruption은 앞으로 AI가 기존 B2B 소프트웨어의 기능을 잠식할 수 있다는 우려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지난 23일에는 앤트로픽이 COBOL 기반 레거시 시스템을 자동으로 분석·업데이트하는 Claude Code 도구를 발표한 직후 IBM 주가가 하루에 13% 이상 급락, 닷컴 버블 이후 최대 낙폭을 기록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COBOL은 여전히 미국 ATM 거래의 90% 이상, 사회보장·금융 백엔드에서 핵심 언어이고 이 시장에서 IBM 메인프레임·서비스가 핵심 공급자라는 인식이 강한 상태다. COBOL 기반 영업은 “고난도·고마진·장기 컨설팅·서비스"였는데, AI 도구가 이를 저비용·자동화해 버리게 된다면 IBM이 누리던 서비스 마진이 줄어든다는 공포가 나타났다. 다행히 앤트로픽이 이런 우려를 인식한 듯 주요 소프트웨어 기업과 파트너십을 맺었다는 소식이 나오면서 그간 투매에 휩쓸렸던 기업들의 주가는 반등했다. AI에 대체되기보다는 공존으로 살길을 모색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앤트로픽은 자사 클로드 코워크를 세일즈포스와 같은 다양한 기업용 앱에 통합하는 기능을 선보였다. 웨드 부시 증권 보고서에는 “앤트로픽의 이번 발표는 AI가 촉발한 소프트웨어 경쟁력 위험이 과장되었고 소프트웨어 인프라에 깊숙이 자리 잡은 워크플로를 대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AI 파괴 또는 AI 협력, 어떤 세상이 도래할지 모른다. 다만 최악의 시나리오는 AI 기업들이 기업용 자동화 툴을 빠르게 상용화하고 동시에 고금리가 오래 지속되어 레버리지 많은 소프트웨어 기업들의 현금흐름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기존 SaaS 비즈니스의 매출이 생각보다 빨리 줄고 프라이빗 크레딧에서 소프트웨어 익스포저가 높은 포트폴리오의 부실률이 UBS가 말한 10%+ 구간으로 치솟게 되어 구조조정을 겪는 것일 거다. 베스트 시나리오는 IBM 같은 회사들이 클라우드와 AI 회사의 도구를 적절히 엮어 “레거시 + AI 현대화 파트너"라는 포지션을 곤고하게 이룩하는 것일 거다. 거시적으로 AI 디스럽션은 소프트웨어 수익·고용 악화, 더 나아가서는 자본시장 붕괴 순서로 번질 수 있는 새로운 충격 경로로 빠질 수 있기에 2026~27년은 “AI가 생산성을 얼마나 올리는가" 못지않게 “AI가 기존 자산·부채 구조를 어디까지 흔드는가"를 봐야 하는 시기임에는 틀림이 없다. bienns@ekn.kr

[EE칼럼] “100% 확신은 없다: 확률예보가 필요한 이유”

강수를 중심으로 확률예보에 대해 몇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 기상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기상기관은 왜 '강수확률 30%'와 같은 수치로 내일의 날씨를 설명할까. 우리는 “서울 지역의 내일 강수확률은 50%입니다"라는 예보를 들을 때, 그 의미를 과연 정확히 이해하고 있을까. 혹시 이를 '비가 올 가능성과 오지 않을 가능성이 각각 절반'이라는 단순한 통계적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은가. 더 나아가, 본질적으로 불확실할 수밖에 없는 대기 현상을 예측하면서 '확률'이라는 개념을 덧붙이는 일이 예보의 책임을 완화하기 위한 방패막이 장치는 아닌지 의문을 품어본 적은 없는가. 확률예보는 모호함을 감추기 위한 수사가 아니라, 불확실성을 정직하게 드러내고 이를 의사결정 가능한 정보로 전환하려는 과학적 진보의 산물이다. 과거 예보가 예보관의 경험과 직관에 크게 의존하던 주관적 예보의 시대를 지나, 오늘날에는 슈퍼컴퓨터 기반의 수치예보모델에 의존하는 객관적 예보 시대로 발전했다. 그럼에도 대기는 수많은 변수가 상호작용하는 초복잡계이자 비선형 시스템이기에, 모든 과정을 완벽히 재현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러한 한계를 인식한 결과로 등장한 대안이 바로 확률예보다. 확률예보는 전통적 통계 기법과 앙상블 예측 등 복합적인 과학적 과정을 통해 산출된다. 함축적으로 강수확률 30%란, 과거 유사한 기압계와 기상 조건에서 해당 지역에 10번 중 3번 비가 내렸음을 의미한다. 강수확률 50% 역시 같은 맥락에서 10번 중 5번 비가 왔다는 뜻으로, 과학적으로 정당한 결과물이다. 이는 불확실성을 회피한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정량화해 제시하는 가장 정직한 방식이다. 확률예보는 단정적인 결정론적 예보보다 더 많은 데이터와 계산, 그리고 검증을 거쳐 생산되는 고차원의 정보라 할 수 있다. 확률예보의 가치는 산업 현장에서 특히 분명하게 드러난다. 기업 경영에서 기상 단순한 참고 자료를 넘어 리스크 관리의 핵심 수단이다. 이를 설명하는 대표적 개념이 '비용-손실 모델(Cost–Loss Model)'이다. 대응 비용(C)과 대비하지 않았을 때 발생할 손실(L)을 비교해 임계확률 Pc=C/L을 산출하고, 예보 확률이 이를 초과할 경우 행동에 나서는 전략이다. 예를 들어 농업 분야에서 농약 살포 비용이 100만원이고, 비로 인해 재살포와 작물 피해로 500만원의 손실이 예상된다면 임계확률은 20%다. 즉 강수확률이 20%만 되어도 살포를 연기하는 편이 통계적으로 합리적이다. 건설 현장에서 콘크리트 타설 비용이 500만원이고, 우천 시 재시공 손실이 5,000만원이라면 임계확률은 10%에 불과하다. 낮은 확률이라도 공사를 중단하는 것이 경영상 안전한 선택이 된다. 물류·유통 산업에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강수확률이 예보되면 인력을 선제적으로 배치해 배송 지연과 고객 이탈이라는 더 큰 손실을 예방할 수 있다. 이처럼 확률예보는 의사결정을 정교화하고, 장기적으로 막대한 비용 절감과 생산성 향상을 가능하게 한다. 국가적 재난 관리에서도 원리는 같다. 태풍이나 집중호우의 발생 확률이 일정 임계치를 넘는 순간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면 방재의 골든타임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100% 확신'을 기다리는 태도는 곧 위험을 방치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확률에 기반해 움직이는 것만이 인명과 재산 피해를 최소화하는 길이다. 현대 과학기술로도 100% 완전한 예보는 불가능하다. 이는 예보관의 역량 부족이나 슈퍼컴퓨터 성능의 한계 때문이라기보다는, 대기 운동 자체가 지닌 근본적 불확실성 때문이다. 특히 기후위기로 인해 과거에 경험하지 못한 극한 기상현상이 빈번해지는 오늘날, 단정적 결정론에 머무는 태도는 기상·기후 정보의 가치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는 사고방식일 수 있다. 인공지능 기반 예보가 발전하더라도, 불확실성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이제 우리는 확률예보를 보다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기반 전력 수급 예측 역시 기상 변수의 확률 정보를 반영한 전략 수립이 필수적이다. 장기 기후예측에서도 단일 수치를 제시하는 방식보다 확률예보에 기반한 정보가 정책과 산업 현장에서 훨씬 실질적인 가치를 제공한다. 확률예보는 우리에게 '스스로 판단할 권리'를 부여한다. 20%의 가능성에도 대비할 것인지, 80%의 가능성에 기대어 모험을 감수할 것인지는 결국 우리의 선택이다. 예보를 고정된 정답이 아니라 전략적 의사결정 도구로 인식할 때, 우리는 자연재해의 위협을 보다 현명하게 관리하고 데이터에 기반한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기후위기 시대, 확률예보를 통한 '슬기로운 예보 생활'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기자의 눈] AI 전쟁은 ‘시간 싸움’이다

인공지능(AI) 열풍이 실리콘밸리 공기를 바꿔놓고 있다. 한때 미덕처럼 여겨지던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 후순위로 밀리고 열심히 일하는 분위기가 짙어졌다.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주 6일 일한다는 뜻의 '996 근무'를 채택하는 기업들이 생겨나고 있다. 일부 빅테크는 '창업자 모드'를 선언하고 업무 강도를 높였다. 핵심 엔지니어들이 특정 시기 '24시간 대응 체제'에 돌입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뉴욕타임스는 “실리콘밸리에 '허슬(hustle)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고 평가했다. 중국 상황도 다르지 않다. AI 역량 개발을 기치로 내건 첨단 기업들을 중심으로 직원들에게 고강도 노동을 독려한다. '996 문화'의 원조가 중국이다. 유명 기업인들이 공식석상에서 “집에 안 갈 각오를 하라"는 말을 할 정도다. AI가 산업 지형도를 바꾸면서 기업 문화도 다시 속도와 성과 중심으로 재편되는 모습이다. 기술 패권 경쟁은 자본 싸움이면서 동시에 시간 전쟁이다. 한 분기 늦으면 시장을 내주고, 한 세대 뒤처지면 격차를 좁히기 어렵다. 미국과 중국 기업들이 인력과 자본을 총동원해 속도를 끌어올리는 이유다. 우리나라는 달라 보인다. 특히 '산업의 기둥'이자 AI 첨병인 반도체를 둘러싼 제도 개편 논의가 제자리걸음이다. '반도체 특별법'이 국회 문턱을 넘긴 했지만 연구개발 인력의 근로시간 특례를 담은 이른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조항이 빠진 반쪽짜리다. 무작정 장시간 노동을 옹호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반도체 공정 개발과 AI 반도체 설계처럼 집중 투입이 불가피한 분야에 대해 산업 특성에 맞는 유연한 제도를 설계하자는 요구다. 우리 정치권 내 논의는 노동권 후퇴냐 아니냐의 이분법에 갇혀 있다. 반도체 호황은 우리에게 분명 기회다.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AI 수요 확대로 국내 기업들이 수혜를 보고 있다. 그렇다고 이 흐름이 영구적 우위로 이어진다고 단정하긴 어렵다. 글로벌 수요 확대라는 구조적 요인이 큰 만큼 기술 격차를 벌릴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다. 경쟁국이 총력전을 펴는 사이 우리는 제도 논쟁에 머문다면 차이는 순식간에 좁혀질 수 있다. 노동계의 우려도 경청할 대목이 있다. 보상과 안전장치 없이 노동시간만 늘리는 방식은 해법이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전면 완화가 아니라 정밀한 설계다. 연구개발 고소득 직군에 한해 자율과 책임을 강화하고, 성과 보상과 연동하는 특례 모델 등을 고민할 수 있다. 시장의 시계는 국회의 속도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AI 시대 기술 전쟁에서 가장 비싼 자원은 시간이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전장 한복판에 서 있다. 여헌우 기자 yes@ekn.kr

[EE칼럼] 유럽의 기술 중립성은 정책의 후퇴인가 진화인가?

“클린 디젤"은 유럽의 자동차 제조사로부터 만들어진 마케팅 브랜드와 같은 거였다. 디젤 엔진은 연료와 산소의 혼합공기를 고압축하여 자체 발화 폭발시키는 방식(기체는 압력이 높아지면 온도가 높아지므로)으로 엔진을 기동한다. 혼합공기를 점화플러그로 발화 폭발시키는 휘발유 엔진과 비교할 때 엔진 구조가 무거워 폭발음이 크고 둔탁하다. 기동 토크가 커서 화물차나 탱크 등 고하중 수송 차량에 적합하나 배기가스에서 미세먼지와 질소산화물(NOX)이 배출되어 대기 환경 면에서 단점이 커서 도시용 승용차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유럽 정부의 기후변화대응 정책은 대기오염 물질 보다는 이산화탄소가 더 중요하게 다루어졌었고 이에 유럽 자동차 제조사들은 디젤 엔진이 연료 효율이 높아(휘발유 엔진 대비 20∽30% 유리)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적다는 것을 근거로 친환경 엔진임을 주장했다. 디젤 엔진은 독일인에 의해 개발된 것이고 기술 경쟁력도 높았기 때문에 유럽 국가들은 디젤 자동차에 대한 세제 혜택을 마련하며 보급 지원을 했었다. 독일과 프랑스 자동차 회사들이 디젤 엔진의 대기오염 물질 방출과 엔진 소음을 최소화하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엔진 자체의 구조적 특성으로 인해 이 처리 기술들은 한계가 있어서 여전히 시끄럽고 승차감이 좋지는 않았다. 클린 디젤이라는 언어의 마술과 정부의 세제 혜택으로 인한 경제성은 소비자의 선택을 높이는데 기여를 했다. 그 결과로 2010년대 초반까지 유럽의 디젤 자동차 보급율은 60%에 가까웠다. 그러나, 2015년 디젤 게이트 사건으로 독일 제조사는 법적 제재와 사회적 비난을 받으며 시장에서 퇴출되기 시작하였다. 디젤 게이트 이후 유럽 정부는 이산화탄소 감축을 위해 이번에는 연소 엔진 퇴출과 전기차 보급 사업으로 급전환을 하였다. 그러나, 유럽 내의 자동차 제조사들은 전기차 기술을 개발하는데 속도가 늦어졌고 한국과 중국산 전기차에 시장을 잠식당하기 시작하였다. 독일 대표적 자동차 제조사인 폭스바겐의 공장들이 문을 닫으면서 산업 경쟁력 상실이 국가 경제 위기로 악화되는 심각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최근 유럽 정부는 그동안은 어떤 특정한 기술을 선택해서 보급 촉진 사업을 하였으나 이제는 어떤 기술이라도 탄소 감축 성능을 확보한다면 인정하겠다는 방향으로 변경하고 있다. 유럽 정부는 이를 기술 중립성이라고 하고 시장에 의해 선택되도록 하는 유연한 접근법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기술 중립성은 건물 부문에서도 적용되어 가스보일러 퇴출과 히트펌프의 보급 촉진 정책으로 진행하다가 다양한 기술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유럽 정부의 기술중립성은 원칙적으로 당연한 것이었는데 어째서 애초부터 그런 유연성을 취하지 못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디젤 엔진, 전기차. 히트펌프의 기술적 한계는 엔지니어들이 제기를 했었던 것이고 시장의 상황도 만만치 않았음은 예측되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2000년대 초 유럽 정부는 정책적 성과에 조급했었고 정책이 시장을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넘쳤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기존의 산업적 유리함을 활용하려고 할 뿐 혁신없는 안일함이 있었다. 자만감과 안일함은 대중의 신뢰를 잃어버리게 하였고 정치적 반대파들은 그 부문을 집요하게 공격하고 있다. 독일 극우 정당은 신규 풍력 발전의 허가 반대뿐만 아니라 현재 운영 중인 풍력발전기까지도 전면 철거를 2025년 총선에서 공약으로 내세웠고 미국의 트럼프 정부는 “기후변화는 사기다."라며 미 행정부 내의 기후 변화 관련 연구 및 사업 예산을 없애버렸다. 이제야 기술 중립성을 정책 카드로 내세운 유럽 정부의 결정이 유연한 접근이라고 긍정적으로 볼 수 있으나 일련의 과정을 보면 정책 실패에 대한 인정이라고 보는 편이 더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은 앞으로도 계속 지게 될 것이고 새로운 방향은 새로운 정치 세력에 의해 설계되고 이끌어 가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한국이 유럽 국가들의 정책을 참고하면서 열심히 따라왔었는데 선도자가 수렁에 빠진 것을 보게 되었다. 이제 스스로 좌표를 잡고 가는 방향을 잡아야 할 때가 온 것이라면 수렁을 회피하고 갈 수 있을 것이다. 언어의 마술사가 아닌 혁신을 위한 도전을 기꺼이 감수하는 자만이 시장을 지배할 수 있다는 교훈이 유럽이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이지 않을까 한다. bienns@ekn.kr

[김병헌의 체인지] 장동혁, 보수의 이름으로 보수를 허무는가

정치는 신념의 언어로 자신을 포장하지만, 실제로는 권력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다. 위기에 처한 정치인일수록 '원칙'과 '법치'라는 단어를 전면에 내세워 지지층을 결속하려 한다. 그러나 그 원칙이 공동체를 향한 것인지, 아니면 개인의 정치적 생존을 위한 것인지는 결국 태도와 책임에서 드러난다. 보수를 자임하면서도 보수 여론을 자극하는 정치인일수록 표현은 단정하고 논리는 간결해 보인다. 하지만 그 속을 들춰보면 정작 감당해야 할 책임은 희미해지고, 주장과 현실 사이의 간극만 또렷해진다. 최근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의 발언이 그렇다. 그는 윤석열 전 대통령의 내란 우두머리 혐의 1심 무기징역 선고를 두고 “아직 1심에 불과하며 무죄 추정의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이른바 '윤어게인' 세력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당 안팎의 요구를 '당을 분열시키려는 시도'라고 규정했다. 표면적으로는 법치주의를 강조하는 듯 보이지만, 그 논리는 스스로 충돌한다. 무죄 추정은 형벌을 확정하기 전까지 피고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사법 절차상의 원칙이다. 그러나 정치의 영역에서는 법적 유·무죄와 별개로 책임의 무게를 따져야 한다. 특히 1심에서 중형이 선고된 사안이라면, 정당 지도자의 언어는 사법 판단을 존중한다는 입장과 함께 국민에게 책임 있는 자세를 보이겠다는 다짐이 우선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이번 발언은 결과적으로 사법 판단의 의미를 축소하고, 강성 지지층의 감정을 의식한 메시지에 더 가까웠다. 법원을 존중한다고 말하면서도 그 판단의 권위를 흔드는 듯한 태도는, 보수가 강조해온 책임 윤리와 거리가 멀다. 보수 정치가 오랫동안 내세워온 가치는 질서와 절제, 그리고 결과에 대한 책임이었다. 그러나 내부 비판을 '적대 세력'으로 규정하는 순간, 정당은 스스로 토론과 성찰의 통로를 좁힌다. 비판을 차단한 조직은 외부와의 경쟁에서도 유연성을 잃는다. 자기 교정 능력을 상실한 보수는 더 이상 가치 공동체가 아니라, 특정 인물과 노선을 방어하는 집단으로 축소될 위험이 크다. 세계 정치사에는 이런 길의 말로가 적지 않았다. 일본의 사회당은 냉전 이후에도 이념적 순혈주의에 갇혀 현실 감각을 잃었다. 안보 현실과 중도 유권자의 변화를 외면한 채 강성 지지층의 언어에 매달렸다. 결과는 몰락이었다. 장기 집권의 상징인 자유민주당이 아니라, 분열과 해체의 길을 걸은 쪽은 사회당이었다. 스스로 외연을 차단한 대가였다. 영국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강경 브렉시트 노선에 사로잡혔던 보수당은 내부 극단주의와 리더십 혼란 속에 신뢰를 잃었다. 당권을 쥔 지도자들이 당내 강경파의 눈치만 보다 중도층을 떠나보낸 결과, 총선 참패라는 혹독한 심판을 받았다. 보수의 이름으로 보수의 기반을 허무는 자해적 선택이었다. 지금 장 대표의 행보는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 그는 '윤과의 절연'을 거부함으로써 강성 지지층의 박수를 얻을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대가로 중도층은 더 멀어진다. 이미 흔들리는 지지율, 수도권 민심, 청년층 이탈은 경고등이 켜진 지 오래다. 그럼에도 그는 '갈라치기 세력'이라는 낙인으로 내부 쇄신 요구를 봉쇄하려 한다. 이것이 과연 보수 재건의 전략인가, 아니면 차기 권력 지형에서 자신의 입지를 계산한 정치적 셈법인가. 정당은 특정 인물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중형이 선고된 전직 대통령과 운명공동체를 자처하는 순간, 당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묶인다. 정치적 판단이 끝난 사안을 '무죄 추정'이라는 법률 용어로 덮으려는 태도는, 법의 권위를 빌린 정치적 방어에 불과하다. 이 길의 끝은 뻔하다. 보수의 외연 은 축소되며 정치 지형도 기울기가 심화한다. 견제받지 않는 여당은 오만해지기 쉬워질수 밖에 없다. 보수의 공멸은 보수만의 비극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균형추를 무너뜨리는 국가적 손실이다. 지도자의 언어는 당장의 환호가 아니라, 내일의 책임을 향해야 한다. 장동혁 대표가 끝내 깨닫지 못한다면, 역사는 냉정하게 기록할 것이다. 보수를 살리겠다던 지도자가, 보수의 숨통을 조였다고. 그리고 그 후과는 국민 모두가 치르게 될 것이다.

[이슈&인사이트] 법 앞에 선 관세의 좌절, 멈추지 않는 보호무역의 파고

2026년 2월 20일, 미연방대법원은 6대3으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국제긴급경제권한법(IEEPA)을 근거로 부과한 이른바 '상호관세'를 위법이라고 판시했다. 비상경제권한은 외환통제와 자산동결 등 긴급조치에 한정되는 것이지 광범위한 관세 부과라는 사실상의 조세권 행사까지는 허용하지 않는다는 취지이다. 이로써 관세주권이 의회에 귀속된다는 헌법적 원칙이 재확인된 동시에 “미국은 전 세계와 전쟁 중이 아니다"라는 다수 의견의 문구를 통해 트럼프 행정부 통상정책에 한계를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 통상정책에 대한 판결로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였다고 보기엔 이르다. 우리경제에 일시적 안도가 될 수는 있지만, 이로써 폭풍이 멎었다기보다, 오히려 미정부의 보호주의무역 정책의 방향이 선회하였다 신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미연방대법원은 판결에서 IEEPA가 무제한적 세금부과를 위한 수단은 아니며, 국가안보나 국제수지 위기라는 엄격한 요건과 직접적 연계가 필요하다고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이에 곧장 '플랜B'로 대응하며 태세전환을 꾀하고 있다. 무역법 122조(국제수지 위기 대응)를 근거로 10~15%의 '글로벌 관세' 부과 행정명령에 곧바로 서명하며 우회경로로 선회한 것이다. 이로써 통상정책의 폭풍은 '법적 근거'의 정당성 다툼에서 '장기적 법정 공방'과 '입법·행정의 우회 전략'의 제2라운드에 돌입하였을 뿐이다. 다시 말해, 관세와 무역통상정책의 불확실성이 사라진 것이 아니며 그 형식적인 모습만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산업별 영향은 명암이 교차할 것이다. 반도체·화학·제약은 상호관세가 무효화 된에 따라 단기적으로 비용절감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 15% 수준의 관세가 10% 이하로 낮아질 경우 가격경쟁력 회복과 마진 개선이 동시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대미수출 비중이 높은 메모리 반도체와 배터리 등 특수화학 소재 기업에는 실적이 개선되는 가시적 효과가 있을 수 있다. 다만 이러한 효과가 '상호관세'에 한정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자동차와 철강은 여전히 무역확장법 232조에 따른 안보관세의 틀안에 묶여 있다. 이러한 품목별 관세부과가 지속되는 한, 완성차와 고급 강재를 생산하는 산업에 나타날 실익은 매우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또 다른 변수는 관세환급(refund)의 이슈다. 전 세계적으로 이미 납부된 관세가 약 2,500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는 가운데, 미정부를 상대로 관세를 소급하여 환급해달라는 소송이 본격화될 가능성이 있다. 여기에서 계약조건이 이슈가 될 것이다. 즉 DDP(관세지급인도) 방식으로 수출한 기업은 관세를 직접 부담했을 가능성이 크고, FOB 조건 기업은 수입자가 부담했을 여지도 있다. 따라서 환급소송에 승소하였을 경우에도 환급의 청구주체와 회계처리, 세무상 이익귀속 문제까지 복합적인 문제가 얽히게 되어 실효성을 가능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약속도 이번 판결을 통해 시험대에 올랐다. 일각에서는 “위법한 압박에 의한 합의"라는 명분론을 제기하지만, 국가 간 신뢰를 기반으로 한 장기협력의 틀을 훼손할 경우 우리가 감당해내야할 후과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이에 우리정부는 기존 약속은 원칙적으로 이행하되, 투자의 이행 속도와 그 방식측면에서 유연한 전략을 취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번 투자는 장기에 걸쳐 이루어져야 하므로, 이를 협상 카드로 적극 활용하여 세제 등에서 인센티브를 확보하는 한편, 미국에 투자하는 기업에 대한 보조금 확대, AI 등 기술협력 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방안을 통해 실리적인 외교를 추구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일본과 EU 역시 유사한 법적 대응을 검토할 것이므로 해당 국가의 정부와의 공조를 통한 다자 압박을 병행하여 우리에게 최대한 유리하게 협상을 이끌어가는 방안도 검토해볼 수 있다. 결국 통상전략은 기존과 달라진 것이 없다. 관세장벽은 낮아진 것이 아니라 명분의 측면에서 형태를 바꿨을 뿐이다. 이번 미연방대법원의 판결을 레버리지 삼아 우리는 새로운 균형점을 모색하되 전략적 인내는 여전히 요구되며, 이러한 환경에서 우리는 더욱 정교한 협상방안을 강구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법의 그림자가 멈춘 지점에서 치열한 외교전략이 태동해야 할 시점이다. bienns@ekn.kr

[EE칼럼] 용인 반도체 산단 이전 토론회의 발전을 위한 제언

여러 단체가 최근 용인 반도체 산업단지 이전을 주장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기후생태연대는 '서남권 RE100 산단과 기업 유치'라는 주제로 꾸준히 토론회를 진행하고 있다. 필자는 산업단지 이전 논의에 관심을 갖고 지난해 9월 첫 토론회를 직접 참관한 데 이어, 지난 11일 열린 3차 토론회는 유튜브로 시청했다. 이번 3차 토론회는 1차 때보다 발표자의 전문성이나 토론 내용의 객관성이 돋보였다. 이는 토론 문화의 바람직한 진화이며 필자 또한 배울 점이 많았다. 앞으로 이 토론회가 더욱 생산적인 논의의 장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몇 가지 의문점을 공유하고자 한다. 토론회의 전체적인 기조는 다음과 같다. 우선 서남권의 풍부한 재생에너지를 수도권으로 송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따라서 초고압직류송전(HVDC) 망이 필수적인 용인 반도체 산단 조성 사업이 착공 단계에 이르렀음에도 이를 중단하고 호남으로 이전해야 한다. 이를 통해 국토 균형 발전과 탄소중립 달성을 동시에 앞당길 수 있다. 필자는 이미 진행 중인 국책 사업을 이전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큰 무리수라고 생각하지만, 향후에 진행될 신규 사업을 염두에 둔 주장이라면 이렇게 제언할 수 있고 또 경청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이 든다. 이번 3차 토론회에서 한겨레신문 곽정수 기자의 발표는 매우 중립적이고 실사구시적인 주장이어서 자칫 한쪽으로 쏠릴 수 있는 토론회의 중심을 잡아주었다. 그는 사회적으로 찬반 양론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는 '산단 이전 논쟁'에 대해 쟁점별로 문제점을 지적했다. 용인 산단 유치를 '고수'하는 자들에겐 송전망 반대 여론을 고려했을 때 전력 공급이 가능한지 물었다. '이전'을 주장하는 자들에겐 용수, 부지, 정주 여건 등 산단의 적합성과 재생에너지 이용에 따른 ESS 등 막대한 투자 부담을 지적했다. 그리고 '정치권'에 대해서도 정치 논리를 앞세운 소모적 공방은 국익에 도움도 안 되고 오히려 유치에 불리할 수도 있다면서 후보지가 갖춰야 할 유치 조건 확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에 대해서도 일관성없는 발언으로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면서 기업들이 후보지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편 이날 토론회의 주요 포인트는 질의응답에서 나왔다. 토론회 말미에 발언권을 얻은 한 청중이 “데이터센터나 반도체 공장은 365일, 24시간 가동해야 하는데 장마나 태풍으로 7일 이상 재생에너지 공급이 안 될 경우 대응방안은 무엇이냐?"고 질문했다. 이에 대해 전력계통 전문가인 동신대 이순형 교수는 “ESS 등으로 대응하는 것은 한계가 있으므로 원전이나 중부지역에서 갖다 쓴다"고 답변했다. 이 교수는 본인 발표 시에는 전력 측면에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고 발언했기에 이 부분이 의아했다. 필자가 듣기에 타 지역으로부터 전기를 받아쓴다는 이 교수의 답변은 산단 이전론 측의 핵심 주장인 'HVDC가 불가능하므로 산단을 이전해야 한다' 라는 논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발언으로 들렸다. 삼프로TV에서 운영하는 언더스탠딩 유튜브 채널의 올해 1월 14일자 '전기 남는 호남? 삼성·SK 못 가는 이유' 방송에서 김상훈 기자는 “반도체 산단이 호남으로 내려가도 동해안에서 끌어오는 송전망이 필요하다. 물리적 거리도 비슷하다"라고 한 발언이 상기되었다. 즉, 용인 반도체 산단 정도의 전기 수요는 어디를 가나 추가적인 송전망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본질적인 의문이 사라지지 않는다. 1차, 3차 토론회 어디에도 토론회의 전제인 'RE100 산단'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없다. 마찬가지로 이 토론회의 공동주최자이기도 한 김원이 의원이 대표 발의한 '재생에너지자립도시 조성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안'에서도 RE100 산단에 대한 구체적인 정의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제2조 용어 정의에서 ““재생에너지자립도시"란 재생에너지의 생산과 소비가 연계·순환될 수 있도록 전력의 생산·공급기능과 이를 활용하는 산업·정주 기능을 집적하기 위하여 지정·고시된 구역“으로 명시되어 있는데, 이는 엄밀한 정의와는 다소 거리가 멀다. 또한 이렇게 지정된 구역에는 독점적 허가를 받은 사업자만이 전력거래소를 거치지 않고 재생에너지 공급이 가능하다고 법안은 적고 있다. 현 시점 (2월) 기준 SMP가 110원대, REC 가격이 70원대(1kWh 기준)인 상황에서 재생에너지 PPA 가격 역시 SMP + REC 가격을 추종하는 흐름이다. 결국 RE100 산단의 전력 단가는 현재에도 산업용 을 가격 대비 메리트가 적고, 이후 서남권 해상풍력 전기가 공급되는 것을 가정하면 해상풍력의 높은 LCOE 때문에 오히려 한전이 공급하는 전기요금보다 큰 폭으로 높아질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전기요금으로 어떻게 유치 기업의 경쟁력을 보장할 것인지 가늠이 어렵다. 이외에도 크고 작은 논의점이 많았지만 전반적으로 이번 3차 토론회는 유익한 내용이 많아 다음 토론회를 기대하게 했다. 추후 논의에서는 '송전망 증설 필요성,' 'RE100 산단의 구체적인 정의,' '전력 단가' 등과 관련된 의문점이 보다 해소되고, 더 계량화된 데이터와 더 구체적인 대안과 일정을 가지고 토론하는 자리가 되면 좋겠다. bienns@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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