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국은 북극항로의 아시아 첫 관문, 에너지 허브 기회”

[인터뷰] “한국은 북극항로의 아시아 첫 관문, 에너지 허브 기회”

기후변화로 북극해의 빙하가 녹으며 북극항로가 열리고 있다. 북극항로는 한국에 아주 특별한 기회를 선사하고 있다. 한국 등 아시아 국가들은 유럽으로 수출하기 위해 남중국해, 말라카해협, 수에즈운하를 거쳐 약 2만km를 가야 한다. 하지만 북극항로를 이용하면 동북아 국가들의 경우 1/3이 줄어든 1만5000km면 갈 수 있다. 세계 최대 제조지역과 세계 두 번째 경제지역과의 만남은 그만큼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의 발전을 이끌 수 있다. 한국은 북극항로에서 아시아 지역의 첫 번째 관문에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점은 무..

[김병헌의 체인지] 대통령, 반도체 앞에서 원칙을 묻다

금산분리는 한국 경제의 오랜 원칙이었다.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과 금융 지배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기능해 왔다. 쉽게 손대기 어려운 규범으로 인식돼 왔지만 반도체와 AI 같은 첨단산업의 시간표 앞에서 이 원칙은 점점 현실과 어긋나기 시작했다. 수십조 원이 단번에 투입돼야 하는 산업에서 투자 시기를 놓치면 기술 격차는 순식간에 벌어진다. “돈을 벌어서 투자하려면 장비를 들여오고 세팅하는 데만 3년이 걸린다"는 곽노정 SK하이닉스 사장의 말은, 기업의 이해관계를 넘어 산업의 속도가 얼마나 빨라졌는지를 보여주는 현실 진단이었다. 지난 10일 열린 '인공지능(AI) 시대의 K-반도체 비전과 육성전략 보고회'에서 곽 사장이 대규모 반도체 투자를 가로막는 금산분리 규제를 언급하자, 이재명 대통령은 원칙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방향을 틀었다. “일리가 있다"는 대통령의 한마디는 정치적 수사라기보다 현장을 전제로 한 실질적 판단이었다. 대통령은 규칙을 지키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 산업은 멈출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정확히 짚었다. 최근 이 대통령의 정책 기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념이나 진영의 언어보다 지금 무엇이 국가 경쟁력에 도움이 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원칙은 지키되, 원칙이 만들어진 목적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면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자세다. 금산분리라는 오래된 규범 앞에서 대통령이 던진 질문은 단순했다. 지금의 규제가 독점을 막고 있는가, 아니면 첨단산업의 발목을 잡고 있는가를 물었다. 대통령의 생각은 간단명료하면서 단순했다. 독점을 막기 위해 만든 제도가, 오히려 산업 발전을 가로막는다면 손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해법은 유연하게 '예외적 완화'다. 반도체라는 국가전략산업에 한해, 지주회사 증손회사 지분율을 100%에서 50%로 낮추고 외부 자본을 끌어올 수 있게 하자는 구상이다. 원칙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목적에 맞게 조정하는 선택이다. 새로운 실험은 아니다. 미국 인텔은 이미 글로벌 자산운용사 브룩필드와 합작사를 만들어 반도체 팹 투자를 진행했다. 인텔이 경영권을 유지한 채 외부 자본을 활용한 구조다. 일본 역시 정부와 민간 금융이 함께 반도체 산업을 떠받치고 있고, 대만 TSMC는 글로벌 금융시장을 적극 활용해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국가가 직접 보조금을 쏟아붓기 어려운 우리의 현실에서, 규제 완화는 '돈 안 드는 산업정책'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우려가 없을순 없다. 핵심 사업을 분리해 외부 투자를 받을 경우, 주주 이익이 희석될 수 있다는 지적은 결코 가볍지 않다. 과거 LG에너지솔루션 분사 당시의 논란이 다시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다. 특정 기업, 특히 SK하이닉스를 위한 '맞춤형 정책' 아니냐는 시선마저 존재한다. 이 지점에서 대통령의 실용주의는 다시 한 번 시험대에 오른다. 이 대통령은 모든 완화를 공정위 심사와 승인이라는 안전장치 안에 두겠다고 했다. 무제한 특혜가 아니라, 관리 가능한 범위에서의 '개방'이다. 삼성전자가 이미 누리고 있던 구조적 자유를 SK하이닉스도 가질 수 있게 하자는 점에서, 역차별 해소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갖는다. 최근 미국에 원자력 잠수함 건조 협력을 요청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과거 보수 진영의 의제로 여겨졌고, 동시에 진보 진영에서 경계하던 사안이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보수가 원해온 요구도, 보수가 반대해온 영역도 동시에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태도. 이재명식 실용주의의 핵심이다. 정치는 선택의 예술이다. 모든 원칙을 지키면서 모든 성과를 얻을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조정하느냐다. 반도체는 단순한 산업이 아니라, 안보이자 미래 성장의 축이다. 그 사실 앞에서 대통령은 규칙을 신성불가침의 성역으로 두지 않았다. 이재명식 실용주의는 단기 성과보다 장기 경쟁력을 본다. 이번 금산분리 예외 완화는 그 철학이 구체적 정책으로 드러난 사례다. 논란은 남겠지만, 변화는 시작됐다. 그리고 지금 한국 경제에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변화다.

[이슈&인사이트]이재명 대통령 발언과 한국식 라이시테의 시작

한국 정치의 무대에서 “정교분리"라는 단어가 다시 전면에 등장했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불법 종교단체는 해산해야 한다"고 언급한 것은, 단순한 원칙 확인 이상의 정치적 신호다. 한국 사회의 갈등 지형—특히 특정 종교 세력이 정치·행정의 영역에 사실상 영향력을 행사해온 지난 수년간의 풍경—을 고려하면, 이 발언은 프랑스의 라이시테(laïcité) 개념과 비교했을 때 더 분명한 의미를 갖는다. 프랑스식 라이시테는 흔히 “세속주의"로 번역되지만, 그 본질은 종교를 배척하는 국가가 아니라 종교를 우대하지도, 종속되지도 않는 공화국을 만드는 데 있다. 1905년 제정된 '교회와 국가 분리법'은 두 가지 원칙에서 출발한다. 하나는 양심의 자유, 즉 믿을 자유와 믿지 않을 자유를 동등하게 보장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의 중립성, 즉 국가는 어떤 종교에도 급여를 지급하거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원칙은 단순한 제도 설계가 아니라, 프랑스가 오랫동안 교권과 맞서 싸우며 쌓아온 역사적 축적의 결과이다. 왕정과 가톨릭의 동맹 속에서 억압되고 배제된 시민사회가, 공화국의 이름으로 종교적 권력을 정치의 바깥으로 밀어낸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라이시테는 언제나 정치적 장치이자 사회적 투쟁의 결과였다.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을 이 프랑스적 맥락에 비추어 보면, 그것은 한국식 라이시테의 가능성을 시험하는 첫 장면처럼 보인다. 한국은 헌법에 이미 “정교분리"가 명시돼 있지만, 실제로는 특정 종교가 정치 네트워크, 복지사업, 언론, 그리고 선거 과정에서 비공식적 영향력을 행사해온 것이 공공연한 현실이었다. 정교분리는 선언되었으나 제도적 관철은 이루어지지 않은, 말하자면 비완성의 공화국이었던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언급은 바로 이 지점을 겨냥한다. 한국적 맥락에서 정교분리는 더 이상 추상적 원칙이 아니라, 정치·행정의 투명성, 시민의 평등권, 국가 권력의 독립성을 둘러싼 실질적 문제의 한가운데에 자리한다.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시민의 자유를 종교적 영향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것이다. 이는 프랑스 라이시테가 과거 교황권의 정치 간섭을 차단하며 공화국을 재건했던 과정과 겹쳐 보인다. 그러나 프랑스의 사례가 말해주듯, 정교분리는 법률 조항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라이시테는 1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논쟁적이다. 무슬림 여성의 히잡 착용 문제, 학교에서의 종교 상징 문제, 정체성 정치에 종교가 결합하는 극우의 전략 등, 라이시테는 계속해서 재해석되고 쟁점화된다. 국가의 중립성은 언제나 새로운 사회적 균열 앞에서 다시 시험대에 오른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은 선언적 의미를 넘어, 한국 정치에 내재된 종교 권력의 비공식 네트워크를 어떻게 투명화하고 해체할 것인가라는 구조적 질문을 던진다. 정교분리란 단지 국가가 종교를 통제하거나, 종교 활동을 공적 공간에서 제한하는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종교로부터 자유로운 정치, 그리고 역으로 정치로부터 자유로운 종교를 보장하는 민주주의의 기본 장치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직면한 문제는 특정 종교 세력이 정치 권력과 결합하여 형성한 비가시적 영향력, 즉 종교적 사적 권력이 민주주의의 공적 영역을 침식해온 오랜 구조다. 이 지점에서 대통령의 발언은 공화국적 의미를 갖는다. 그는 프랑스의 1905년 법이 그랬던 것처럼, 종교와 국가 사이의 새로운 경계 설정을 요구하는 시대적 압력을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한국식 라이시테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질문해야 한다. 그것은 프랑스의 모델을 단순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역사적 조건 속에서 국가 권력과 종교 권력 사이의 균형을 재구성하는 일이다. 한국 사회는 종교 다원주의와 시민권의 확대 속에서 새로운 정교관계를 모색해야 한다. 프랑스의 라이시테가 120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정교분리는 완결된 제도가 아니라, 지속적 실천의 과정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은 그 시작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선언이 공화국의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는 이제 한국 시민사회와 정치가 어떤 실천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성일권

[EE칼럼] 탄소중립의 핵심 기술, 국내 CCS를 더 이상 방치하지 마라

전 세계적으로 반복되는 기후재난과 이로 인한 피해는 날로 증가하고 있다. 기후변화는 지구의 나이 약 46 억 년 동안 자연스럽게 발생하고 있다. 10만 년 주기로 이산화탄소 농도 변화와 지구 온난화 현상이 반복되고 있다는 과학적 증거도 존재한다. 일부에서는 기후변화는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산업화 이후 폭발적인 화석연료 사용 증가로 인한 탄소 방출의 급증도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범지구적인 2050 탄소중립 정책이 성공하면 정말로 기후변화가 멈출 것인지에 대한 과학적 다툼과 찬반은 뒤로 하고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에너지전환으로 탄소 방출을 줄이는 것이다.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탄소중립의 길은 어렵고 멀지만 꼭 가야 하는 길인데 우리의 발걸음은 여전히 잰걸음에 불과하다. 탄소중립을 위해서는 에너지 효율 향상을 통해 에너지 사용량을 줄이거나, 원전 또는 수소와 같은 저탄소 에너지원으로 에너지전환을 실행하고, 또한 산업체에서 발생되는 이산화탄소를 포집하여 지층에 저장하거나 유용한 물질로 전환하여 재활용하는 이산화탄소 포집-활용-저장(CCUS, Carbon Capture, Utilization, and Storage)기술을 활용해야한다. 에너지전환은 국민 경제 및 국가 산업 문제와 에너지 인프라 구축 등의 문제로 장기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반면에 당장 활용이 가능한 방법은 이미 전세계적으로 검증되고 활용 중인 CCS 기술이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50개의 CCS사업이 운영 중에 있다. 2030년에 4억 톤, 2050년엔 10억 톤 저장을 목표로 북미와 유럽 지역에서 활발히 추진되고 있다. 탄소중립의 선두 주자인 노르웨이의 탄소중립 실천 과정을 보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노르웨이는 북해에서 석유 하루 200만 배럴를 생산 중이며 가스를 포함하면 석유환산으로 약 385만 배럴 규모를 생산하고 있는 산유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부터 35년 전인 1991년에 탄소세를 도입하여 꾸준히 탈탄소 정책을 추진한 결과 대표적인 유럽의 탄소저장 허브 국가로 자리매김하였다. 인구 500만인 이들은 어떻게 과감한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을까? 먼저 꾸준히 캐시카우(Cash Cow) 역할을 하는 북해의 유전으로부터 확보된 자금으로 장기적인 에너지전환 부문에 투자가 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국가 에너지원 믹스를 살펴보면 재생에너지 비율이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전력의 90% 이상을 수력이 공급하고 있어 풍력을 포함하면 전력의 100% 가까이 신재생 에너지로 공급이 가능한 국가이다. 즉, 풍부한 신재생에너지원과 막대한 자금의 바탕 위에 탄소세와 같은 정부 정책이 함께 작동되었기 때문에 탄소중립의 선두 주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비교하면 한국은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다. 2025년 한국의 상황은 어떤가? 한국 정부도 여러 차례에 걸쳐 청사진을 발표했다. 2010년 계획에는 CCS를 통해 2030년까지 연간 3천만 톤을 감축하겠다는 내용이었다. 2023년 계획에서는 2030년까지 연간 5백만 톤, 2050년에 약 5천만 톤을 감축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한국은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아직 시작도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국내에서 첫 번째 CCS 저장소로는 생산이 종료된 동해-1 폐가스전이 검토되고 있지만 몇 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2030년 목표를 맞추려면 1백만 톤 규모의 저장소가 5개 필요하고 2050년 목표를 맞추려면 1백만 톤 규모의 저장소가 50개 이상이 준비되어야 한다. CCS 사업도 자원개발처럼 지하의 저장소를 찾아서 주입 설비를 건설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적어도 5년~10년 전에 미리 준비를 해야한다. 실행력 없는 계획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언제까지 계획만 수정하며 시간을 보낼 것인가? 신현돈

[데스크칼럼] 탄소중립, 전기화가 능사는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탄소중립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당선 이후 이를 실천하기 위해 환경부와 산업통상자원부의 에너지 부문을 합친 기후에너지환경부를 출범시켰다. 그리고 초대 장관에 환경 및 에너지에 관심이 많던 김성환 국회의원을 임명했다. 김성환 장관이 이재명 정부의 핵심 탄소중립 설계자이자 총책이라 할 수 있다. 김 장관의 탄소중립 실현 방식은 명확해 보인다. 재생에너지 보급 확대를 통한 전기화이다. 그는 장관 후보 시절 언론에 “화석연료가 아닌 재생에너지를 기반으로 모든 것을 다 전기화해야 한다. 탄소 문명에서 탈탄소 문명으로 전환하는 문명사적으로 중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지난 10월 1일 기후에너지환경부 출범식에서는 “내연기관 자동차뿐만 아니라 건설기계 · 농기계 · 선박 등 모든 동력기계를 전동화하고 도시가스 대신 전기로 열을 생산하는 히트펌프, 제로에너지빌딩 확산 등 건물 부문 탈탄소 전환도 적극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이후 김 장관은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100GW 보급(현 35GW 보급), 도시가스가 아닌 전기로 열을 공급하는 공기열 히트펌프 지원책 마련 등 본격적인 전기화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이를 지켜보는 에너지업계의 시선에는 우려감이 한가득이다. 실현 가능하지도 않고, 그럼에도 이를 독단적으로 밀어부칠 경우 에너지안보에 심각한 구멍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100GW를 보급하려면 향후 일년에 15GW씩, 5년동안 75GW를 구축해야 한다. 시간도 많지 않아 대부분 태양광으로 공급해야 한다. 태양광 1GW에 필요한 면적은 대략 축구장 600개 정도다. 우리나라에서 축구장 600개 면적의 태양광 발전소를 일년에 15개씩, 5년동안 구축한다는 게 가능할까? 총 에너지 수요에서 전기화 비중이 급격히 높아지게 되면 그만큼 피크 전력도 높아져 더 많은 발전용량이 필요하다. 현재 한겨울 난방으로 인한 피크 전력은 80GW에서 많을 때는 90GW를 넘는데, 여기에 전기모빌리티 비중이 더 높아지고 전기 열까지 더해지면 피크 전력은 120~130GW를 훌쩍 넘을 수 있다. 태양광과 풍력 발전의 계통 접속을 받아주기 위해 원전, 석탄, LNG 발전의 비중이 축소된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자연현상으로 재생에너지 발전이 갑자기 사라지게 된다면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대혼란에 빠지게 된다. 그 짧은 시간에 재생에너지 발전 공급량을 대체할 수 있는 자원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일각에서는 AI로 전체 전력 시스템을 통제한다면 가능할 수 있다는 이론적 반론도 있다. 그러나 내로라하는 통신사, 유통사들이 해커조직에 여지없이 뚫리고 있는 현실을 보고 있자면 전력 시스템의 AI화는 국가안보에서 가장 핵심인 에너지 시스템을 적에게 통째로 내주는 최악의 쥐구멍이 될 수도 있다. 에너지 전문가들은 탄소중립을 위해 전기 에너지만 고집할 게 아니라 가스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가스 에너지는 다른 화석연료보다 탄소와 배출먼지가 적게 발생해 전환기연료 또는 브릿지연료로 불리며, 탄소포집저장활용(CCUS) 등 미래 기술과 접목하면 충분히 탄소중립연료로도 전환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전국 곳곳에 6만km가 넘는 가스배관이 깔려 있어 '제2의 에너지 고속도로'가 구축돼 있는 셈이다. 대외 여건도 가스에너지에 유리하게 조성되고 있다. 러-우 전쟁 종결이 다가오고 있는 가운데 러시아는 최대 수출품목인 천연가스를 판매가 막힌 유럽 대신 대부분 아시아로 판매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은 관세협상으로 아시아 여러 국가들과 대규모의 천연가스 판매계약을 맺음에 따라 향후 2~3년 안에 미국 본토산 천연가스가 태평양을 건너 아시아로 향할 예정이다. 또한 미국 알래스카주의 풍부한 천연가스도 아시아로 향할 수밖에 없다. 물류가 몰리는 곳에는 허브가 필요하다. 에너지 전문가들은 한국이 국내외 기회를 포착해 에너지 허브를 구축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에너지 허브를 구축하면 경쟁력 있는 에너지를 충분히 확보하고 이를 통해 AI강국과 제조업을 발전시켜며, 동시에 에너지안보까지 튼튼하게 구축하고 미래 청정연료 확보할 수 있다. 윤병효 기자 chyybh@ekn.kr

[EE칼럼] 미국 전력망 논의에서 배우는 교훈

강현국 미국 렌슬러공대 기계항공원자력공학과 교수 다른 에너지와는 달리 전력망 운영과 전기 공급 관련해서는 유난히 사회적인 논의가 많다. 미국에서도 정말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고, 최근에는 큰 변화가 관찰된다. 이러한 움직임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우리나라에 참조가 될 만한 사례가 많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원자력 에너지를 향한 회귀가 강력한 동인을 얻고 있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공화당과 민주당 지지여부에 따라서 그리고 주 별 에너지 산업 현황에 따라서 입장이 다 달랐는데 이제는 거의 통일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불과 몇 년사이의 변화다. 에너지 자급 자족이 가능한 정말로 드문 선진국에 해당하는 미국에서는 가능한 선택지가 여럿이고 그 조합도 다양하니 여러 의견이 나올 수 밖에 없다. 뉴욕주나 매사츠세추주처럼 오랫동안 재생에너지 보급에 적극적이었고 상대적으로 원자력에 비 우호적이었던 주에서 원자력 발전소 신규 건설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 뉴욕주에서는 주지사가 이미 주 전력청을 통해 1기가와트급의 신규원전 건설을 추진할 것을 정하였고 현재 자기 지역에 원자력발전소를 유치하고자 하는 지자체를 상대로 신청을 받고 있다. 매사추세츠에서도 주지사 지시에 따라 원자력 로드맵을 만들기 위한 공청회가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사실 이 뒷면의 이야기가 더 흥미진진하다. 그 동안 미국 동부의 대표적인 부유한 주였던 이 두 주에서는 적극적으로 보조금을 제공하고 태양광과 풍력 발전기를 설치하여 재생에너지 중심의 전력 정책을 펼쳐왔는데, 그러다보니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이 큰 문제가 되었다. 이것은 재생에너지를 활용하는 어느 나라에서나 겪는 문제이다. 이 간극을 매우기 위해서 뉴욕주는 캐나다의 온타리오주에서, 매사추세츠주는 퀘벡주에서 수력으로 생산된 많은 양의 전기를 수입해 왔다. 즉, 해가 뜨고 바람이 부는 시간에는 생산된 전기를 직접 사용하고 그렇지 않은 시간에는 출력조절이 쉬운 캐나다의 수력에 의지하여 전력망을 유지한 것이다. 이것은 독일이 재생에너지 정책을 펴면서, 유럽 11개국에 연결된 전력망을 통해 모자라는 전기를 수입해서 해결한 것과 매우 비슷한 정책이다. 만약 노르웨이의 피요르드에 설치된 수력발전소들이 없었다면 독일의 재생에너지 정책도 성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 미국이 당면한 문제는 최근에 전력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캐나다의 각 주에서 자신들이 소비할 전기도 모자라는 지경에 이르러 미국에 공급할 여력이 크게 줄어든 것이다.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이 사용하는 전기가 어떻게 공급되고 있는지를 몰랐다가 이제야 그 심각성을 이해해 가는 과정에 있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민주당 정부에서 진행되었던 전기화 정책이다. 자동차를 내연기관에서 전기차로 교체하기 위해 세금으로 많은 보조금을 지급하였는데 여기에 가정에서 사용하는 스토브까지 모두 전기로 바꾸려고 하고 있다. 이미 보스턴의 공공 건물에서는 가스나 화석연료 사용이 금지되었고, 곧 신규 주택에서의 가스레인지 설치가 금지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가스나 석유 난방에서 전기를 이용한 히트펌프로 교체하면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정원일에 필요한 기계들도 전기로 작동하는 제품을 구입하면 보조금을 지급한다. 이렇게 해서 가정에서 소비되는 에너지원을 거의 전기로 바꾸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렇게 되면 전력 소모량이 많아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주민들은 이제 전기 요금에 매우 민감해 질 수 밖에 없다. 미국 내의 여러 곳에서 데이터센터 설치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이 기저에도 전기 공급과 관련한 문제가 깔려 있다. 즉, 전기를 많이 소비하는 데이터센터가 들어오면 그 주에서 전기가 모자라게 되니 외부에서 비싼 가격으로 구입하는 전력량이 많아져서 전기 요금이 올라가게 되고, 이를 반대하는 주민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AI가 신 경제를 창출할 것으로 예상이 되니 반드시 데이터센터를 유치하고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어서 이런 문제의 해법으로 원자력에너지가 부각되고 있다. 구글이나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원자력발전소에 직접 투자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정부는 에너지 지배력(Energy Dominance)이라는 주제를 들고 나왔다. 지난 달에 발간된 국가안보전략(NSS)에서 미국의 에너지 지배력(석유, 가스, 석탄, 원자력)을 회복하고 핵심 에너지 부품을 자력 공급할 수 있도록 소위 말하는 리쇼어링하는 것을 최우선 전략으로 제시하였다. 그 논리를 좀 더 들여다 보면, 미국의 국력은 평시와 전시에 모두 생산 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 강력한 산업 부문에 달려 있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산업 기반을 구축하기 원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에너지 생산 능력을 확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전기에 관해서는 원자력을 활용한 전력 생산을 통해 제어할 수 있는 양질의 전기를 원하는 때에 적절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핵심이다. 여러 가지 문제가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있는데, 공개된 논의를 통해 국민들이 현재의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고, 사실과 과학에 기반한 미래 전략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인상적이다. 여기에서 우리나라가 배워야 할 것이 적지 않다. 강현국 렌슬러공대 기계항공원자력공학과 교수

[기자의 눈] 원화 스테이블코인, 시장은 뛰는데 법안은 못 간다

네이버파이낸셜과 두나무의 합병 소식은 원화 스테이블코인 시장에 대한 기대감을 한층 끌어올리고 있다. 국내 최대 간편결제 사업자인 네이버파이낸셜과 국내 최대 가상자산거래소인 두나무가 손을 잡은 것은 원화 스테이블코인 성장성에 대한 강한 자신감이 전제되지 않으면 내리기 어려운 결정이기 때문이다. 두 회사의 합병이 이뤄지면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부터 유통, 결제까지 전 과정을 아우르는 단일 생태계를 구축하며 시장을 주도할 가능성이 크다. 이를 발판으로 글로벌 시장도 본격적으로 확대하겠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다. 네이버 뿐만 아니다. 은행과 주요 핀테크, 블록체인 기업들도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에 대비해 물밑 준비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시장 속도와 달리 제도는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의 출발점인 디지털자산기본법(가상자산 2단계 법안) 입법이 지연되고 있어서다. 네이버파이낸셜과 두나무가 구상하는 생태계 역시 법적 근거가 마련되지 않으면 현실화하기 어렵다. 입법 지연의 배경에는 금융위원회와 한국은행 간 이견이 자리하고 있다. 한은은 금융시스템 안정을 위해 은행이 51% 이상 지분을 가진 컨소시엄만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이 가능하다는 은행 51%룰을 주장하고, 인가 과정에서 유관기관의 만장일치 합의와 한은의 검사권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에 금융위는 과도한 요구라며 난색을 표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사실상 주도권 싸움으로 보는 시선이 적지 않다. 문제는 그 사이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업계는 금융시장 변화에 맞춰 선제적인 준비에 들어갔지만 명확한 기준이 없어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판단하기 어렵다며 혼란을 호소한다. 사업을 서두르자니 향후 규제 리스크가 부담이고, 기다리자니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딜레마에 빠졌다. 실제 미국, 유럽, 일본, 홍콩 등 주요국은 스테이블코인 관련 법안을 마련하고 제도권 편입에 나섰다. 세계적으로 혁신 경쟁이 치열해진 가운데 한국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모습이다. 앞서 국회 정무위원들은 금융위에 지난 10일까지 정부안을 마련할 것을 요구했으나 금융위는 또다시 제출하지 못했다. 쟁점 대부분이 해소됐다는 설명이지만 불확실성은 여전하다. 여당 의원들은 당 차원에서 국회 입법을 추진하겠다는 계획인데, 업계는 업계 의견이 충분히 반영된 정부안 마련이 우선이란 입장이다. 더 늦기 전에 시장이 출발할 수 있는 최소한의 법적 틀부터 마련돼야 한다. 글로벌 디지털 금융 시장에서 한국이 설 자리를 지키기 위한 결단이 필요한 때다. 송두리 기자 dsk@ekn.kr

[기자의 눈] 이찬진 금감원장, ‘과도한 욕구’ 불편하다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이 연일 금융지주 회장과 금융지주의 지배구조 문제를 직격하고 있다. 이 원장은 이달 1일 기자간담회에서 금융지주 회장들을 향해 “다들 연임 욕구가 많은 것 같다"며 “그 욕구가 너무 과도하게 작동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달 10일 양종희 KB금융지주 회장, 진옥동 신한지주 회장 등 8개 금융지주 최고경영자(CEO)와 만난 자리에서는 “전 국민을 대표하는 기관의 주주 추천 등 사외이사 추천 경로 다양화와 사외이사 임기 차등화 등을 통해 독립성을 갖춘 후보 추천위원회 구성과 공정한 운영이 뒷받침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원장이 거론한 '전 국민을 대표하는 주주'는 사실상 국민연금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돼 거센 논란이 일고 있다. 국민연금이 금융지주 사외이사를 추천하는 문제는 결코 간단한 사안이 아니다. 정부와 금융당국이 국민연금을 통해 금융사의 의사결정에 개입할 수 있고, 금융사는 정권에 입맛에 휘둘리는 등의 숱한 부작용이 우려된다. 더 큰 의문은 이찬진 원장이 왜 KB금융지주, 신한지주, 하나금융지주, 우리금융지주 등 금융지주사의 지배구조를 겨냥하는지다. 이 원장이 앞서 발언한 금융지주 회장의 '연임' 욕구는 근거가 없고 추상적이다. 개인의 욕구는 제 3자가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영역일 뿐, 딱 떨어진 정답은 결코 나올 수 없다. 이 원장이 지난 10월 국정감사에서 “금융지주 회장이 되면 이사회에 자기 사람을 채워 '참호'를 구축하는 분들이 보인다"는 발언도 같은 맥락이다. 금융지주 사외이사는 정관과 지배구조 내부규범에 따라 정해진 임기가 있고, 임기가 만료되거나 중간에 사정이 생기면 교체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자기 사람'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 금융지주사와 회장들은 어떠한 절차를 갖춰야 하는가. 금융지주사들은 전임 회장 시절 발탁된 사외이사들의 임기를 규정과 관계없이 계속 연장해야 한다는 뜻인가. 아니면 현 회장의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차기 회장을 내정하고, 그 회장이 추천한 사외이사들을 이사회에 심어야 한다는 뜻인가. 아무리 공정한 절차와 선거를 통해 조직의 장을 발탁했다고 해도, 그 조직 구성원들이 모두 조직의 장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이 국민 모두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사외이사가 현 회장 재임시절 선임됐다고 해도, 회장에 대한 평가와 판단은 개인마다 다르다. 이 원장의 '자기 사람'과 '참호'라는 표현에 의구심이 드는 이유다. 현재 우리나라 금융지주 지배구조의 가장 큰 문제는, 금융당국 수장과 정치권 등 주주와 관계없는 '이해집단'이 주주들의 의사결정을 존중하지 않는 데 있다. 제3의 세력들은 자신의 '욕구'를 가감 없이 드러내며 본인의 입맛에 따라 금융지주사와 회장들, 이사회가 움직이길 원한다. '과도한 욕구'는 금융지주 회장이 아닌 금융당국 수장과 정치권에 어울리는 단어다. 나유라 기자 ys106@ekn.kr

[신율의 정치 내시경] 비상계엄 미화와 품격 상실의 길

윤석열 전 대통령은 비상계엄 선포 1년 즈음에 옥중 담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는 자신의 비상계엄 선포를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데 집중했다. 그는 해당 담화에서 “12.3 비상계엄은 국정을 마비시키고 자유 헌정질서를 붕괴시키려는 체제 전복 기도에 맞서, 국민의 자유와 주권을 지키기 위한 헌법 수호책무의 결연한 이행이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국민의힘 일각에서 제기하는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라는 논리와 궤를 같이한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비상계엄 선포와 이른바 '의회 폭거'는 전혀 다른 차원의 두 가지 사안이라는 점이다. 비상계엄은 대통령의 권한이긴 하나, 말 그대로 '비상'한 상황에서만 발동되는 예외적 조치다. 일반적으로 '비상 상황'이란 대규모 테러로 국민의 생명이 위협받거나, 외부 세력의 침입으로 국가 안보가 심각하게 훼손되는 경우를 의미한다. 반면, '의회 폭거'는 본질적으로 정치적 영역에 속하는 문제다. 따라서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일부가 주장하는 '의회 폭거'는 '비상 상황'의 요건에 해당할 수 없는 것이다. 윤 전 대통령 스스로도 이를 인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 드론을 보낸 사례가 이를 방증한다. 이는 북한의 반응을 유도함으로써 외부 위협을 인위적으로 조성하려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낳고 있다. 만약 이러한 시도가 사실이라면, 그는 국내 정치 상황만으로는 '비상 상황'을 구성하기 어렵다는 점을 알고 있었던 셈이 된다. 설령 민주당이 정치적으로 폭주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정치의 영역에 속하는 사안이므로, 정치적 방식으로 해결했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윤 전 대통령이 야당과 적극적으로 소통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결국 여야는 평행선을 달리며 정치 자체가 실종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런 정치 실패에 대해 윤 전 대통령은 책임을 통감하고, 국민 앞에 진솔한 사과를 했어야 했다. 윤 전 대통령이 사과해야 할 사안은 이뿐만 아니라 더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씨를 둘러싼 여러 논란에 대해서도 대통령으로서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야 했다. 영부인이었던 김건희 씨는 '방어권' 행사라는 명목으로 수차례 사실과 다른 허위 발언을 하며, 영부인으로서의 품격을 스스로 실추시켰다. 그는 마치 진실을 말하듯 화려한 수사를 동원했지만, 정작 증거나 증언이 드러나면 말을 바꾸는 모습을 되풀이했다. 이러한 태도에서는 공인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품격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윤 전 대통령이 이러한 사안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채, 자신의 행동만을 일방적으로 미화하려 한다면, 결국 그 역시 '품격 상실'이라는 진흙탕 속으로 스스로를 끌어들이는 셈이 된다. 더 나아가, 그는 현재 진행 중인 '보수의 위기'에 대해서도 책임을 느껴야 한다. 그가 진정으로 '자유 민주주의'를 중시한다면, 더는 보수 진영을 위기에 빠뜨리지 말고, 자신이 모든 책임을 감수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주장을 실제 행동으로 증명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역시 탄핵 경험을 한 박근혜 전 대통령과 비교하게 된다. 두 사람 모두 탄핵당했다는 공통점이 있으나, 중요한 차이점도 존재한다. 박 전 대통령의 탄핵 사유는 여전히 법리적 논쟁의 여지가 있다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반면 윤 전 대통령의 탄핵 사유는 국민 다수가 직접 목격한 명백한 사건들로 구성돼 있다. 또한 박 전 대통령은 윤 전 대통령처럼 자신의 행위를 적극적으로 미화하려 들지 않았다. 이는 전직 대통령으로서 최소한의 품격을 지키려는 태도로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의 경우 그렇지 못했다. 바로 이 때문에 윤 전 대통령은 더욱 거센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윤 전 대통령은 이제라도 한때나마 대한민국을 이끌었던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품격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만 국민들의 자괴감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을 것이다. 신율

[EE칼럼] 빌 게이츠의 방향 전환과 에너지 지정학

빌 게이츠의 기후변화에 대한 입장 변화가 화제다. 그는 지난 10월 28일 '기후변화의 혹독한 3가지 진실'이라는 자신의 글에서 기후변화는 인류가 멸망할 정도가 아님에도 인류 종말론적 시각이 단기 탄소 감축에 집착하도록 만든다고 주장했다. 이 발언은 4년 전 그가 출간한 '기후 재앙을 피하는 법'에서의 종말론적 입장과 반대되는 것이어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방향 전환 이전에 또 다른 구루의 피벗이 있었다. 대니얼 예긴은 올해 2월 포린 어페어에 '문제에 직면한 에너지전환'이라는 글을 통해 전 세계 풍력과 태양광 에너지 생산량은 기록적 수준에 도달했지만 석유와 석탄 에너지 생산량 또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면서 장기간에 걸쳐 전 세계 1차 에너지 믹스에서 탄화수소가 차지하는 비중은 1990년 85%에서 2024년 80%로 크게 변하지 않은 상황을 두고 '에너지전환이 아닌 에너지 추가'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2022년 그는 뉴욕타임스 에즈라 클라인과의 인터뷰에서 유럽의 러시아 화석연료 의존도 탈피를 위해 재생에너지가 기존 용량의 3배가 필요하다면서 재생에너지 경로 가속화는 서구 세계가 기억을 잃어버린 에너지 안보에 관한 것이라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선 '급속한 에너지전환'을 추진하느라 세계가 에너지 안보를 고려하지 않았고 에너지 비용과 경제성도 소홀했다고 말하면서 2050 탄소중립 목표를 2030년으로 앞당기려다 더 많은 위기가 찾아올 것이라 주장했다. 빌 게이츠와 대니얼 예긴의 입장 변화엔 포지션 정리라는 뚜렷한 공통점이 보인다. 빌 게이츠는 기후 문제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했던 게이츠 재단의 단계적 폐쇄와 브레이크스루 에너지 기후정책 그룹 해체를 포함한 대규모 구조조정을 발표했다. 대니얼 예긴은 그의 재생에너지 관점을 통째로 바꿨다. 유럽은 더 많은 전력을 얻기 위해 천연가스보다 풍력에 의존할 것이며 재생에너지가 가장 우선순위에 있기 때문에 많은 양의 가스가 필요하지 않다고 했지만 이후 신재생에너지가 '과도하게 설정'되면서 화석연료 투자가 줄어들어 에너지전환 목표를 낮추지 않으면 70년대 오일 쇼크보다 더한 에너지 위기가 찾아올 것이라 진단했다. 대니얼 예긴이란 이름이 없었다면 OPEC 관계자 말처럼 들릴 정도다. 빌 게이츠가 새롭게 관심을 두는 분야는 저소득 국가의 에너지와 식량 부문이다. 그는 이들 국가의 화석연료 프로젝트 자금지원 중단이 전 세계 배출량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이들 국가의 안정적 전력공급을 위한 자금조달이 어려워졌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아프리카 대륙에 더 이상 에너지전환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며 천연가스와 석탄 프로젝트가 이들을 더 나아지게 할 것이라는 이유로 지원을 시사했다. 뉴스위크는 '다음 대형거래는 아프리카'란 장문의 기사에서 세계 핵심 광물 30%가 매장되어 있는 아프리카와 2,400억 달러의 무역 관계를 맺고 있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10년 전보다 투자와 대출 규모가 절반으로 줄어든 중국, 사헬지역 및 기타 아프리카 국가들에 안보 측면 지원의 한계가 뚜렷한 러시아를 제치고 미국이 아프리카의 영향력 확대와 더불어 전략 금속과 핵심 광물에 대한 접근권 확보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빌 게이츠와 대니얼 예긴의 방향 전환은 기존 재생에너지 중심 전환이 실패로 돌아갔으며 에너지 정책에 지정학 요소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트럼프의 '기후의제 사기'라는 표피를 걷어내면 미국의 '에너지 지배'를 통한 전 세계 영향력 확대라는 대전략을 마주할 수 있다. 유럽과 일본, 한국은 미국 LNG 수입을 확대할 것이고 아프리카의 자원을 두고 미국은 중국, 러시아와 경쟁할 것이다. 미국 에너지부 장관 크리스 라이트는 넷제로 정책으로 영국이 미국의 가장 가난한 주보다 소득이 낮은 이유로 에너지 전환으로 2005년 이후 28%나 줄어든 에너지 소비 감소를 들었다. 세계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더 많은 에너지가 경제적 번영'을 가져온다는 '에너지 추가' 내러티브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기자의 눈] 산업용 전기요금 내린다면…‘파괴적 혁신’ 마중물 돼야

전기요금 때문에 산업계가 아우성이다. 지난해 말부터 산업용 전기요금이 킬로와트시(㎾h)당 185.5원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지난 2022년 1분기와 비교하면 무려 75.8%나 올랐으니 불만이 나올 만하다. 가정용 전기요금이 산업용보다 더 비쌌던 구조도 어느 순간 역전된 상황이다. 전기요금에 쏟아지는 아우성은 업황 부진에 빠진 철강과 석유화학 업계에서 가장 크게 들린다. 유관협회와 업계에 따르면, 철강은 탄소 배출을 줄이려 석탄을 연료로 쓰는 고로 대신 도입한 전기로 가동으로 전기요금 부담이 늘고 있다. 석화도 설비 규모가 워낙 거대해 전체 매출의 5%가량(2025년 2분기 기준)이 전기료로 빠져나간다. 전기료를 한시적으로라도 깎아주면 철강 및 석화 기업들이 사업 체질을 개선하는 데 힘을 받을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그렇다고 전기료 인하가 단순히 철강·석화업계의 '버티기용 수단'이 될 순 없다. 반대 논리가 만만치 않아서다. 당장 발전사들은 내년부터 탄소배출권 유상할당 부담이 커진다. 재생에너지 발전 인프라 구축에 투자해야 하기에 지출 요소가 크다. 또한, 미국 등 주요국가들이 전기료 지원을 국가 보조금 지원으로 간주해 자국산업 경쟁력을 저해하는 '불공정 무역'을 핑계로 제재를 가할 경우 우리 정부와 업계에 통상 부담으로 작용한다. 실제로 미국 상무부는 한국의 저렴한 전기요금이 사실상 철강업계에 보조금을 지원하는 효과와 같다는 논리로 무역 조치를 시도하기도 했다. 이같은 전기요금 인하 반대 논리를 돌파할 만한 유인책으로 국내 철강·석화사들이 글로벌 공급망 속에서 '수퍼 을(乙)'이 되는 것을 떠올려 본다. 범용 메모리로 성장해 온 한국 반도체기업들이 고대역폭메모리(HBM)로 미국 빅테크의 러브콜을 받고, 반도체 장비 제조사들이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을 좌지우지하는 현재 모습을 철강과 석화산업이 본보기 삼았으면 하는 '상상'이다. 전기료 감면으로 마련한 '버티기 체력'을 연구개발에 쓰고, 이를 통해 개발한 혁신소재를 해외시장에서 무역 제소를 피할 지렛대로 삼자는 것이다. 갈수록 거세지는 보호무역주의 속 생존법이 결국 '국내 공급망 강화'라는 점과도 일맥상통한다. 따라서 철강과 석화업계는 '파괴적 혁신'을 고민해볼 시점이다. 소재 연구개발은 당장에 바짝 투자한다고 성과를 낼 수 없다. 기초·응용 과학 같은 학문적 토대부터 복원하고, 어떤 소재 개발에 집중할 지를 민관이 판단해 과감히 투자하는 실행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전기료 감면 정책을 철강·석화산업의 단기성 버티기 수단이 아닌 고부가가치 스페셜티 소재 경쟁력을 강화하는 마중물로 일대 전환하는 '파괴적 혁신'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수퍼 을 전략'의 큰 그림 속에서 전기료 감면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정승현 기자 jrn72benec@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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