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당시 사무장급이던 대한항공 승무원의 위암 사망이 우주방사선 노출에 따른 '산업재해'로 처음 인정되면서 '하늘 위 숨겨진 위험'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높아졌다. 에너지경제신문은 대한항공 조종사들이 한국항공운항학회에 투고한 '항공 승무원의 우주방사선 피폭 저감에 관한 연구' 논문을 근거로 국내 항공승무원들이 마주한 '우주방사선 피폭'의 실태를 과학적 데이터로 분석하고, 그 원인과 현실적인 저감 방안을 심층적으로 조명해 본다. 기획 내용은 총 3회에 걸쳐 △상편 문제의 심각성 △중편 피폭의 핵심 원인 △하편 구체적인 해법과 미래 과제 순으로 연재한다. 우주방사선 피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항공기 운항을 전면 중단할 수는 없다. 핵심은 위험을 인지하고 데이터를 기반으로 관리하며, 합리적인 수준에서 저감하는 것이다. 대한항공 현직 기장들이 주도한 연구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3가지 저감 방안을 명확히 제시한다. 이는 단순한 제언을 넘어 항공사의 운항 스케줄링과 비행 계획 시스템에 직접 적용 가능한 실행 계획에 가깝다. ①개인별 북극 항로 비행 횟수 제한 특정 승무원이 고위험 노선에 집중적으로 투입되는 것을 막아 단기간에 과도한 피폭이 누적되는 것을 방지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다. 이는 연간 총 피폭량이 법적 한도에 근접하는 승무원들을 보호하는 데 필수적인 조치다. ②고위도-저위도 노선 균형적 배분 이는 보다 정교한 접근법으로 승무원의 비행 스케줄을 하나의 포트폴리오처럼 관리하는 개념이다. 요컨대 한 승무원이 피폭량이 높은 뉴욕 비행을 했다면 다음 비행은 피폭량이 현저히 낮은 방콕이나 시드니 노선에 배정해 월간 또는 연간 누적 피폭량을 평균화하고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스케줄링 기반의 저감 방안은 이미 대한항공에서도 수용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대한항공 노사는 2021년 7월 협의를 통해 승무원의 비행 노선과 시간을 관리하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해 연간 6mSv에 근접하는 피폭량을 기록한 승무원을 북극 항로가 아닌 노선이나 비행 시간이 짧은 노선에 자동으로 배정하는 시스템을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연구에서 제시된 방안이 기술적으로 충분히 구현 가능하고 노사 양측의 공감대를 얻고 있음을 보여주는 긍정적인 신호다. ③고위도 노선 운항 시 계획 비행 고도 하향 항공기는 일반적으로 공기 저항이 적어 연료 효율이 가장 높은 최적 순항 고도로 비행한다. 그러나 이 고도는 우주방사선 노출 측면에서는 가장 위험한 고도일 수 있다. 연구는 비행 계획서상 고도를 의도적으로 낮출 경우, 방사선량이 얼마나 감소하는지를 시뮬레이션 프로그램 'CARI-6M'을 통해 정량적으로 분석했다. 분석 결과 순항 고도를 단 2000ft(약 610m)만 낮춰도 평균 13.2%의 피폭선량 저감 효과가 나타났고 4000ft(약 1220m)를 낮추면 그 효과는 25.6%에 달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저감 효과가 저위도 지역보다 고위도 지역에서 더 크게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이는 가장 위험한 구간에서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데이터는 항공사와 규제 당국, 그리고 노조 간의 논의를 '해야 한다, 말아야 한다'의 이분법적 대립에서 '어느 수준까지가 합리적인가'의 과학적 토론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강력한 근거가 된다. 비근한 예로 4000ft 하강이 연료비 측면에서 부담이 크다면 2000ft 하강이라는 절충안을 통해 여전히 13% 이상의 의미 있는 안전 개선을 달성할 수 있다. 이는 급진적인 변화 없이도 점진적이고 데이터에 기반한 안전성 향상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고도 조절과 북극항로 우회는 필연적으로 경제적 비용을 수반한다. 고도를 낮추면 공기 밀도가 높아져 항공기 저항이 커지고, 이는 곧 유류 소비 증가와 비행 시간 연장으로 이어진다. 이는 항공사의 운영 비용을 직접적으로 상승시키는 요인이며, 탄소 배출량 증가라는 환경적 부담으로도 작용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러시아 영공 폐쇄는 이러한 비용 증가가 어느 정도인지를 현실에서 보여줬다. 북극항로를 이용하지 못하고 남쪽으로 우회하게 된 미주 동부 노선들은 편도 비행 시간이 최대 1시간 40분까지 늘어났고, 이는 고스란히 추가 유류비와 운영비 부담으로 돌아왔다. 결국 이 문제는 '안전'과 '경제성' 사이의 고전적인 줄다리기 문제로 귀결된다. 그러나 최근의 법적 판결들은 이 저울의 균형추를 안전 쪽으로 상당 부분 이동시켰다. 과거에는 추가 유류비가 명확한 '비용'으로 인식된 반면, 승무원의 건강 문제는 잠재적이고 불확실한 '리스크'로 취급됐다. 하지만 이제 우주방사선 피폭으로 인한 질병이 구체적인 '산재'로 인정됨에 따라 승무원의 건강 문제는 수백억 원에 이를 수 있는 법적 배상·기업 이미지 실추·우수 인력 이탈 등 명확하고 측정 가능한 '비용'이 됐다. 따라서 이제 항공사는 단기적인 유류비 절감과 장기적인 법적·재무적 리스크 관리 사이에서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만 하는 입장이 됐다. 연구가 제시한 데이터 기반의 점진적 저감 방안들은 이 균형점을 찾는 과정에서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이는 더 이상 회피할 수 없고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필수적인 경영 과제다. 정부는 항공 승무원의 우주방사선 피폭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관련 규제를 꾸준히 강화해왔다. 과거 국토교통부와 원자력안전위원회로 이원화 돼있 관리 체계는 2023년 6월 11일부터 원안위로 일원화됐고, '생활주변방사선 안전관리법(이하 생활방사선법)' 개정을 통해 항공사의 책임과 의무가 대폭 강화됐다. 개정된 법률과 그 하위 규정인 '항공운송사업자의 우주방사선 안전 관리 규정'은 승무원의 연간 피폭 방사선량 관리 기준을 6mSv로 명시했다. 이는 과거 '5년간 100mSv'라는 복잡한 기준보다 훨씬 더 엄격하고 명확하다. 또한 항공사는 승무원의 연간 피폭량이 6mSv를 초과할 우려가 있는 경우, 즉시 저감 조치를 취해야 할 의무를 진다. 법령이 명시한 조치는 △기존 계획된 국제 항공 노선보다 피폭 방사선량이 낮은 노선으로 변경 △탑승 예정 국제 항공 노선 횟수의 조정 △국제·국내 항공 노선을 탑승하지 않는 근무로 변경 등이다. 이는 앞서 연구가 제시한 스케줄링 기반의 해결책을 법적으로 강제한 것이다. 아울러 항공사는 우주방사선 측정 장비나 검증된 평가 프로그램을 사용해 노선별·개인별 피폭량을 정확히 조사·분석하고, 그 기록을 승무원이 75세가 되거나 마지막 운항 후 30년이 될 때까지 보관해야 하며 관련 내용을 정부에 보고해야 한다. 이 외에도 승무원에게 우주방사선의 위험성과 안전 관리에 대한 정기적인 교육을 실시하고, 이에 관한 건강 진단을 받게 해야 한다. 이러한 규제 강화는 정부 차원의 항공 승무원 안전 관리의 중요한 진일보다. 이는 항공사가 더 이상 재량에 따라 안전 조치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법적 의무로서 승무원의 피폭량을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저감해야 함을 의미한다. 국내에서의 규제 강화는 긍정적이지만 세계 유수의 항공사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체계적인 우주방사선 관리 시스템을 운영해왔다. 이는 국내 제도가 국제 표준에 발맞춰 가는 과정에 있음을 보여준다. 유럽연합(EU)은 이미 1996년 유럽 원자력 공동체(EURATOM) 지침을 통해 항공 승무원을 직업적 피폭자로 간주하고 보호 조치를 의무화했다. 이에 따라 독일은 2001년부터 관련 법규를 시행했고 루프트한자는 연간 피폭량이 1mSv를 초과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승무원을 의무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루프트한자는 독일 항공우주센터(DLR)와 협력해 '항공 경로 선량 계산을 위한 유럽 프로그램 패키지(EPCARD)'와 같은 공식 승인된 계산 프로그램을 사용해 각 비행편의 피폭량을 산출한다. 이 데이터는 승무원 관리 시스템과 직접 연동돼 고피폭 승무원의 스케줄을 조정하는 데 활용된다. 또 정기적인 기내 실측을 통해 계산 프로그램의 정확도를 검증하는 등 과학적 신뢰도를 높이는 데도 힘쓰고 있다. 에어프랑스는 프랑스 항공 당국과 협력해 2000년대 초반부터 '시버트(SIEVERT)'라는 독자적인 컴퓨터 시스템을 개발해 운영 중이다. 이 시스템은 은하 우주방사선뿐만 아니라, 예측이 어려운 '태양 입자 현상(SPE)' 발생 시의 피폭량까지 계산go 실시간에 가까운 위험 관리를 지원한다. SIEVERT 시스템의 계산 결과는 실제 항공기에서 측정한 값과 15% 이내의 오차를 보일 정도로 높은 정확도를 자랑하며, 이는 프랑스 승무원 피폭량 관리의 과학적 기반이 되고 있다. 이들 사례는 20여 년 전부터 정부와 항공사가 함께 과학적 데이터에 기반한 정교한 관리 시스템을 구축했고, 피폭량 계산 결과를 승무원 스케줄링이라는 실질적인 인력 운용에 직접 연동해 '사전 예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공통점을 보여준다. 이는 대한민국 항공업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명확히 제시한다는 평가다. 승무원들의 우주방사선 피폭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다. 한 승무원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시작된 사회적 관심은 사법부의 역사적인 판결과 정부의 강력한 규제 강화로 이어졌다. 대한항공 역시 자동화된 스케줄링 시스템 도입을 약속하는 등 변화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해결은 법적 의무를 이행하는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규제는 최소한의 안전망일 뿐, 승무원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안전 문화(Safety Culture)'가 기업의 운영 철학에 깊이 뿌리내려야 한다. 이는 항공사의 모든 의사결정 과정에 승무원의 건강이라는 변수가 당연하게 포함돼야 함을 뜻한다. 요컨대 비행 계획을 수립할 때 운항 관리사는 단순히 최단 거리와 최적 고도를 계산해 연료 효율성만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해당 항로와 고도의 예상 피폭선량을 함께 비교 평가해야 한다. 만약 약간의 고도 하향이나 항로 변경으로 피폭량을 크게 줄일 수 있다면 추가되는 연료비를 '안전을 위한 투자'로 인식하고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의사결정 구조와 기업 문화가 필요하다. 이는 '가능한 한 낮게(ALARA, As Low As Reasonably Achievable)'라는 방사선 방호의 대원칙을 기업 경영에 체화하는 과정이다. 이제 남은 과제는 대한항공을 비롯한 국내 항공업계의 리더십에 달려 있다. 승무원의 안전을 단순한 규제 준수 항목이나 비용 문제로 여기는 시각에서 벗어나 기업의 최우선 가치이자 지속가능한 성장의 핵심 동력으로 인식하는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하늘길의 안전은 항공기의 안전 외에도 그 길을 만드는 사람들의 건강과 안전이 보장될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