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과 재계 ③] 라디오부터 자동차·철강까지…한국 산업의 ‘국산화 81년’

[광복절과 재계 ③] 라디오부터 자동차·철강까지…한국 산업의 ‘국산화 81년’

1959년 11월 국내 최초의 국산 라디오가 세상에 나왔다. 금성사, 현재 LG전자가 만든 진공관식 라디오 'A-501'이었다. 지금은 평범한 전자제품처럼 보이지만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 사용하는 라디오 대부분을 외국 제품에 의존하던 시절이었다. A-501은 현재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국가유산청은 이 제품의 제작 시기를 1959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광복 이후 한국 산업의 역사는 어쩌면 이런 '처음'들의 연속이었다. ◇ 1959년 라디오, 1973년 쇳물, 1975년 자동차 금성사는 라디오에서 멈추지 않았다. 1960년..

같은 전쟁에도 엇갈린 2분기 해운 성적표…하반기는 나란히 뛸까

국내 해운업계가 중동전쟁 국면 속 2분기 견조한 외형 성장에도 불구하고 수익성 측면에서 엇갈린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전반적인 업황 강세 흐름 속 주력 선종별 운임 변동성이 각 업체의 수익성을 가른 모양새다. 17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 주요 해운업체 3곳(HMM·팬오션·현대글로비스)은 올해 2분기 일제히 두 자릿수 외형 성장을 이끌었다. HMM이 매출 3조402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9.7% 성장률을 보인 가운데, 팬오션과 현대글로비스(해운 부문)도 각각 1조9137억원·1조6441억원 매출을 기록해 같은 기간 47.9%·20.9% 규모로 외형 성장에 성공했다. 중동 전쟁에서 비롯된 고유가와 통항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선복 수요 증가에 힘입어 호조를 보였다는 공통점이다. 성적표는 영업이익에서 갈렸다. HMM이 2분기 영업이익 3541억원을 올려 전년 동기 대비 51.8%, 팬오션도 1937억원으로 같은 기간 57.4% 수준의 성장을 거뒀다. 반면 현대글로비스 해운 부문은 이 기간 1309억원으로 이 기간 영업이익이 34.6% 줄었다. 이처럼 전반적인 외형 성장세에도 업체별 수익성이 정반대를 나타낸 배경에는 각 업체의 주력 선종이 지닌 특수성이 자리한다. 같은 중동전쟁을 겪으면서도 주력 선종별로 지정학적 리스크가 운임과 비용에 전달되는 방식이 달랐던 영향이라는 설명이다. HMM의 경우, 주력 선종인 컨테이너선은 당초 누적된 선복 공급과잉으로 올해 운임 약세가 이어지며 전년보다 수익성이 악화할 것으로 예견됐었다. 그러나 전쟁 여파로 발생한 중동 지역의 통항 불확실성이 오히려 컨테이너선 시황을 지지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주요 항로에서 우회 운항이 이어질 경우 선박의 항해 거리가 길어지고 운항 일수가 늘어난다. 동일한 물동량을 처리하는 데 필요한 선복이 증가하면서 시장에 공급되는 실질 선복량을 줄이는 효과를 낸다. 이에 따른 선복 수급 개선이 운임을 지지하면서 외형 성장뿐 아니라 수익성 개선으로 이어진 것으로 분석된다. 또한 지난 7월 미국의 관세 변경에 앞서 5~6월 화주들의 재고 선제 확보 심리가 더해지면서 운임 상방 압력을 가중, 유가 상승과 선복 과잉을 상쇄했다는 평가다. 실제 지난 2분기 상하이컨테이너운임지수(SCFI)는 평균 2337포인트(p)를 기록하며 전년 동기 1645p를 42.1% 가량 웃돌았다. 이 같은 시황 호조는 팬오션의 주력 선종인 건화물선(드라이벌크)에서도 나타났다. 2분기 발틱건화물운임지수(BDI)는 평균 2751p로 전년 동기보다 87.4% 높게 형성됐다. 특히 건화물선 시황 호조의 집중 수혜를 받는 케이프사이즈 용선을 2분기 15척으로 전분기(9척)보다 6척 늘리면서 팬오션의 건화물선 영업이익은 847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59.8% 뛰었다. 여기에 중동전쟁의 직접적인 영향권 내에서 선복 수요가 높은 유조선(탱커) 부문 역시 2분기 영업이익 437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66.5% 증가하며 수익성 개선에 힘을 보탰다. 반면 PCTC를 주력으로 하는 현대글로비스는 고유가 부담을 운임 상승보다 먼저 떠안았다. 중동전쟁에 따른 선박 연료비 상승에도 이를 운임에 즉각 반영하기 어려운 PCTC 사업 특유의 계약 구조가 수익성을 압박했다는 설명이다. 자동차운반선은 완성차 업체와 장기운송계약을 체결하는 비중이 타 선종 대비 상대적으로 높다. 이에 유가 상승으로 연료비가 증가하더라도 비용 상승분이 운임에 반영되기까지 약 2~3개월의 시차가 발생한다. 매출 증가에도 비용 부담이 먼저 손익에 반영되면서 영업이익이 감소한 배경이다. 업계에선 올 하반기 PCTC의 유가 상승분이 3분기들어 보전(약 600억원)되며 업황 호조에 따른 현대글로비스의 수익성 개선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중동지역 통항 차질 장기화에 따른 HMM과 팬오션의 실적 개선세도 지속될 것으로 전망하는 분위기다. SCFI와 BDI가 지난 14일 기준 각각 3355.24p·2863p로 각각 지난 2분기 평균 대비 43.6%·4.1% 높게 형성되며 시황 강세를 지속, 유조선 용선료 역시 초대형 유조선(VLCC)을 중심으로 연중 최고치를 거듭 갱신하면서 업계의 수익성을 지지하고 있다. 다만 이 같은 시황 강세는 중동 전쟁에 밀접한 연관성을 보이는 만큼, 향후 정세 안정화 여부 등에 따라 대규모 변동을 보일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업계 관계자는 “중동 지역 불확실성에 더해 파나마 운하 통항 제한 가능성까지 겹치면서 해상 운임이 단기간 급격히 하락하기 어려운 구조로 굳어지고 있다"면서도 “중동 정세 완화와 홍해 운항 복귀에서 비롯되는 유효 선복 공급확대가 단기 운임 변동의 최대 변수로, 글로벌 제조업 경기에 따른 물동량 변화와 맞물리며 변동성이 크게 확대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박주성 기자 wn107@ekn.kr

일본서 번 돈 한국으로…롯데 신격호는 어떻게 ‘두 나라 재벌’을 만들었나

1941년, 스무 살 청년 신격호는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손에 쥔 돈은 83원. 낮에는 신문과 우유를 배달하고 공장에서 일하면서 밤에는 학교에 다녔다. 1945년 광복을 맞았지만 그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대신 일본에 남아 사업가의 길을 택했다. 전쟁이 끝난 일본에서 비누와 포마드 등을 만들며 사업 기반을 닦았고, 미군을 통해 일본에 퍼지기 시작한 껌에 눈을 돌렸다. 사업은 성공했다. 1948년 자본금 100만엔, 직원 10명의 주식회사 롯데가 출범했다. 이후 초콜릿과 캔디, 비스킷, 아이스크림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일본의 중견 식품기업으로 성장했다. 현재 롯데그룹 창업주 고(故) 신격호 회장의 이야기다. 앞선 세대의 한국 기업가들이 광복 이후 일본인이 남긴 공장이나 국내에서 축적한 사업 기반을 토대로 기업을 키웠다면 신 회장이 걸은 길은 달랐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자본을 축적한 뒤 다시 한국으로 들어왔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신 회장을 '1948년 일본 롯데, 1967년 한국 롯데제과 설립을 시작으로 한일 양국에 걸친 거대 재벌그룹을 만들어낸 기업인'으로 정의한다. ◇ 광복됐지만 일본에 남았다…껌으로 일군 '롯데' 신 회장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1년이다. 경남 울주군에서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울산농업전수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향했다. 도쿄에서 일을 하면서 와세다 고등공업학교 화학과를 졸업했다. 1945년 광복은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갈림길이었다. 조국은 해방됐지만 신 회장은 귀국하지 않았다. 일본에 남아 전공을 살려 비누와 포마드 크림 등을 만드는 사업을 시작했고 전후 일본 경제에서 새로운 소비재로 떠오르던 껌에 뛰어들었다. 시중의 껌을 직접 사서 연구하고 기술자를 고용해 제품을 만들었다. 껌 사업이 성공하면서 1948년 6월 법인 '롯데'를 설립했다. 사명은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샤롯데에서 따왔다. 롯데는 이후 초콜릿과 캔디, 비스킷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혔다. 신 회장이 1941년 일본에 건너간 지 20여년 만에 일본에서 상당한 사업 기반을 확보한 기업가로 성장한 것이다. ◇ 1965년 한일수교가 바꾼 길…이번엔 일본에서 한국으로 신 회장의 두 번째 이동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를 계기로 시작됐다. 당시 한국은 경제개발에 필요한 해외 자본 유치가 절실했다. 한국경제인협회 기업인박물관은 한일수교를 계기로 일본 자본의 국내 진출이 확대됐으며 롯데와 코오롱 등 재일교포 기업가가 세운 기업들도 이 시기에 한국으로 '역진출'했다고 설명한다. 신 회장도 움직였다. 1967년 4월 한국에 롯데제과를 설립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한일 국교 정상화로 국내 투자의 길이 열리자 신 회장이 롯데제과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한국 사업에 나섰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한국 롯데제과는 직원 약 500명 규모로 출발했다. 이미 해태제과와 동양제과가 국내 시장을 양분하고 있었지만 일본에서 축적한 자본과 제과 기술, 판매기법 등을 앞세운 롯데가 빠르게 시장에 진입했다. SK나 한화와도 출발점이 달랐다. SK와 한화가 광복 이후 국내에 남겨진 귀속기업·시설을 인수하면서 현재 그룹의 기반을 마련했다면 신 회장은 일본에서 직접 일군 기업과 자본을 토대로 한국 시장에 새 회사를 세웠다. 한국 재계의 형성 과정에 '귀속재산 불하'와는 또 다른 자본축적 경로가 있었던 셈이다. ◇ 껌 팔던 회사가 호텔·백화점으로…'현해탄 경영' 한국 진출 이후 롯데의 성장 속도는 빨랐다. 1960년대 후반 식품을 중심으로 국내 사업 기반을 마련한 뒤 1970년대 들어 사업 영역을 공격적으로 넓혔다. 1973년 호텔롯데를 설립했고 1974년 칠성한미음료를 인수했다. 1976년에는 호남석유화학을 인수해 석유화학 산업으로 영역을 넓혔으며 1979년에는 롯데쇼핑과 롯데리아를 설립했다. 특히 호텔과 백화점은 이후 롯데의 정체성을 만드는 사업이 됐다. 당시 한국의 관광·유통산업은 지금과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초기 단계였다. 롯데는 1973년 호텔롯데를 설립한 뒤 6년에 걸친 공사를 거쳐 1979년 서울 소공동에 대규모 호텔을 열었다. 롯데 측 자료에 따르면 호텔 건설에는 당시 1억5000만달러가 투입됐다. 같은 해 롯데쇼핑도 설립됐다. 일본에서 껌과 초콜릿을 팔아 성장한 기업이 한국에서는 식품을 넘어 호텔·백화점·관광·석유화학으로 사업을 넓혀간 것이다. 롯데는 신 회장의 이런 경영 방식을 훗날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현해탄 경영'으로 설명했다. ◇ 한국 기업인가 일본 기업인가…롯데 따라다닌 '국적 논란' 한일 양국에서 동시에 사업을 키운 이력은 롯데의 성장 동력이면서 동시에 오랫동안 정체성 논란을 낳은 배경이 됐다. 그룹의 최초 법인은 1948년 일본에서 만들어졌다. 신 회장은 일본에서 '시게미쓰 다케오(重光武雄)'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일본 롯데와 한국 롯데를 동시에 경영했다. 반면 한국 롯데는 1967년 별도 법인으로 출범한 뒤 빠르게 규모를 키웠다. 롯데그룹이 발간한 50년사에 따르면 한국 롯데는 1967년 매출 8억원, 임직원 약 500명의 롯데제과에서 시작해 식품·유통·관광·화학·금융 등을 아우르는 그룹으로 확대됐다. 때문에 롯데의 역사를 단순히 '일본 기업의 한국 진출'이라고만 설명하기도 어렵다. 신 회장은 한국에서 별도의 기업집단을 구축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업의 무게중심도 한국으로 확대했다. 한국경제인협회는 이를 일본에서 성공한 재일교포 기업가가 한일수교 이후 한국으로 '역진출'한 대표 사례로 분류한다. ◇ 일본에서 자본 축적해 한국에 투자…또 하나의 재벌 탄생 경로 신 회장의 궤적은 광복 이후 한국 재계가 만들어진 과정이 얼마나 다양했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다. 국내에서 자신의 사업을 일군 삼성·LG·현대 창업주가 있었고, 일본계 귀속기업을 인수해 재건한 SK·한화 창업주가 있었다면 신 회장은 아예 일본으로 건너가 성공한 뒤 자본과 사업 경험을 들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1941년 부산항을 떠난 청년은 27년 뒤 일본 롯데의 경영자가 돼 한국에서 다시 기업을 시작했다. 그렇게 들어온 자본은 제과에서 식품으로, 호텔과 백화점으로, 다시 석유화학과 건설 등으로 흘러갔다. 한국 재계 형성의 역사에서 신격호와 롯데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다. 전지성 기자 jjs@ekn.kr

‘현금vs주식’ SK최태원 재상고 쟁점, 9440억 ‘지급 방식’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이혼소송 재상고 배경에는 파기환송심의 법리 판단뿐 아니라 9440억원에 달하는 재산분할액의 지급 방식을 둘러싼 양측의 이견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최 회장 측이 판결 수용까지 검토했지만 현금과 주식을 섞어 지급하는 방안을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측이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다시 대법원의 판단을 구하게 됐다는 것이다. 법조계에 따르면 최 회장 측은 지난달 24일 파기환송심 판결 직후 이를 수용해 9년여간 이어진 소송을 마무리하는 방안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재상고 기한까지 약 3주 안에 9440억원의 현금을 마련하는 문제가 걸림돌이 됐다. ◇ SK㈜ 지분은 팔기도, 담보 잡기도 부담 최 회장의 핵심 자산은 SK㈜ 지분이다. 문제는 이 지분이 단순한 금융자산이 아니라 그룹 지배력과 직결돼 있다는 점이다. 최대주주가 단기간에 대량 매각에 나서면 주가 충격은 물론 지분율 하락에 따른 지배구조 변화 가능성까지 고려해야 한다. 파기환송심 역시 SK㈜ 주식을 직접 나누는 대신 최 회장이 노 관장에게 현금을 지급하는 '대상분할' 방식을 택했다. SK㈜ 지분이 그룹 지배권의 근거라는 점을 고려한 판단이다. 이에 최 회장 측은 현금과 주식을 함께 지급하는 절충안을 제안한 것으로 전해졌다. 주가가 하락하면 차액을 보전하되 상승하더라도 추가 이익을 요구하지 않는 조건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노 관장 측은 판결 주문대로 전액 현금 지급을 요구했고 협의는 성사되지 않았다. 최 회장 대리인단이 재상고 기한을 불과 1분가량 남긴 지난 14일 오후 11시59분께 입장문을 낸 것도 막판까지 양측의 협의가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재상고 자체에도 적지 않은 비용이 든다. 9440억원 전액을 다툴 경우 인지대만 수십억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재상고를 택한 데는 자금 조달에 필요한 시간을 확보하려는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판결이 확정되면 최 회장은 완제 시까지 연 5%의 지연이자를 부담해야 한다. 9440억원을 기준으로 단순 계산하면 하루 약 1억3000만원이다. 재상고에 상당한 비용이 들더라도 당장 수천억원의 현금을 마련해야 하는 부담을 피하면서 조달 방안을 짤 시간을 확보할 수 있는 셈이다. ◇ 주가 하락, 법리 다툼엔 유리해도 자금 마련엔 악재 재상고심에서는 파기환송심의 재산분할 비율 산정 방식이 핵심 쟁점으로 다뤄질 전망이다. 파기환송심 재판부는 주식 가액 기준일을 환송 전 항소심 변론 종결일인 2024년 4월16일로 정하면서 이후 SK㈜ 주가 상승을 재산분할 비율 산정 과정에서 고려했다. 노 관장의 기여도를 일부 인정하면서 최종 분할 비율은 최 회장 66.6%, 노 관장 33.3%로 정했다. 환송 전 항소심이 인정한 노 관장의 몫 35%보다는 1.7%포인트 낮아졌다. 최 회장 측은 특정 시점을 주식 가치 산정 기준일로 정하고도 이후 주가 변동을 분할 비율에 반영한 것은 일관되지 않은 판단이라는 논리를 펼 것으로 예상된다. 최근 SK㈜ 주가가 파기환송심 변론 종결 당시보다 크게 하락한 점도 이런 주장에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 다만 주가 하락은 자금 조달 측면에서는 부담이다. 보유 지분의 담보가치와 처분가치가 함께 낮아지기 때문이다. 법리 다툼에서는 활용할 수 있는 변수가 현금 마련 과정에서는 오히려 악재가 되는 구조다. 관심은 재상고 기간 최 회장이 어떤 방식으로 재원을 마련하느냐에 쏠린다. SK실트론 지분 29.4% 활용, SK㈜ 주식담보대출 등 여러 방안이 거론된다. 배당을 통한 현금 확보 가능성도 있지만 어느 방안이든 지배구조와 주주가치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 최 회장 측이 재상고 입장문에서 “개인적 문제로 주주와 구성원에게 심려를 끼쳐 송구하다"며 그룹 경영과 주주를 언급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 나온다. SK그룹이 AI·반도체를 중심으로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총수 개인의 9440억원 조달 문제가 그룹 지배구조나 재무전략에 영향을 미칠지도 관심사다. 재계 관계자는 “SK㈜ 지분은 최 회장의 가장 큰 자산인 동시에 그룹 지배력의 핵심이어서 단순히 시장에서 처분해 현금을 만드는 문제로 보기 어렵다"며 “재상고 기간 동안 지분 훼손을 최소화하면서 현금을 확보할 수 있는 조달 구조를 찾는 것이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지성 기자 jjs@ekn.kr

[재계와 친일 논란 下] 일제 때 돈 벌면…‘기업인과 친일의 경계선’

일제강점기에 회사를 운영해 돈을 벌었다면 '친일 기업인'일까. 일본 회사에 취직했다면 어떨까. 광복 81주년을 맞아 당시를 살았던 기업인들의 행적을 들여다보면 답은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사람들은 장사를 하고 회사에 다니며 공장을 운영했다. 훗날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을 세운 창업 1세대 상당수도 일제강점기에 처음 경제활동을 시작했다. 반면 같은 시기 기업을 경영하면서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원하거나 식민통치 기구와 친일단체에서 활동한 기업인도 있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 대상이 됐고, 수십년 뒤 정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나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이 올랐다. 두 부류를 가른 것은 무엇이었을까. 앞선 1편이 일본인이 남긴 귀속재산이 해방 이후 한국 기업에 어떻게 넘어갔는지를 추적했다면 이번에는 '일제강점기의 경제활동은 어디까지 생업이고, 어디서부터 친일행위로 평가됐는가'를 들여다봤다. ◇ 기업인도 친일인명사전에…박흥식·김연수 등 이름 올라 2009년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는 정치인과 관료, 군인, 경찰뿐 아니라 경제인도 포함됐다. 경제 분야 수록자 가운데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인물이 박흥식과 김연수다. 박흥식은 일제강점기 화신백화점을 중심으로 사업을 키워 '조선 최고의 부자' 가운데 한 명으로 불렸다. 문제는 사업가였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박흥식은 일제의 전쟁 수행과 관련된 군수산업에 참여했다. 해방 후인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하면서 기업인 가운데 처음으로 체포된 인물도 박흥식이었다. 당시 반민특위가 기업인을 바라본 기준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반민족행위처벌법은 단순한 사업활동이 아니라 군수공업을 책임경영한 행위 등을 처벌 대상으로 규정했다. 실제로 반민특위의 조사·송치 자료를 보면 '군수산업'은 별도의 조사 분야였다. 확인된 조사 건수 20건 가운데 17건이 특별검찰부로 송치되고 5건이 기소됐다. 김연수 경성방직 사장의 사례는 더욱 복잡하다. 경성방직은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조선인 기업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김연수는 기업 경영 외에도 일제 말 각종 친일·전시협력 활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훗날 친일반민족행위 조사 대상이 됐다. 흥미로운 점은 그의 역사적 평가가 처음부터 하나로 정리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1949년 반민특위 재판에서는 김연수에게 무죄가 선고됐지만, 수십년 뒤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과정에서는 일부 행위가 친일반민족행위로 판단됐다.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도 경제 분야 인물로 수록됐다. 친일 문제를 둘러싼 판단 기준 자체가 시대에 따라 논쟁의 대상이 돼왔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 회사를 다녔느냐보다 '무엇을 했느냐' 친일인명사전의 선정 기준을 보면 경제인이라는 직업 자체가 친일 여부를 가르는 기준은 아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선정기준은 일제의 국권침탈과 식민통치,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는지를 핵심으로 삼았다. 경제 분야에서는 국책 경제기관·단체의 간부로 활동하며 일제의 경제정책에 적극 협력했는지, 침략전쟁 수행을 위해 거액의 금품을 헌납했는지, 군수산업 책임자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등이 판단 대상이 됐다. 개인의 구체적인 행위와 지위, 지속성과 적극성 등을 함께 고려한 것이다.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역시 2005년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협력해 이뤄진 반민족행위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국가기구로 설치됐다. 이는 '일제 때 일본 회사에 다녔다'거나 '일제 때 사업으로 돈을 벌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 친일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 같은 시대 살았던 재계 창업주들은 이 기준을 현재 주요 그룹의 창업 1세대에게 대입하면 차이가 더 분명해진다. 이병철 삼성 창업회장은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열어 일제강점기부터 사업가로 활동했다. 정주영 현대 창업회장 역시 쌀가게를 운영하고 자동차 정비사업에 뛰어들었다. 김종희 한화 창업회장은 일제가 전시경제를 강화하던 시기 화약 유통을 통제하기 위해 만든 조선화약공판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이 일제강점기에 경제활동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박흥식 등의 전시협력 행위와 동일선상에 놓을 수는 없다. 앞서 살펴본 친일 조사와 사전의 기준 자체가 '어디에서 일했느냐'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했느냐'를 따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편 사례도 있다. 효성 창업주 조홍제는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26년 6·10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일제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훗날 모두 '기업인'이 됐지만 식민지 시대의 행적은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친일인명사전에 없다=친일 아니다'도 아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다. 특정 인물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자체가 '친일행위가 전혀 없었다'는 인증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친일인명사전은 민간 연구기관인 민족문제연구소가 자체 기준과 사료 검증을 거쳐 편찬한 결과물이다. 정부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역시 별도의 법률과 조사 범위에 따라 활동했다. 실제로 친일 문제를 둘러싼 판단은 해방 직후 반민특위, 정부 조사위원회, 민간 연구기관 사이에서도 조사 목적과 적용 범위가 완전히 동일하지 않았다. 따라서 명단에 이름이 있느냐 없느냐만으로 역사적 평가를 끝내기보다 구체적인 행적과 사료를 확인해야 한다는 게 관련 연구의 기본적인 접근법이다. ◇ 81년 지나도 어려운 질문…'생업'과 '협력'의 경계 기업인의 친일 문제는 다른 분야보다 판단하기 까다로운 측면이 있다. 식민지 경제 자체가 일본 제국의 통제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기업을 운영하려면 당시의 행정·금융·유통체제 안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태평양전쟁으로 갈수록 원료와 생산량, 물자 배급까지 국가 통제가 강화됐다. 그러나 그런 구조 안에서 사업을 했다는 사실과 식민통치나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행위를 동일하게 평가할 수도 없다. 해방 직후 반민특위가 '군수산업'을 별도의 조사 대상으로 삼고, 훗날 친일인명사전 역시 경제인의 구체적인 지위와 전쟁협력 행위를 따진 것도 이런 경계선을 설정하려는 시도였다. 한국 근현대 경제사를 연구한 한 전문가는 “일제강점기에 기업을 운영했다거나 일본계 기업에서 근무했다는 사실만으로 친일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적절하지 않다"며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협력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지위와 역할을 맡았는지 등 구체적인 행위를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반대로 기업활동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시의 전쟁협력이나 식민통치 지원 행위까지 단순한 생업으로 설명해서도 안 된다"며 “개별 인물에 대한 평가는 당시 자료를 토대로 각각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광복 81년이 지난 지금도 '친일 기업인'의 경계선을 한 문장으로 긋기는 쉽지 않다. 다만 과거의 조사와 연구가 보여주는 기준은 비교적 분명하다. 일제강점기에 돈을 벌었느냐가 아니라, 그 돈과 지위로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무엇을 했느냐는 것이다. 전지성 기자 jjs@ekn.kr

[재계와 친일 논란 上] 재벌은 정말 ‘적산’에서 태어났나…대기업의 출발 추적해보니

광복 81주년을 맞아 본지는 독립운동과 기업가, 주요 그룹의 탄생, 산업 국산화의 역사를 살펴봤다. 하지만 한국 재계의 성장사는 산업보국이라는 한 단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일본인이 남긴 귀속재산은 누구에게 넘어갔고,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창업주들은 그 시대를 어떻게 통과했을까. 일본에서 부를 일군 기업가는 왜 다시 한국에 투자했을까. 광복 이후 오늘날 재계가 만들어진 과정의 이면을 짚어본다. [편집자주] “한국의 대기업들은 광복 후 일본인들이 남겨놓고 간 기업과 공장을 넘겨받아 성장했다." 한국 재벌의 기원을 이야기할 때 종종 등장하는 주장이다. 실제로 광복 이후 일본인 소유 기업과 토지, 건물 등 막대한 재산이 미군정과 한국 정부에 귀속됐고 상당수가 이후 민간에 불하됐다. 이 과정에서 오늘날 대기업의 모태가 된 기업을 인수한 창업주도 있었다. 그렇다면 삼성과 SK, 현대자동차, LG, 한화 등 지금의 주요 그룹은 정말 모두 이른바 '적산(敵産)'에서 출발했을까. 국가기록원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각 그룹의 공식 사료 등을 토대로 주요 그룹의 출발점을 추적해보면 답은 '그렇지 않다'에 가깝다. SK와 한화처럼 일본인 또는 일본계 기업의 귀속재산을 인수한 것이 그룹 성장의 직접적인 출발점이 된 사례가 있는 반면 삼성·LG·현대처럼 창업자가 독자적으로 시작한 사업이 그룹의 모태가 된 경우도 있다. 한국 재벌의 탄생을 '적산 불하'라는 하나의 공식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이유다. ◇ 일본인이 떠나며 남긴 29만건…누가 가져갔나 '적산'은 적국의 재산이라는 의미다. 광복 이후에는 일본 정부와 일본인, 일본계 기업 등이 한반도에 남긴 재산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널리 사용됐다. 미군정은 일본인 소유 재산을 접수해 관리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남아 있던 귀속재산을 한국 정부에 넘겼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이때 한국 정부에 이관된 귀속재산은 사업체 2203건, 부동산 28만7555건, 기타 2151건 등 모두 29만1909건에 달했다. 정부는 1949년 12월 귀속재산처리법을 제정하고 민간 매각에 나섰다. 한국전쟁으로 처분이 한때 지연됐지만 1950년대 들어 불하는 다시 빠르게 진행됐다. 특히 1953~1959년 귀속재산 불하가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국가기록원은 이 기간 이뤄진 불하가 전체 건수의 86%, 계약금액의 68%를 차지했다고 설명한다. 당시 정부 입장에서 귀속기업의 민영화는 단순히 일본인의 재산을 나눠주는 문제가 아니었다. 전쟁으로 파괴된 생산시설을 다시 돌리고 산업을 복구하는 동시에 민간 중심의 경제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누가 어떤 기업을 넘겨받았고, 그것이 이후 한국의 재벌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다. ◇ SK의 시작 '선경직물'…일본계 공장에서 한국 대기업으로 현재 주요 그룹 가운데 귀속재산과의 연결이 비교적 선명한 곳이 SK다. SK의 모태인 선경직물은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회사였다. 최종건 SK 창업회장은 경성직업학교를 나온 뒤 선경직물 수원공장에 견습기사로 입사해 제직조장 등을 맡았다. 광복을 맞자 최 창업회장은 한국인 소주주들과 함께 공장 가동에 참여했다. 이후 선경직물은 귀속재산이 됐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공장이 폐허에 가까울 정도로 파괴됐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최 창업회장은 전쟁 중 폐허가 된 공장을 정부로부터 매수했다. 남아 있던 부품을 모아 직기를 복구했고 1953년 선경직물주식회사를 다시 일으켰다. 현재 SK도 1953년 한국전쟁 직후 폐허 속에서 선경직물을 창업한 것을 그룹 역사의 출발점으로 설명한다. 오늘날 반도체·통신·에너지·바이오를 아우르는 SK그룹의 모태에 일본계 기업에서 출발해 정부 귀속을 거친 선경직물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인 셈이다. 다만 이를 단순히 '멀쩡한 일본 기업을 넘겨받았다'고 표현하는 것도 당시 상황과는 거리가 있다. 최 창업회장이 인수한 시점의 선경직물은 한국전쟁으로 상당 부분 파괴된 상태였고 이를 복구해 사업을 다시 일으키는 과정이 뒤따랐다. ◇ 한화도 귀속재산과 직접 연결…화약 독점기업 인수 한화 역시 귀속재산과 그룹의 출발이 직접 연결되는 사례다. 김종희 한화 창업회장은 1942년 조선화약공판에 입사했다. 조선화약공판은 일제가 여러 화약업체의 판매 조직을 통합해 만든 국내 화약 유통업체였다. 광복 직후 김 창업회장은 조선화약공판 지배인에 임명됐고 이후 관리인을 맡았다. 회사는 미군정의 귀속기업으로 관리됐다. 전환점은 1952년이었다. 김 창업회장은 조선화약공판 운영권을 획득한 뒤 같은 해 한국화약을 설립했다. 현재 ㈜한화의 출발이다. 한화가 공개한 그룹 연혁에도 이 과정이 명확하게 남아 있다. 1952년 한국화약 설립에 이어 1953년 '조선화약공판 불하 인수', 1955년 '조선유지 인천 화약공장 불하 매수'가 기록돼 있다. 일본이 구축했던 화약 생산·유통시설이 광복 후 귀속재산이 되고 다시 한국인 기업가에게 넘어가 오늘날 한화의 사업 기반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한화의 성장 역시 자산을 넘겨받는 데서 끝나지는 않았다. 한국화약은 이후 다이너마이트 국산화에 나서 1957년 국내 최초로 다이너마이트 생산에 성공했고, 화약 사업을 기반으로 기계·석유화학을 거쳐 현재 방산·우주항공·에너지·금융 등으로 영역을 확대했다. ◇ 그렇다면 삼성도 '적산기업'?…출발은 달랐다 SK와 한화의 사례를 모든 대기업에 적용하면 문제가 생긴다. 삼성의 출발은 광복 이전인 1938년 이병철 창업회장이 대구에서 세운 삼성상회다. 이후 사업 영역을 넓히며 해방 전부터 독자적인 사업 기반을 형성했다. 이 창업회장이 일본인이 운영하던 조선양조를 인수하는 등 일제강점기 일본인 소유 사업체와 거래하거나 이를 인수한 사례는 존재한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삼성그룹 자체가 광복 후 정부의 귀속기업을 불하받아 출발했다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삼성이라는 기업의 모태가 이미 광복 이전부터 존재했기 때문이다. LG도 비슷하다. 구인회 창업회장은 일제강점기 진주에서 포목상 등 자신의 사업을 운영했다. 광복을 맞은 1945년 부산으로 사업 무대를 옮겨 조선흥업사를 설립했고 이후 화장품 사업을 거쳐 1947년 락희화학공업사를 세웠다. LG 공식 사료에 따르면, 조선흥업사는 당시 군정청으로부터 무역업 허가 제1호를 받아 설립됐다. 이후 화장품과 플라스틱, 전자산업 등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즉 LG 역시 일본인 소유 귀속기업 하나를 불하받은 것이 그룹의 직접적인 출발점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현대도 정주영 창업회장이 일제강점기 자동차 정비업을 시작하고 광복 이듬해인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설립한 뒤 1947년 현대토건을 세우면서 성장한 경우다. 이처럼 현재 주요 그룹들의 출발 경로부터 서로 달랐다. ◇ '적산 수혜'냐 '맨손 신화'냐…전문가 “기업별로 따져봐야" 귀속재산 불하가 해방 이후 산업자본 형성의 한 축을 담당했다는 평가가 있지만, 이를 하나의 잣대로 현재 대기업의 기원과 성장까지 설명하기는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경제사 전문가들은 귀속재산 불하가 광복 직후 부족했던 생산설비와 자본을 민간으로 이전하는 중요한 통로였다는 점과, 이후 개별 기업의 성장 과정을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 한 경제사학계 관계자는 “귀속재산 불하가 해방 이후 한국의 초기 산업자본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면서도 “그렇다고 오늘날 대기업의 성장을 모두 귀속재산 불하의 결과로 설명하는 것도 역사적 과정을 지나치게 단순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기업마다 출발 조건이 달랐고 한국전쟁 이후의 복구와 산업화, 수출 확대 과정에서 기업 간 성패도 크게 갈렸다"며 “귀속재산을 어떤 조건으로 인수했고 이후 어떤 투자와 경영을 통해 사업을 확대했는지 개별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재계에서도 비슷한 반응이 나온다. 한 관계자는 “일본계 기업의 자산을 인수한 것이 현재 그룹의 모태가 된 기업도 있지만 창업자가 광복 이전부터 독자적인 사업을 운영했거나 해방 이후 새롭게 회사를 세운 사례도 있다"며 “현재의 대기업들을 일괄적으로 '적산기업'이라고 규정하기에는 각 그룹의 성장 과정에 차이가 크다"고 말했다. 광복 81년 뒤 주요 그룹의 출발점을 따라가면 서로 다른 경로가 확인된다. 일본계 공장을 인수해 다시 일으킨 기업이 있는가 하면 식민지 시대부터 자신의 사업을 하다 해방 이후 제조업으로 넘어간 기업도 있었다. '적산의 수혜'와 '맨손의 창업 신화'라는 상반된 평가 사이에서 한국 재계의 탄생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결국 개별 기업의 출발과 성장 과정을 각각 들여다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전지성 기자 jjs@ekn.kr

[현장] 50년 무사고 ‘대통령 전용기’…국립항공박물관 야간 개장 속으로

한여름 밤, 붉은 노을이 내려앉은 김포국제공항 인근 항공기 엔진 형상의 국립항공박물관을 배경으로 웅장한 비행기 한 대가 관람객들을 맞이했다. 1974년 우리나라가 대통령 전용기로 도입한 첫 번째 항공기이자 50여 년간 대한민국 공군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운용된 'HS-748(기체 번호 1713)'이다. 국립항공박물관은 특별전 '마지막 비행, 새로운 시작 - 대통령 전용기 HS-748' 개막에 맞춰 지난 12일 저녁, 개관 6년 차 이래 처음으로 특별 야간 개장 행사를 개최했다. 이번 야간 행사에는 175팀이 지원해 단 20팀(56명)만이 선정될 정도로 관람객들의 열기가 뜨거웠다. 기자는 이 특별 여정에 동행해 대한민국 영공을 누빈 HS-748의 발자취와 영웅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봤다. 이날 야외에서는 국토교통부 항공교통관제사 출신인 이광호 국립항공박물관 학예관이 김포공항과 활주로에 얽힌 흥미로운 역사 해설을 진행하며 행사의 깊이를 더했다. 이 학예관은 “이곳 김포공항 부지는 1950년대 6·25 전쟁 때부터 미군이 군용 비행장으로 사용하던 곳으로, 주변에 황토색 지붕으로 된 공군 군사 우체국(APO) 건물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고 소개했다. 아울러 “김포공항에는 2개의 활주로가 있는데, 박물관과 가까운 구 활주로는 길이 3600m에 폭 45m인 반면 건너편 신 활주로는 길이 3200m, 폭 60m로 짧고 더 넓다"며 “항공기가 발달하면서 이착륙 거리는 짧아지는데 비행기 동체는 점차 넓어지는 경향이 있어 이를 수용하기 위해 새로 만들어지는 활주로의 폭이 넓어지는 것"이라고 전문적인 관제 지식을 곁들였다. ◇ 국가의 품격을 더한 '공군 1호기'와 무사고의 심장 전시실 입구에 들어서자 “모든 임무를 마치고 기억의 자리로 오다"라는 문구가 이번 전시의 의미를 묵직하게 전달했다. 우리나라 첫 대통령 전용기는 1950년대 미군으로부터 인수한 C-47이었으나 1970년대 귀빈 공수 임무 전담 비행대대가 창설되며 국가의 품격을 더할 수 있는 전용기가 필요해졌다. 이에 1974년 영국 왕실 전용기로도 사용되며 성능과 안정성을 인정받은 호커 시들리(Hawker Siddeley)의 HS-748이 도입됐다. 본격적인 전시에 앞서 최은정 국립항공박물관 학예사는 “초창기 모델인 C-47은 앞쪽 하단에 무궁화 그림이 있어 '무궁화호'라는 애칭으로도 불렸다"며 “현재 우리나라 대통령 전용기인 공군 1호기는 과거처럼 직접 구입하지 않고 대한항공의 기재를 임차해 운용하고 반납하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고 역사적 배경을 짚었다. 전시장 제원표와 야외 안내판에 표기된 HS-748의 제원도 관람객들의 발길을 사로잡았다. 영국의 항공기 제작사 '호커 시들리'가 생산한 쌍발 프로펠러 여객기인 HS-748은 길이 20.42m(67ft), 날개 길이(폭) 30.02m(안내판 기준 30.2m, 98ft 6in), 높이 7.57m(24ft 10in)이며 기본 무게(Basic Empty Weight)는 1만2882kg이다. 롤스로이스 다트 엔진 2기를 탑재해 417km/h(225kt)의 순항 속도를 낸다. 원래 52인승으로 설계됐으나 대통령 전용기로 도입되면서 26명만 탑승할 수 있도록 개조됐다. 1974년 도입부터 1985년까지 중·단거리 대통령 전용기로 운용됐고 이후 공군 수송 임무를 수행하다 2024년 12월 31일부로 공식 퇴역했다. 전시를 안내한 최 학예사는 “HS-748은 1985년까지 11년간 대통령 전용기로서 'KOREA AIR FORCE 001' 콜사인으로 불리며 임무를 수행했고, 이후 2024년 공식 퇴역할 때까지 공군에서 정부 수송기로 활약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비행기의 심장인 '롤스로이스 다트(Rolls-Royce Dart) 터보 프롭 엔진' 실물이었다. 프로펠러 길이가 4m가 넘는 이 엔진은 짧은 활주로에서도 안정적인 이착륙을 가능하게 했다는 설명이다. 최 학예사는 “조종사와 정비사 모두 입을 모아 엔진의 훌륭함을 칭찬했다. 날개가 길어 만에 하나 엔진에 문제가 생겨도 글라이딩 착륙이 가능할 만큼 튼튼하고 뛰어난 기체였다"고 부연했다. ◇ “정비사의 자랑과 완벽한 임무"…보이지 않는 영웅들의 헌신 전시는 '비행기와 사람들'이라는 주제를 통해 50년 무사고 비행을 이끈 조종사외 정비사, 객실 승무원의 헌신을 깊이 있게 조명했다. 최 학예사는 비행기 정비 방식의 원리를 설명하며 “비행기는 튼튼하면서도 하늘에 무사히 떠야 하기 때문에 견고하고 가벼운 조립이 필요하다. 따라서 무거운 용접이나 접착제 대신 '리벳(rivet)'을 이용해 촘촘히 기체를 조립하는 원리로 정비가 이뤄진다"고 설명했다. '50년 무사고 비행, 정비사의 자랑' 코너에는 우리나라 공군에 도입된 유일한 영국제 항공기였기에 기체 관련 설명서부터 시작해 정비 교본이 모두 영국식 영어로 작성돼 있어 선배들의 노트로 밤낮없이 공부해야 했던 정비사들의 고충과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또한 '안전한 비행, 완벽한 임무'를 위해 갤리에 구비된 핫팟과 오븐으로 정성껏 다과를 준비했던 승무원들의 일화도 돋보였다. 이들은 최종 선발 이후 기내 안전 교육은 물론 비즈니스클래스 객실 서비스 교육까지 철저히 받은 뒤 임무에 투입됐다. 전시장 한편에 마련된 복장과 기내 물품에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어 있었다. 최 학예사는 조종 예복을 소개하며 “현재 1호기 기체는 민항사 기체를 빌려 쓰기에 대한항공의 정복을 입지만, 그 외 고정익이나 헬기 임무를 수행하는 공군 조종사들은 전시된 남색 조종 예복(특수복)과 유사한 옷을 입고 비행에 나선다"고 전했다. 또한 베이지색 승무원복에 대해 “1960년대 초기에는 여자 승무원만 있었고 치마나 원피스를 주로 입었으나, 2010년대부터 남녀 승무원이 모두 임무를 수행하게 됐다. 전시된 의상은 헬기 임무나 추운 날씨에도 안전하고 편안하게 근무할 수 있도록 여자 승무원에게 새로 도입된 바지 정장"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봉황기가 새겨진 기내 서비스 식기를 가리키며 “이런 기내 식기에 밥을 먹으면 한 그릇이 얼마나 예뻤을까 상상하게 된다"며 웃음을 자아냈다. 조종사 코너에서는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당시 수송 임무를 맡았던 조종사가 훗날 교황청으로부터 전달받은 흑백 사진이 관람객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보안상 군 공항에서 사진 한 장 남기기 어려웠던 시절, 철책을 함께한 자신의 '애기(愛機, 아끼고 사랑하는 비행기)'와의 잊지 못할 순간을 간직한 귀중한 사료였다. ◇ “대통령이 이렇게 좁은 곳에?"…찜통 더위 날린 관람객들의 환호 이날 행사의 백미는 야외 전시장에 위치한 HS-748 실물 기체 내부 관람이었다. 보존과 방역상의 이유로 평소 굳게 닫혀 있던 기체의 문이 한시적으로 열리자 관람객들은 신발에 덧신을 씌우고 조심스레 계단을 올랐다. 본래 52인승으로 설계된 내부는 26인승 맞춤형 공간으로 개조돼 있었다. 프로펠러 항공기 특성상 소음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는 기체 맨 뒤쪽에는 넓은 좌석과 테이블이 갖춰진 '하늘 위 집무실(대통령 좌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비록 기내 냉방 시설이 없어 찜통 더위가 이어졌지만 관람객들의 얼굴에는 호기심과 설렘이 가득했다. 가족과 함께 온 관람객 정명옥 씨는 “뉴스에서만 보던 전용기를 실제로 보니 요즘 여객기보다 크기가 아담해 신기했다"며 “노을 지는 활주로 야경이 너무 아름다워 다른 국립 박물관들처럼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야간 개장을 정례화했으면 좋겠다"고 기대감을 내비쳤다. 아들 김진혁 군 역시 “진짜 비행기인가 싶어 가까이 가봤다"며 눈을 반짝였다. '항공 덕후' 아들 시현 군과 함께 온 신윤복 씨는 “비행기의 역사를 훑어보고 실물을 직접 볼 수 있어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평했다. 딸 윤서 양과 함께 방문한 윤세진 씨는 “대통령이 어떻게 이렇게 좁은 곳을 탔을까 상상해보는 것이 신기했다. 여름 방학을 맞아 아이에게 평소 볼 수 없는 전용기를 보여줄 수 있어 즐거웠다"고 만족감을 표했다. 프로펠러 여객기가 생소하고 신기했다는 관람객 임대환 씨의 긍정적인 평가도 이어졌다. ◇ '마지막 비행, 그리고 새로운 시작' 하늘에서의 모든 임무를 마친 HS-748은 국립항공박물관으로 이전하기 위한 대공사를 거쳤다. 안전한 이송을 위해 엔진·프로펠러·날개·동체를 모두 분리한 뒤 공군의 도움과 전문가·보존 과학자들의 손길을 통해 비행기는 지금의 자리에서 새롭게 재조립됐다. 그간 HS-748이 공군에서 무사히 50여 년간 임무를 이어올 수 있었던 원천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 흘린 사람들의 피땀 어린 노력이었다. 탁월한 성능과 사람들의 헌신이 빚어낸 이 항공 문화 유산은 이제 퇴역 기체라는 꼬리표를 떼고 국립항공박물관에서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고 있다. 50여 년 대한민국 영공의 품격을 지켜낸 HS-748 특별전은 국립항공박물관 3층 기획 전시실과 야외 공간에서 무료로 만나볼 수 있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광복절과 재계 ③] 라디오부터 자동차·철강까지…한국 산업의 ‘국산화 81년’

1959년 11월 국내 최초의 국산 라디오가 세상에 나왔다. 금성사, 현재 LG전자가 만든 진공관식 라디오 'A-501'이었다. 지금은 평범한 전자제품처럼 보이지만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 사용하는 라디오 대부분을 외국 제품에 의존하던 시절이었다. A-501은 현재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국가유산청은 이 제품의 제작 시기를 1959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광복 이후 한국 산업의 역사는 어쩌면 이런 '처음'들의 연속이었다. ◇ 1959년 라디오, 1973년 쇳물, 1975년 자동차 금성사는 라디오에서 멈추지 않았다. 1960년 국내 최초 국산 선풍기를 생산했고 1966년에는 국내 최초 흑백TV를 개발·생산했다. 전자제품을 수입해서 쓰던 나라가 직접 만들어 쓰는 나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철강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1968년 포항종합제철이 출범했다. 자본도 기술도 부족한 상황에서 일관제철소 건설에 나선 지 5년 만인 1973년 6월9일 포항 1고로에서 첫 쇳물이 쏟아졌다. 포스코는 당시의 창업정신을 '제철보국'으로 설명한다. 철강을 직접 생산해 자동차·조선·건설 등 다른 산업이 성장할 기반을 만들겠다는 의미였다. 2년 뒤에는 한국 자동차 산업의 상징적인 제품이 등장했다. 1975년 12월 생산을 시작한 현대자동차 '포니'다. 현대차가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고유모델 승용차'라고 소개하는 차량이다. 디자인은 이탈리아의 조르제토 주지아로에게 맡기고 일부 핵심 부품과 기술은 해외에서 들여왔지만 국산화율을 크게 높였다. 처음부터 모든 기술을 국내에서 개발한 자동차라기보다 해외 기술을 흡수하면서 독자적인 자동차 산업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였던 셈이다. ◇ '못 만들던 나라'에서 세계시장 경쟁자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국산화의 의미도 달라졌다. 처음에는 해외에서 완제품을 들여오지 않고 국내에서 직접 생산하는 것 자체가 목표였다. 이후에는 부품과 소재, 생산설비를 자체 개발하는 단계로 넘어갔다. 조선도 마찬가지다. HD현대중공업은 1972년 조선사업을 시작했다. 조선소가 완공되기도 전에 초대형 유조선을 수주해 건조하는 이른바 '현대중공업 신화'를 만들었고, 설립 10년 만에 세계 1위 조선소로 올라섰다. 현재도 HD현대중공업은 조선·대형엔진 부문 세계 1위 기업이라고 밝히고 있다. 한화의 역사도 국산화와 맞닿아 있다. 1952년 한국화약으로 출발해 산업 인프라 건설에 필요한 화약 국산화에 나섰고 1957년 국내 최초로 다이너마이트를 국산화했다. 1959년에는 공업용 화약 자체생산 체제를 갖췄다. 이렇게 쌓인 제조업 기반 위에서 한국은 이후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 배터리 등으로 산업 영역을 확대했다. ◇ 81년 뒤 '기술독립'의 대상이 바뀌었다 2026년 한국 기업들이 고민하는 국산화는 1950~1970년대와 성격이 다르다. 라디오나 자동차 같은 완제품을 국내에서 만들 수 있느냐는 단계는 이미 지났다. 이제 경쟁은 인공지능(AI), 첨단 반도체 장비·소재, 차세대 배터리, 로봇, 소형모듈원자로(SMR) 등으로 이동하고 있다. 반도체 하나만 해도 완제품 생산능력만으로 기술자립을 말하기 어렵다. 설계 소프트웨어부터 제조장비와 소재, 첨단 패키징까지 세계 각국의 기업이 하나의 공급망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기술독립'은 모든 것을 국내에서 만드는 과거식 국산화와도 거리가 있다. 핵심 기술을 확보하면서도 글로벌 공급망에서 다른 국가와 기업이 쉽게 대체할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1959년 국산 라디오 한 대에서 시작한 도전은 1970년대 쇳물과 자동차, 조선소를 거쳐 반도체와 배터리로 이어졌다. 광복 81년을 맞은 한국 산업의 질문도 달라졌다. 과거의 질문이 '우리 손으로 만들 수 있는가'였다면 이제는 '세계가 필요로 하는 기술을 우리가 갖고 있는가'다. 전지성 기자 jjs@ekn.kr

“경쟁은 남기고 피로도는 낮춘다”…‘제우스’ vs ‘이클립스’

국내 게임업계의 신작 다중접속역할수행게임(MMORPG) 경쟁에 불이 붙었다. 컴투스가 오는 26일 '제우스: 오만의 신'을 선보이는 데 이어 스마일게이트도 다음 달 '이클립스: 더 어웨이크닝'을 출시한다. 두 게임 모두 기존 MMORPG의 핵심 재미인 성장과 경쟁은 유지하면서도 이용자들이 MMORPG에서 느끼는 '플레이 피로도'를 낮추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어 주목된다. ◇ 신작 MMORPG 맞대결 '시동' 15일 게임업계에 따르면 컴투스의 MMORPG '제우스: 오만의 신'(이하 제우스, 개발사 에이버튼)이 오는 26일 정식 출시를 앞두고 사전 예약을 진행하고 있다. '제우스'는 그리스 신화를 배경으로 한 MMORPG로, 모바일과 PC 크로스플랫폼을 지원한다. 최고신 제우스를 중심으로 세력 간 협력과 대립, 다양한 성장 시스템 등을 핵심 콘텐츠로 내세운다. 특히 '모두를 위한 MMORPG'를 표방하며 이용자가 각자의 성장 속도에 맞춰 경쟁의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제우스'와 맞대결이 예상되는 작품은 스마일게이트의 '이클립스: 더 웨이크닝'(이하 이클립스, 개발사 엔픽셀)이다. '이클립스'는 현재 사전등록을 진행 중이며, '제우스'가 출시되고 약 보름 후인 9월 10일을 정식 출시일로 잡았다. '이클립스'는 신의 축복 아래 번영한 세계 '에데리온'과 그 이면의 세계 '오르테아', 그리고 교단의 절대적 질서 속에서 피어나는 인간의 자유 의지와 각성을 그린다. MMORPG 장르 본연의 성장과 경쟁의 재미를 유지하면서 플레이 부담을 낮춘 'MMO라이트(Lite)'를 지향한다. ◇ “경쟁의 재미는 그대로, 플레이 부담은↓" 두 작품의 공통점은 '경쟁을 없애지 않으면서도 경쟁에 따른 피로도를 어떻게 낮출 것인가'에 있다. 다만 접근 방식은 다르다. '제우스'가 이용자가 경쟁의 시점과 강도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면, '이클립스'는 접속 시간과 전투 부담 자체를 줄이는 방식으로 MMORPG를 가볍게 만들었다. 먼저 '제우스'는 이용자가 직접 경쟁에 뛰어드는 시점과 강도를 선택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인공지능(AI)을 통해 이용자들이 자신의 스펙에 맞춰 경쟁의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하고, 계층 간 격차가 지나치게 벌어지지 않도록 시스템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을 제시했다. '이클립스'의 경우 방치형 시스템을 도입해 MMORPG의 긴 경쟁에 따른 유저 피로도를 줄이는 데 집중했다. 이용자는 '성소' 시스템을 통해 게임에 접속하지 않은 시간에도 성장 재화와 경험치 등을 축적할 수 있다. 또 과금 측면에서도 피로도를 줄였고, 게임 내 안전 지역의 범위를 넓혀 이용자 간 전투(PvP)에 대한 부담을 줄였다. 세력 간 전투(RvR) 콘텐츠의 경우에도 플레이타임을 10분 내외로 설정해 경쟁의 강도를 조절했다. 두 게임의 맞대결은 단순한 신작 MMORPG 간 흥행 경쟁을 넘어, 새로운 MMORPG 문법이 시장에서 통할지를 가늠하는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경쟁의 강도를 낮추면서도 MMORPG 특유의 성장과 협력, 경쟁에서 오는 재미를 얼마나 살려내느냐가 관건이다. '제우스'와 '이클립스'가 각각 다른 방식으로 제시한 '덜 피곤한 MMORPG' 가운데 어떤 형태가 이용자의 선택을 받을지 주목된다. 정희순 기자 hsjung@ekn.kr

[광복절과 재계 ②] 1945년에도 삼성은 있었을까…지금의 대기업들 찾아보니

삼성은 1945년 8월15일 광복 당시에도 존재했을까. 현대와 LG, SK는 어땠을까. 지금은 한국 경제를 대표하는 대기업들이지만 시계를 81년 전으로 돌리면 모습은 전혀 달라진다. 어떤 기업은 이미 장사를 하고 있었고, 상당수 그룹은 이름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현재 주요 그룹의 역사를 광복 당시로 되돌려봤다. ◇ 삼성은 있었다…반도체 아닌 식품 팔던 '삼성상회' 삼성의 역사는 광복보다 7년 빠르다. 이병철 창업회장은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설립했다. 오늘날 삼성그룹의 출발점이다. 삼성에 따르면 삼성상회는 대구에서 식품 등을 중국 만주와 베이징 등에 수출하는 사업을 했다. 따라서 1945년 8월15일 당시 삼성은 창업 7년차였다. 다만 지금의 삼성전자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삼성전자가 만들어진 것은 1969년이다. 반도체와 스마트폰은커녕 전자산업 진출 자체가 광복 이후 20여년이 지나서야 이뤄졌다. ◇ 현대의 뿌리는 자동차 정비소 정주영 현대 창업회장의 사업 역사는 광복 이전부터 시작됐다. 정 창업회장은 1940년 자동차 정비소 '아도서비스'를 설립했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사업에 처음 '현대'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듬해에는 현대토건을 설립했다. 현재의 현대자동차는 1967년 출범했고, HD현대의 뿌리인 현대중공업의 조선사업은 1972년 시작됐다. ◇ LG·SK·한화는 모두 광복 이후 태어났다 LG의 출발은 광복 2년 뒤다. 구인회 창업회장이 1947년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했다. 첫 사업 가운데 하나가 화장품이었다. 1958년에는 금성사를 세우면서 전자산업에 뛰어들었다. 오늘날 LG화학과 LG전자의 모태다. SK의 출발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이다. 최종건 창업회장이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선경직물 공장을 복구하면서 그룹의 역사가 시작됐다. 한화 역시 전쟁 이후 탄생했다. 김종희 창업회장이 1952년 한국화약을 설립했다. 당시 국가 인프라 건설에 필요한 산업용 화약을 국산화했고, 1957년 국내 최초로 다이너마이트 국산화에 성공했다. ◇ 롯데도 없었다…신격호는 일본에 롯데 역시 광복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신격호 창업회장은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공부와 일을 병행했다. 광복 이후에도 일본에 남아 사업을 시작했고 1948년 일본 롯데를 세웠다. 한국에서 롯데제과를 설립한 것은 1967년이다. 포스코는 더 늦다. 포항종합제철은 1968년 창립됐다. 자본도 기술도 부족했던 상황에서 일관제철소 건설에 나섰고, 1973년 6월9일 포항 1고로에서 처음 쇳물을 뽑았다. ◇ 81년 뒤 세계 산업의 한복판으로 광복 당시 존재했던 기업도, 이후 태어난 기업도 출발점은 지금과 크게 달랐다. 삼성은 식품 무역에서 반도체·스마트폰으로, 현대는 자동차 정비에서 자동차·건설·조선으로 영역을 넓혔다. LG는 화장품과 플라스틱에서 전자·배터리·AI로, SK는 직물에서 반도체·통신·에너지로 성장했다. 한화의 산업용 화약은 방산·우주항공으로 이어졌고, 1972년 울산의 작은 어촌에서 시작한 HD현대의 조선사업은 세계 최대 규모의 조선업체로 성장했다. 81년 전 광복 당시의 기업 지도를 현재와 겹쳐놓으면 한국 산업이 얼마나 짧은 시간에 바뀌었는지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1945년에는 이름조차 없었던 기업 상당수가 이제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 배터리, 방산 등 세계 산업의 중심에서 경쟁하고 있다. 전지성 기자 jjs@ekn.kr

‘케이크 맛집’ 된 벤츠, ‘커피 맛집’ 된 BMW…자동차 회사들의 취향 저격 변신

“딱 백원 모자라서 벤츠는 못 사고 치즈케이크만 먹고 왔습니다" 요즘 성수에서는 이 농담이 꽤나 그럴듯하게 들린다. 자동차를 보러 간 공간에서 케이크를 먹고, 커피를 마시고, 전시를 즐기는 경험이 자동차 회사들의 새로운 마케팅이 됐다. 이제 경쟁 무대는 도로 위를 넘어 카페와 전시, 패션과 미식의 영역으로 넓어지고 있다. 자동차를 파는 회사에서 자동차가 상징하는 취향과 라이프스타일까지 함께 제안하는 브랜드로 진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는 지난 10일 손종원 셰프와 협업한 '1886 독일 치즈케이크'를 서울 성수동 '메르세데스-벤츠 스튜디오 서울'에서 단독 판매하기 시작했다. 1886년 칼 벤츠가 특허를 출원한 세계 최초 자동차 '페이턴트 모터바겐'에서 영감을 받아 개발한 디저트로, 브랜드의 역사와 독일 헤리티지를 '먹는 경험'으로 풀어낸 사례다. 지난 5월 문을 연 메르세데스-벤츠 스튜디오 서울은 차량 전시뿐 아니라 카페와 브랜드 컬렉션,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복합 라이프스타일 공간이다. 개관 이후 누적 방문객은 6만6000명을 넘어섰다. 벤츠 코리아는 스튜디오 서울을 '브랜드의 역사와 가치를 일상 속 다양한 경험으로 확장하는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BMW도 비슷한 전략을 펼치고 있다. 인천 영종도 BMW 드라이빙센터에는 커피와 브런치 메뉴를 판매하는 카페와 레스토랑, 라이프스타일 숍이 함께 운영되며 차량 전시와 시승을 넘어 브랜드를 체험하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BMW M FEST 2026'을 열어 전시와 드라이빙 체험뿐 아니라 패션·공연·푸드존 등 라이프스타일 콘텐츠를 결합한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현대자동차도 체험형 마케팅을 강화하고 있다. 현대차는 지난 7월 서울 성수동 인포멀 스퀘어에서 '더 뉴 그랜저 테크 팝업 스토어'를 열고 차세대 하이브리드 시스템과 플레오스 커넥트, 스마트 비전 루프 등 주요 기술을 전시와 체험 콘텐츠 형태로 공개했다.연구원들이 직접 기술 개발 과정을 설명하고 방문객이 전시를 체험한 뒤 SNS 인증 이벤트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기아 역시 지난해 EV4 출시 당시 패션 플랫폼 무신사와 협업한 'EV4랑 무신사랑 스타일링 합니다' 캠페인을 진행했다. 성수동 '기아 언플러그드 그라운드'에서는 EV4 전시와 함께 패션 쇼케이스, 스타일링 토크쇼, 쇼룸 전시 등을 열며 자동차와 패션을 결합한 체험형 콘텐츠를 선보였다. 이렇듯 자동차 판매 경쟁에 브랜드 경험 경쟁이 더해지고 있다. 소비자에게 자동차 성능과 가격을 설명하는 데서 나아가 브랜드가 상징하는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먼저 경험하게 하는 전략이다. 과거 자동차 마케팅이 광고 모델과 전시장 중심이었다면 최근에는 셰프·패션 브랜드·아티스트와 협업해 브랜드를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 체험하게 하는 방향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메르세데스-벤츠와 현대차, 기아 등이 성수를 중심으로 브랜드 공간과 팝업, 문화 콘텐츠를 잇달아 선보이는 것도 같은 흐름이다. 카페와 전시, 패션과 팝업스토어가 결합된 성수의 소비 문화가 자동차 회사들의 마케팅 전략과 맞물리면서 새로운 고객 접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흐름을 '취향 소비'와 '경험 소비' 확산의 결과로 보고 있다. 이은희 인하대학교 소비자학과 교수는 “체험형 공간은 소비자들이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면서 자발적으로 브랜드를 확산시키는 효과가 있다"며 “잘 만든 광고 한 편보다 소비자가 직접 올린 게시물이 더 신뢰를 얻는 경우가 많고, 브랜드가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메시지보다 훨씬 깊은 경험으로 받아들여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동차 회사들이 셰프와 협업하고 카페와 전시 공간을 만드는 것은 단순히 차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동차를 타는 것 이상의 경험과 감정을 제안하는 것"이라며 “승차감이나 기능을 강조하는 광고와 달리 자동차를 통해 연상되는 라이프스타일 전체를 경험하게 하는 전략"이라고 했다. 박서현 기자 shine@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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