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비무환(有備無患). 미리 대비하면 뒤에 닥칠 근심을 덜 수 있다는 오래된 지혜다. 요즘 ESG를 둘러싼 논쟁을 보고 있으면 이 네 글자가 새삼 떠오른다. 기업 입장에서 ESG는 당장 돈이 들어가는 비용일까. 아니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기를 견디기 위해 평소 내는 보험료일까. 시장 분위기만 보면 ESG의 전성기는 지나간 것처럼 보인다. 로이터가 시장조사업체 모닝스타 자료를 인용해 보도한 데 따르면, 2026년 2분기 유럽에서 새로 출시된 지속가능펀드는 13개에 그친 반면 64개가 폐쇄됐다. 미국도 신규 출시는 3개, 폐쇄는 22개였다. 수익률에 대한 실망과 정치적 반발, 그린워싱 논란이 겹쳤다. 그런데 더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금융업계가 지속가능성을 설명하는 말을 '세상을 바꾸는 투자'에서 '회복력'과 '에너지안보' 쪽으로 옮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 변화는 세계가 처한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최근 중동의 충돌과 호르무즈 해협의 불안은 에너지 수입국에 공급망의 취약성을 다시 일깨웠다. 로이터는 최근 에너지안보의 해법을 특정 에너지원이나 특정 지역에 다시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원과 공급 경로를 함께 다변화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고 분석했다. 경제학자 프랭크 나이트는 1921년 '위험, 불확실성 및 이윤'에서 확률을 계산할 수 있는 '위험'과 그 확률조차 제대로 알기 어려운 '불확실성'을 구분했다. 지금 기업이 마주한 세계는 후자에 가깝다. 언제 전쟁이 터지고, 어느 항로가 막히며, 폭염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정확히 계산하기 어렵다. 울리히 벡이 말한 '위험사회'도 이런 세계를 설명한다. 현대의 위험은 국경과 산업의 울타리 안에 머물지 않는다. 한 지역의 전쟁이 원유와 LNG 가격을 흔들고, 폭염이 전력수요와 노동생산성을 동시에 건드린다. 한 기업의 공급망 문제가 다른 나라의 공장 가동까지 멈출 수 있다. 이쯤 되면 환경과 안전, 노동, 공급망, 지배구조를 따로 떼어 보는 것 자체가 현실과 어긋난다. 최근 실증연구도 ESG의 가치를 단순한 선악의 문제보다 위험관리의 관점에서 다시 살펴보고 있다. 누르마사리(Nurmasari) 등 연구진이 2026년 'Economic Studies'에 발표한 연구는 2015~2023년 인도네시아 기업의 411개 기업-연도 자료를 분석했다. 평상시에는 ESG와 기업 시장가치 사이에 음(-)의 관계가 나타났지만, 연구진이 코로나19 위기 국면으로 설정한 기간에는 ESG가 시장가치 하락을 완충하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다만 모든 성과지표에서 같은 효과가 확인된 것은 아니었다. 단기 주식수익률에서는 뚜렷한 방어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모라브초바(Moravcová)와 스클라다나(Skládaná)가 2026년 'Journal of Economics'에 발표한 연구에서는 다른 모습이 나타났다. Euro Stoxx 50 기업을 분석한 결과, ESG 평가가 높은 기업이라고 해서 전쟁 발발 직후 주가를 반드시 더 잘 방어한 것은 아니었다. 전체 ESG 점수보다 사회(S) 부문에서 고평가 기업과 저평가 기업 사이의 시장반응 차이가 상대적으로 뚜렷했다. 여기서 한 가지가 분명해진다. ESG는 만능 보험이 아니다. 위기의 성격에 따라 필요한 역량이 달라진다. 감염병에는 노동자 안전과 공급망의 신뢰가 중요할 수 있고, 에너지 위기에는 조달선 다변화와 에너지 효율, 자체적인 위험관리 능력이 더 중요해진다. 기후재난을 견디는 공장과 전력망에 필요한 능력은 또 다르다. 이 문제는 남의 일이 아니다. 한국의 수출 제조기업들도 공급망 재편, 탄소규제, 노동·인권 기준과 에너지가격 변동을 동시에 감당해야 한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7월 지속가능성 공시 제도화 방안 최종안을 발표하고, 2028년(FY2027)부터 연결자산총액 10조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를 시작으로 의무공시를 시행한 뒤 2029년에는 5조원 이상 기업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그러나 공시 일정만 준비해서는 부족하다. 철강·반도체·배터리 같은 수출 제조기업에는 전력조달과 탄소비용, 공급망 안정성이 이미 경영의 핵심 변수가 됐다. 데이터센터 역시 계통 접속과 안정적인 전력 확보가 사업의 전제가 되고 있다. ESG 보고서를 잘 만드는 것과 위기를 견디는 기업을 만드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그래서 질문을 바꿀 때가 됐다. “ESG를 하면 돈을 더 버는가"보다 “어떤 ESG가 어떤 위기에서 기업을 지켜주는가"를 물어야 한다. 평상시에는 비용처럼 보이는 투자도 위기의 순간 손실을 줄이고 회복시간을 단축한다면 의미는 달라진다. 유비무환의 지혜는 오래됐지만 기업경영의 현실은 오히려 그쪽으로 가고 있다. ESG의 가치는 좋은 이름에 있지 않다. 위기가 왔을 때 실제로 작동하느냐에 있다. *이창언 우석대학교 미래융합대학 창업컨설팅학과 교수 / 우석대 일반대학원 ESG·공공정책학과 주임 교수 / 우석대 ESG 국가정책연구소 소장 송민규 기자 songmg@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