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항공대 서인원 교수 “항공사 옥죄는 ‘규제’는 결국 소비자 권리 저해”

[인터뷰] 항공대 서인원 교수 “항공사 옥죄는 ‘규제’는 결국 소비자 권리 저해”

[인터뷰] 항공대 서인원 교수 “항공사 옥죄는 '규제'는 결국 소비자 권리 저해" 국제 항공 여객 운송은 태생적으로 다수의 국경과 관할권을 횡단한다. 1929년 제정된 바르샤바 협약과 1999년 제정된 몬트리올 협약은 국경을 넘나드는 항공운송을 통일적으로 규율하며, 항공법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최근 전 세계 규제 지형이 요동치고 있다. 지난 5월 바하마 나소에서 열린 제4차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민간 항공 법률 자문가 포럼(CALAF, Civil Aviation Legal Advisers Forum)을 관통한..

[이슈&인사이트] AI 시대, 왜 다시 가스터빈인가

반도체가 AI의 두뇌라면, 전기는 혈액이다. 아무리 뛰어난 두뇌도 혈액이 공급되지 않으면 제 기능을 할 수 없듯, AI도 전력 없이는 단 한 번의 연산도 수행할 수 없다. AI 시대의 경쟁력은 더 이상 반도체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이제는 안정적인 전력을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시대가 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최근 발표한 Energy and AI 보고서에서 전 세계 데이터센터의 전력소비가 2030년 약 945TWh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현재 일본 전체의 연간 전력소비량을 넘어서는 규모다. 우리나라도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와 AI 데이터센터 구축이 본격화되면서 막대한 전력 수요가 예상된다.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기술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확보하고도 이를 뒷받침할 전력을 적기에 공급하지 못한다면 국가 경쟁력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막대한 전기를 무엇으로 공급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재생에너지와 원자력을 해법으로 제시한다. 탄소중립과 에너지 안보를 고려하면 두 전원 모두 앞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그러나 AI 시대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현실이 되었고, 기존의 전력 수급 전망은 근본적으로 다시 쓰이고 있다. 원자력은 건설과 송전망 확충에 긴 시간이 필요하고, 재생에너지는 자연조건에 따라 출력이 달라진다. 에너지저장장치(ESS) 역시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급증하는 전력 수요를 단기간에 모두 감당하기에는 아직 한계가 있다. 문제는 새로운 전원을 확충하는 속도보다 AI가 전기를 요구하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는 데 있다. 이러한 변화는 이미 미국에서 현실이 되고 있다. 최근 셰브론(Chevron),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GE 버노바(GE Vernova)는 텍사스에서 약 2.67GW 규모의 가스발전 설비를 AI 데이터센터와 함께 구축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기존 송전망 확충을 수년씩 기다리기보다 발전설비와 데이터센터를 동시에 구축해 필요한 전력을 직접 공급하는 방식이다. 일본 역시 원자력과 재생에너지 확대를 추진하면서도 고효율 가스터빈 발전을 적극 활용하고 있으며, 유럽도 재생에너지 확대와 함께 전력계통의 유연성을 높일 수 있는 다양한 전원을 확보하는 데 정책의 무게를 두고 있다. 이들 국가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원자력과 재생에너지를 확대하면서도 AI 시대의 급증하는 전력 수요를 두 전원만으로 감당하기는 어렵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느 나라도 특정 발전원에 의존하지 않고, 가스터빈을 포함한 다양한 전원을 조화롭게 활용하는 방향으로 미래 전력시스템을 설계하고 있다. 역설적인 사실은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아질수록 오히려 가스터빈의 가치가 더욱 커진다는 점이다. 전기는 생산과 소비가 거의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 에너지다. 태양광 출력이 갑자기 감소하거나 풍속이 변하면 그 부족분을 즉시 보충할 발전원이 필요하다. 가스터빈은 안정적인 전력을 공급하는 동시에 출력을 빠르게 조절할 수 있어 산업단지와 AI 데이터센터의 주전원으로 활용될 뿐 아니라, 재생에너지 비중이 높아질수록 전력계통의 균형을 유지하는 중요한 조정전원의 역할도 수행한다. 다시 말해 가스터빈은 재생에너지의 경쟁자가 아니라, 재생에너지가 더욱 안정적으로 활용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핵심 기반시설인 셈이다. 기술적 장점도 분명하다. 가스터빈은 수십 메가와트 규모의 분산형 발전부터 대규모 복합발전까지 폭넓게 적용할 수 있으며, 최신 대형 가스터빈 두 기를 활용한 복합발전은 약 1.2~1.4GW 규모의 전력을 생산해 원자력발전소 한 기에 버금가는 전력 공급도 가능하다. 또한 발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폐열을 산업용 증기나 지역난방에 활용하는 열병합발전을 적용하면 총 에너지 이용효율은 약 90%까지 높아질 수 있다. 같은 연료로 전기와 열을 동시에 생산하는 대표적인 고효율 에너지 시스템이다. 물론 천연가스를 사용하는 가스터빈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 하지만 이미 상용화된 고효율 복합발전과 열병합발전의 장점을 적극 활용하고, 수소 혼소와 탄소포집(CCS) 기술을 단계적으로 확대한다면 탄소 배출을 줄이면서도 AI 시대에 필요한 안정적인 전력을 현실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강점이 있다. 우리나라는 미국, 독일, 일본, 이탈리아에 이어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대형 발전용 가스터빈 독자 기술을 확보한 나라다. 발전용 가스터빈과 전투기·무인기 등에 사용되는 항공엔진은 동일한 가스터빈 기술을 기반으로 하며 핵심 원리와 요소기술을 공유한다. 가스터빈은 전력설비를 넘어 항공우주와 방위산업까지 뒷받침하는 국가 전략기술인 것이다. AI 시대의 에너지 정책은 어느 한 전원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발전원의 장점을 어떻게 균형 있게 조합할 것인가의 문제다. 원자력과 재생에너지, 그리고 가스터빈이 각자의 강점을 살려 상호 보완적으로 활용될 때 우리는 AI 시대의 폭발적인 전력 수요와 탄소중립이라는 두 과제를 함께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EE칼럼] 한국이 AIDC 걸음마도 못떼는 사이, 중국은 저멀리 달아나고 있다

지금 세계는 격렬하게 AI 세상을 향해 재편되고 있다. 우리는 반도체 주식의 레버리지 논쟁을 하는 사이에 이미 미국과 중국은 국가의 생존을 건 AI 주권 경쟁 중이다. 대한민국의 현주소는, 지역균형 발전, 수도권 규제, 지역 반발, 발전원 차별, 전력계통 부담, 주민 수용성 논쟁, 복잡한 규제로 인하여 AI 데이터센터(AIDC) 한 동 짓는 데 수년을 소모하고 있다. 그 사이 중국은 이미 저멀리 날아올라 도망가고 있다. 지난 7월 문샷AI(Moonshot AI)가 공개한 Kimi K3는 그 상징적 신호탄이다. 파라미터 2조 8,000억 개의 초거대 오픈소스 모델로, 아레나AI의 웹 개발 평가에서는 앤스로픽의 Claude Fable 5와 OpenAI의 GPT-5.6 Sol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Artificial Analysis 종합지능지수에서도 세계 4위, 발스AI 종합평가 2위를 기록했다. 미국산 AI를 이용한 증류에 대한 논쟁이 있지만, 미국이 최신 AI 반도체 수출을 전면 통제하는 상황에서 저성능 중국산 칩만으로 세계 최고 수준 모델을 만들어낸 것이다. 미·중 성능 격차가 사실상 좁혀지고 뒤집힐 수도 있다는 충격적 사건이다. 중국은 왜 날아오르는가? 첫째, 국가 주도의 인프라 폭격이다. 중국은 2026년 6월 블룸버그가 확인한 대로 향후 데이터센터 구축에만 약 2,950억 달러(2조 위안) 규모의 국가계획을 편성했다. '동수서산(東數西算)' 전략을 통해 서부 사막에 초대형 컴퓨팅 클러스터를 조성하고, 동부 산업지대와 광통신망으로 통합한다. 우리가 '어디에 지을지'를 놓고 다투는 동안, 그들은 '얼마나 더 지을지'를 논한다. 둘째, R&D에 대한 국가의 무한 베팅이다. 중국 과기부는 AI 기초연구·모델 아키텍처·반도체 자립화에 이르는 全 밸류체인에 조 단위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실패해도 다시 시도할 수 있는 '탄약'을 국가가 대주는 것이다. 한국의 R&D 예산은 반대 방향으로 삭감된 뒤 뒤늦게 복원 논의 중이다. 셋째, AI 인재에 대한 파격 대우다. 문샷AI, 딥시크, 지푸(智譜)의 핵심 엔지니어 다수는 20~30대다. 정부는 이들에게 세제 감면·주거·연구비를 패키지로 제공한다. 반면 한국은 AI 박사급 인재의 순유출국(純流出國)이다. 대학은 인건비 상한에 묶이고, 기업은 스톡옵션 규제에 발목이 잡힌다. 유능한 인재들을 지방으로 이전하라고 내몰고 있다. 넷째, 프라이버시를 넘어선 데이터 확보다. AI가 학습할 데이터를 국가가 무제한으로 공급한다. 자유민주주의 관점에서 무섭지만 AI는 그 양분을 충분히 먹고 자라고 있다. 우리도 산업경쟁력 관점에서는 데이터 활용을 냉정하게 봐야 한다. 중국은 14억 인구의 의료·교통·산업·소비 데이터를 사실상 국가자산으로 활용한다. 우리는 개인정보보호법·의료법·마이데이터 규제가 서로 충돌하며 AI 학습용 데이터의 물길 자체가 막혀 있다. 데이터가 없는 AI는 연료 없는 엔진이다. 다섯째, 기업 주도의 규제 완화다. 중국은 기업이 먼저 뛰고 정부가 뒤에서 규제를 정리한다. 미국 역시 '허가받고 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다가 조정하는' 사후규제형이다. 한국은 정부 주도로 사전 인허가·환경영향평가·계통영향평가·지자체 동의를 순차적으로 통과해야 한다. AIDC 특별법은 절름발이에 불과하다. 여전히 대부분의 절차가 AI를 위한 철저한 '완화'가 아닌 뒷다리 잡기 수준에 머문다. 속도가 곧 경쟁력인 시대에 이는 치명적이다. 여섯째, 전기요금이 사실상 공짜다.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 보도에 따르면, 중국 지방정부는 국산 AI 칩을 사용하는 데이터센터에 산업용 전기요금을 최대 50%까지 할인해 준다. 젠슨 황 엔비디아 CEO 역시 “중국은 전기료가 사실상 무료"라며 미국의 규제 완화를 촉구했다. 반면 한국의 산업용 전기요금은 지난 2년간 인상을 거듭했고, 데이터센터 전용요금에 대한 논의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데이터센터에는 오히려 PPA 등이 허용되지도 않으면서 공공 그리드망을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발전소를 짓지 않는 나라가 산업혁명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듯, AIDC를 짓지 않는 나라는 지능혁명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왜 우리 동네에 짓느냐"는 지역 정치와, “재생에너지 100%가 아니면 안 된다"는 이념적 잣대로 스스로의 발목을 묶고 있다. 과거 경부고속도로가 반대에도 불구하고 놓였기에 오늘의 한국 제조업이 있었다. AIDC와 그 기반이 되는 인프라와 저렴한 전기요금 체계는 오늘의 고속도로다. 실속없는 이념이 아니라 미래 경제성장과 경제주권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조홍종

[기자의 눈] ‘17억 근저당’이 드러낸 대출 규제의 두 얼굴

정부가 다주택자와 비거주 1주택자, 초고가주택 보유자의 세 부담을 높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도 “불법과 편법이 동원된 부동산 불로소득을 뿌리 뽑겠다"며 조세제도를 국민 눈높이에 맞게 재정비하겠다고 강조했다. 그런 가운데 대통령 부부의 분당 아파트 매각 방식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 29억원에 매매계약을 체결하고 대금을 모두 지급받기 전에 소유권을 넘겨주면서, 매수인을 채무자로 한 채권최고액 17억7700만원의 근저당권을 설정했기 때문이다. 야당은 대출 규제를 우회한 '셀러 파이낸싱'이라고 비판했고, 여당과 청와대는 미지급 잔금을 확보하기 위한 적법한 안전장치라고 반박했다. 우선 17억7700만원은 실제 미지급 잔금이 아니라 근저당권의 채권최고액이다. 금융기관이 실제 대출금보다 채권최고액을 높게 설정하는 관행을 고려하면 실제 채권액은 이보다 적을 가능성이 크다. 구체적인 잔금 규모와 상환기한은 계약 내용이 공개돼야 확인할 수 있다. 거래를 서두를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해당 아파트는 신탁방식 재건축 사업시행자 지정고시를 앞두고 있었다. 고시 이후 소유권이 이전되면 매수인이 조합원 지위를 승계하지 못하고 현금청산 대상이 될 수 있어 먼저 등기를 마칠 필요가 있었다는 설명이다. 이를 단순한 '핑계'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논란이 모두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수도권·규제지역에서 시가 25억원을 초과하는 주택의 구입 목적 주담대 한도는 2억원이다. 일반 매수자가 금융권을 통해 조달할 수 없는 자금을 매도인이 잔금 유예 형태로 제공했다면 경제적으로 신용을 공여한 효과가 발생한다. 불법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대출 규제의 정책적 효과를 우회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여지는 충분하다. 특히 이런 방식은 누구에게나 가능한 선택이 아니다. 대부분의 1주택자는 매각 잔금으로 다음 집의 대금을 치러야 한다. 10억원대 잔금을 받지 않고 소유권부터 넘겨줄 수 있는 매도자는 제한적이다. 강한 대출 규제가 현금 부자에게는 낮은 문턱이 되고 자금력이 부족한 실수요자에게만 높은 장벽이 되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한다. 보유세 강화도 같은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보유에 따른 편익에 상응하는 세금을 부담시키는 것은 조세 형평성에 부합한다. 그러나 세금만으로 집값을 잡을 수 있다고 장담해서는 안 된다. 과도한 세 부담은 매물 잠김이나 임대료 전가를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 비거주 1주택자의 불가피한 사정을 어떻게 구분할지, 초고가주택을 실거래가격과 공시가격 중 무엇으로 판단할지도 아직 명확하지 않다. 대통령실은 실제 미지급 잔금과 상환기한, 무이자 약정 여부와 세무 처리 방침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적법한 거래라면 투명한 공개가 논란을 끝내는 가장 빠른 길이다. 국민에게는 대출을 엄격히 제한하면서 정책 최고 책임자의 거래에서는 다른 자금조달 통로가 활용됐다면, 그 차이를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 역시 대통령의 책임이다. 장혜원 기자 dalgu@ekn.kr

[기자의 눈] 제조업 뿌리 흔드는 전기료…‘기후 대의’와 ‘생존’ 사이

한국과 중국의 산업용 전기요금은 킬로와트시(kWh)당 각각 180원대와 120원대로 큰 격차를 보인다. 이러한 요금 차이는 글로벌 시장에서 중국과 치열하게 경쟁하면서도 전력을 대량으로 소모하는 첨단·기반산업일수록 더 치명적으로 다가온다. 전력 집약도가 높은 반도체, 철강, 석유화학 산업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중국 지방정부의 정책적 인센티브까지 감안하면 실제 체감하는 전력비용 격차는 이보다 훨씬 넓어질 것이다. 반면 한국은 불공정 무역 제소 같은 통상 부담이 커서 전기료 인센티브를 주기 어렵다. 공교롭게도 철강과 석화는 정책 지원의 법적 근거가 되는 특별법이 시행 중이고, 반도체특별법은 다음 달 시행을 앞두고 있다. 입법부가 세 분야에 대한 특별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전기료 감면 같은 지원 내용을 담을지도 논의했지만, 다른 나라에서 이를 국가 보조금 지원으로 간주하고 무역 제재를 내리면 수출에 타격을 입을 수 있어 결국 빠졌다. 안정적 전기 공급도 산업 경쟁력 유지에 중요하다. 이들 산업은 하나같이 전기 공급이 찰나라도 끊기면 손실이 커지기 때문이다. 반도체는 공정 상에 있는 웨이퍼를 쓸 수 없어 폐기해야 되고, 철강과 석화는 재가동까지 두달여의 시간이 필요하다. 경쟁 국가 대비 저렴한 전기요금과 안정적 전력 공급은 제조업 중심의 국내 산업을 키우는데 중요하다. 이 같은 여건은 한국이 재생에너지를 얼마나 늘릴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키운다. 아직은 재생에너지 발전 단가가 비싸고, 기후에 따라 발전량이 달라지는 간헐성도 감당해야 해서다. 지난 2023년 기준 태양광 발전 단가는 kWh당 135.3원, 육상풍력 165.6원, 해상풍력 287.2원이다. 보급 실적이 쌓일수록 발전 단가가 낮아질 것으로 예상되지만, 아직 기존 발전 방식만큼 경제성을 확보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원전은 60원 수준으로 이미 단가가 낮고, 대량의 전력을 안정적으로 생산한다. 사용후 핵연료 처리 문제가 있지만 무탄소 전원이라는 장점 때문에 탄소 중립에 기여할 현실적 발전원으로 꼽혀왔다. LNG 발전은 대략 LNG 가격에 따라 160원대까지 오르기도 하지만, 안정적 발전과 유연한 출력 조절이 가능하다. 기후위기 대응과 친환경 가치를 고려하면 당장 재생에너지 100%를 밀어붙여도 모자랄 판이지만, 제조업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현실도 직시해야 한다. 우리가 당장 제조업을 포기할 수 없다면, 기후위기 대응과 산업 경쟁력 확보 사이의 현명한 타협점을 찾아야 할 때다. 정승현 기자 jrn72benec@ekn.kr

[데스크 칼럼] 한국 산업을 위한 마지막 1%

관건은 1퍼센트(%)다. 대한민국 산업은 언제나 마지막 1%를 쫓았다. 철강은 쇳물이 견디는 1도의 열처리, 조선은 1톤의 적재량, 자동차는 1km의 연비, 반도체는 1%포인트의 수율을 위해 경쟁했다. 도무지 도달할 수 없을 것 같은 마지막 1%를 채우기 위해 기업은 수없이 실패를 거듭해 왔다. 우리 산업은 더 이상 '추격자'가 아니다. 메모리 반도체는 전 세계 시장의 60%를 점유하고, 조선은 다시 세계 수주 1위를 다툰다. 자동차 역시 글로벌 판매 상위권을 지키고 있다. 기술과 경쟁력을 놓고 본다면 이미 99%에 도달했다. 마지막 1%는 어디서 찾을 것인가. '100% 승자'로 만들 마지막 퍼즐 역시 새로운 기술에서 나올 것이라고 믿기 쉽다. 생성형 인공지능(AI)과 휴머노이드 로봇이 대표적이다. 아직 선도국과의 격차를 좁혀야 하고, 미래 산업의 주도권도 이 기술들이 쥘 것이라는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정부 역시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 지난 6월 이재명 대통령은 AI 데이터센터·반도체·피지컬 AI를 국가 '3대 메가 프로젝트'로 선정했다. 국가인공지능전략위원회도 휴머노이드 소분과를 신설해 산업 생태계 조성과 현장 확산을 핵심 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 산업의 '추천 알고리즘'은 하나다. 더 고도화된 AI, 더 많은 휴머노이드 로봇, 더 새로운 기술. 그 알고리즘이 끝내 최적화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 바로 '사람'이다. 기술은 스스로 산업이 되지 않는다. AI가 가능성을 계산한다면, 판단과 실행은 인간의 몫이다. 같은 설비를 들여오고, 같은 기술을 확보하고, 같은 계산을 거쳐도 다른 생산성과 경쟁력을 만들어내는 1%는 결국 사람에게서 나온다. 한국 산업에서 기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전면에 서 있지만, 사람은 늘 그랬듯 배경에 머문다. 사람을 지키고, 키우고, 마음껏 뛰게 하는 일은 AI와 휴머노이드 로봇만큼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선진국을 추격하던 한국 산업은 늘 다음 먹거리를 찾았다. 이제 오늘날의 모든 것을 키운 사람을 돌아볼 차례다. 지난해 OECD는 한국의 성인 직업훈련 참여율이 13%로 OECD 평균(40%)보다 크게 낮고, AI 분야에서도 인재 유출이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한국의 연구개발 투자 비중만큼은 국내총생산(GDP)의 5%로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정작 기술을 만들 사람은 부족한 실정이다. 규제 역시 기회여야 한다. 지난 2019년 정부가 규제샌드박스를 도입한 이후 2500여 건의 과제를 승인했다. 기존 규제에 막혀 있던 기술과 서비스가 시장에 나갈 기회를 얻었다. 2500여 건의 '예외'는 한국 산업에 혁신이 부족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혁신을 담아낼 제도가 부족했다는 반증이다. 반세기 동안 한국 산업이 던진 질문은 '무엇을 키울 것인가'였다. 이제는 질문이 달라져야 한다. '누가 그 기술을 만들고, 지키고,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다. 산업의 중심에 기술을 세우는 시대는 끝났다. 이제 사람을 그 중심에 세울 골든 타임이 왔다. 100이라는 숫자를 앞둔 지금, 그 마지막 획을 긋는 건 사람이어야 한다. 오유신 기자 news@ekn.kr

[김성우 시평] 공급만큼 수요와 비용도 중요하다

김성우 김앤장 법률사무소 환경에너지연구소장 지난달 29일 정부가 발표한 '3대 메가프로젝트' 계획에 반도체 클러스터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가 포함되어 있다. 계획대로라면 준공시점이 아직 미정인 광주 반도체 공장 4기를 가동하는 데 6.3GW, 비수도권에 분산건설될 AI 데이터센터 가동에는 2035년까지 18.4GW의 발전소가 추가로 필요하다. 여기에 현재 진행 중인 용인 반도체 공장 10기에 필요한 전력 15GW까지 포함하면 새로운 반도체·AI 전력 수요는 40GW에 육박한다. 현재 우리나라 전체 발전설비용량의 1/4에 상당하는 규모다. 메가프로젝트가 성공하려면 차질 없고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전제되어야 하는 이유다. 정부도 재생에너지와 원전 등 가용한 자원을 총동원한다는 방침이다. 광주 반도체 공장에 필요한 전력을 호남의 풍부한 태양광·풍력과 한빛원전 등을 활용해 공급하고, 발전소와 산업단지를 연결하는 전력망도 신속히 건설하면서 신규원전 공기단축도 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수도권 용인 반도체 공장은 강원 동해안과 충남 서해안에 집중된 LNG 발전소 등에서 생산한 전력을 활용한다는 구상으로, 기존 전력망의 용량을 늘리고 신규 전력망은 지중화 방식을 통해 속도를 낼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AI 데이터센터의 경우, 재생에너지와 원전, LNG 발전 등을 모두 활용하되, 지역에서 생산한 전기를 지역에서 쓰는 분산형을 확대하기로 했고, 발전량이 간헐적인 재생에너지는 에너지저장장치(ESS) 등으로 대응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반도체 공장은 순간적인 정전만으로도 웨이퍼 전체를 폐기해야 하는 극도로 민감한 수요처이고, AI 데이터센터도 순간적인 부하 변동이 많아 공급이 까다로운 수요처다. 즉, 수요전력의 양은 물론이고 수요전력의 질까지 정확히 맞춰야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메가프로젝트 관련 전력공급을 둘러싼 다양한 제안들이 쏟아지고 있다.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 달성을 고려해 재생에너지를 더 늘려야 한다는 주장과 감축목표를 조정해서라도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또한, 날씨에 따라 출력이 변동하는 태양광과 풍력에 항상 일정한 전력을 공급할 수 있는 대형 원전이나 액화천연가스 발전이 받쳐주는 전력망과 병행∙활용하라거나, 호남 원전을 포함해 대규모 에너지저장장치(ESS)나 액화천연가스 발전 등 가용한 자원을 최대한 기술중립적으로 활용하라는 제안도 나왔다. 한편, 설계수명이 이미 지났거나 설계수명이 다가오는 기존 발전기들의 수명 연장하라거나, 서남권역내 전력망 확충은 물론이고 영남지역 원전까지 연결이 가능한 동서축 초고압 전력망 건설이 필요하다는 제안까지 등장했다. 이처럼 현재 쏟아지는 제안들은 대부분 급증할 전력 수요를 어떤 방식으로 공급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공급방안을 선택할 때 정확한 수요예측에 기반해야 하고, 증가하는 비용을 어떻게 최소화하고 배분할지를 함께 고민하지 않으면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수요예측의 경우, AI 산업 여건에 따라 급변하는 반도체∙데이터센터의 전력수요를 과거 경제성장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기존 수요예측과 별도로 구분하는 것은 당연하고, 경영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달라질 수 있는 기업의 투자계획이나 정부의지에 따라 바뀔 수 있는 보급정책을 어느 정도까지 확정된 수요로 간주할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더욱이 상세 이행계획이 없는 상태에서 년도별 수요량을 어떻게 정교하게 가정할지에 대한 판단도 관건이다. 상세 수요계획에 대한 정교한 고민 없이 공급방안을 아무리 정확하게 세워 본들 이는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비용배분의 경우, 재생에너지 비중을 빠르게 높이려면 에너지저장장치 등 안정성을 보완하기 위한 비용이 크게 증가하고 가용한 에너지원들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한 전력망 건설 비용도 소요되는 등 추가 비용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이에 각 에너지원별 추가 비용에 대한 분석을 기반으로 경제성+환경성을 고려한 최적의 공급조합을 고민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추가 비용에 대해서는 전기요금에의 영향 등을 고려하여 어떻게 배분할지에 대한 논의도 병행되어야 한다. 3대 메가프로젝트는 약 4,000조원 규모의 역대급 계획으로 대한민국의 지속가능한 성장 기반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이에 프로젝트 성공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인 전력 공급방안을 고민하는 첫 단계부터 현실적 수요계획과 합리적 비용배분이 함께 고려되어야 성공 확률이 더 올라간다는 생각이다. bienns@ekn.kr

[김병헌의 체인지] 북중미 월드컵의 BTS와 트럼프, 그리고 방시혁 유감

올림픽과 월드컵은 더 이상 스포츠 경기만이 아니다. 정상외교와 민간외교가 동시에 펼쳐지는 세계 최대의 플랫폼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대한민국을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국가라는 이미지를 각인시켰고, 2002년 한일월드컵의 '붉은악마'는 세계인에게 한국의 역동성과 시민문화를 보여줬다. 스포츠는 국경을 넘고, 문화는 언어를 뛰어넘는다. 그래서 세계적인 스포츠 이벤트는 언제나 외교와 경제, 문화가 함께 움직이는 거대한 무대다. 2026 북중미 월드컵 결승전 하프타임 쇼는 그런 의미를 다시 한번 보여줬다. 하이라이트는 단연 BTS였다. 수만 명의 관중과 전 세계 수억 명의 시청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BTS는 K-팝을 넘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브랜드 자체를 상징하는 존재로 무대를 장악했다. 이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현장에서 BTS를 향해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미국이 개최국이라는 상징성과 맞물려 사실상 미국의 이벤트와도 같은 분위기도 연출했다.세계 각국 정상과 글로벌 기업인, 문화예술인들이 모이는 공간에서 문화의 힘은 외교의 언어보다 더 강력하게 작동한다. 여기서 하나의 가정을 해본다. 만약 방시혁 하이브 이사회 의장이 법적 제약 없이 이 행사에 참석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어디까지나 가정이다. 실제 그런 일정이나 초청이 사전에 이뤄졌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세계 음악 산업에서 방시혁이라는 이름이 갖는 위상을 생각하면 충분히 상상해 볼 만한 장면이다. 방시혁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 기업인이 아니다. BTS를 세계 정상급 아티스트로 성장시키며 K-컬처 산업의 판을 바꾼 인물이다. 하이브는 음악을 넘어 플랫폼과 콘텐츠, 공연산업을 연결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고, BTS는 한국 문화의 가장 강력한 소프트파워가 됐다. 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과 현대경제연구원 등은 BTS가 한국 경제에 미치는 연간 경제효과를 수조 원 규모로 추산한 바 있다. 해외 관광객이 한국을 찾는 이유 가운데 K-팝은 이미 중요한 요소가 됐다.국가 브랜드 가치 상승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이어진다. 그래서 세계적인 무대에서 BTS는 단순한 가수가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중요한 문화 외교관으로 기능한다. 그들을 세계시장으로 이끈 제작자 역시 다른 의미의 민간외교 자산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수사나 법 집행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 법 앞의 평등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다.죄가 있다면 법에 따라 처벌받아야 한다.최근 경찰은 방시혁 의장의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를 장기간 수사해 왔지만 최종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경찰은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검찰은 보완수사를 요구하며 반려했다. 수사가 길어질수록 국민은 두 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하나는 혐의가 충분한데 왜 결론이 늦어지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혐의가 불충분한데 왜 이렇게 오래 끌고 있는가이다.장기화되는 수사는 피의자에게도, 사회에도 적지 않은 비용을 발생시킨다. 기업은 의사결정이 늦어지고 투자자는 불확실성을 감수해야 한다.국가적으로 중요한 글로벌 일정이나 기업 활동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세계 경제가 공급망 경쟁과 관세 협상으로 급변하는 상황에서 문화산업도 국가 경쟁력의 핵심 축이다. BTS가 미국에서 갖는 영향력은 단순한 인기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미국 정치권과 경제계에서도 K-팝은 하나의 산업이자 문화현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런 자산은 정부가 예산을 들여도 쉽게 만들 수 없는 국가 브랜드다. 이재명 대통령은 여러 차례 국익 중심의 실용외교를 강조해 왔다. 이념보다 국익, 형식보다 실용이라는 기조는 외교뿐 아니라 행정 전반에도 적용될 필요가 있다. 국가기관 역시 법 원칙을 지키면서도 국가 전체의 이익과 국제적 환경을 함께 고려하는 균형감각을 가져야 한다. 노파심에서 다시 강조하지만, 특정 사건에 대한 수사에 정치적 고려가 개입돼서는 안 된다. 반대로 불필요하게 장기화되는 수사 역시 국가적 비용을 키울 수 있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신속하고 공정하며 예측 가능한 법 집행이다. 월드컵 폐막식에서 BTS는 다시 한번 세계인의 박수를 받았다. K-컬처의 저력을 증명한 순간이었다. 스포츠를 넘어 문화와 경제, 외교가 만나는 공간이었다. 우리는 이제 이런 세계적 무대를 한국의 국익을 키우는 전략적 자산으로 바라봐야 한다. 민간이 만든 문화의 힘은 정부가 대신 만들 수 없다. 그렇기에 정부는 그 힘이 세계무대에서 최대한 발휘될 수 있도록 제도와 행정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법은 흔들림 없이 집행돼야 하지만 국익을 위한 유연한 행정과 실용적 사고 역시 함께 작동해야 한다. 그것이 K-컬처 강국 한국에 걸맞은 국가 운영의 모습일 것이다.

[이슈&인사이트] AI 투자, 월가와 미 정부가 멈출 수 없는 이유

인공지능이 몰고 올 미래를 두고 두 가지 역사적 비유가 맞선다. 1차 산업혁명의 방직 기계는 생산성을 혁명적으로 끌어올렸지만 그 과실은 공장주에게 집중됐고 숙련공들은 거리로 내몰렸다. 반면 2차 산업혁명의 철도와 전기는 초기 투자 거품이 꺼진 뒤 운송비를 폭락시키고 모든 산업의 혈관이 되어 시민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꿨다. AI가 어느 길을 걸을지는 단순한 공학의 문제가 아니라 배분의 정치경제학에 달려 있다. AI가 인플레이션을 잡고 금리를 낮추려면 기술이 소수 거대 기업의 전유물에 그치지 않고 경제 전체로 번져야 한다. 중소 제조업체의 공급망을 최적화하고 지역 병원의 행정 비용을 낮추고 항만 물류의 병목을 풀어내는 범용 기술로 진화할 때 비로소 경제 전체의 총공급이 확대되며 구조적 물가 하락 압력이 발생한다. 결정적 변수는 접근성이다. 오픈소스 생태계가 살아나 누구나 저렴한 비용으로 수요 예측 모델을 돌릴 수 있게 되면 생산성 향상의 과실이 소비자 가격 하락으로 스며든다. 반대로 몇몇 빅테크가 독점적 모델로 시장을 장악하면 생산성 증가분은 주주 배당에 갇히고 거시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의 늪에 빠진다. 그런데 지금 글로벌 자본시장에서는 묘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연준이 20여 년 만의 고금리로 긴축하는데도 마이크로소프트와 구글 같은 하이퍼스케일러들은 연간 수백조 원을 AI 데이터센터에 쏟아붓는다. 본래 고금리는 장기 투자에 독이지만, 월가 은행권의 이해관계가 이 흐름을 떠받치고 있다. AI 생태계는 고금리 한파 속 거의 유일한 핫 마켓이다. 데이터센터 구축을 위한 사모대출, 부동산 유동화 증권 발행, 스타트업 투자 자문까지 AI 벨류체인 전체가 은행들의 수수료와 이자 이익을 떠받치는 거대한 자금 회로로 작동하고 있다. 실리콘밸리은행 붕괴 이후 벤처캐피털의 초기 자금이 마른 자리를 은행권 신용이 메우며 고금리에도 기술 인프라에 과잉 투자되는 기묘한 균형이 유지되는 이유다. 한국 반도체 산업도 여기에 깊숙이 얽혀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주가 상승은 결국 하이퍼스케일러들의 데이터센터 투자가 지속된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HBM을 비롯한 AI용 반도체 수요는 빅테크의 CAPEX 사이클과 직결된다. 은행권이 AI 투자를 외면하지 못하는 것처럼, 한국 반도체 주식의 밸류에이션 또한 이 거대한 자금 회로의 연장선에 놓여 있다. 고금리 압박으로 하이퍼스케일러들이 투자 속도 조절에 나선다면 그 충격은 반도체 라인으로 전이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더 강력한 플레이어인 미국 정부의 셈법도 맞물린다. 국가 부채는 34조 달러를 넘겼고 연간 이자 비용만 국방 예산을 추월했다. 이 빚더미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출구는 명목 성장률을 금리보다 높게 유지해 부채 비율을 희석시키는 길이다. AI는 '고성장-저물가'라는 방정식을 풀 유일한 열쇠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생산성 혁명이 완성될 때까지 이 실험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데이터센터가 굶주리지 않도록 전력망 확충과 신규 원전 인허가를 밀어붙이고, 중소기업의 AI 도입에 세액공제를 확대해 기술 파급을 의도적으로 촉진하려 들 것이다. 결국 이 거대한 흐름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 월가 대형 은행들은 AI를 사실상 유일한 수익 파이프라인으로 삼아 고금리 시대의 돌파구를 찾고 있고, 미국 재무부는 천문학적 국가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AI 기반 생산성 향상 말고는 마땅한 시나리오가 없다. 은행의 이익 증대와 미국 정부의 부채 부담 완화라는 두 마리 토끼가 AI 투자의 지속을 강제하는 셈이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단순한 기술 버블이 아니라 글로벌 금융과 패권국의 재정이 한 방향으로 정렬된 정치경제학적 필연에 가깝다. AI 투자는 살아있다. bienns@ekn.kr

[EE칼럼] 한 나라, 두 재난 : 물폭탄과 불볕더위가 동시에…

“It never rains but it pours." 영어권에서 널리 쓰이는 이 격언을 직역하면 “비는 오기만 하면 퍼붓는다"는 뜻이다. 여러 문제가 한꺼번에 몰려오는 상황을 비유할 때 흔히 사용된다. 오늘날 인류가 마주한 기후위기의 가혹한 속성을 이보다 더 날카롭게 관통하는 말도 드물 것이다. 대한민국은 국토 면적이 그리 넓지 않다. 고속열차를 타면 불과 몇 시간 만에 끝에서 끝으로 이동할 수 있는 이 좁은 땅에서, 우리는 오랫동안 같은 계절이면 전국이 비슷한 날씨를 공유하는 것을 당연한 상식으로 여겨왔다. 장마철에는 전국에 비가 내리고, 한여름에는 전국이 함께 달아오르는 식이었다. 그러나 가속화되는 기후변화는 우리가 수십 년간 신뢰해 온 이 자연스러운 상식을 완전히 깨뜨리고 있다. 이제는 같은 시각, 같은 나라 안에서 홍수와 가뭄이, 폭우와 폭염이 동시에 교차하는 기이한 시대가 도래했다. 대표적인 신호탄이 2022년 여름이었다. 당시 서울에는 시간당 141.5mm라는 기상관측 이래 최대 집중호우가 쏟아졌고, 중부지방 전체가 막대한 인명과 재산 피해를 입었다. 1942년 이후 80년간 깨지지 않았던 1시간 강수량 기록을 경신한 것이었다. 반면 같은 시기 남부지방의 풍경은 완전히 달랐다. 광주와 전남 지역은 그해 내내 기상관측 사상 최악의 가뭄에 시달리고 있었고 여름인 8월에도 사정이 나아지지 않았다. 2022년 누적 강수량은 평년의 64%에 불과했고, 농업용 저수지 저수율은 평년의 절반 수준까지 떨어졌다. 나라의 절반은 물이 넘쳐 도시가 잠기는데, 다른 절반은 물이 없어 농업용수와 생활용수를 걱정해야 했던 것이다. 과거의 기상학적 상식으로는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극단적인 대비였다. 이러한 현상은 이제 일회성 이변이 아닌 일상이 되었다. 지난 7월 중순에도 중부지방과 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기록적인 집중호우가 쏟아졌다. 경북 북부에는 주민 300여 명이 긴급 대피할 정도로 물폭탄이 투하됐다. 더욱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순간 기상청이 발표한 특보 현황이다. 경상도와 충청도에는 호우특보가 발령된 반면, 불과 200km 남짓 떨어진 전남과 광주에는 폭염특보가 내려져 있었다. 한쪽에서는 물난리를 막으려 모래주머니를 쌓고, 다른 한쪽에서는 뙤약볕을 피해 무더위 쉼터로 향하는 모순적인 현실이 동시에 펼쳐진 셈이다. 이 두 사건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기후변화로 인해 강수의 공간적 편차가 극대화되고, 상반된 극한기상이 한반도라는 좁은 틀 안에서 동시에 표출되는 '새로운 기후체제(New Climate Regime)'의 개막을 알리는 엄중한 경고다. 이제 “전국이 차차 흐려져 비가 오겠다"거나 “전국에 가마솥더위가 기승을 부리겠다"는 식의 평면적인 표현만으로는 현재의 역동적인 날씨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할 변화는 단순히 온도가 오르는 데 그치지 않는다. 폭염과 집중호우의 빈도와 강도가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커졌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장마의 모습, 강수 형태의 공식마저 무너졌다. 가을과 겨울은 짧아지고 여름은 비대하게 길어지고 있다. 지난 30년의 평균치인 '기후평년값'이 더 이상 현재의 위험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며, 산불이 대형화·연중화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이 모든 변화 중에서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전선에서 위협하는 쌍두마차가 바로 폭염과 집중호우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의 국가 재난 대응체계가 여전히 '하나의 시점에 하나의 재난'을 처리하는 선형적 구조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집중호우가 시작되면 모든 행정력과 관심은 홍수 방어에 쏠리고, 폭염이 이어지면 그제야 온열질환 대책에 집중한다. 그러나 기후재난은 더 이상 친절하게 순차적으로 찾아오지 않는다. 이제는 중부지방의 배수펌프장 가동을 점검하는 동시에, 남부지방의 취약계층 냉방시설과 응급의료체계를 점검해야 하는 시대다. 서로 다른 형태의 재난이 한 화면에 동시에 잡히는 '복합재난'으로 진화한 것이다. 따라서 국가 방재의 패러다임도 근본적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첫째, 재난 대응 기조를 전국 단위의 동일 기상환경 관점에서 탈피하여, 지역별로 상이한 위험 요소를 실시간으로 분리·관리하는 다원적 체계로 개편해야 한다. 둘째, 정부와 지자체, 특히 중앙정부는 호우와 폭염을 별개의 매뉴얼이 아닌 '하나의 통합된 복합재난 시나리오' 안에서 설계해야 한다. 같은 날, 같은 행정망 안에서 홍수 통제와 가뭄·폭염 대책이 유기적으로 동시 가동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기상정보 역시 단순한 수치 예보를 넘어 특정 지역에 어떤 위험이 중첩되어 있는지를 직관적으로 전달하는 '복합위험정보'로 진화해야 한다. 국민 또한 내 지역뿐만 아니라 타지에 있는 가족의 안전까지 입체적으로 살피는 인식의 확장이 필요하다. 기후위기를 과거의 경험적 데이터로 재단하려는 시도는 무모하다. 기후변화의 속도에 맞춰 도시계획, 하천정비, 수자원 관리 정책의 설계기준을 전면 상향해야 하며, 재난대응 매뉴얼 역시 복합재난을 상정하고 재작성해야 한다. 무엇보다 첨단 기상관측망과 수치예보 기술, 그리고 예보관 역량 강화에 대한 중장기적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하며, 생산된 고도 기상정보가 지자체와 국민에게 가장 신속하고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도달하는 전달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제 우리 사회는 스스로에게 던지는 단순한 질문을 보다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 물폭탄과 불볕더위 중 무엇에 더 집중할 것인가라는 이분법적 질문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기후위기는 이미 불편함의 영역을 넘어 생존의 문제가 되었고, 그 핵심은 여러 재난을 한꺼번에 감당해야 하는 복합성이다. 어떤 시점에 폭우와 폭염 중 하나만 선택해 순차적으로 방어하겠다는 안일함은 통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이미 그 두 가지 거대한 재앙을 양손에 동시에 쥐고 싸워야 하는 나라가 되었기 때문이다. 철저한 새로운 준비만이 피해를 최소화하는 유일한 열쇠다.

[기자의 눈] CEO 임기까지 정하는 금융당국…지배구조 개선인가, 관치인가

금융당국이 금융지주 최고경영자(CEO)의 장기 연임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은 지배구조 개선안을 내놓을 예정이다. 개선안에는 이사회 독립성 강화와 CEO 후보 검증 절차 개선, 성과보수 체계 개편 방안도 담긴다. 금융사고 발생 시 임원의 성과급을 환수하는 클로백(Clawback) 제도와 임원의 개별 보수를 주주총회에서 심의하는 세이온페이(Say-on-pay) 도입, CEO 후보 검증 기간 확대와 이사회 심의 과정 공개 등도 포함될 것으로 예상된다. 클로백, 세이온페이 도입, CEO 후보 검증 절차 개선 등은 금융회사의 책임경영을 높이는 측면에서 공감대를 얻고 있다. 하지만 CEO의 연임 횟수까지 제도적으로 제한하는 것은 성격이 다른 문제다. 특정 인물 중심의 의사결정 구조를 막고 이사회의 견제 기능을 강화하는 것은 금융산업의 신뢰를 높이기 위한 필수 과제다. 금융당국도 그동안 금융사고 발생 시 경영진의 책임을 강화하고 승계 절차의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고 꾸준히 강조해 왔다. 문제는 방법이다. CEO의 연임 여부는 경영 성과와 기업가치, 주주들의 평가가 종합적으로 반영되는 사안이다. 이사회가 후보를 검증하고 주주총회가 최종적으로 신임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기업지배구조의 기본 원리다. 그럼에도 일정 횟수 이상 연임을 사전에 제한한다면 정부가 민간 금융회사의 인사 자율성에 개입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이번 개선안의 취지는 이해할 수 있다. 장기 재임이 이어질 경우 견제 장치가 약화되고 조직이 폐쇄적으로 운영될 가능성을 우려하는 시각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장기 재임 자체를 문제로 보는 접근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중요한 것은 재임 기간이 아니라 성과와 견제 장치다. 글로벌 금융권에서도 CEO의 임기는 횟수가 아니라 능력과 성과로 평가받는다. 세계 최대 은행인 JP모건체이스의 제이미 다이먼 CEO는 20년 가까이 회사를 이끌며 지속적인 성장과 기업가치 제고를 이끌어 왔다. 국내에서도 윤종규 전 KB금융지주 회장은 2014년부터 2023년까지 장기간 재임하며 그룹의 체질 개선과 실적 성장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장기 재임이 곧 지배구조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연임 자체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다. 이사회가 독립적으로 CEO를 평가하고 주주들이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판단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후보군 관리와 승계 절차를 투명하게 운영하고 이사회의 책임성과 공시를 강화하는 것이 지배구조 개선의 본질이다. 금융당국의 지배구조 개선은 금융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제도가 돼야 한다. 절차와 책임을 강화하는 것은 시장의 신뢰를 높이지만 CEO의 임기까지 일률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자칫 책임경영 강화보다 관치금융 논란을 키울 수 있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정답을 미리 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이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원칙과 장치를 만드는 것이다. 박지성 기자 captain@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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