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진종문 교수 “HBM 16단 쌓아도 역부족...AI 메모리 승부처는 ‘계층 설계’

[인터뷰] 진종문 교수 “HBM 16단 쌓아도 역부족...AI 메모리 승부처는 ‘계층 설계’

AI 메모리의 대명사로 떠오른 HBM(고대역폭메모리)을 두고 벌써 '한계론'이 나온다. SK하이닉스는 최근 “GPU-HBM 조합만으로는 앞으로의 AI 워크로드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내놨다. 이를 보완할 기술로 PIM(프로세싱 인 메모리), HBF(고대역폭플래시), KV 캐시 분산 배치 기술인 SALT-KV를 잇달아 제시했다. 삼성전자도 zHBM·zNAND 등 메모리의 물리적 배치를 바꾸는 '3D 구조'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HBM 한 종류의 성능 경쟁을 넘어 여러 메모리를 어떻게 조합하느냐가 AI 메모리 시장의 다음 승부..

[기자의 눈] 중동원유 의존도 낮춘다는 정부, 실행력으로 증명해야

“70%에 이르던 원유 중동의존도를 이미 몇달 만에 50%대로 낮췄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2일 자신의 X(구 트위터)를 통해 “국민여러분께서는 유가에 관해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며 언급한 수치다. 이 대통령은 “원유수입의 중동 의존도는 50%로 여전히 높은데, 전쟁은 언제 끝날 지 모르고 원유 시장은 수렁에 빠져있다"며 중동산 원유의 의존도를 추가로 낮추겠다는 정책 방향성을 함께 시사했다. 정부도 화답했다. 산업통상부는 지난 23일 무역보험공사에서 '제6차 자원안보 협의회'를 열고 도입 원유의 특정 지역 의존도를 50% 이하로 낮추는 내용의 '제1차 자원안보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같은 날에는 '제6차 부담금운용심의위원회'를 통해 비중동산 원유 수입 시 발생하는 운임차액을 오는 12월까지 최대 100%로 환급하겠다는 방침을 정했다. 비중동산 원유 도입 확대에 따라 발생하는 정유업계의 장거리 해상운임 부담을 완화함으로써 업계의 수입선 다변화를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수입선 다변화는 중동발(發) 해상물류 차질이 장기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가피한 정책이다. 높은 중동 의존도는 지정학적 리스크가 발화할 때마다 국내 에너지 수급위기의 핵심 원인으로 반복 지목돼왔기 때문이다. 과거 원유 다변화 노력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다. 1980년대 2차 오일쇼크를 거치며 중동 의존에 위기감을 느꼈던 당시 정부는 '원유도입선 다변화 지원제도'를 도입하고 미주·아프리카산 원유의 운송비를 지원했다. 2015~2016년 미국이 40년 만에 원유 수출제한을 해제한 것은 이러한 다변화 지원제도와 맞물려 한국의 미국산 도입 비중이 두 자릿수로 굳어지는 계기가 됐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역대 정부의 노력에도 한국의 중동 의존도는 좀처럼 50% 밑으로 떨어지지 않은 것일까. 전문가들은 원유 수급지형의 지리적 특성을 원인으로 지목한다. 중동을 제외하면 한 달 이내에 국내 수요를 충당할 만한 양을 도입할 수 있는 공급처가 사실상 전무하다는 것이다. 장기간을 거쳐 중동산 중질유에 최적화된 국내 정제설비도 의존도를 쉬이 낮출 수 없는 원인으로 자리잡았다. 중동산 원유 의존도 완화는 결국 국내 수급 안정성과 경제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정부 차원의 면밀한 로드맵 설계와 실행력이 담보되어야만 가능하다. 마침 산업부는 정유업계를 대상으로 정제설비 전환과 정제기술 고도화 연구개발(R&D)에 대한 지원에 나서겠다는 목표를 세운 상태다.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정부의 확고한 의지를 실행력으로 증명해야 한다. 박주성 기자 wn107@ekn.kr

[박영범의 세무칼럼] 1조 원대 탈세 포착… 배민·무신사 등 41개사 세무조사 왜 받나

지난 14일 국세청은 서민들의 체감 물가와 직결되는 먹거리 및 생활 소비재 분야에서 불공정 행위와 탈세를 일삼은 41개 사업자에 대해 대대적인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이번 조사는 원재료비 상승 등 대외적 요인을 핑계로 소비자에게 물가 부담을 전가하면서도, 정작 뒤로는 원가를 부풀리거나 변칙적인 거래를 통해 약 1조 원에 달하는 막대한 이익을 은닉한 시장 교란 사업자들을 정조준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배달의민족, 풀무원, 무신사, 에이블리 등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대형 플랫폼과 종합 식품업체들이 조사 대상에 대거 포함되어 그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국내 배달 앱 1위 사업자인 배달의민족은 국내에서 창출한 1조 원대 이익을 정당한 세금 납부 없이 독일 모회사로 이전한 혐의를 받고 있다. 국세청은 배민이 원천징수 해야 했을 1,000억 원대 세금을 탈루한 역외 탈세 혐의와 더불어, 해외 관계사에 업무 지원 용역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부가가치세 매입 세액을 부당하게 공제받은 혐의를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종합 식품업체인 풀무원은 원재료와 물류비 등 제조원가 상승을 이유로 가공식품 가격을 대폭 인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내외 특수관계 법인이 부담해야 할 비용까지 제품 원가에 포함해 소비자에게 전가한 혐의를 받는다. 또한, 사주 일가가 지배하는 관계회사에 귀속되어야 할 경비를 업무와 무관하게 대신 지출하거나, 국외 관계사에 거액의 금전을 무상으로 대여해 '부당행위계산부인' 대상이 된 것으로 파악된다. 무신사와 에이블리 등 패션 플랫폼 업체는 변칙적인 회계 처리를 통한 고의적 매출 누락 혐의를 받고 있다. 이와 함께 특수관계 법인에 광고비와 용역비를 과다 지급하고 재고자산을 고가에 매입하는 방식으로 원가를 부풀린 혐의, 그리고 법인 명의로 고가 아파트를 임차해 사주가 개인적으로 거주하는 사익 편취(업무무관자산 유용) 혐의에 대해서도 조사가 진행 중이다. 아울러 밥상 물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계란 생산 농가 11곳도 도마 위에 올랐다. 이들은 계란이 '금란'으로 불리는 호황기 동안 수십억 원대의 수익을 축소 신고했다. 일부 업체는 거래처에 세금계산서 없는 무자료 거래를 요구하고 판매 대금은 비사업용 차명 계좌로 수취해 수익을 은닉했다. 나아가 가족이 대표로 있는 별도의 농업회사법인에 시가보다 낮은 가격으로 산란용 병아리를 넘겨 부당하게 이익을 나누어 주고, 지방자치단체로부터 받은 보조금을 수입 금액에서 빠뜨린 혐의도 받고 있다. 곡물·과일·육류 등 수입·유통업체 12곳은 할당관세 혜택을 악용했다. 참깨, 파인애플, 돼지고기 등을 수입하며 세제 혜택을 받은 이들은 허위로 경비를 부풀리고 매출 신고를 누락했다. 0%의 할당 관세율로 돼지고기를 수입해 온 한 업체는 거래 중간에 대표자 자녀 명의의 유령 회사를 끼워 넣어 유통 마진(통행세)을 챙긴 후 단기간에 폐업하는 수법을 썼다. 또한, 특수관계 법인을 통해 근무 사실이 없는 대표자의 친인척에게 수억 원을 급여 명목으로 지급하며 가공 경비를 계상하기도 했다. 이렇게 빼돌린 법인 자금은 배우자의 아파트 취득이나 자녀에 대한 편법 현금 증여에 사용된 것으로 드러났다. 국세청은 탈세와 물가 상승 간의 연결고리가 확인된 만큼, 민생 안정을 위해 이번 세무조사 혐의자들을 철저히 검증할 방침이다. 특히 재료비 및 유통비용 등 가격 인상의 명분이 되는 생산 원가의 적정성과 정상 거래 여부를 집중적으로 점검한다. 나아가 법인 자금 유출로 부를 축적해 온 사주 일가의 재산 형성 과정을 샅샅이 파헤치고, 차명계좌를 통한 수익 은닉이나 가짜 세금계산서 수수, 명의대여 등 조세범죄 혐의가 드러나면 즉시 조세범칙 사건으로 전환해 단호히 대처할 예정이다. 이처럼 전방위적이고 강도 높은 국세청의 세무조사에 직면한 기업들은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려는 감정적 대응이나 맹목적인 회피를 자제하고, 객관적인 사실관계에 따라 투명하고 성실하게 조사에 임해야 한다. 무엇보다 해외 모회사 및 특수관계 법인과의 자금 거래나 용역 제공에 있어, 해당 거래가 객관적인 시장 가격(시가)에 기반한 합리적 결정이었음을 증명하는 정상가격 산출 자료와 회계 장부를 철저히 준비해 소명해야 한다. 원가 부풀리기나 부당행위계산부인 혐의를 벗기 위해서는 비용 배분의 기준이 동종 업계의 통상적인 기준에 부합함을 논리적으로 입증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아울러 법인 자산의 사적 유용이나 가공 경비 계상 의혹과 관련해서는, 지출된 자금이나 취득한 자산이 오로지 기업의 정상적인 수익 창출과 영업 활동을 위해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업무 일지, 차량 운행 기록부 품의서 등 객관적 물증을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 특히, 배우자와 자녀 등 가족에게 지급한 인건비를 세무조사에서 가공 경비나 부당 행위로 의심받지 않고 정상적인 비용으로 인정받으려면, 사후 조작이 불가능한 객관적 근거로 실제 근무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단순한 출근부나 계약서를 넘어 이메일, 사내 메신저, 결재 로그, 차량 운행 기록부 등 구체적인 업무 흔적을 제시해야 한다. 가족의 급여 수준 역시 사내 일반 직원이나 동종 업계와 비교하여 해당 가족이 수행한 업무 난이도 및 직책에 부합하는 합리적인 수준임을 소명해야 한다. 타 직장 겸직, 개인 사업장 운영, 원거리 거주 등 물리적·시간상으로 상시 근무와 모순되는 상황이 없어야 한다. 부득이한 경우 그에 맞는 근무 형태와 급여 산정 기준을 갖추어야 하며, 지급된 급여가 다시 대표에게 돌아가는 일 없이 가족 본인의 계좌에서 투명하게 관리되는 정상적인 자금 흐름을 증명해야 조사를 무사히 종결할 수 있다. 국세청의 특별 세무조사 과정에서 세법 해석상의 이견이나 오해가 발생할 경우, 무조건적인 반발보다는 과세전적부심사나 조세심판원 심판청구 등 법적으로 보장된 조세 불복 절차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이를 통해 기업의 정당한 입장을 차분하고 합리적으로 구제받는 성숙한 대응이 필요하다. bienns@ekn.kr

[EE칼럼] 목적과 수단의 도치

돈과 행복 가운데 어느 게 우선일까? 물론 행복이다. 그런데 돈이 우선되어서 건강이나 행복을 해치기도 한다. 회사에 다니다 보면 가정보다 조직이 우선이 되는 순간이 생긴다. 한두 번 조직에 양보하다가 어느 날 가정이 귀찮게 여겨질 수도 있다. 수단이 목적의 자리를 차지해 버린 것이다. 학생 때는 목전의 시험을 치르고 성적만 받으면 배운 것은 잊어버려도 좋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법과 규정은 사회적 안전과 정의를 지키기 위한 수단인데 규정을 준수하는 것이 우선이 되어서 정작 위급한 상황에서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를 사회학에서는 '목적과 수단의 도치(Goal Displacement)'라고 부른다. 우리 역시 이미 도치된 수단을 진짜 목적인 양 추구하고 있다. 흔히 듣는 얘기들이 있다. 'OECD 국가 가운데 우리나라가 재생에너지 보급이 꼴찌다.' '지구온난화를 늦추기 위해 RE100이 시급하다.' 'NDC 달성을 위해 재생에너지 보조금을 확대해서 이산화탄소 배출을 더 줄여야 한다.' '기업의 RE100 가속화를 위해 재생에너지 전력구매계약(PPA) 제도를 더 확대해야 한다.' 재생에너지 발전은 값비싸고 전력 생산도 들쭉날쭉하며 예비발전소와 전력저장치(ESS)까지 함께 있어야만 운용이 가능한 문제가 많은 발전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보급을 확대해야 한다면 그 이유는 이산화탄소 배출 저감일 것이다. 즉 이산화탄소 배출 저감이 목적이고 재생에너지는 이를 위한 수단이다. 발전원별로 전력 1킬로와트시(kWh)를 생산하는데 배출하는 이산화탄소는 석탄발전이 약900g(그램), 천연가스는 약500g, 태양광발전은 40g, 풍력발전은 20g, 원자력발전은 12g이다. 이산화탄소 배출저감이 목적이라면 당연히 원자력발전을 확대해야 한다. 착시효과도 있다. 재생에너지 발전이 전력을 생산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서는 예비발전기를 따로 두거나 전력저장장치를 달아야 한다. 전력생산의 간헐성을 보완하기 위한 설비도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들 설비에 의한 이산화탄소 배출 기여분을 함께 생각해야 하는데 그 부분이 빠진 것이다. 위의 '익숙한 얘기'는 원자력발전에 의한 이산화탄소 감축효과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고 모두 수단이 목적의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재생에너지 보급이 목적이 아니다. 물론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 원자력을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수요가 있고 기술력이 있는 나라는 30여개 국에 불과하다. 그 외의 국가와 원전을 보유하고 있지만 탈원전으로 가고 있는 일부 국가의 경우에는 재생에너지 확대가 이산화탄소 배출을 저감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같이 더 효과적인 방법인 원자력발전을 배제하는 것은 아둔하거나 나쁜 의도가 있는 것이다. 정부는 재생에너지 보급을 확대하기 일정 규모(500MW) 이상의 대규모 발전사업자에게 총발전량의 일정 비율 이상을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를 이용하여 공급하도록 의무화하는 RPS(신재생에너지 공급의무화제도)를 두고 있다. 발전사업자가 일정 규모의 재생에너지 발전을 하던지 그렇지 못하면 재생에너지 발전사업자로부터 REC(신재생에너지 공급인증서)를 구매하여 의무량을 채우도록 하고 있다. 한국수력원자력주식회사(이하 한수원)는 원자력발전과 수력발전을 담당한다. 당연히 이산화탄소 배출이 재생에너지발전보다 적다. 그렇다면 한수원은 RPS제도에 따라 REC구매를 해야 하는가? 그렇게 하도록 강제하고 있다. 정부가 목적과 수단이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미국은 원자력발전을 탄소 배출이 없는 지속 가능한 청정에너지원이자 핵심 기저 전력으로 인정하며, 이산화탄소 배출저감에 따른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세액공제(Tax Credit)와 연방 대출 보증, 연구개발비 지원 등 전방위적인 보조금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최근 UN을 중심으로 REC 대신 원전과 수소를 포함하는 CF100(Carbon Free 100%) 및 CFE(무탄소에너지) 인증 제도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국가적으로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RE100을 주창한 영국의 The Climate Group이라는 NGO도 이제 CFE를 받아들인다. 재생에너지뿐만 아니라 원자력발전으로 생산된 전기를 사용해도 인정해주는 것이다. 이산화탄소 배출저감이 목적이지 재생에너지 보급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조용하다. 목적과 수단이 계속 도치되어 있기를 바라는 힘있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정신이 제대로 박혔다면 도리어 원자력발전에 보조금을 주어야 한다. bienns@ekn.kr

[기자의 눈] 용산역은 민주당, 서울역은 국민의힘 전유물인가

명절이면 정치권에는 익숙한 장면이 반복된다. 여야 지도부가 주요 기차역을 찾아 귀성객에게 인사를 건네고, 악수를 나누며 밥상 민심을 살핀다. 기자들은 몰려와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린다. 이 인사 장소에도 공식이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호남선이 출발하는 용산역을, 국민의힘은 경부선이 지나는 서울역을 지난해 설날까지 찾았다. 푸른 점퍼와 붉은 점퍼가 기차역을 나눠 차지하는 모습이 어느새 굳어졌다. 정당 입장에서는 자연스러운 선택일 수 있다. 사람이 많이 오가는 대합실과 열차 탑승구에서 메시지를 전하기 쉽고, 당원과 지지자들이 현장을 찾기도 수월하다. 지지층에 먼저 예우를 갖추려는 뜻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같은 장면이 쌓이면서 생기는 이미지다. 서울역은 국민의힘, 용산역은 민주당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을 여지가 있다. 국민의 눈에는 한국 정치의 고질적인 지역주의를 그대로 비추는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 서울역과 용산역은 모든 시민이 이용하는 공공장소다. 가족을 만나러 떠나는 사람과 연휴를 마치고 돌아오는 사람이 함께 오간다. 정치인에게는 민심 행보용으로 적합한 곳이지만 시민에게는 목적지로 가기 위해 지나는 곳이라서 길을 막으면 불편하다. 교통망이 발달하면서 서울역과 용산역의 경계, 경부선과 호남선의 물리적 장벽도 과거보다 크게 흐려졌다. 정치권만 낡은 지역 구도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여야는 평소 국민통합과 협치를 자주 말한다. 이를 거창한 공동선언으로만 보여줄 필요는 없다.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작은 선택에서도 정치권의 태도는 드러난다. 그렇다면 다음 명절부터는 장소를 맞바꿔 보면 어떨까. 민주당 지도부가 서울역에서 영남행 귀성객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하고, 국민의힘 지도부가 용산역에서 호남행 승객의 손을 맞잡고 덕담을 건네는 방식이다. 지금까지의 익숙한 풍경과도 확연히 다를 것이다. 여야가 늘상 정쟁으로 과격하게 맞서는 것과 별개로, 명절 귀성 인사만은 서로 다른 지역의 시민들을 만나는 기회로 삼아볼 수 있다. 늘 같은 역에서 같은 지지층을 만나는 관행에서 벗어나는 상징적인 행사가 된다. 이번 추석에 민주당 지도부는 '민생 회복, 물가 안정'이라는 문구가 적힌 어깨띠를 착용했다. 다음 명절에 정당이 서로의 공간을 벗어나 교차 방문한다면, 메시지의 진정성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지 않을까. 이상무 기자 rokmc@ekn.kr

[이슈&인사이트] 테슬라가 간과한 생명의 무게

자동차로 이동하는 건 현대인에게 가장 기본적인 권리에 속한다. 이 이동은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 또한 자동차로 이동하려면, 마차를 이용해도 마찬가지겠지만, 무엇보다 문을 열고 닫을 수 있어야 한다.너무 당연한 얘기를 정색하며 말하는 게 우습지만, 오늘날 도로 위를 질주하는 첨단의 전동화 차량 중 일부는 때로 이 단순한 전제를 충족하지 못하기에 정색하지 않을 수 없다. 문을 열어야 할 때 열지 못하면 치명적 상황이 열릴 수 있다. 최근 테슬라를 비롯한 주요 완성차 업체가 중국에서 총 400만 대가 넘는 차량을 리콜한 사태는, 매끄러운 디자인과 혁신이라는 미명 아래 무엇인가 매우 중요한 것이 망각되고 있음을 일깨운다. 이 사태의 중심에 선 테슬라의 리콜 규모는 약 300만 대이다. 리콜이라는 익숙한 말로 퉁치기엔 현대 기술주의의 폐해가 너무 심각해 보인다. 논란의 핵심은 일론 머스크의 테슬라가 대중화한 이른바 '매립식 도어 핸들(Flush Door Handle)'이다. 차체와 완벽하게 밀착되어 공기저항을 줄이고 미래지향적인 미니멀리즘을 완성한다는 이 손잡이는, 차량 전원이 차단되는 비상 상황에서 차를 운전자나 탑승자를 가두는 철창으로 바꿔버린다. 사고로 전기가 끊겼을 때 내부의 기계식 비상 개방 장치를 직관적으로 찾지 못해 화마 속에서 생명을 잃거나 구조의 손길이 차단되는 참사가 잇따르고 있다. 전통적인 기계식 손잡이와 달리, 전자식 매립 핸들은 비상용 레버가 도어 포켓 안쪽이나 보이지 않는 패널 아래 숨겨져 있어 절체절명의 순간에 탑승자를 패닉으로 몰아넣는다. 기술혁신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이 감각적 디자인은, 역설적으로 인간의 생존이라는 가장 본질적인 가치를 뒷전으로 밀어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사태가 일회성 해프닝이 아니라는 점이다. 테슬라는 완전자율주행(FSD, Full Self-Driving)을 둘러싼 과장 광고와 끊이지 않는 소송 속에서, 줄곳 안전 검증보다 시장 선점과 주가 부양을 우선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무선 소프트웨어 업데이트(OTA)라는 현대적 기술을 내세워 물리적 리콜 비용과 사회적 책임을 교묘하게 축소하려는 모습은, 테슬라의 혁신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근본적 의문을 품게 한다. 인류문명의 발전보다는 특정인을 세계 최고 부자를 만드는 게 유일한 목적 같다. 지금도 FSD는 홍보되고 있고, 교묘한 방어장치로 눈가림하면서 우리가 상상하는 자율주행이 실제로 가능할 것처럼 과장한다. '매립식 도어 핸들'을 리콜하게 한 중국은 FSD란 용어도 금지했다. 테슬라가 제공하는 '보조주행' 정도의 용어를 쓴다. 타당한 조치다. 테슬라가 FSD라는 말을 쓴 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한 번도 FSD가 구현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FSD가 아닌 차량을 FSD로 착각하며 몰다가 실제로 사고가 나고 소송이 이어지고 사법당국이 나서는 등 혼란이 빚어지고 있다. 소비자는 소프트웨어 오류와 복잡한 사용자 인터페이스의 실험 대상이자 위험을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이상한 존재로 전락했다. 오늘날 빅테크와 결합한 모빌리티 자본은 인간을 존엄한 주체가 아니라, 실험실의 데이터이자 이윤 창출을 위한 도구로 보는 듯하다. 종종 잊히지만, 인간의 생명은 최상위 가치다. 머스크의 행보는 그가 말하는 혁신이 CEO 개인의 과시욕과 거대한 자본의 탐욕이 결부된 자본주의의 추한 괴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디자인의 미려함이나 자율주행의 환상 속에서, 비상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공포에 떨어야 하는 인간의 목소리는 소음처럼 지워진다. 이제 쟁점은 한국 정부가 이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이다. 한국인의 생명이 중국인보다 덜 소중하지는 않지 않을까. bienns@ekn.kr

[EE칼럼] 발전공기업 통합, 지역 전력계획과 거래권도 넓혀야

정부가 발전 5사를 하나의 발전공기업으로 통합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발전사 간 중복투자와 불필요한 경쟁을 줄이고, 분산된 인력과 자산을 효율적으로 운영해 재생에너지 확대와 석탄발전 전환에 대응하겠다는 취지다. 에너지 전환기에 공기업의 기능과 운영체계를 재정비할 필요성은 분명하다. 그러나 발전공기업의 운영 효율을 높이는 것만으로 변화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을까. 인공지능은 제조업과 농업, 건물, 교통, 금융 등 거의 모든 산업의 생산방식과 경쟁구조를 바꾸고 있다. 데이터센터와 첨단산업의 전력수요가 빠르게 증가하면서 안정적이고 친환경적인 전력을 확보할 수 있는지가 기업과 산업의 입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조건이 됐다. 이제 전기는 단순한 생산비용이 아니라 데이터와 함께 지역의 산업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자산이다. 하지만 현재의 중앙집중형 전력체계에서는 전기를 생산하는 지역과 사용하는 지역, 전력망을 계획하는 주체가 서로 분리돼 있다. 농촌에는 태양광과 풍력발전소가 늘어나지만 주민이 체감하는 소득과 일자리는 많지 않다. 마을이 공동 태양광사업을 추진해도 배전망의 여유가 없으면 계통접속을 기다려야 한다. 반면 인근 산업단지의 기업은 재생에너지가 필요해도 바로 옆에서 생산된 전기를 직접 공급받기 어렵다. 전기는 지역에서 생산되지만 지역의 생산자와 소비자, 산업과 수익은 연결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한전의 배전망을 지방정부에 넘기는 방식이 현실적인 해법은 아니다. 전국 전력망의 안정성과 보편적 공급, 지역 간 요금 형평성은 국가 차원에서 관리해야 한다. 현행 전기사업법상 배전과 전기판매도 허가사업이며, 한전이 사실상 전국의 배전망 운영과 소매판매를 담당한다. 필요한 것은 한전의 기능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한전이 수립하는 전력망 계획과 지역의 산업·에너지 계획을 연결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지방정부에 '지역 전력계획 참여권'을 부여할 필요가 있다. 지방정부가 지역의 재생에너지 공급 전망과 산업단지·농업시설·공공건물·데이터센터의 수요를 조사하고, 이를 장기 배전망 투자계획에 반영하도록 하는 것이다. 한전과 지방정부, 지역기업과 주민이 참여하는 지역 전력계획 협의체를 구성해 어느 지역의 배전망을 먼저 보강하고 어떤 사업의 계통접속이 시급한지 함께 결정할 수 있다. 지역 전력거래의 통로도 넓혀야 한다. 현재 분산에너지특화지역에서는 일정한 조건 아래 분산에너지사업자가 전력시장을 거치지 않고 전기사용자에게 직접 전기를 공급할 수 있다. 이러한 제도적 실험을 확대해 지역에서 생산한 재생에너지를 인근 기업과 공공시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다만 전국적인 전기판매를 지방정부에 맡기자는 것이 아니라, 한전의 전력망을 이용하면서 승인된 사업과 구역 안에서 지역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거래 기회를 확대하자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공지능과 에너지데이터의 활용이 중요하다. 낮에 남는 태양광 전력을 공동 에너지저장장치에 저장하고, 인공지능으로 수요와 발전량을 예측해 필요한 시간과 시설에 공급할 수 있다. 공장과 공공건물에는 인공지능 기반 에너지관리 서비스를 적용할 수 있다. 발전·소비·저장 과정에서 생성되는 데이터는 새로운 기술의 실증과 에너지 서비스 개발에 활용된다. 지역은 전기를 외부로 보내는 생산지를 넘어 전력과 데이터로 지식과 서비스를 만드는 산업현장이 될 수 있다. 주민 이익공유도 태양광 발전수익에만 의존해서는 지속되기 어렵다. 전력가격과 금리, 계통접속과 출력제어에 따라 수익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발전수익에 지역 전력거래, 에너지저장장치와 수요관리, 건물 에너지 절감, 탄소감축, 데이터 서비스의 수익을 더해야 한다. 그 성과를 지역에너지 공유기금에 적립해 주민배당과 에너지복지, 지역기업 육성과 청년 일자리에 재투자한다면 에너지 전환은 지역 기본소득과 기본사회로 발전할 수 있다. 발전공기업 통합이 중앙의 운영 효율을 높이는 개편이라면, 지역 전력계획과 거래권의 확대는 그 성과를 지역의 산업과 소득으로 연결하는 개혁이다. 발전회사를 하나로 만드는 데서 개편을 끝내서는 안 된다. 인공지능 시대에는 누가 더 많은 전기를 생산하는가뿐 아니라 누가 전력과 데이터를 결합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그 성과를 지역사회와 공유하는가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bienns@ekn.kr

[김성우 시평] 글로벌 ESS 성장과 우리의 전략

김성우 김앤장 법률사무소 환경에너지연구소장 SNE리서치에 따르면 2026년 상반기 글로벌 에너지저장장치(ESS)용 리튬이온 배터리 출하량이 461GWh로 집계되며 전년 동기(270GWh) 대비 71% 증가했다. 같은 기간 글로벌 전기차용 배터리 사용량이 609GWh로 전년 동기 대비 20% 성장한 수치와 비교해 봐도 ESS의 괄목할 만한 도약이다. 속도와 안정성이 중요한 AI 데이터센터의 에너지 수요와 간헐성 보완이 필요한 재생에너지 발전량 증가가 도약의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특히 전력망 안정화를 위한 ESS는 347GWh로 전체의 75%를 차지했다. AI 데이터센터 확대, 재생에너지로의 전환, 전력시스템 안정화는 단기간내 멈추지 않을 대세적 흐름이므로 앞으로 ESS 성장의 동인도 견조해 보인다. 연간 출하량 기준으로 올해 984GWh에서 내년에는 1150GWh로 증가하고, 2035년에는 올해의 2배 수준인 1870GWh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는 이유다. 이렇게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잇는 ESS시장도 중국이 선점하고 있다. 글로벌 1위부터 4위까지 전부 중국 회사인데, 이들의 시장 점유율만 합쳐도 55%에 육박한다. 한국도 전년 대비 높은 성장율을 기록하고 있지만 중국과 절대량에서 격차가 너무 커 글로벌 시장 점유율의 유의미한 확대가 절실한 상황이다. 이에 정부도 다양한 정책으로 국내 ESS 산업 육성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우선, 기술 측면에서는 산업통상부가 지난 9월 22일 '배터리 산업기술 로드맵'을 발표했다. 정부와 배터리 업계가 나트륨·전고체 배터리를 새로운 성장 축으로 키우기 위해 정부는 차세대 배터리 기술 개발에 2500억원이 넘는 재정을 투입하고, 국내 셀제조 3사는 비경쟁 영역에서 공동 연구와 표준화에 나서며, 산업 전체가 제조공정 혁신과 소재 국산화 등에 2030년까지 약 8조원을 투입하는 것이 주요 골자다. 기존 국내 업체들이 고성능 NCM(니켈·코발트·망간) 배터리 기술 중심으로 경쟁력을 쌓아온 만큼, 나트륨 배터리와 전고체 배터리 기술을 통해 가격 경쟁력을 갖춘 보급형 배터리와 고성능 차세대 배터리를 동시에 확보해 중국과의 격차를 좁힘으로서 K-배터리가 글로벌 시장의 주도권을 탈환하겠다는 전략이다. 둘째, 생산 측면에서는 세제지원을 약속했다. 지난 8월 3일 재정경제부가 '2026년 세제개편안'을 발표하면서, 녹색전환 및 경제안보 차원에서 전략적 중요성이 높은 산업의 국내 생산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국내생산세액공제를 신설했는데, 대상 품목에 이차전지를 포함시켰다. 기존 통합투자세액공제는 시설투자(CapEx)에 대한 지원에 집중되어 있어 생산운영비(OpEx) 비중이 상대적으로 큰 산업에 대해 생산량에 기초하여 세액공제를 지원함으로서 국내 생산기반 확충 및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려는 취지다. 셋째, 보급 측면에서는 중앙계약시장 입찰로 시장을 확대하고 있다. 기후에너지환경부가 지난 9월 23일 제3차 ESS 중앙계약시장을 개설하고 총 1180㎿ 규모의 ESS 발전사업자를 선정한다고 전해졌다. 중앙계약시장은 전력거래소가 계통 안정화에 필요한 ESS 용량을 경쟁입찰로 선정하고 낙찰자와 15년 장기계약을 체결하는 시장이다. 주목할 점은 이번 한 차례 공고 물량이 앞선 두 차례 누적 낙찰량을 넘어선다는 점이다. 정부가 ESS 구축에 속도를 내면서 국내 시장 규모도 빠르게 커지고 있다. 전기차 수요 둔화로 주춤한 시장에 충분한 물량을 공급해 규모의 경제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배경은 고무적이다. 결국 상술한 정부의 지원들이 더욱 빛을 발하려면, 기술개발에 성공하고 국내생산 및 보급을 확대하는 우선 목표 달성에 추가로, 산업 경쟁력 강화를 통한 글로벌 ESS 시장에서의 점유율을 높일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상기 지원정책들을 구체화할 때 글로벌 경쟁구도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기술 경쟁을 예로 들면, 나트륨 배터리의 경우 중국은 이미 400GWh 규모의 기가팩토리를 운영 및 계획하고 있는 반면, 중국 외 전 세계를 합친 수치는 11GWh에 그쳐, 우리의 기술개발 성공이 곧 글로벌 경쟁력 확보로 연결될 수 있는 전략이 지금부터 고려되어야 한다는 판단이다. 배터리는 전기차용에서 ESS용으로 이미 빠르게 확대·성장하고 있고, 앞으로도 로봇, 드론, 위성 등 새로운 시장 축이 계속 더해질 가능성이 높다. 올 상반기 글로벌 ESS 시장 성장을 예지적으로 해석하고 글로벌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우리의 전략이 더 없이 중요한 이유이다. bienns@ekn.kr

[기자의 눈] 시장이 발자국을 쫓는 이유

공시 없이 주가가 치솟는 종목이 나오면 시장의 반응은 대개 비슷하다. “뭔가 있다." 며칠 뒤 호재 공시가 뜨면 “역시"라는 말이 뒤따른다. 이 짧은 반응에는 한 가지 전제가 깔려 있다. 공시보다 먼저 아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급등은 그 누군가가 먼저 지나간 발자국이다. 투자자들이 공시 대신 소문과 급등 종목을 쫓는 건 발자국을 따라가는 일이다. 공시를 읽어서는 늦으니, 앞서 간 사람의 흔적이라도 밟겠다는 계산이다. 추격 매수는 결국 미공개정보가 시장에 돌고 있다고 인정하는 행위다. 물론 모든 급등이 미공개정보 때문은 아니다. 수급이나 업황이 이유일 때도 많다. 그런데도 시장이 급등을 소문의 흔적으로 읽는다는 사실이 공시에 대한 신뢰가 어디까지 떨어졌는지 보여준다. 이 전제가 근거 없는 의심만은 아니다. 증권선물위원회가 지난 16일 고발·통보한 4건을 보면 공개매수 정보는 임직원 5명에서 가족·지인 11명으로 번졌다. 신기술사업금융사 대표는 유상증자 계획을 미리 알고 공시 전에 주식을 팔아 수십억원의 손실을 피했다. 공시가 나오기 전, 시장 어딘가에는 이미 발자국이 찍혀 있었던 셈이다. 이달에도 비슷한 의심이 잇따랐다. 코스닥 상장사 더코디에서는 임원 13명이 최대주주 변경 공시 직전 열흘 새 처음으로 주식을 사들였다. 에이비엘바이오는 대표 가족 등이 기술이전 공시 전 주식을 사고판 혐의로 15일 압수수색을 받았다. 아직 의혹과 혐의 단계지만, 시장이 급등부터 의심하는 이유로는 충분하다. 문제는 발자국을 쫓는 습관이 스스로 커진다는 점이다. 투자자가 급등을 신호로 읽을수록 가격은 공시 전에 먼저 움직이고, 공시가 나올 때 남는 몫은 줄어든다. 공시의 가치가 떨어지니 투자자는 더 부지런히 발자국을 찾는다. 시세조종 세력에게 이만한 먹잇감도 없다. 가짜 발자국을 찍어 급등을 만들면 추격 매수가 알아서 따라온다. 발자국을 따라간 끝에서 투자자가 만나는 것은 정보가 아니라 먼저 온 사람이 던지는 물량일 수 있다. 공시 제도의 약속은 단순하다.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 선다는 것이다. 그 약속이 지켜진다고 믿어야 투자자는 발자국 대신 공시를 읽는다. 신뢰를 되찾는 길은 발자국이 찍히지 않게 하는 데 있다. 중대 계약과 자본거래는 협의 단계부터 정보 접근자를 관리하고, 공시 전 이상 급등은 거래소가 즉시 경위를 따져야 한다. 제재도 빨라져야 한다. 이번 공개매수 사건은 거래 뒤 1년이 넘어서야 결론이 났다. 발자국을 남긴 사람이 곧바로 드러나는 시장이어야 투자자도 발자국 쫓기를 멈춘다. 공시가 가장 먼저 도착하는 정보가 될 때, 시장은 다시 공시를 믿는다. 최태현 기자 cth@ekn.kr

[진격의 K-뷰티⑩] “정부 인프라 지원 절실…해외 규격 인증도 적극 지원해야”

[진격의 K-뷰티①] 화장품이 제2의 반도체? 글로벌 영토 확장 '가속 페달' [진격의 K-뷰티②] 한류 열풍에 트렌디한 마케팅까지…'인기몰이' 이유 있었다 [진격의 K-뷰티③] '인기 브랜드' 면면 살펴보니…기초부터 헤어케어까지 '각양각색' [진격의 K-뷰티④] ODM의 힘…韓 기업들 '글로벌 열풍' 이끈다 [진격의 K-뷰티⑤] 외국인 心 잡은 한국 화장품…관광객들 '장바구니' 살펴보니 [진격의 K-뷰티⑥] 韓 넘어 세계로···CJ올리브영 '질주' 무섭다 [진격의 K-뷰티⑦] 수출 지도 바꾼 한국…글로벌 트렌드 변화 속도도 빠르다 [진격의 K-뷰티⑧] 잘나가니 짝퉁도 기승…브랜드 지키기 “방심은 금물" [진격의 K-뷰티⑨] “단순 유행 넘어 원천 기술력 및 R&D 고도화 역량 쌓아야" [진격의 K-뷰티⑩] “정부 인프라 지원 절실…해외 규격 인증도 적극 지원해야" 한국은 지난해 미국을 제치고 세계 2위 화장품 수출국에 올라섰다. 수출액은 114억달러(약 15조3900억원).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중국인 관광객과 보따리상 의존도가 높았던 K-뷰티가 이제 미국과 유럽, 일본을 넘어 중동·중남미까지 영토를 넓히고 있다. 눈길을 끄는 건 성장 방식이다. 지난해 3분기 기준 화장품 수출의 73.3%를 중소기업이 담당했다. 자본력을 갖춘 일부 대기업이 아니라 수많은 중소·인디 브랜드가 세계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는 얘기다. K-뷰티는 정부가 만들어낸 산업이 아니다. 작은 브랜드가 아이디어를 내놓고 국내 제조업자개발생산(ODM)·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기업이 품질을 뒷받침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온라인 플랫폼을 활용해 기업들이 직접 해외 소비자를 찾아갔다. 정부가 해야 할 일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선수가 되기보다 기업이 마음껏 달릴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것이다. 가장 시급한 분야가 해외 규제와 인증이다. 우리 화장품은 200개가 넘는 국가로 향하지만 국가마다 허용 성분과 표시 기준, 인증·통관 절차가 다르다. 미국·유럽뿐 아니라 동남아와 중동, 중남미까지 규제 정보를 촘촘하게 확보해 기업에 제공해야 한다. 중소기업이 제품은 잘 만들어놓고 서류와 인증에 막혀 시장 진입 시기를 놓치는 일은 줄여야 한다. 정부도 해외인증 비용 지원과 규제정보 제공, R&D 지원 등을 확대하고 있다. 방향은 맞다. 식품의약품안전처와 중소벤처기업부,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등에 흩어진 지원 기능을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해외에서 범람하는 가품과 상표권 침해에도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기업의 숙제도 분명하다. 한류와 SNS 마케팅만으로 10년을 버티기는 어렵다. 지금의 성과를 원천기술과 원료·소재, 연구개발(R&D)에 다시 투자해야 한다. 결국 소비자가 두 번째 제품을 집어 들게 하는 힘은 유행이 아니라 품질과 신뢰다. 세계 2위는 종착점이 아니다. K-뷰티를 잠깐의 열풍이 아닌 한국을 대표하는 장수 수출산업으로 만드는 경쟁은 이제부터다. 기업은 세계에서 뛰고 정부는 그 앞의 장애물을 치워주는 것. K-뷰티에 지금 필요한 역할 분담은 의외로 단순하다. 여헌우 기자 yes@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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