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생이라는 채찍으로 금융사들을 거칠게 몰아붙이는 금융당국의 행태가 참으로 혼란스럽다. 당국의 메시지는 또렷하고 분명하다. 고금리, 고물가 등으로 서민들이 어려운 처지에 놓인 만큼 금융사들이 나서서 자영업자, 소상공인의 이자부담을 낮추기 위한 충분한 수준의 지원방안을 내놓으라는 게 요지다. 상생금융은 금융사들의 건전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국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충분한 규모여야 한다는데 방점이 찍혔다.
과거에도 오늘날에도 금융당국 주문의 첫번째 타깃인 시중은행들은 국민이 아닌 ‘당국’이 납득할 만한 상생금융 규모가 어느 수준인지 의중을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다. 올해 말 기준 금리가 5%를 초과하는 기업대출을 보유한 자영업자, 소상공인에게 내년 중 납부할 이자의 일부를 현금으로 돌려주는 ‘이자 캐시백’ 형태로 지원하겠다는 대략적인 윤곽만 나왔을 뿐이다. 다만 2조원에 달하는 캐시백을 은행들이 어떤 기준으로 분담할지에 대해서는 3차례에 걸친 태스크포스(TF) 회의에서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18개 은행 가운데 당기순이익, 개인사업자 대출 비중 등 어느 조건을 적용해도 특정 은행들의 부담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경제 위기 속 심기일전의 각오로 내년도 사업계획 마련에 분주한 은행권이 상생금융 강화 방안에만 힘을 쏟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당국의 압박이 1차 원인이다. 그리고 당국이 은행권을 향해 상생금융을 내놓으라고 채찍질하는 뒷배경에는 총선이라는 빅 이벤트가 버티고 있다. 금융당국은 거대 야당인 민주당이 추진하는 횡재세 법안에 대해서는 철저히 선을 그으면서도 횡재세에 버금가는 상생금융을 요구하고 있다. 사실 국민 입장에서 보면 상생금융이나 횡재세나 어떤 큰 차이가 있는지 알기 어렵다. 당국이 상생금융이 아닌 횡재세를 들이댄다고 해도 정부의 방침에 순응하는 은행권의 행보는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총선, 대선만 다가오면 마치 은행을 자신의 호주머니 다루듯이 휘어잡는 정부와 정치권의 행동은 분명 불편하다. 은행권을 향해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사업 모델을 요구하면서도, 그런 은행을 대하는 이들의 인식은 구태의연하고 고루하다.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일부에서는 은행들이 사회공헌을 강화해야 한다는 당위성 중 하나로 1990년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할 당시 은행들이 공적자금을 투입받아 위기를 극복했다는 과거 이야기를 꺼낸다. 은행들이 어려울 때 국민의 도움을 받아 되살아났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은혜를 갚으라는 취지다.
‘천수답식 경영’도 당국이 은행을 휘어잡는 무기 중 하나다. 고객들로부터 받은 예금에 이자를 붙여 다른 고객들에게 대출해주는 은행의 사업구조가 특권이자 특혜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카드사들이 은행, 증권사처럼 입출금 계좌를 고객에게 제공할 수 있는 ‘종합지급결제업’을 허용해달라고 수년째 건의 중인 것을 보면, 은행의 여수신 기능은 다른 업권도 탐낼 만한 특수한 사업구조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신사업 인허가권을 쥐고 있는 금융정책당국이 은행의 사업 구조를 인질 삼아 소상공인 지원책을 내놓으라고 촉구하는 행보는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굵직한 정치 이벤트를 앞두고 은행권을 향해 지원책을 요구하는 당국의 행보와 이에 복종하는 은행권의 모습이 미래에도 고착화되지는 않을지 우려스럽다. 금융당국의 방침이라면 작은 손짓이라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게 현 은행의 모습이다. 당국의 회초리에 의구심이 들지만, 그럼에도 금융사들이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전제는 변하지 않는다. 당국이 치(治)를 가동해서 하느냐, 금융사가 자발적으로 하느냐 등 방법론의 차이일 뿐이다. 지난달 20일 금융지주사와 만난 후 김주현 금융위원장이 "자영업자, 소상공인이 무너지는 상태에서는 은행 산업에도 미래가 없다. 지속 가능한 영업의 관점에서 봐도 이들의 이자비용을 낮춰주는 게 필요하다"고 발언한 점에 대해 비판할 수 없는 이유다.
관치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면서, 금융사의 사회공헌을 정부의 성과로 포장하려는 노력은 분명 근절돼야 한다. 동시에 은행들은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앞으로도 자발적으로 사회공헌에 주력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나라 경제의 뿌리인 소상공인, 자영업자가 살고 은행도 살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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