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생명. |
[에너지경제신문=나유라 기자]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과 재무적 투자자(FI)인 어피니티 컨소시엄 간에 경영권 분쟁이 갈수록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교보생명은 지금이 상장의 최적기인 만큼 기업공개(IPO)를 통해 공정한 시장가치를 산출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이와 달리 어피니티는 IPO보다는 주주 간에 계약서를 이행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양측의 입장차가 좁혀지지 않는 것은 작년 9월 국제상업회의소(ICC) 1차 중재판정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신창재 회장 입장에서는 어피니티가 제시한 가격을 받아들일 경우 경영권을 위협받을 수 있는 만큼 상장을 통해 풋옵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는 평가다.
◇ 10년간 계속된 갈등...ICC 1차가 신 회장 구했다
21일 금융권에 따르면 투자은행(IB) 업계에서는 어피니티가 신 회장 측에 풋옵션을 행사한 2018년부터 현재까지 신 회장 입장에서 내놓을 수 있는 카드는 다 내놨다는 분석이 나온다.
어피니티는 2012년 9월 교보생명 지분 24%를 인수하며 3년 내 교보생명의 기업공개(IPO)가 이뤄지지 않으면 풋옵션을 행사하기로 했다. FI의 지분 매입가는 주당 24만5000원, 총액 1조2000억원이었다. 그러나 2015년 9월까지 대내외적인 여건 악화로 IPO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어피니티 컨소시엄은 2018년 풋옵션을 행사했고, 주당 가격으로 40만9912원, 총 2조122억원을 제출했다. 해당 안을 받아들이면 신 회장 입장에서는 경영권이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이에 신 회장은 FI와 꾸준히 협상을 벌이면서 자산담보부채권(ABS) 발행, 제3자 매각, 기업공개 후 차익보전 등의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FI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벼랑 끝에 몰렸던 신 회장을 구한 것은 다름 아닌 ICC 1차 중재판정이었다. 지난해 9월 국제상업회의소(ICC)에서는 신 회장과 어피니티 간에 풋옵션 계약이 유효하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어피니티가 제시한 주당 가격 40만9000원에 매수할 의무는 없다고 판단했다. 양측 분쟁의 단초였던 ‘주당 가격 40만9000원’과 관련해 어피니티 측의 주장을 기각한 것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당초 1차 중재에서 신 회장 측에 유리한 판결이 나오기 어려울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을 뒤집고, 신 회장에 유리한 쪽으로 결론이 났다"며 "(어피니티가) 풋옵션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절차상 문제가 있었고, 신 회장 측이 어피니티의 가격대를 응할 이유가 없다는 가장 중요한 핵심을 ICC가 짚은 것"이라고 평가했다.
◇ ICC 강제성 없지만 대법원 판결과 효력 동일..."IPO가 최선"
업계에서는 신 회장과 어피니티 간에 계약에서 중요한 허점이 있었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신 회장이 풋옵션 가격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평가기관을 통해 가격을 산정하지 않아도 어피니티가 이를 강제할 의무가 없다는 게 쟁점이다.
실제 신 회장은 주주 간 계약서가 애초에 불공정하다고 반발하며 어피니티 측에 가격대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신 회장 측은 자신이 지정한 회계법인에서 어피니티가 제시한 가격보다 10% 이상 낮은 가격대를 제시할 경우 제3평가기관을 통해 새로운 가격을 받아야 한다는 조항을 문제 삼고 있다. 계약서에는 제3평가기관을 정할 때 어피니티가 사전에 추린 3곳의 평가기관 중 신 회장이 한 곳을 정하도록 규정했는데, 이것이 결국은 어피니티 측에 유리한 쪽으로 결론이 나도록 설정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다.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 |
또 다른 관계자는 "양측이 풋옵션 계약을 체결할 때만 해도 2015년이면 무난하게 상장에 성공할 것으로 봤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어피니티 측은 "만일 계약서가 신 회장에 불리한 쪽으로 이뤄졌을 경우 ICC에서도 분명 이 부분을 지적했을 것"이라며 "그러나 ICC에서도 계약 자체는 유효하고, 적법하다고 판단한 만큼 신 회장은 약속대로 계약을 이행해야 한다"고 밝혔다.
중재판정은 이행에 강제성은 없지만 대법원 판결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다. 기업들이 ICC에서 나온 결과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기업 신뢰도, 투자자 유치 등에 부정적이다. 신 회장이 IPO를 추진한 것도 ICC 중재판정 결과를 이행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ICC에서 어피니티가 제시한 40만9000원에 주식을 사들일 의무가 없다고 본 만큼 IPO를 통해 공정시장가치(FMV)를 산출하자는 의도다.
◇ 10년 전 주당 24만5천원 투자...어피니티, 풋옵션 이행 촉구
그러나 어피니티는 측은 IPO와 관계없이 계약상 의무를 이행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IPO를 통해서는 어피니티가 계획한 만큼의 자금을 회수할 수 없다는 속내가 깔린 것으로 풀이된다.
일례로 2010년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한 삼성생명의 경우 청약 증거금으로 약 20조원에 달하는 역대 최대 규모의 자금이 몰리며 흥행에 성공했다. 그럼에도 당시 공모가는 11만원이었고, 현재 주가는 5만9000원대로 12년 전 공모가에도 미치지 못한다. 교보생명이 IPO를 추진해도 주당 가격은 10만원을 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게 증권가 안팎의 분석이다.
이렇게 되면 어피니티가 회수하는 자금은 기존에 제시한 40만9000원대는 물론 10년 전 투자금(24만5000원)보다 적을 가능성이 크다. 신 회장이 2019년 어피니티 측에 기업공개 후 차익보전 등의 협상안을 제시한 것은 어피니티의 이러한 자금 상황을 고려한 조치였다. 증권가 관계자는 "오랜 기간 분쟁을 이어가는 것은 교보생명, 어피니티 모두에게 득보다는 실이 크다"며 "현재 상황에서 가장 공정하게 기업가치를 산출하고, 모든 주주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IPO"라고 말했다. 이어 "사실상 신 회장이 풋옵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모든 방안들을 가동한 상태"라며 "교보생명의 상장 필요성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보기보다는 좀 더 거시적인 관점으로 (어피니티에서도) 공감을 해줘야 한다"고 밝혔다.
교보생명 측은 "기준금리 인상, 새 국제회계기준(IFRS17), 신지급여력제도(K-ICS) 도입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걷히고 있고, 보험주가 경기 방어주로서 주목을 받고 있는 만큼 상장을 추진하는데 있어서 지금이 최적의 시기"라며 "현재 비상장사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투자자 보호 수단을 마련한 만큼 IPO를 통해 브랜드 가치는 물론 기업 투명성을 제고해 한 단계 도약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작년 말 연결재무제표 기준 교보생명의 총자산은 130조9000억원, 당기순이익 4893억원, 자기자본이익률(ROE) 4.25%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