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 초안 발표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전력당국과 실무자들은 이번 전기본의 관건인 신규 원자력발전소 규모와 재생에너지 비중 등을 두고 고심을 거듭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에너지업계에서는 한국전력공사의 적자와 송전망 확충이 선결되지 않을 경우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는 우려를 내놓고 있는 상황이다.
5일 에너지업계에 따르면 지난 10차 장기송변전설비계획에 따라 한국전력공사는 2036년까지 송전과 변전 투자에 56조원, 배전에 44조원 등 총 100조원을 투자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 인프라 투자가 완료돼야 2036년까지 예정된 발전소들이 제대로 운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관련 투자는 거의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그 사이 인프라 투자를 전제로 한 발전사업 허가가 크게 늘었다.
해상풍력, 호남영남 태양광 등 신규 비분산 재생에너지의 경우 인프라 건설이 완공돼도 전력계통 접속이 실패할 가능성이 크고, 향후 신규발전사업 허가도 나지 않는 등 많은 문제 소지를 갖고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
실제 2021년까지 완공 예정이던 강원-수도권 송전망 확충이 실현되지 않으면서 대형 발전원들도 송전제약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다.
산업통상자원부와 한전은 문제가 계속해서 불거지자 2026년까지 전력 송배전 인프라 완공 계획을 밝혔지만 이마저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신규 발전사업 인허가를 담당하는 전기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학장은 “송배전망 독점 사업자인 한전이 40조원이 넘는 누적적자로 투자여력이 없다"며 “한동안 송전제약 빈발은 물론 다른 발전원들의 신규허가도 나지 않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해 보인다"고 분석했다.
한 발전업계 관계자는 “11차 전기본에 원전 2기 혹은 4기, 10기가 반영되는 게 문제가 아니다"라며 “당장 한전 적자 해소 위한 전기요금 정상화, 정치 독립적인 전력산업 거버넌스 개편, 송배전망 등 인프라 확충이 더 시급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전력당국의 최우선 과제는 전기요금 정상화 등 송배전망 사업자인 한전이 필수 투자를 차질없이 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11차 전기본 총괄위원장인 정동욱 중앙대 교수는 “신규원전 건설은 아직 정확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무조건 반영한다' 혹은 '반영 하지 못 한다' 둘 다 불확실하다"며 “원자력발전은 워낙 규모가 커 대규모 부지가 필요하고 건설기간도 긴만큼 정부에서도 계획에 쉽게 반영하기는 어렵다"고 말한 바 있다.
실제 산업부는 물론 에너지업계에서도 11차 전기본에 신규 원전이 포함돼도 실제 건설은 어렵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11차 전기본 수립작업에 참여중인 한 관계자는 “전기요금 인상 없이 탄소중립을 추진하려면 원전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다만 11차 전기본에 포함된다고도 하더라도 입지 선정이 쉽지 않은 것은 물론 고준위방사성폐기물 특별법도 여전히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생산한 전기를 과거처럼 고압송전망으로 전송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며 인구도 감소해 장기적인 수요처 확보도 불확실하다"고 지적했다.
원전업계에서는 '신규원전 추가 건설에는 문제가 없다'며 수용성 확보에 적극 나서야 한다는 입장이다.
노동석 에너지정보문화재단 원전소통지원센터장은 “기후위기,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등으로 에너지안보와 탄소배출 저감, 변동성 재생에너지의 보완 수단으로서 원전이 재평가되고 있다"며 “우리도 '실행가능하고 합리적인 에너지믹스 재정립'을 목표로 원전을 중시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조기 착수된 11차 전기본에 신규원전이 반영될 것이라는 예상이 일반적이다. 당장 착수해야 하는 일이 지역의 수용성을 전제한 원전입지 확보다. 이를 위해 재생에너지처럼 이익 공유, 지역상생 모델을 적극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원전 수용성이 예전보다 좋아진 것이 사실이다. 지역 이장협의회의 원전유치 플래카드가 걸리고 자생적 친원전 시민단체가 생겼으며 반원전 시위에 맞불 집회가 열리는 것도 전에 없던 일"이라며 “세계적으로도 원전 소유형태는 국영, 공영, 민간 또는 혼합형태가 혼재 할 뿐 아니라 소유와 운전이 분리돼 민간 또는 지자체도 원전사업에 지분참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정부는 2년마다 장기 전력 수급 전망을 바탕으로 발전원별 구성비, 송·변전 설비 계획 등을 담은 전기본을 세운다. 11차 전기본은 2024년부터 2038년까지 적용된다. 11차 전기본 수립 총괄위원회는 초안을 최대한 이른 시일 내 마무리하기 위해 매주 1회 이상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