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미국 대선에서 승리한 이후 외교 행보에 열을 올리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일본과도 유의미한 관계 구축에 나서고 있다. 반면, 비상계엄 사태 이후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소추안 가결로 직무가 정지되면서 한미 동맹 관계는 위기를 맞게될 처지에 놓였다.
트럼프 당선인은 16일(현지시간) 플로리다주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과의 기자회견에서 취임 전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 회동 가능성에 대해 “그들(일본)이 원한다면 나는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우리는 일본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아베 신조 전 총리 부인인 아베 아키에 여사를 통해 이시바 총리에게 책과 기념품 등 선물을 보냈다고도 밝혔다.
트럼프 당선인은 전날 부인 멜라니아 트럼프 여사와 함께 아키에 여사를 만나 바 있다. 멜라니아 여사는 엑스(X·옛 트위터) 계정에 트럼프 당선인, 아키에 여사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리고 “아베 아키에 여사를 마러라고에서 다시 맞이해 영광이었다. 우리는 그녀의 작고한 남편인 아베 전 총리를 추모하고 그의 훌륭한 유산을 기렸다"고 적었다.
아베 전 총리는 2016년 대선 당시 취임 전 트럼프 당선인을 찾아가 외국 정상 중 처음으로 만났고 이를 바탕으로 개인적 관계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이시바 총리도 트럼프 당선인과 취임 전 회동을 모색해왔지만 트럼프 당선인 측에서 응해주지 않으면서 아직 회동은 성사되지 못한 상태다.
애초 트럼프 당선인 측은 원칙적으로 내년 1월 취임 이전에는 외국 정상과 만나지 않기로 했다고 이시바 총리 측에 전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아베 아키에 여사와 면담, 기업 투자 등 일본 측의 '전방위 접근' 노력이 이어지면서 입장을 선회하는 분위기인 셈이다.
실제 이날 기자회견은 손 회장의 1000억달러(143조6000억원) 규모 대미 투자계획 발표를 위해 기획됐다. 특히 트럼프 당선인이 기자들과 각종 이슈 관련 질의응답을 주고받으면서 사실상 대선 승리 후 첫 기자회견 모양새가 됐다.
손 회장은 트럼프 당선인과 기자회견한 뒤 NHK와 단독 인터뷰를 갖고 “어제는 당선인과 아침 식사를 함께하는 등 아침부터 저녁까지 7시간 정도 친근한 시간을 보냈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투자계획에 대해서는 “당선인에게는 앞으로 여러 회사로부터 많은 제안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처음에 재빠르게 행동하는 것으로 여러 비즈니스와 파트너십을 넓힐 수 있어 의사결정은 빠른 편이 좋다"고 말했다.
주목할 점은 트럼프 차기 대통령의 당선이 결정되기 훨씬 전부터 일본은 관계 구축에 공을 들여왔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 때인 지난 4월 23일(현지시간)에는 당시 집권 자민당 부총재를 맡고 있던 아소 다로 전 일본 총리가 뉴욕 트럼프타워를 찾아 공화당 대선 후보인 트럼프 전 대통령을 만났다.
아소 전 총리는 트럼프와 개인적 친분을 쌓은 아베가 총리로 재임 때 부총리를 역임하면서 정상회담에 배석했고, 두 정상의 골프 회동에도 동참했기에 트럼프 전 대통령과도 안면이 있다. 이 회동은 일본 정부 입장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선에 승리하는 경우에 대비한 '보험 들기'라는 해석이 당시 일본 언론에서 나왔다.
트럼프 당선인은 같은 날 조지 글래스 전 포르투갈 대사를 일본 주재 미국 대사로 지명했다. 그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트루스소셜에 올린 글에서 “글래스를 다음 주일 미국 대사로 발표하게 돼 기쁘다"고 적었다.
이와 관련해 일본 정부 대변인인 하야시 요시마사 관방장관은 17일 오전 정례 브리핑에서 “일본을 중시한다는 취지의 트럼프 차기 대통령 발언을 환영한다"며 “쌍방이 편리한 시기에 회담을 갖고 차분히 의견을 교환하면서 인간관계를 구축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트럼프 당선인의 주일 대사 지명과 관련해 “일본과 미국의 가교 역할을 맡을 중요한 임무"라며 “주일 미국대사를 포함해 차기 (미국) 정권과 일·미 동맹을 더욱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을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트럼프 당선인은 지난 5일 데이비드 퍼듀 전 연방 상원의원을 중국 주재 대사로 지명했고 이날 일본 주재 미국 대사도 임명됐지만 한국 주재 미국 대사에 대한 언급은 아직도 없다.
트럼프 당선인은 집권 1기 취임을 앞두고서도 일본과 중국 주재 대사는 미리 지명했지만, 주한 대사는 공석으로 놔두다 취임 후 1년 6개월이 지난 2018년 7월에야 해리 해리스 전 미 태평양군사령관을 임명한 바 있다.
그가 처음 미 대선에서 승리한 2016년 말과 이듬해 초도 당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정국이 진행되던 때여서 윤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통과돼 직무가 정지된 현재의 한국 상황과 유사했다.
이런 와중에 다른 나라 정상들은 트럼프 당선인을 향해 '줄대기'를 시도하고 있다. 탄핵 정국 속에서 리더십 부재 상태인 한국과 대조적이다.
실제 트럼프 당선인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각국 정상들이 나에게 연락하고 일부는 만남을 시도하려고 한다"며 100개국 이상 정상과 통화를 가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국에 대한 언급은 회견에서 나오지 않았다.
내년 1월 20일 예정된 트럼프 당선인의 취임식에 정상들이 줄줄이 참석할 것으로 관측된다. 주요 외신에 따르면 트럼프 당선인은 이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취임식 참여를 초청했고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나이브 부켈레 엘살바도르 대통령 등도 초대를 받았다.
이런 가운데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대북 정책과 관련해 한국을 패싱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트럼프 당선인이 최근 리처드 그레넬 전 주독일 대사를 북한 업무를 담당할 '특수임무 특사'로 지명하면서다. 미국이 북한과 직접 대화에 나서겠다는 뜻으로 풀이되는 만큼 한국에는 또 하나의 경고음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