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환 서강대 명예교수/에교협 공동대표 |
정부가 뒤늦게 에너지 정책의 법제화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지난 4년 동안 에너지 관련 법률을 철저하게 외면해왔던 것과는 완연하게 다른 모습이다. 거대 여당이 국회를 틀어쥐고 있는 현실에서 일단 법제화를 해놓으면 차기 정부도 탄소중립으로 포장해놓은 탈원전·탈석탄을 함부로 바꾸지 못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정치 현실에서 대못질은 환상일 뿐이다. 2017년의 신규 원전 6기의 건설 중단시킨 것이 가장 확실한 증거다.
정부가 합리적인 논의를 바탕으로 대못의 법제화를 시도하는 것도 아니다. 세계 최초로 만들었다는 ‘수소법’은 시행 직후부터 여당발 개정 논란에 휩싸여 버렸다. 정부·여당이 ‘청정수소’에 대한 규정을 빼먹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탓이다. 그런데 청정수소의 정체에 대해서는 여당 내부에서조차 합의를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상황이 만만치 않다. 온실가스를 내뿜지 않고 수소를 생산하려면 엄청난 양의 전기를 소비해야만 한다. 멀쩡하게 소비할 수 있는 전기로 운송·저장·활용 기술조차 부실한 청정수소를 생산해야 할 명분이 없다. 엄청난 양의 온실가스를 쏟아내는 개질 수소를 ‘블루 수소’라고 부르기도 멋쩍은 일이다. 개질 수소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를 포집하는 기술을 석탄에 적용한 ‘블루 석탄’이 훨씬 더 현실적인 대안이기 때문이다.
고작 109명의 찬성으로 통과시켜놓은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도 엉망이다. 국회법이 필수로 요구하는 비용추계도 내놓지 못했다. ‘녹색’은 이미 우리 사회에서 퇴출된 이명박 정부의 핵심 정책을 정리해놓은 ‘저탄소 녹색성장 기본법’에서 고스란히 베껴놓았다. 83개 조항 중에서 행정·지원 조직의 구성에 관련된 조항만 20개가 넘는다. 결국 탄소중립은 핑계일 뿐이다. 사실 탄소중립 기본법은 ‘친정부 시민단체 육성법’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정부가 숨 가쁘게 쏟아내고 있는 ‘탄소중립’ 방안도 허접하기는 마찬가지다. 어설픈 정책 홍보 이벤트에 지나지 않았던 탄소중립 비전 선포 1주년을 핑계로 내놓은 ‘대전환 비전·전략’이 그렇다. 선도기업의 총수들을 청와대로 불러들인 것도 옹색한 일이었다. 앞으로 4년 동안 필요하다는 94조 원의 비용을 억지로 기업에 떠넘기겠다는 어설픈 꼼수였을 뿐이다.
대전환의 내용이 어지럽다. 미국조차 참여를 망설이고 있는 석탄 폐지를 무작정 밀어붙일 모양이다. 2034년까지 노후 석탄발전 24기를 폐쇄한다. 대안이 황당하다. 2018년 3.6%에 지나지 않은 재생에너지의 비중을 70.8%로 끌어올리고, 0%인 청정수소 자급률도 60%까지 확대한다. 재생에너지의 낮은 효율과 극심한 변동성?간헐성의 극복에 필요한 기술에 대한 고민을 찾아볼 수 없다. 청정수소도 미국의 무책임한 저술가 제레미 리프킨이 20년 전에 제시했던 황당한 SF소설 수준의 억지를 국가의 핵심 국정과제로 제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암모니아·수소의 혼소·전소 기술을 확대하겠다는 주장도 비현실적이다. 자동차용 요소수 생산에 필요한 월 1700톤의 요소도 확보하지 못해서 사회주의 경제정책이라는 ‘배급제’까지 시행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연료로 쓸 엄청난 양의 암모니아·수소를 청정기술로 생산하겠다는 것은 억지일 수 밖에 없다. 암모니아와 수소의 생산에 쓸 전기를 직접 사용하는 것이 훨씬 더 현실적인 선택이다.
2017년 느닷없는 ‘탈핵’으로 시작해서 ‘에너지 전환’과 ‘탄소중립’으로 포장해놓은 ‘탈원전’은 1958년에 제정해놓은 원자력진흥법을 통째로 무시한 폭거였다. 신고리 5·6호기를 비롯한 신규 원전의 공사를 중단시켜버린 법적 근거도 분명치 않았다. 저탄소·녹색성장기본법·에너지법·전기사업법도 무시해버렸다. 국회가 제정한 에너지 관련 법률을 통째로 외면해왔던 정부가 차기 정부에게는 법제화를 통해 대못질을 시도하는 것은 볼썽 사나운 내로남불이다.
탄소중립은 앞으로 우리 사회가 지혜롭게 대처해야만 하는 엄중한 과제다. 우리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전 세계 배출량의 1.51%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적 책임도 0.1%에 불과하다. 우리가 국제 사회에서 앞장서 막춤을 춰야 할 이유가 없다. 차기 정부가 현 정부의 막춤을 이어가야 한다는 기대는 부질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