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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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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하이닉스 HBM 설계 연구원, 계약 어기고 美 마이크론 임원으로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24.03.07 10:12

첨단 기술 유출 심각…산업 스파이도 가파른 증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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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SK하이닉스 HBM 연구원이 미국 마이크론 임원으로 자리를 옮긴 점에 대해 법원이 제동을 걸었다. 사진=SK하이닉스 제공

사법부가 SK하이닉스 고대역폭 메모리(HBM) 설계 담당으로 일하다 후발 주자인 미국 마이크론으로 이직한 전 연구원에 대한 전직 금지 가처분을 인용했다. 업계는 HBM 기술 경쟁이 치열함을 시사한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업계 내 첨단 기술 경쟁에 불이 붙으며 외국 경쟁사로의 기술 유출 우려도 커지고 있다.


7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A씨는 SK하이닉스에서 D램·HBM 설계 관련 업무를 맡아오다 2022년 7월 퇴사하고 마이크론의 임원급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미 A씨는 SK하이닉스 퇴직 즈음에 마이크론 등 경쟁사에 2년 간 취업·용역·자문·고문 계약 등에 대한 계약을 일절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약정서에 서명까지 한 상태였다.


김상훈 서울중앙지방법원 제50민사부 재판장은 지난달 말 SK하이닉스가 A씨를 상대로 제기한 전직 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위반 시 1일당 1000만원을 지급하라고 결정했다. 현재 SK하이닉스가 글로벌 HBM 시장 1위를 점하고 있는데, A씨가 근무 중 알게 된 지식이 경쟁사인 마이크론으로 유출되면 회사 경쟁력 훼손이 불가피하다고 봐서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전직 금지 약정 잔여 기간이 5개월 남짓한 가운데 법원의 이 같은 움직임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전직 금지 기간이 얼마 안 남았을 때에는 가처분 신청 기각 결정이 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행 강제금을 언급하면서까지 막아선 건 법원도 HBM 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했다는 이유에서다.


HBM은 인공지능(AI) 시대를 이끌어 갈 반도체의 핵심으로 꼽힌다. 이는 복수의 D램을 수직으로 연결해 데이터 처리 속도를 혁신적으로 제고한 고성능 메모리다. AI 시장 확대에 따라 폭발적인 성장세가 예상된다. HBM은 1세대(HBM)-2세대(HBM2)-3세대(HBM2E)-4세대(HBM3)-5세대(HBM3E) 순으로 개발돼왔다. SK하이닉스는 HBM3를 엔비디아에 사실상 독점 공급하고 있고, 시장 점유율은 50% 내외로 명실상부한 글로벌 1위다.




그런 상황에서 마이크론은 갑자기 SK하이닉스나 삼성전자보다 빠르게 5세대인 HBM3E 양산 계획을 발표하고, 이후 삼성전자가 업계 최초로 12단 36GB HBM3E 개발에 성공했다고 밝히는 등 차세대 개발·양산 경쟁은 날이 갈수록 심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재판부가 결정문에는 A씨가 지득한 정보가 새나가면 마이크론은 SK하이닉스와 같은 수준의 사업 역량을 갖출 시간을 줄일 수 있는데, 반대급부로는 SK하이닉스가 비 가역적으로 HBM 경쟁력 상당 부분을 잃게 된다고 명시돼 있다.


A씨를 임원으로 영입한 마이크론은 글로벌 3위 메모리 제조사다. 그간 HBM 시장 내 존재감은 사실상 없었지만 지난해 10월 실적 콘퍼런스콜에서 HBM 시장 진출 선언에 따라 대대적인 입지 강화에 나섰다. 이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인력을 빨아들여 가능했다는 전언이다.


이와 관련, 실제 반도체 업계에는 핵심 기술 산업 스파이들이 존재해 우려 섞인 시선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에는 삼성전자 전직 임원이 영업 비밀은 반도체 공장 설계 도면을 빼돌려 중국 내 반도체 공장을 지으려 했던 혐의로 적발됐다. 삼성전자 자회사인 세메스의 전직 연구원은 영업 기밀을 이용해 반도체 습식 세정 장비를 만들어 수출했다가 적발돼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타 업체로 이직을 준비하던 삼성전자 엔지니어는 국가 핵심 기술이 담긴 중요 자료를 화면에 띄워놓고 촬영해 보관하다 적발되기도 했다.


산업통상자원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국가 핵심 기술'을 포함한 전체 산업 기술의 해외 유출 적발 사건은 전년보다 3건 증가한 23건으로 나타났고, 15건이 반도체 분야에 관한 것이다.


최근 5년 새 전체 산업 기술 유출 적발 건수는 총 96건으로 매년 우상향 그래프를 그리고 있다. 국가정보원 산업기밀보호센터(NISC)가 2003년부터 지난해 7월까지 20년 간 집계한 해외 유출 산업 기술은 총 552건으로, 피해 규모는 100조원을 상회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연구 인력이 근무하던 국내 기업 입장에서는 퇴사한 직원이 핵심 기술을 경쟁 업체로 유출했다는 사실을 파악하기 쉽지 않고, 이를 인지하고 전직 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도 법원으로부터 인용 결정이 내려지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려 사실상 속수무책인 판이다.


낮은 형량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대법원 사법연감에 의하면 2021년 산업기술보호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진 1심 사건 총 33건 중 무죄(60.6%)와 집행유예(27.2%)가 전체의 87.8%였다. 2022년 선고된 영업 비밀 해외 유출 범죄 형량은 평균 14.9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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