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이 패권 전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국가 안보의 한 축으로 떠오른 반도체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해외에서는 반도체 제조사에 보조금을 지원하고 있는 반면 국내에서는 단순 세제 혜택 제공에 그치고 있어 관련 법 제정이 하루빨리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3일 재계에 따르면 무역 분쟁으로 촉발된 미-중 갈등은 인공 지능(AI)·5G·자율 주행 자동차 등 첨단 기술 패권 경쟁으로 확대됐고, 바이든 행정부에서는 반도체로 더욱 집중되는 모양새다. 첨단 기술 발전의 근간인 반도체 산업은 나아가 빅데이터·로봇·항공우주·양자 컴퓨터를 포함한 슈퍼 컴퓨터에 활용되고, 민군 겸용이 가능해 미국은 이를 단순 경제적 차원이 아닌 국가 안보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반도체의 역사는 1947년 벨(현 AT&T) 연구소에서 세계 최초로 트랜지스터를 개발함으로써 시작됐다. 하지만 반도체의 본고장인 미국은 2017년 이후 좀처럼 시장을 선도하는 칩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1990년대까지만 해도 반도체 설계·제조 등 고부가가치 시장을 장악하며 세계 반도체 생산의 37%를 차지했지만 오늘날에는 10%대도 겨우 유지하는 형국이다. 이는 제조 공정의 고도화에 따라 설계에 역량을 집중하고, 생산은 한국·일본·대만·중국 등에 외주를 맡긴 것에 기인한다.
이에 반도체 주권을 회복하고자 미국 의회는 5년 동안 직보조금 390억달러와 750억달러 대출·보증, 25% 세액 공제, 132억달러 연구·개발(R&D) 지원금 제공을 골자로 하는 '반도체 및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을 제정했고, 정부는 올해 3월 인텔에 85억달러(한화 약 11조4138억원)에 달하는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중국의 움직임을 의식한 결과다. 중국은 최근 신형 인프라와 도시화를 의미하는 '양신(兩新)'과 교통·통신·수리 등 전통 인프라를 뜻하는 '일중(一重)' 등 혁신 주도형 성장을 위한 '14차 5개년 계획·2035 중장기 목표'를 발표했다. 특히 △5G 기지국 △산업 사물 인터넷(IoT)△AI·데이터 센터 △고속 철도 △전기차 충전소 등 신형 인프라 투자를 위한 안정적인 반도체의 확보가 지상 최대 과제로 급부상했다.
기술 발전에 따라 더욱 수준 높고 많은 양의 반도체가 요구되자 미국은 네덜란드 광학 장비 기업 ASML로 하여금 중국향 극자외선(EUV) 노광기 수출과 사후 지원도 금지할 정도로 반도체 패권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
칩4 동맹국의 반도체 기업에는 반도체 및 과학법에 의거, 자국 내 첨단 생산 공장 설립 등 각종 투자를 독려하며 인텔과 마찬가지로 막대한 보조금을 주기로 했다. 구체적으로 삼성전자는 9조원, SK하이닉스 6200억원, TSMC에는 8조9000억원을 받게 됐다.
섬나라인 대만은 산악 지대가 많아 송배전 시스템 구축에도 난항을 겪고 있다. 또 지진도 자주 발생해 반도체 산업 발전에 불리한 조건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대만도 현지 정부와 의회는 전력 공급과 공장 증설 부지 확보 등 모든 산업 정책의 초점을 TSMC에 맞춰 전폭적으로 밀어주는 모양새다.
타이중시는 TSMC가 관내 전력 중 38%, 용수는 9%를 쓸 수 있도록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반도체는 불안정한 국제 정세 속 호시탐탐 자국을 노리는 중국에 대항할 무기이기 때문에 대만에서는 TSMC가 '호국신산(護國神山, 나라를 지키는 지키는 신령스러운 산)'으로 통한다.
이처럼 글로벌 반도체 경쟁은 국가 총력을 건 전쟁 수준으로 격화되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여소야대 정국에서 더욱 심해지는 정쟁 탓에 제대로 된 지원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21대 국회에서는 반도체 기업들의 시설 투자비와 R&D 비용 중 일부를 소득세나 법인세에서 공제해주는 투자 세액 공제 특례 제한법 개정안인 'K-칩스법'이 발의된 바 있지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계류 중 회기 만료로 본회의에 오르지도 못한 채 자동 폐기됐다.
당시 K-칩스법은 반도체 설계 및 제조·디스플레이·2차 전지 등 국가 전략 기술에 대한 국내 설비 투자를 유도하고자 이에 대한 기본 공제율을 상향하고, 2023년에 직전 3년 평균에 비해 늘어난 투자 금액 중 10%를 추가 공제해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K-칩스법은 어디까지나 직보조금 제공 없는 세제 혜택에 그쳐 알맹이 없는 지원책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외국에서는 현금성 지원이 이뤄지지만 국내에서는 그렇지 못한 이유로 특정 기업에 대한 특혜 시비와 그에 따른 논란이 예상되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전문가들은 국내에서는 반 기업 정서가 팽배해 과감한 지원책이 나올 수 없다고 지적한다.
개원한지 3개월 가량 된 22대 국회에서는 벌써 6개 반도체 지원법안이 나왔다. 가장 먼저 관련 법안을 발의한 고동진 국민의힘(강남구 병)은 반도체 클러스터 지정과 육성 시책 시행, 생산 시설 등 인프라에 대한 보조금 지원 등을 심의·이행하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특히 국가·지방 자치 단체가 반도체 클러스터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전력·용수 등 공급을 위한 산업 기반 시설을 선제적으로 신속히 직접 설치하는 동시에 그에 따른 비용도 부담하도록 했다. 아울러 정부로 하여금 원활한 전력 수급을 위해 반도체 산업에 대한 '국가 전력망 설치 및 확충에 관한 사항'을 산업통상자원부의 '전력수급기본계획'에 의무 반영토록 했다.
고 의원은 “반도체 산업을 통한 생산 유발 650조원, 직간접 고용 창출 346만명, 소재·부품·장비 협력 기업 매출 204조원 등의 경제적 낙수 효과를 유발시키고, 대한민국이 '반도체 주권 확립'을 통한 반도체 산업·경제 강국으로 지속 발전될 수 있게한다는 것이 발의 취지"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