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 도입과 각 상장사의 주주가치 제고 노력 등으로 국내 기업들의 자사주 소각 금액이 크게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주주 행동주의의 활성화와 더불어 국내 증시 저평가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설 예정인 만큼, 자사주 소각에 참여하는 기업들도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11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를 보면 연초 이후 지난 8일까지 국내 상장기업들이 자사주 소각을 알린 공시 건수는 39건으로 나타났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20건) 대비 두 배 가까이 증가한 수치다. 소각금액은 3조5350억원으로 작년 같은기간 1조3186억원 대비 168.08%(2조2164억원)이 늘었다.
기업별로 살펴보면 SK이노베이션이 7936억원으로 가장 크다. 앞서 지난달 5일 SK이노베이션은 이사회를 열고 자사주 492만주의 소각을 결의했다고 공시했다. SK이노베이션이 자사주를 소각한 것은 지난 2011년 출범 이후 처음이다. 삼성물산이 7677억원으로 뒤를 이었다. 삼성물산은 오는 4월 19일 이미 취득한 자사주 보통주 591만8674주를 소각한다. 또 오는 2025년과 2026년 각각 남은 자사주 780만7563주를 차례로 소각할 예정이다. 삼성물산은 지난해 2월 열린 이사회에서 보유중인 자사주 보통주 2471만899주(13.2%)와 우선주 15만9835주(9.8%)를 전량 소각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눈에 띄는 부분은 금융지주사들의 움직임이다. 소각 규모는 KB금융이 3200억원, 하나금융지주 3000억원, 신한지주 1500억원 순이다. 지난해에도 이들 금융지주사들은 대대적인 자사주 소각을 이어온 바 있다.
최초로 자사주 소각에 나서는 사례도 있다. 미래에셋벤처투자는 국내 벤처캐피탈(VC) 상장사 중 처음으로 자사주 140만2716주를 소각한다고 밝혔다. 장부금액 기준으로 98억3000만원이며 소각 예정일은 오는 27일이다.
이처럼 기업들의 자사주 소각이 늘어난 이유는 행동주의 펀드 및 소액 주주연대의 주주 행동주의 움직임이 더욱 활발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ESG기준원(KCGS)이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2023년 주주제안 건수는 195건으로 전년인 2022년 142건 대비 크게 증가했다. 여기에 정부가 국내 증시의 저평가(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해 밸류업 프로그램을 도입한다고 밝히면서 기업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한 점도 이유다. 지난달 26일 금융위원회를 비롯해 한국거래소 등 유관기관은 기업가치 제고를 지원하기 위해 '코리아 밸류업 지수'를 올 3분기 중 개발하고, 전담 지원체계를 구축한다고 밝혔다.
박석중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한국 증시 저평가에 대해 “반도체·IT업종에 대한 높은 의존도에 따라 이익 변동성이 높다"며 “낮은 자본이익률(ROE)은 자산운용과 주주환원에 있어서 열위에 놓일 수 밖에 없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그는 저평가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ROE 개선과 이를 위해 이익 증가 혹은 자본 축소가 동반될 필요가 있다"며 “자본 축소는 배당 증대, 자사주 매입·소각 등을 통해 잉여 현금을 축소하는 방안이 있다"고 덧붙였다.
국내 자본시장에 불고 있는 주주 행동주의는 증시 레벨업으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안예하 키움증권 연구원은 “미국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본격적인 주주 행동주의가 활발해지면서 기업은 자사주 소각을 중심으로 주주환원을 확대했다"며 “위기 이후 기업 지배구조 관련 제도의 대대적인 정비가 이뤄지고, 이 과정에서 주주자본주의가 재차 부각됨에 따라 2010년대 미국의 행동주의 활성화 및 주주환원 확대는 크게 증가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