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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E칼럼] 이사의 책임을 면해주는 '신뢰의 항변'을 입법해야 한다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19.12.05 16:02

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최준선


기업과 임원에 대해 2,205의 벌칙 규정을 두고 있는 한국 법체계상 임원은 항상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기분으로 하루하루 살아간다. 자칫 발을 헛디디면 교도소 안으로 떨어진다. 기업 이사회에서 위험한 결정을 할 때 흔히 법률회사의 의견서(legal opinion)를 받는다. 그 의견서에서 적법하다고 결론이 난 사안에 대해 이사가 찬성했다면, 나중에 주주들로부터 손해배상책임을 면할 수 있을까? 한국에서는 분명하지 않다. 

법률회사의 의견서는 미국에서는 매우 일반화되어 있다. 법원도 법률회사의 의견을 받아 이사회 결의를 한 경우 이사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 그 근거는 미국 회사법에 있다. 미국 S&P 500 대기업 60% 이상이 설립준거법으로 정하고 있는 ‘델라웨어주 일반회사법’ 제141조 (e)항은 "이사는 자신의 의무를 이행할 때 회사의 기록 및 회사의 집행임원(상임이사) 또는 회사가 선임한 자가 그 직업상 또는 전문가로서의 능력 범위 내의 사항에 관하여 회사에 제시하거나 제출한 정보, 의견서, 보고서 또는 진술서를 선의로 신뢰하였다면 충분히 보호받는다."고 규정한다. 전문가 또는 회사의 상임이사가 제출한 의견이나 보고서 등을 믿고 찬성했다면 임무를 게을리 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신뢰의 항변’(defense of reliance)이라 한다.

한국 상법 제399조는 ‘이사가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 또는 정관에 위반한 행위를 하거나 그 임무를 게을리한 경우 회사에 대하여 연대하여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고, 그 행위가 이사회의 결의에 의한 것인 때에는 그 결의에 찬성한 이사도 책임이 있으며, 결의에 참가한 이사로서 이의를 한 기재가 의사록에 없는 자는 그 결의에 찬성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규정한다. 주목할 것은 ‘이사회에서 이의를 제기한 기록이 없으면 찬성한 것으로 추정한다’는 것이다. ‘찬성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 취지는 이사가 스스로 찬성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제출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의를 제기했다는 기록이 없으면 모두 찬성한 것으로 추정된다니 매우 엄격한 규정이다.

그런데 의사록에 ‘기권’한 것으로 기재된 경우는 어떻게 될까? 위 법문에 따르면 이의를 제기했다는 기록이 없으면 모두 찬성한 것으로 추정된다니, ‘기권이 이의제기는 아니지 않은가, 그럼 찬성한 것으로 추정되어야 하지 않은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처럼 애매하기 때문에 대부분 대기업에서는 ‘이사직무수행규준’이라는 것을 만들어 두고 있다. 한국 유수의 반도체회사의 이사직무수행규준 제5.5조는 "이사회에서의 자세: 이사는 이사회의 결의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가능한 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한다. 이사회 결의에 있어서 이사는 원칙적으로 「찬성」 또는 「반대」의 두 가지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표명하여야 하며, 합리적인 사유가 없는 한 기권과 같은 중립적인 입장 표명은 삼가하여야 한다."고 규정한다. 

그런데 지난 5월에 내린 대법원 판결은 기권한 경우 ‘결의에 찬성한 것으로 추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 판결로 이사회에서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고 기권만 했어도 그 사실이 의사록에 기재되었다면 굳이 증거를 제출할 필요 없이 찬성한 것이 아니라고 해석되고, 책임도 면할 수 있게 됐다. 이는 장차 책임질 결정을 두려워하는 이사들을 기권하도록 유도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사실관계를 보면, 카지노사업자인 甲 주식회사 이사회는 甲 회사의 주주이기도 한 乙 지방자치단체에 150억 원을 기부하기로 결의했다. 본래 이 기부안의 타당성에 대해 이사회에서 의견대립이 있었다. 가결할 경우 이사들이 업무상 배임혐의가 인정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재적 이사 15명 중 12명이 출석하고 출석이사 중 7인은 찬성, 3명은 반대, 2명은 기권했다. 甲 회사는 결의에 찬성 및 기권한 이사를 상대로 상법 제399조 위반을 이유로 손해배상을 구했다.

대법원은 이 사건에서 "위 기부행위가 폐광지역 전체의 공익 증진에 기여하는 정도와 甲 회사에 주는 이익이 그다지 크지 않고, 기부의 대상 및 사용처에 비추어 공익 달성에 상당한 방법으로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丙 등이 이사회에서 결의를 할 당시 위와 같은 점들에 대해 충분히 검토하였다고 보기도 어려우므로, 이사 丙 등이 위 결의에 찬성한 것은 이사의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주의의무(선관주의의무)에 위배되는 행위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대법원 2019. 5. 16. 선고 2016다260455 손해배상(기) 사건). 따라서 위 결의에 찬성한 이사들은 손해배상책임이 인정됐다.

다만, 원심은 기권한 2명도 찬성한 자로 분류했으나 대법원은 원심을 파기하면서 이들은 찬성한 것으로 추정되지 않고, 손해배상책임도 없다면서 사건을 원심법원에 돌려보냈다. 미국에서도 기권의 경우는 적어도 찬성으로 추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일을 이사회 회의석상에서만 기권했다고 면책되지는 않을 것이다. 일관성 있게 발언하고 기권했어야 한다. 이 사건에선 甲 회사의 사내 법무팀과 법무법인 등의 의견서에서 기부안이 법령위반 또는 선관주의의무 위반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표명되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찬성결의에 가담했으니 변명의 여지없이 임무를 게을리 한 것으로 판단된 것이다. 

기업의 이사를 보호하려면 델라웨어 일반회사법처럼 ‘신뢰의 항변’을 상법에 명문으로 규정해 상임이사의 보고서, 사내 법무팀 또는 사외 법률회사의 의견서를 선의로 믿고 결의한 사안에 대해서는 이사들이 전적으로 면책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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