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11월의 일이니 꼭 20년 전이다. 국회의장을 지낸 이재형 선생을 기념해 만든 운경(雲耕)상의 제4회 문화 언론 부문을 수상한 노신사가 단상에 올라 입을 열었다. "바둑 두는 조남철입니다." 그날 모인 청중은 고졸(古拙)한 첫 마디부터 뭔가 다름을 알아차렸고, 70년 인생 이력이 담긴 소감에 한동안 귀를 기울였다.
바둑계가 흔히 ‘조선생님’으로 부른 송원(松垣) 조남철. 현대 한국바둑의 개척자인 조선생의 공적을 대별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은 프로기사로서의 성취. 선생은 일본의 기타니 도장에 입문한 지 4년만인 1941년에 ‘프로 입단’했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다. 하지만 기사로서의 성취는 태평양전쟁과 광복, 6·25 전쟁의 역사적 변혁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야 했다. 1956년 창설된 국수전에서 우승하고, 9회까지 연속 제패했다. 기전이 몇 없던 시절에 통산 30회나 우승했다.
이름은 고유명사이다. 그런데 어느 한 분야에서 대성하여 국민의 인정을 받게 되면 흔히 이름 뒤에 ‘~이’가 붙는다. 선생의 이름 역시 일반명사화 했다. 잡은 대마를 두고 "조남철이가 와도 못살린다."고 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선생은 1세대 기사의 최고봉이었다.
둘째, 현대 한국바둑이 번영할 시스템을 구축했다. 선생이 1945년에 설립한 ‘한성기원’은 ① 국제시합에 대비하여 순장바둑을 폐지하고 현대바둑으로 대체한다. ② 내기바둑을 금하고 건전한 국민오락으로 보급한다. ③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기원(일본기원처럼)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같은 뚜렷한 목표를 갖고 있었다. 현재 관점으로는 응당한 지향점이겠지만 광복 직후의 그 혼란한 시기에 23세 청년이 품은 꿈으로는 실로 담대하지 않은가.
한성기원은 여러 번 이름을 바꾸는 어려움을 극복하며 한국기원과 대한바둑협회로 발전했고, 한국이 바둑 인구 1천만에, 세계 바둑계의 정상을 20년 이상 차지한 토대가 되었다. 목표를 이룬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둑이 문화로 성장하는 기틀을 놓았다. 선생은 평생 27권의 바둑 책을 저술했다. 특히 1955년에 출간한 ‘위기개론’은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바둑 교본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어려운 한자나 일본어로 된 난삽한 바둑용어가 선생의 손에서 우리말로 다시 태어났다.
이러한 공로로 선생은 이미 1980년대에 유력지가 선정한 ‘해방 40년간 한국을 이끈 100인의 인물’ 반열에 올랐다. 1989년에 ‘응씨배’를 우승한 필자와 함께 은관문화훈장을 받았고, 타계 후에는 문화적 공로가 재삼 인정 되어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고, 대국수의 칭호가 헌정되었다.
선생이 가신 지도 12년, 길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한국 바둑을 둘러싼 환경은 그동안 급변했다.
대륙의 굴기(屈起)를 따라잡기가 힘겨울 정도로 바둑의 중심이 중국으로 넘어가고 있다. 바둑을 둘러싼 경제 규모, 전반적 우호도, 동호인, 학습열기, 심지어 우리가 절대 우위에 있던 세계대회 우승수에서도 압도 당하고 있다. ‘국위 선양과 국민 사기 앙양’의 우리 자랑은 점점 옛일이 되고 있다.
인간을 추월한 인공지능(AI)의 도래는 기량으로 승부하던 바둑 전문가 집단의 미래를 뒤흔들었다. 지금까지는 실력만 뛰어나면 어떻게 해도 무방했지만, 앞으로는 아니다. 기량 외의 다른 면에서도 분명히 ‘프로’가 되어야 한다. 가치 있는 경험재(experience good)라는 상품성을 팬들로부터 입증 받지 못한다면 프로의 미래 역시 암담할 수밖에 없다.
이따금씩 발표되는 여론조사 결과는 한국 바둑의 여건이 여전히 나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기야 전체의 20%에 달하는 인구가 바둑을 알고 있는 나라가 달리 있을까. 그러나 그건 그저 평면적인 수치일 뿐이다. 그런 자산을 꿰어서 보배로 만드는 방안은 여전히 난망하다.
조남철 선생이라면 어떤 묘안을 내놓으셨을까.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선생이야말로 당대를 살아간 혁신가임이 틀림 없다. 선생을 다시 생각한다. (지난 11월 5일은 ‘바둑 진흥법’으로 법정 기념일이 된 바둑의 날이다. 올해 법률이 제정된 의의를 살려 국회에서 제1회 기념식을 거행했다. 11월 5일은 한성기원 설립일에서 유래했다.) 조훈현 자유한국당 의원, 프로기사 9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