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주요 기업들이 다양한 이유로 계열사간 분할·합병을 추진하고 있는 가운데 다른 그룹사들도 서둘러 지배구조 개편에 나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사의 충실 의무 확대'를 골자로 상법이 개정될 경우 이 같은 작업에 큰 제약이 생길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 두산 “체질개선 과정서 소액주주 무시"···삼성·SK·동원 사례 재조명
21일 재계에 따르면 두산그룹은 최근 클린에너지, 스마트 머신, 반도체·첨단소재 등 3대 축으로 사업 구조를 재편한다고 발표해 소액주주들의 원성을 사고 있다. 그룹 '캐시카우'이자 알짜회사인 두산밥캣에 대한 대주주 지배력 강화를 위해 무리한 합병 비율을 채택했다는 이유에서다.
두산그룹 변화의 핵심은 두산밥캣을 두산로보틱스의 합병이다. 양사 시가총액이 비슷하다보니 그룹은 이들은 인적분할·합병하는 과정에서 교환 비율을 1대 0.63으로 책정했다. 문제는 실적이다. 두산밥캣은 작년 기준 매출 9조7589억원, 영업이익 1조3899억원을 기록했다. 두산로보틱스는 같은 기간 매출 530억원, 영업손실 192억원을 냈다.
시가를 기준으로 기업간 합병을 추진하는 게 불법은 아니다. 다만 내실이 탄탄하지만 주가가 눌려있는 회사와 실체 없이 주가만 뛰어있는 회사의 가치를 동일시하는 게 적합하냐는 지적은 자본시장에서 꾸준히 제기돼왔다. 대주주가 의도적으로 주가를 내리거나 올려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지배구조를 개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논란이 된 사례도 많다.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이 대표적이다. 당시 합병비율은 1대 0.35였다. 당시 대주주 지분율이 높은 제일모직 가치를 높게 산정해 삼성물산 주주들이 피해를 본다는 목소리가 컸다. 행동주의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경우 이 사건을 기점으로 국내 시장에서 본격적으로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SK 역시 SK C&C와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비율을 대주주에 유리하게 정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현대차그룹도 지난 2017년 현대모비스 사업부를 분할해 일부를 현대글로비스와 합치려 했지만 소액주주들이 반대하자 계획을 철회했다. 동원그룹의 경우 2022년 동원산업과 동원엔터프라이즈 합병을 추진하다 합병 비율을 변경해야 했다. 노골적으로 상장사인 동원산업보다 총수 일가 지분율이 높은 동원인터프라이즈에 유리하게 움직여서다.
SK그룹이 지난 18일 SK이노베이션과 SK E&S를 합병하기로 한 결정도 주목받는다. 시장 예상보다 상장사인 SK이노베이션 주주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지주사 SK(주)의 영향력을 일부 양보했다는 점에서 두산 사태와는 정반대다. SK이노베이션 주가가 저평가된 상태라는 점 등을 고려해 SK그룹이 소액주주들을 최대한 배려한 선택을 내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 '상법 개정' 물밑 논의 활발한데···재계 '눈치싸움' 치열해질 듯
재계에서는 이번 두산그룹 사태를 계기로 '상법 개정' 논의 방향성이 경영계에 불리하게 흘러가지 않을지 걱정하는 분위기다. 상법 개정의 핵심은 '회사'로 한정하고 있는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을 '주주'로 확대할지 여부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은 지난달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상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노란봉투법, 민생지원금 지급 등 쟁점 법안을 처리 또는 폐기하고 나면 민주당이 상법 개정을 당론으로 추진할 가능성도 상당하다는 분석이다.
경제개혁연대는 지난 17일 입장문을 내고 “두산 사업구조 재편이 일반주주의 이익에 부합하는지 의문"이라며 “두산에너빌리티는 분할합병이 아닌 두산밥캣 지분 직접 매각 방식이 더 유리하고, 두산밥캣 주주는 주식의 포괄적 교환 아닌 공개매수 방식이 더 유리하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두산의 사례는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의무 도입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라며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고려하도록 할 경우 회사가 지배주주 또는 경영자와 일반주주 간 이해충돌의 소지가 있는 의사결정을 할 때 일반주주의 이익에도 부합하는지 신중히 검토한 후에 추진하게 된다는 점에서 효과적인 사전·사후적 대책이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배구조 개편을 중장기적으로 추진해온 그룹사들은 속내가 복잡하다. 이사 충실 의무 범위가 확대된다 해서 당장 기업 분할·합병에 제동이 걸리는 건 아니지만 필요 이상의 에너지를 쓰게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해관계가 맞지 않는 이들이 소송을 남발하는 등 진행 비용이 늘어날 수 있는 가능성도 충분하다.
삼성그룹은 삼성전자에 대한 삼성물산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방법을 찾는 중이다. 현대차그룹은 현재 순환출자 고리를 끊는 동시에 정몽구 명예회장의 주력사 지분을 정의선 회장이 증여받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롯데그룹은 호텔롯데 상장 등을 통해 일본 롯데와 관계를 재정립하는 지배구조 개선을 추진 중이다. 카카오 등 후진적인 지배구조를 지닌 기업들도 체질개선 작업에 돌입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