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너일가 모녀와 형제가 대립해 온 한미약품그룹 경영권 분쟁이 '오너일가 출신 지주사 대표'와 '전문경영인 출신 계열사 대표'의 권한 다툼으로 비화하면서 재연 조짐을 보이고 있다.
29일 한미약품그룹에 따르면, 그룹 주력사 한미약품의 박재현 대표는 28일 오후 5시께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한미약품의 독자적 인사조직 신설 계획을 알렸다.
그동안 한미약품은 독자적 인사조직 없이 인사업무를 지주사인 한미사이언스에 위임해 왔으며, 한미사이언스는 한미약품의 인사·법무 등 업무를 대행하면서 한미약품으로부터 일정 수준의 수수료를 받아 왔다.
박 대표는 이번에 한미약품 내 독립적 인사조직을 신설하고 독자경영에 필요한 부서를 차례로 신설해 독자경영과 선진 전문경영인 체제 구축을 본격화하겠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그러자 약 1시간 뒤 오너일가의 임종훈 한미사이언스 대표가 역시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박재현 한미약품 대표이사 사장의 직위를 사장에서 전무로 강등하고, 업무 범위를 제조본부로 한정하는 인사발령을 냈다.
박 대표의 직급 강등 사유로 임 대표는 특정주주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을 꼽았다. 즉, 박 대표가 송영숙 한미사이언스 회장과 임주현 한미사이언스 부회장 모녀와 개인 대주주인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의 3자연합측 이익을 앞세운 경영을 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박재현 대표는 1993년 한미약품에 연구원으로 입사해 지난해 3월 한미약품 대표에 선임된데 이어 지난 3월 부사장에서 사장으로 승진한 전문경영인이다. 송영숙 회장과 임주현 부회장 모녀측의 신임을 받는 인사로 알려져 있다.
업계는 임종훈 대표의 이번 인사를 형인 임종윤 한미사이언스 사내이사와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형제측이 경영권 분쟁 당사자들인 모녀측(3자연합측)의 인사로 분류되는 박재현 대표를 견제하고, 대표이사 업무에서 배제시키기 위한 조치로 풀이하고 있다.
임종훈 대표의 인사에 한미약품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지주사 대표의 계열사 대표 직위 강등 조치는 원천무효 또는 위법의 소지가 있다는 입장이다.
한미약품 관계자는 “임종훈 대표의 박재현 사장직위 강등 조치는 아무 실효성이 없으며 오히려 원칙과 절차 없이 강행된 대표권 남용의 사례"라며 “지주사 대표의 인사발령은 모두 무효이며 (박재현) 대표의 권한 및 직책은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또한 “그동안 지주사 대표는 계열사의 인사·법무 등 경영지원에 관한 스텝 기능을 수탁받아 용역업무를 대행하는 역할을 했을 뿐 계열사 임직원에 대한 직접적인 인사 발령 권한이 없다"며 “계열사의 대표가 인사·법무 업무를 독립화해 별도 조직을 만드는 행위는 아무런 법적인 장애가 없다"고 부연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이같은 (독자경영) 방침을 지주사 대표에 대한 '항명'으로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넌센스"라며 “신동국 회장과 송영숙 회장, 임주현 부회장도 이번 한미약품의 독자경영을 강력히 지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업계에 따르면, 한미약품 대표이사 선임·해임 등은 한미약품 이사회가 결정한다. 한미약품 이사회 구성원은 총 10명으로 송영숙·임주현 모녀 체제때 선임된 이사가 박재현 대표를 포함해 총 6명이고 여기에 지난 6월 임시주총을 통해 임종윤·종훈 형제와 신동국 회장, 남병호 헤링스 대표가 새로 합류했다.
지난 6월 한미약품 이사진에 합류할 때만 해도 형제측을 지지했던 개인 최대주주 신동국 회장은 지난달 모녀측으로 돌아서며 이른바 '대주주 3자연합'을 결성했고 곧바로 전문경영인체제 전환을 표방했다. 한미약품그룹에서 송영숙·임주현 모녀와 신동국 회장의 지분은 우호지분을 포함해 50% 이상을 차지한다.
업계는 신동국 회장의 지지에 힘입어 지난 5월 지주사 단독대표에 오른 임종훈 대표와 새로 결성된 대주주 3자연합간의 갈등이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3자연합측은 한미사이언스 이사진 과반수를 되찾기 위해 이사회 구성원을 기존 10명에서 12명으로 늘리는 정관변경을 안건으로 하는 임시주총 소집을 요구했으나 임종훈 대표는 명분이 없다며 거부의사를 분명히 했다.
일부 업계는 상법상 임시주총 소집을 요구하는 주주제안을 이사회가 거부하거나 지체하면 주주는 법원에 주총 소집 허가 결정을 구할 수 있는 만큼 지주사 이사회의 과반수를 장악한 임종훈 대표가 임시주총 소집을 계속 거부하면 결국 법정 공방을 통한 분쟁 장기화로 이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