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선 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
넷플리스 영화 ‘지옥’을 봤다. 천사가 죽음을 예고하고, 예고했던 정확한 시각에 지옥 악마들이 나타나 그 예고를 들은 사람의 목숨을 거둔다. 죽는 자는 왜 죽는지 까닭을 모른다. 죽어야 할 날은 30분 후일 수도 있고, 20년 후일 수도 있다. 죽어야 할 이유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심지어는 갓 태어난 아기도 죽음을 선고받는다.
나는 이 영화에서 아무 이유 없이 죽는 사람들은 사고사(事故死)로 사망하게 되는 사람을 은유한 것으로 이해했다. 사고를 당하는 사람은 아무 죄가 없다. 영화에서 갓난아기는 그의 부모가 온 몸으로 감싸 안아 목숨을 건지고, 대신 부모가 죽는다. 가끔 사고 현장을 전하는 언론보도에서 사고로 죽은 부모와 죽은 부모의 품에 안겨 기적같이 온전히 살아남은 아이를 보지 않는가.
영화는 가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견하기도 한다. 2016년에 개봉된 영화 ‘아수라’는 가상도시 ‘안남시’를 배경으로 한다. 안남시는 안산시와 성남시를 합성한 것이며, 대장동 사건을 예언한 영화인 것처럼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영화 아닌 다큐를 찍었나"라고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한다. 2011년 개봉 영화 ‘컨테이전’은 박쥐로부터 유래된 바이러스 재난영화인데,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 발생을 예언한 영화라고들 한다. 가끔 느끼는 것이지만 영화건 소설이건 만화건, 작가는 천재인 경우가 많다.
영화 ‘지옥’ 역시도 마치 한국 국회가 ‘중대재해처벌법’을 통과시킬 것을 예고한 것 같다. 아무 이유 없는 사망에 대해 영화 속 사이비 종교는 "죄를 지은 자가 죽음으로써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단언한다. 일단 죽었으니 죽은 자에게 죄가 있다는 것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사고가 났고, 그 사고는 경영책임자가 무언가를 잘 못해서 발생한 것이라고 단정한다는 식이다. 그 잘못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되, 경영책임자는 1년 이상 징역형으로 단죄하겠다는 것이다. 영화 ‘지옥’의 구도와 똑 같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산업 현장에서 인명사고가 나면 공장장 등 현장 책임자를 처벌하는 법률이다. 작업 현장의 열악한 안전시설 때문에 사고가 나고, 현장책임자가 처벌받으면 그 책임자는 억울할 수밖에 없다. 본사가 안전시설을 제대로 갖출만한 물적ㆍ인적 지원을 하지 않아 완전한 시설을 갖추지 못한 것뿐인데, 힘없는 현장 관리자만 처벌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이런 불합리를 개선하고자 만든 법률이 중대재해처벌법이다. 안전예산을 책정하고 집행할 위치에 있는 사람을 처벌해 안전시설 확보를 유도하자는 것이다. 사안의 핵심을 찌르는 아주 그럴듯해 보이는 법률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법률도 아니다. 모든 형사법은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을 명확히 규정 하고, 그것을 위반한 자를 처벌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죄형법정주의다. 그런데 이 법률은 도대체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너무나 불친절한 이 법률은 추상적 의무만을 열거했을 뿐,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면 면책된다는 규정은 하나도 없다.
항상 그렇듯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대형 사고가 터지면 국회는 대책이랍시고 무조건 강력한 처벌을 규정한 엉터리 같은 법률 하나를 뚝딱 만든다. 그리고는 책임을 다 했다는 듯, 그 법률이 실제로 어떻게 적용될지는 관심도 없다. 법안을 발의한 의원은 그 이름을 알려 유권자에게 생색이나 내는, 재선을 위한 표 구걸 행태가 반복됐다. 이 법률도 딱 그 수준이다.
이런 행태는 기본 형법을 무력화하고, 가중된 중형주의로 법정형 및 법적용의 혼란을 초래한다. 법 적용의 통일성과 안정성을 위해서는 기존 형법전 규정의 적용요건과 형량을 비교하는 등 충분한 숙고를 거쳐야 하고, 가급적 특별법이 아닌 형법전에 규정해야 한다. 특별법이 많은 사회는 그만큼 불안정한 사회라는 방증이다.
사장이 구속되면 기업은 파탄나고 근로자도 직장을 잃는다. 답답하게도 경제ㆍ민생 대통령이 되겠다는 대선 후보조차 이 법률에 대해선 일언번구 말이 없다. 믿을 사람 하나 없는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