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병역특례 폐지, 더는 미룰 명분이 없다

정부가 예술·체육 분야 병역특례 제도를 도입한 게 1973년이다. 대한민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국제사회에서 존재감을 드러낼 기회도 많지 않았다. 세계 무대에서 태극기를 올리는 선수들에게 병역 혜택을 주는 일은 나름의 시대적 명분이 있었다. 국가의 위상을 높인 공적에 대한 보상이었다. 그 명분을 되묻게 한 장면이 있다. 방탄소년단(BTS)의 입대다. 세계 음악시장을 뒤흔든 일곱 멤버는 모두 병역의 의무를 이행했다. 한국어 노래로 세계 정상에 오른 이들의 국위선양을 부정할 사람은 드물다. 반면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들은 '전역모'를 썼다. 공적의 크기를 재단할 수는 없다지만, 국가가 그어 놓은 경계의 정당성은 흔들렸다 최근 논란은 오래된 질문을 다시 꺼내게 만들었다. 일부 축구대표팀 선수들이 병역 혜택 받은 것을 자축하는 언행으로 비판받았다. 야구대표팀의 인터뷰 내용도 공분을 샀다. 개인의 경솔함만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병역을 경기 성적에 대한 포상으로 삼아 온 제도가 논란의 뿌리다. 민심도 엄중하다. 에너지경제신문이 리얼미터에 의뢰한 조사에서 병역특례 축소 응답은 41.1%, 전면 폐지는 32.6%였다. 현행 제도 유지는 21.5%에 그쳤다. 이번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 게임부터 즉시 폐지하는 방안에도 52.4%가 찬성했다. 국회에서는 아시안게임 금메달에 따른 일률적인 특례를 없애는 병역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국방부 장관도 단계적 축소와 궁극적인 폐지를 목표로 삼고 있다고 밝혔다. 개정안은 특별한 국위선양 공적에 대한 예외를 남겼다. 기준만 바꾼 특례가 형평성 논란까지 끝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국가대표의 노력과 성취는 존중받아야 한다. 포상금과 선수 육성 지원 등 보상할 방법도 있다. 병역은 성격이 다르다. 청년들은 학업과 생업을 멈추고 복무한다. 병역자원이 줄어드는 현실에서 예외의 근거는 더욱 엄격해야 한다. 제도를 정리하는 과정에도 원칙이 필요하다. 이미 정해진 기준을 신뢰한 선수들에게는 합리적인 경과조치를 마련해야 한다. 특권을 없애는 일이 또 다른 불공정을 낳아서는 안 된다. 병역제도의 근간은 형평성과 신뢰다. 국가가 예외를 남발하면서 청년들에게 국가에 대한 의무의 신성함을 강조할 수는 없다. 국위선양은 포상할 수 있다. 국방의 의무는 거래할 수 없다. 반세기 전의 명분으로 오늘의 불공정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여헌우 기자 yes@ekn.kr

[기자의 눈] 대한항공의 ‘고삐 풀린 표값’은 어디에 있나

국정감사는 정부 정책과 기업 활동을 검증하는 자리다. 기업에 추가 제재를 요구하는 국회의 주장도 검증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항공권 가격이 문제라면 어떤 노선에서, 언제부터, 얼마나 올랐는지부터 제시해야 한다. 박상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지난 12일 배포한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기업 결합 관련 보도자료는 이 기본적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제목에는 '고삐 풀린 항공권 가격'을 내걸었지만 공개한 통계는 여객 수와 시장 점유율이었다. 구조적 조치 완료 이후의 평균 운임과 인상률, 경쟁 항공사와의 가격 비교는 없었다. 가격을 문제 삼으면서 가격을 보여주지 않은 셈이다. 의원실의 문제 의식 자체를 부정할 이유는 없다. 대형 항공사 간 기업 결합으로 경쟁이 약해지고 소비자의 부담이 커질 가능성은 지속적으로 살펴야 한다. 그러나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와 실제로 피해가 발생했다는 판단 사이에는 입증의 과정이 필요하다. 높은 점유율만으로 그 간격을 메울 수는 없다. 항공권은 예약 시점과 좌석 등급, 할인·환불 조건에 따라 판매 가격이 달라진다. 그렇다고 비교 기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공정거래위원회도 좌석 등급별·분기별 평균 운임을 기준으로 2019년 대비 물가 상승률을 반영한 인상 한도를 적용해 왔다. 위반을 적발해 제재한 사례도 있다. 공정위는 작년 아시아나항공의 4개 노선 평균 운임 인상 한도 초과에 대해 이행 강제금을 부과했다. 대한항공 측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이 사실을 지울 수는 없다. 동시에 의무 적용 기간에 발생한 과거 위반을 규제 종료 이후의 가격 상승을 입증하는 자료로 대신할 수도 없다. 이번에 문제 삼은 기간의 운임은 별도로 확인해야 한다. 규제가 왜 종료됐는지도 짚어야 한다. 공정위는 운수권과 슬롯 이전 등 구조적 조치를 이행하면 해당 노선의 운임·공급 제한을 해제하도록 제도를 설계했다. 구조적 조치가 완료되지 않은 노선에는 행태적 조치를 계속 적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경쟁사의 진입이 없다는 이유로 운임과 공급에 관한 의무까지 사라지는 구조가 아니다. 그런 만큼 구조적 조치를 마친 노선의 제한 종료를 기업이 규제의 빈틈을 이용한 결과처럼 다뤄서는 안 된다. 당국이 정한 조건을 이행한 데 따른 절차이기 때문이다. 그 조건이 충분한 경쟁을 만들지 못했다면 제도의 실효성을 따져야 한다. 기업의 조건 위반과 정책 설계의 한계는 다른 문제다. 의원실이 붙인 통계에도 설명이 필요한 변화가 있다. 인천-LA의 대한항공·아시아나 합산 점유율은 2019년 100%에서 올해 상반기 79%로 낮아졌다. 바르셀로나는 100%에서 62%, 로마는 80%에서 59%, 프랑크푸르트는 67%에서 42%로 내려갔다. 합병 전 독립적으로 경쟁하던 두 회사의 점유율을 더한 값과 합병 이후 수치를 비교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 하락만으로 경쟁 문제가 해소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재 점유율이 높다는 이유로 신규 사업자가 확보한 고객과 경쟁 구도의 변화를 평가에서 빼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추가 제재를 요구하려면 기존 조치가 무엇을 바꿨고, 무엇을 바꾸지 못했는지부터 분석해야 한다. 대한항공의 높은 점유율에는 시장의 선택도 작용한다. 의원실이 인용한 익명 항공업계 임원도 대한항공의 노선망·운항편 수·환승 수요·브랜드 충성도를 경쟁 우위의 배경으로 꼽았다. 소비자가 운항 시간·연결 편의·서비스에 대한 신뢰 등을 비교해 대한항공을 선택했다면 그 결과로 확보한 점유율은 기업 경쟁력의 성과다. 기업이 경쟁하고 소비자가 선택하며 그 선택이 시장 점유율로 나타나는 것이 시장 경제의 작동 방식이다. 경쟁 정책이 보장해야 할 것은 공정하게 경쟁할 기회이지 사업자 간 점유율의 균등 배분이 아니다. 운수권과 슬롯 이전 등 정해진 의무를 이행한 기업에 점유율이 높다는 이유만으로 추가 제재를 요구하려면, 소비자의 선택과 별개로 어떤 경쟁 제한 문제가 남아 있는지 밝혀야 한다. 물론 항공은 규제 산업이기에 높은 점유율 전부를 소비자 선호의 결과로 단정할 수 없다. 그런 것처럼 소비자가 선택해 쌓인 경쟁력까지 규제 실패로 취급해서도 안 된다. 프랑크푸르트 노선도 마찬가지다. 의원실은 트리니티항공의 운항 중단과 철수 가능성을 들어 대한항공 계열의 재독과점을 우려했다. 그런데 같은 자료에 기재된 외항사의 올해 상반기 여객 비중은 약 40.1%다. 트리니티항공이 빠지면 경쟁이 약해질 수 있다. 그렇다고 외항사의 공급 능력과 증편 가능성을 검토하지 않은 채 시장의 향방을 단정할 수는 없다. 반납 운수권을 대한항공을 위시한 한진그룹 계열이 재확보할 수 있다는 주장 역시 재배분 기준과 국내외 시정 조치상 조건을 제시해야 검증이 가능하다. 신규 항공사가 들어오지 않는 이유도 조사 대상이다. 의원실 스스로 항공기 확보·운항 비용과 불확실한 수익성을 원인으로 들었다. 기재와 자금, 사업 전략의 문제인지, 이전받을 슬롯의 조건 때문인지, 기존 사업자의 경쟁 제한 행위 때문인지에 따라 해법은 달라진다. 항공사마다 환승 수요와 화물 수입, 고객 구성, 비용 구조가 다르다. 따라서 진입 부진을 지적하는 데서 멈춰 대한항공에 추가 부담을 요구하면 원인과 처방이 어긋날 수 있다. 공정거래법도 높은 시장 점유율과 지위 남용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시장 지배적 사업자로 추정된다는 사실이 곧 부당한 가격 인상의 증거는 아니다. 시장 지배력은 검증의 출발점이지 모든 결론을 대신하는 숫자가 아니다. 추가 제재도 구호만으로는 평가할 수 없다. 기존 승인 조건을 바꾸자는 것인지, 새로운 위법 행위를 제재하자는 것인지부터 명확해야 한다. 조건 이행에 따라 제한을 종료한 뒤 새로운 의무를 부과하려면 그 근거와 절차를 설명해야 한다. 그래야 기업의 예측 가능성과 소비자 보호를 함께 논의할 수 있다. 규제는 내용에 따라 경쟁을 촉진할 수도, 공급을 위축시킬 수도 있다. 추가 조치가 운임과 좌석 공급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대체 항공사는 그 공급을 감당할 수 있는지 검토하지 않고서는 소비자에게 이로운 처방인지 알 수 없다. 규제를 더한다는 사실만으로 소비자 보호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박상혁 의원실의 보도자료에는 그런 판단에 필요한 핵심 자료가 빠져 있다. 운임 비교 수치도, 진입 부진에 대한 구체적인 원인 분석도, 추가 제재의 대상과 방식도 제시되지 않았다. 공개 자료의 범위에서 보면 검증보다 제재 요구가 앞섰다. 국감 준비의 충실도는 보도자료 제목의 강도로 입증되지 않는다. '고삐 풀린 항공권 가격'을 문제 삼았다면 규제 종료 뒤 가격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보여줘야 한다. 대한항공에 설명 책임을 요구하는 국회라면 자신의 주장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박 의원실이 먼저 내놓아야 할 것은 더 강한 제재 요구가 아니라 그 요구를 뒷받침할 운임 자료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기자의 눈] 작은 빈틈 노리는 해킹…은행 보안, 달라져야

이달 1일 알려진 신한은행의 해킹 사고를 시작으로 금융권 전반에 보안 경고등이 켜졌다. 그동안 개별 금융회사에서 크고 작은 금융사고가 발생했으나, 해커 공격으로 여러 금융회사의 개인정보가 잇따라 유출된 것은 이례적이다. 피해는 시중은행은 물론 지방은행, 제2금융권 등 금융권 전반으로 확산됐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최근 연이은 해킹 사고로 금융회사 16곳에서 약 10만건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것으로 파악됐다. 은행권도 더 이상 해킹의 안전지대가 아니란 사실이 드러난 셈이다. 이번 사고는 그동안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옆문'의 보안 취약성을 보여준다. 은행들이 핵심 전산망 등 주요 시스템을 보호하는 데 집중하는 사이 직원이나 외부 대출 모집인이 사용하는 영업지원시스템 등 주변 업무 시스템의 보안 관리에는 허점이 있었다. 대문은 굳게 잠갔지만 옆문은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이다. 높은 수준의 보안을 기대했던 은행에서 개인정보가 유출된 만큼 고객들의 불안이 커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더 우려되는 것은 인공지능(AI)을 활용한 해킹 공격이 앞으로 어떻게 진화할지 가늠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번 해킹 공격에는 AI 침투 도구인 '아르텍스(ARTEX)'에 딥시크 등 여러 기업의 대형언어모델(LLM)을 연동하는 방식이 활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AI가 스스로 취약점을 탐색하고 공격 경로를 판단하며 반복적인 침투 시도를 자동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공격 속도는 빨라지고 범위는 더욱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 별다른 문제가 없었던 작은 보안 취약점도 언제든 공격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금융권에서는 이번 사고가 은행 보안 시스템 전반에 대한 과도한 불신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금융회사들은 외부에서 의심스러운 인터넷주소(IP)를 통한 접속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고, 이를 차단하면서 고객 정보를 보호해 왔다고 설명한다. 이번에 드러난 취약점을 보완하고 보안 시스템을 재점검해 외부 공격에 대한 방어력을 높이겠다는 계획이다. 물론 그동안 금융권이 쌓아온 보안 체계 전체를 이번 사고만으로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핵심 시스템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 주변 시스템에서 빈틈이 있었다는 점까지 정당화해 주지 않는다. AI를 활용한 공격이 고도화될수록 작은 빈틈 하나가 더 큰 피해로 이어질 위험도 커진다. 여기에 앞으로 금융회사가 관리해야 할 금융 시스템은 더욱 다양해질 예정이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등 디지털자산, 블록체인 등 새로운 금융 기술 도입이 확대되면 금융 시스템과 외부 연결망은 더욱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새로운 서비스가 늘어날수록 보안 관리의 사각지대가 늘어날 가능성이 커진다. 새로운 기술 도입에 걸맞은 보안 역량을 갖추지 못한다면 비슷한 사고가 되풀이될 수 있다. 이번 사고를 일부 업무 시스템에서 발생한 문제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금융회사들은 보안 체계 전반을 재점검하는 것은 물론 외부 인력의 접근 권한 등 세밀한 부분까지 다시 살펴봐야 한다. 갈수록 고도화해지는 해킹 공격에 대응할 수 있도록 AI를 활용한 방어 능력 강화에도 힘써야 한다. 보안은 가장 튼튼한 부분이 아닌 가장 취약한 지점에서 무너진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송두리 기자 dsk@ekn.kr

[기자의 눈]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독설…이재명 시장도 주진우 의원도

요즘 정치는 발언을 세게 할수록 인기를 얻는다. 직설적인 화법으로 팬덤을 끌어모은 이재명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변방의 장수였던 이 대통령을 중앙 정치의 스타로 만든 결정적 장면은 2016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이었다. 당시 성남시장이던 이 대통령은 촛불집회 무대에 올라 박 전 대통령을 두고 “여러분의 손으로 무덤을 팝시다. 우리의 손으로 그를 잡아 역사 속으로 박정희의 유해 옆으로 보내줍시다"라고 외쳤다. 이 시장은 트위터에는 “이명박·박근혜는 국고손실, 부정부패, 인권침해, 국기문란 혐의로 관련자 모두와 함께 구속해 죽을 때까지 감옥살이 시켜야지요"라는 글을 올렸다. 여야 중진들조차 탄핵이나 하야 언급을 주저하며 눈치를 볼 때, 이 시장은 거침없는 '사이다 발언'으로 분노한 민심을 파고들었다. 대중의 열광을 등에 업은 변방의 자치단체장은 단숨에 야권의 유력 대권주자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공수가 바뀌었다. '대통령 저격수'를 자임하는 주진우 국민의힘 의원이 “이재(제) 명을 끊을 때"라며 10년 전 이재명 시장의 방식으로 공세를 펼치고 있다. 상대의 파멸을 부르짖으며 체급을 키우던 방식 그대로, 부메랑이 되어 대통령 자신에게 돌아온 셈이다. 주 의원의 '극언'도 곧바로 부메랑이 되었다. 박지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13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 이 대통령의 골프 의혹을 제기하던 주 의원을 향해 “나 같으면, 법률비서관이었으면 자살한다"고 주 의원을 도발했다. 주 의원은 윤석열 정부 대통령비서실 법률비서관을 지냈다. 주 의원은 박 의원에 대해 국회 윤리위원회 제소를 촉구했지만, 김민석 민주당 대표는 주 의원에 대한 국회의원 자격정지를 검토하겠다고 맞불을 놓았다. 서로를 향한 극언에 징계 촉구로 응수하는 여야의 모습은 '내가 하면 사이다, 남이 하면 처벌 대상'이라는 내로남불 민낯을 그대로 보여줬다. 상대의 파멸을 부르짖는 증오의 언어는 당장은 강성 지지층의 환호와 주목을 끌어내는 데 효과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독설은 결국 언젠가 정확히 같은 크기의 부메랑이 되어 제 몸을 베는 법이다. 정치가 오직 팬덤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유튜브 쇼츠용 극언판으로 전락할 때, 그 피해는 오롯이 민생의 몫으로 돌아간다. 서로의 목을 베겠다며 증오의 칼날을 휘두르는 이 잔혹한 정치를 끊어낼 자정(自淨) 능력이 여의도에 남아 있긴 하는 걸까. 최소한의 절제마저 기대하는 게 과욕일지도 모르겠다. 신교근 기자 shin1948@ekn.kr

[기자의 눈] 유통업계 ‘적과의 동침’ 시대의 득과 실

적과의 동침. 라이벌 관계의 기업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손을 잡는 상황을 비유하는 말이다. 최근 유통업계에서도 '더 나은 고객 서비스'라는 명분 아래 각자의 실리를 위해 손을 맞잡는 합종연횡 사례가 두드러진다. 경쟁이 치열한 유통업계에서 동종기업과의 동맹은 극히 이례적이었지만, 지금은 흔한 일이 됐다. 네이버와 컬리는 '컬리N마트'를 통해 장보기 수요를 흡수하고 있으며, 신세계그룹은 이커머스 경쟁력 강화를 위해 중국 이커머스 기업 알리바바그룹과 불편한 동거를 택했다. 티몬 영업재개에 애를 먹고 있는 오아시스마켓은 최근 토스쇼핑과 제휴를 맺어 숨통 틔우기에 나섰다. 주요 편의점·대형마트·기업형 슈퍼마켓(SSM)들도 배달 앱·종합 이커머스를 막론하고 온라인 접점 강화를 위해 입점처를 확대해 왔다. 한때 경쟁업체였던 회사를 통째로 사들이려는 움직임마저 나타난다. 협업 제휴와 인수합병은 그 방식은 다르지만 방향성은 같다. 자체 역량을 키우는 대신 이미 경쟁력을 갖춘 회사와 하나로 묶이는 것이다. 미국 우버 테크놀로지는 배달 플랫폼 '배달의민족' 운영사 우아한형제들의 모회사인 독일 '딜리버리히어로' 인수를 추진하며 국내 배달시장 재도전에 나섰다. 사용자·입점업체 등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펼쳐온 유통업체가 연합 전선을 형성하는 배경에는 서로 다른 사업 기반을 바탕으로 상호 보완한다는 의도가 깔려있다. 이용자가 많을수록 서비스 가치가 극대화되는 플랫폼 시장의 네트워크 효과를 고려하면, 개별 기업 입장에서 협업은 효과적인 전략이다. 여기에는 막대한 비용을 써가며 출혈 경쟁을 이어가기보다 차라리 경쟁사와 손잡는 것이 이익 측면에서 더 낫다는 판단이 녹아들어 있다. 혼자 확보하기 힘든 이용자·데이터를 공유해 서비스 규모를 키울 수 있다는 이점 때문이다. 하지만 적과의 동침 전략이 기본 문법처럼 여겨지면서 뒤따르는 문제도 없지 않다. 개별 기업 간 경쟁이 아닌, 대규모 기업끼리 손잡는 생태계가 대세가 되고 거대 플랫폼 간 동맹이 갈수록 공고해진다면 네트워크 밖에 있는 신규 사업자·소규모 플랫폼은 시장 진입마저 힘들어질 가능성이 높다. 갈수록 소비자의 요구·취향이 세분화되는 흐름 속에서 플랫폼업계가 던져야 할 질문은 '어떻게 차별화를 이룰까'다. 진정한 서비스 혁신을 추구한다면 동맹의 덫에 갇히기보다 스스로 버틸 수 있는 자생력을 기를 필요가 있다. 조하니 기자 inahohc@ekn.kr

[기자의 눈] 인국공 새 수장, 필수 덕목은 ‘항공 전문성·글로벌 역량’ 리더십

대한민국 관문이자 글로벌 항공·물류의 핵심 축인 인천국제공항공사가 7개월이 넘는 긴 경영 공백을 끝내고 제11대 사장 선임을 위한 막바지 절차에 진입했다. 최근 임원추천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최종 후보는 박남춘 전 인천시장·김상도 전 국토교통부 항공정책실장·김문권 전 이스타항공 대표 등 3명으로 압축된 것으로 알려졌다. 격변하는 글로벌 항공 시장에서 전문성과 정무 능력을 바탕으로 인천공항의 미래를 이끌어갈 적임자가 누구로 결정될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높다. 공기업 수장 인사는 정치적 보은(報恩)이나 세력 안배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 지난 업무 보고 과정에서 불거진 전임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과의 논쟁 사례는 적재적소 인사 원칙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소관 업무의 세부 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정무적인 선문답식 답변으로 일관하는 수장의 모습은 조직 전체의 신뢰를 실추시키고 정책 추진 동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겼다. 365일 24시간 멈추지 않는 초대형 복합 인프라인 인천공항의 최고 경영자는 현장의 실무 현안을 명확히 꿰뚫어 보고 정부 부처·유관기관과의 유기적 공조를 이끌어낼 수 있는 '실무형 문제 해결사'여야 한다.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등과 긴밀히 협력할 수 있는 글로벌 리더십을 바탕으로 인천국제공항이 맞닥뜨린 4가지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첫째, 동아시아 초대형 공항 간 주도권 경쟁 격화에서 이겨야 한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 베이징·상해 푸동 △싱가포르 창이공항 △홍콩 첵랍콕공항 △일본 하네다·나리타 등 주변국 허브 공항들이 코로나19 이후 공격적인 인프라 투자를 감행하며 지역 항공 물류 주도권을 쥐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인천공항 역시 4단계 공항 확장 사업과 제1여객터미널 리뉴얼 사업을 통해 스마트 국제 공항으로 글로벌 공항 산업을 선도해야 한다. 이는 토목·건설 공사만으로 달성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다. 다양한 항공 노선 유치와 인공 지능(AI)을 접목한 첨단 IT기술 적용, 글로벌 물류 기업 유치 등 항공 산업 전반에 대한 전문성이 뒷받침 돼야 가능한 과제다. 둘째, 공항 보안·안전 시스템의 근본적 혁신과 유관 기관 간 강력한 공조체계 구축이다. 최근 공항 내 외화 밀반출·마약 밀수·보안 구역 내 위해 물품 반입·보조 배터리 화재 등 공항 안전을 위협하는 사건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항공 보안과 안전은 공항공사 독자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만큼 국토부·국가정보원·법무부·국방부·관세청·경찰청·항공 운송 사업자 등 관계 기관과 업체의 빈틈없는 공조가 필수적이다. 현장의 미세한 틈새를 파악하고 각 기관의 역할을 조율하는 세밀한 리더십이 절실한 이유다. 셋째, 미래 준비를 위한 신성장 동력 확보와 내부 조직의 통합이다. 인천공항은 고부가 가치 항공 산업인 MRO 생태계를 강화하고 신 모빌리티 상용 운항을 선도해 K-항공 산업의 글로벌 확장을 뒷받침해야 한다. 이를 이끌어갈 항공 전문 융합 인재 양성도 차질없이 추진해야 한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려면 내부 조직의 안정이 뒷받침 돼야 한다. 장기간 수장 공석으로 누적된 내부 구성원들의 피로감을 씻어내고 노사 간 상생 협력을 끌어낼 수 있는 실효적 소통 역량이 요구된다. 넷째, 공항 운영 체계 개편에 대응하고 지방 공항과의 상생 협력을 이끌어야 한다. 이재명 정부는 지난 9월 관계 부처 합동으로 발표한 '공공 기관 기능 개혁 추진 방안'에서 공항운영 효율화와 공공 기관 기능 조정 차원에서 검토해 온 인천국제공항공사와 한국공항공사의 통합을 유보했다. 지방 공항 활성화 방안을 먼저 마련하고 진행 상황을 점검한 뒤 다시 검토하기로 한 것이다. 또한 양 공항공사의 항공 보안 업무와 관련 보안 자회사를 통합하는 '항공 보안 전문 기관' 설립도 추진한다고 밝혔다. 새 수장은 이러한 조직 개편 논의에 대응하면서 보안 업무의 연속성을 확보해야 한다. 아울러 인천국제공항의 글로벌 허브 경쟁력과 지역 균형 발전을 함께 뒷받침할 수 있도록 지방 공항과의 구체적인 협력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이름보다 실력과 전문성을 갖춘 국가 대표가 필요하다. 축구 국가 대표를 선발할 때 최고의 실력자를 뽑듯, 대한민국 관문을 책임질 인천국제공항의 새 수장 역시 과제를 해결할 역량으로 평가해야 한다. 선임의 기준은 항공 산업 현장에 대한 이해와 국제적 협력 역량, 정부 정책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능력이어야 한다. 이러한 역량을 갖춘 수장이 조직의 힘을 모을 때 인천국제공항은 장기 공백의 흔적을 털어내고 세계 최고의 허브 공항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기자의 눈] 출구없는 뉴스테이…분양전환 혼란은 예견된 미래

제도나 법의 공백에서 생기는 혼란은 예견된 미래다. 8년 만에 뉴스테이 의무 임대 기간이 종료되는 가운데 분양전환을 두고 발생하는 문제가 그렇다. 뉴스테이는 2015년 박근혜 정부에서 도입한 기업형 임대주택 제도다. 8년 동안 장기 거주가 가능하고 임대료 상승률은 연 5% 이내로 제한된다. 소득수준 제한이 없어 유주택자여도 입주가 가능하다. 중산층 주거 안정을 위해 도입된 뉴스테이는 민간임대주택에 관한 특별법을 통해 입주 자격과 임대 조건 등 진입 요건을 구체적으로 정하고 있다. 문제는 의무 임대 기간이 종료된 이후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정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종료 이후 사업자가 분양전환을 해야 하는지, 분양전환을 한다면 기존 임차인에게 우선권을 부여하는게 맞는지, 분양가는 어떻게 산정할 것인지 등을 정하고 있지 않다. 제도의 공백이 생기니 이해관계자들은 각자 입장을 고수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나 리츠회사는 계약 당시 분양전환 대상이 아니었다는 입장이지만, 임차인들은 구체적으로 정하지 않았으므로 분양전환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법에서 분양전환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하고 있지 않은 탓에, 주주 간 협약이나 리츠의 내부 의사결정 등 임차인이 열람하기 어려운 사적 계약에 의해 분양 전환 여부가 결정되는 한계도 있다. 현재 국토교통부와 HUG 등은 무주택 임차인을 대상으로 분양전환을 하고, 우선 매수 신청 기한 종료일까지 무주택 자격을 충족하면 현재 유주택자도 분양전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타협안을 내놨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이 모든 뉴스테이 사례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업장마다 임차인과 리츠 간에 얽힌 쟁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업장은 분양전환 여부 자체가 문제 되지만, 분양전환이 확정됐어도 분양가 산정을 두고 갈등이 이어지기도 한다. 결국은 계속해서 땜질식 처방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현재로서는 정례화된 합의 채널을 마련해 혼선을 줄이고, 분양전환 시기가 도래하기 이전에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합의를 도출해 불확실성을 줄이는 것이 최선이다. 근본적인 해법은 정책 구상 단계부터 제도의 시작과 끝을 함께 설계하는 것이다. 정부는 전월세 시장 안정화를 위해 공공지원 민간임대주택 공급을 활성화 의지를 보였다. 중요한 것은 주택을 얼마나 공급할지만이 아니라 임대 기간이 끝난 이후엔 어떻게 할 것인지까지 함께 설계하는 것이다. 송윤주 기자 syj@ekn.kr

[기자의 눈] 공모주는 묶어도, 투자자의 마음은 못 묶는다

금융당국이 기업공개(IPO) 시장에서 기관투자자의 장기보유를 유도하고 있다. 일정 기간 공모주를 팔지 않겠다고 약속한 기관에 더 많은 물량을 배정하는 방식이다. 오는 11월에는 코너스톤 투자자 제도 시행도 예정돼 있다. 기관투자자는 공모주 일부를 사전에 배정받는 대신 해당 물량을 일정 기간 의무적으로 보유하게 된다. 상장 직후 매도 물량이 쏟아지는 것을 막고 중장기 투자자금을 유치하겠다는 취지다. 그런데 최근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기관투자자가 주식을 오래 보유하도록 만드는 것과 중장기 투자자로 만드는 것은 같은 일일까. 숫자만 보면 정책의 효과는 뚜렷하다. 지난해 7월 의무보유확약 우선배정제도가 도입된 이후 기관투자자의 확약 참여가 크게 늘었다. 올해 상반기 신규 상장기업의 평균 의무보유확약비율은 46.32%로 지난해 같은 기간 7.06%보다 6배 이상 높아졌다. 공모주 배정 과정에서 의무보유 여부가 기관투자자의 중요한 고려 사항으로 자리 잡은 셈이다. 하지만 확약 참여가 늘었다고 기관투자자의 투자전략까지 바뀌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최근 만난 한 자산운용업계 관계자는 일반 IPO 펀드의 운용 전략이 여전히 상장 초기 매도에 맞춰져 있다고 말했다. 공모주를 더 많이 배정받기 위해 의무보유를 약속하는 것과 기업의 성장 가능성을 보고 장기간 투자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기관투자자에게 무작정 장기보유를 요구할 수는 없다. IPO 펀드 역시 투자자에게 수익을 돌려줘야 한다. 상장 초기 주가가 크게 올랐다면 차익을 실현하는 것도 합리적인 투자 판단이다. 기업의 성장 전망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주식을 계속 보유할 이유도 줄어든다. 이처럼 기관투자자가 주식을 얼마나 오래 보유할지는 의무보유확약 여부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확약에 참여할 때는 공모주 배정 혜택이 중요한 고려 사항이 될 수 있지만, 확약 기간이 끝난 뒤에는 기업의 실적과 성장 전망이 투자 판단의 기준이 된다. 의무보유확약 비율이 높아졌다는 사실과 장기투자자가 늘어났다는 평가는 구분해야 하는 이유다. 의무보유확약 확대와 코너스톤 투자자 도입은 IPO 시장의 단기 수급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필요한 시도다. 그러나 주식을 팔지 못하도록 하는 것과 계속 보유할 이유를 만드는 것은 다르다. 제도는 매도 시점을 늦출 수 있지만 투자자의 판단까지 바꿀 수는 없다. 확약이 끝난 뒤에도 투자자를 붙잡아두는 것은 결국 기업의 가치다. 김태환 기자 kth@ekn.kr

[기자의 눈] 18명 설문으로 만든 ‘이재명 정부 AI 실패론’

지난 4월 산업통상부에서 점심시간을 이용한 인공지능(AI) 활용 교육이 열렸다. 참석자는 20여 명. 교육 도중 설문을 돌렸고 18명이 답했다. 전원이 챗GPT와 제미나이 등 상용 AI를 사용한다고 했다. 산업부 직원 약 1250명 가운데 18명이 응답한 조사였다. 이 설문이 지난달 국민의힘 최수진 의원실의 보도자료에 등장했다. 제목부터 이재명 정부의 'AI 100조 투자·한국형 챗GPT' 공약을 겨냥했다. 산업부 공무원들이 164억원을 투입한 정부 AI를 외면하고 해외 AI에 의존한다는 내용이었다. 정부 AI를 자주 이용한다는 응답은 0%, 해외 AI를 사용한다는 응답은 100%라고 했다. 숫자는 틀리지 않았다. 문제는 그 숫자가 설명하는 범위다. 점심시간 교육에 참석한 직원들의 응답으로 산업부 전체의 AI 이용 실태를 판단할 수는 없다. 직급이나 연령 등을 고려한 표본조사도 아니었다. 의원실이 이런 한계를 몰랐던 것도 아니다. 응답자 수를 묻자 “18명이요"라고 답했다. “AI 쓰는 사람들을 샘플링해서 조사한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러나 원 보고서에는 그런 표본 추출 과정이 없다. 산업부 관계자는 이 설문을 두고 “한마디로 의미가 없는 설문"이라고 했다. 의원실 보도자료에는 정보 유출 우려도 담겼다. 해외 AI 사용이 국가 안보 측면에서 위험하다는 주장이었다. 실제 유출 사례를 확인했느냐고 묻자 의원실은 “일반적인 차원"의 지적이라고 했다. 164억원도 산업부에 별도로 투입된 예산이 아니라 범정부 AI 공통기반 전체 사업비다. 산업부의 책임도 있다. 대표성을 갖추지 못한 설문을 공식 연구용역 보고서에 싣고 '정량적 근거'라고 평가했다. 담당자가 뒤늦게 “구색 맞추기 식"이었다고 설명한들 달라질 것은 없다. 그러나 국회는 정부가 내놓은 자료의 허점을 검증하는 곳이다. 이번에는 정반대였다. 의원실은 조사 규모를 알고도 100%라는 비율을 앞세웠다. 여기에 범정부 사업비와 확인되지 않은 정보 유출 우려를 더해 이재명 정부의 AI 정책을 비판했다. 각각의 사실이 뒷받침하는 범위를 넘어선 결론이었다. 정부 AI의 활용도가 낮다면 원인을 조사하면 된다. 보안이 걱정된다면 실제 위반 사례와 관리 실태를 확인하면 된다. 국정감사에서 따져볼 사안도 적지 않다. 그런데 이번 보도자료는 확인된 사실보다 결론이 앞섰다. 산업부가 만든 부실한 자료를 국회가 걸러내지 못한 것이 아니다. 그 자료의 한계를 알고도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근거로 삼았다는 점이 더 심각하다. 김나현 기자 knh@ekn.kr

[기자의 눈] 공급 책임자의 대출규제론, 실행력으로 답해야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5일 국토교통부와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 주택 조기 대량 공급을 지시했다. 미분양 우려로 착공을 망설이는 사업장을 위해 LH가 미분양분을 임대용으로 매입하도록 매수 확약도 지시했다는 것이 정부의 설명이다. 공급계획을 실제 주택으로 연결하는 LH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이성훈 LH 사장의 대출규제 발언은 공급 책임자의 인식을 돌아보게 한다. 이 사장은 지난달 30일 용인 반도체 국가산단 관련 기자간담회에서 주택시장 안정 대책을 묻는 질문에 공급에는 시차가 있다며 대출규제 필요성을 언급했다. 주무부처와 논의한 내용은 아니라는 설명을 덧붙였지만, 무주택자의 내 집 마련 기회를 좁힐 수 있다는 반발이 뒤따랐다. 주택 건설에 시간이 걸리고 과도한 차입을 경계해야 한다는 진단은 타당하다. 그러나 공급을 책임지는 기관의 수장이라면 그 시차를 어떻게 줄일 것인지부터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공급이 늦어지는 동안 대출을 더 조여야 한다는 주장은 자칫 기다림의 비용을 실수요자에게 떠넘기는 것으로 들릴 수 있다. 주택담보대출은 투기적 수요를 키울 수 있지만 자산이 부족한 청년에게는 내 집 마련의 수단이기도 하다. 대출 축소가 가격 안정에 미칠 효과와 무주택자의 구매 여력 감소를 함께 따져야 한다. 현금이 충분한 매수자와 소득으로 원리금을 갚는 실수요자를 구분하지 않으면 주거 사다리를 지키겠다는 설명도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공공기관 수장의 발언은 개인 의견이라는 단서만으로 무게가 줄어들지 않는다. 시장에서는 추가 규제의 신호로 읽힐 수 있다. 발언만으로 가격과 거래가 움직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정책 방향에 대한 혼선을 키울 가능성은 경계해야 한다. 공급 확대와 실수요자 보호를 어떻게 병행할 것인지 명확히 밝혀야 한다. LH가 답해야 할 핵심은 공급의 실행력이다. 후보지 선정과 지구 지정, 인허가와 착공은 각각 다른 단계다. 인허가를 받아도 사업비를 조달하지 못하면 공사는 시작되지 않는다. 매수 확약 역시 대상과 가격, 품질 기준이 구체화돼야 작동한다. 공공이 위험을 인수하는 만큼 임대 수요와 입지를 따져 사업자의 손실을 대신 떠안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정부와 서울시의 공조도 실행으로 평가해야 한다. 홍지선 국토부 장관과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달 30일 공급 협력을 약속했다. 이제는 사업별 합의 내용과 처리 기한을 제시할 차례다. 용산처럼 쟁점이 많은 곳은 부지별 반환·정화 현황과 기반시설 조건을 구분하고, 추진 가능한 사업부터 진행해야 한다. 사업별 당초 일정과 현재 단계, 지연 사유를 공개하는 것도 중요하다. 입주까지 기다려야 하는 세입자에게는 공공임대와 주거 지원을 병행해야 한다. 공급 속도를 높이더라도 안전과 품질을 양보해서는 안 된다. LH 사장의 리더십은 규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말보다 공급을 앞당기는 성과로 평가받아야 한다. 국민이 기다리는 것은 더 큰 공급 숫자나 더 강한 대출규제가 아니다. 감당할 수 있는 비용으로 들어가 살 집과 믿을 수 있는 입주 일정이다. 장혜원 기자 dalgu@ekn.kr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