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E칼럼] ESG의 이면과 한국의 전략적 선택

최근 몇 년 사이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은 전 세계 기업과 투자자들의 핵심 화두가 되었지만, 이제는 그 이면을 냉정하게 들여다볼 시점이 되었다. ESG는 한때 “지속가능성에 대한 약속"처럼 여겨졌지만, 이제는 상황에 따라 취사선택되는 조건부 전략으로 변질되고 있다. 시장성과 수익성, 그리고 효율성이 ESG 원칙을 압도하는 순간, 기업과 금융기관은 주저 없이 기존의 입장을 철회하거나 후퇴한다. 최근 미국에서 벌어지는 사례들은 ESG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명확히 보여준다. 첫째, 미국의 주요 은행들이 탄소 감축 목표에서 급속히 후퇴하고 있다. JP모건, 뱅크오브아메리카, 골드만삭스, 시티, 모건스탠리 등은 2025년 들어 Net-Zero Banking Alliance(NZBA)에서 잇달아 탈퇴하거나, 기후 목표를 1.5℃에서 “파리협정 이하" 수준으로 완화하는 등 ESG 약속을 대폭 후퇴시켰다. 이들은 “정책 변화"와 “고객 전환의 어려움", “지정학적 리스크" 등을 이유로 들며, 사실상 수익성과 실현 가능성을 ESG보다 우선시한 것이다. 둘째, ESG를 앞세운 펀드가 실제로는 탄소 집약적 기업에 투자하는 사례도 있다. JP모건의 '지속가능' 펀드가 약 2억 파운드(약 3000억 원)를 전 세계의 에너지 및 실물 자산 거래 1 등기업인 글렌코어(Glencore)에 투자한 것이 대표적이다. 글렌코어(Glencore)는 환경 규제 위반 이력까지 있는 기업으로, 이는 '지속가능성'이라는 이름 아래 실질적 ESG 원칙은 무시된 사례다. 캘리포니아 공무원연금(CalPERS)는 ESG 전략에 따라 사우디의 아람코(Saudi Aramco)와 셰브론(Chevron) 같은 고탄소 기업을 '기후 솔루션' 투자처로 분류하고 있다. 이들 기업은 탈석유·탈가스의 흐름과는 명백히 반대되는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CalPERS는 “전환기 투자"라는 프레임을 적용해 정당화하고 있다. 이는 ESG를 투자 수익과 리스크 헤지 수단으로 재정의한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더 중요한 흐름은 정부 차원에서도 ESG에 대한 유연한 조정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연방 및 주 정부는 에너지 비용 상승이 경제성과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고 판단하며, 최근 에너지 관련 규제들을 적극 재검토하고 있다. 여러 주는 기후변화, ESG, 환경정의, 탄소세 및 벌금 등과 관련한 각종 규제 중 이념 중심의 비현실적 정책들을 식별하고, 위헌적이거나 과도한 조치들에 대해 시정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미국이 ESG를 무조건 지키는 이상적 규범이 아닌, 경제·안보 현실과 조화되는 실용적 정책 프레임으로 재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친환경을 주도적으로 외치던 EU도 옴니버스 패키지를 통하여 지속가능실사 지침을 연기하거나 유예하고 있으며 탄소국경조정 대상 기업을 대폭 면제해주는 등 실사구시의 자세로 경제가 우선임을 새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정부와 기업은 어떤 전략을 선택해야 하는가? ESG를 우선하면서 기업의 활동을 제약하고 비용을 높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환경규제 위주의 탄소중립 정책의 결말은 제조업 경쟁력 하락과 국민 비용 증가만이 남을 것이다. 물론 탄소중립과 녹색 전환은 시대적 과제이며 이를 외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기술적·지리적 제약, 불리한 자연조건, 높은 전환 비용을 고려할 때, 무리한 선언보다는 실현 가능성과 경쟁력을 고려한 전략이 필요하다. 정부는 에너지 안보와 산업 기반을 위협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점진적이고 유연한 정책 조정을 검토해야 하며, 기업은 실효성 있는 ESG 실행 방안을 스스로 설계해 나가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영리하고 현실적인 전략을 통해 ESG와 생존을 동시에 추구해야 할 때다. 조홍종

[EE칼럼] 빅테크의 원자력 선택

최근 미국 전력시장에 큰 변화가 감지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월 20일 취임과 동시에 에너지 위기를 선포하였다. 파리기후협약으로부터 탈퇴를 선언했고 IRA (인플레이션감소법안)도 폐지될 전망이다. 2024년 10월 구글(Google)이 소형모듈형원자로(SMR) 개발사인 카이로스파워로부터 전력을 공급받기로 하였다는 보도가 나왔다. 같은 시기 거대 유통기업인 미국의 아마존(사)가 SMR 개발사인 X-energy에 5억 달러의 지분투자를 하기로 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12월에는 페이스북의 후신인 메타(Meta)가 원자력 전기 4기가와트(GW) 공급자를 구한다는 공모가 나왔고 올해 4월에는 Equinix(사)가 오클로(Oklo)로부터 500메가와트(MW)의 전력구매에 대해 사전계약을 맺었다는 뉴스가 나온다. 해설없이 팩트만 전달된 위의 뉴스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눈에 뜨이는 것은 이들 빅테크 기업이 몇 년전까지 RE100을 한다던 기업이었다. RE100은 기업에서 사용하는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로 하자는 비정부기구(NGO)의 캠페인이다. 탈원전 정부에서 이를 강조했던 것은 이것이 유일하게 재생에너지 확대를 위한 근거로 사용하기에 적절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캠페인이 이산화탄소 배출저감을 위한 캠페인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오해다. 이 캠페인은 수소연소와 같은 다른 배출저감 방식은 인정하지 않고 재생에너지 보급만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재생에너지 확대가 목표인 캠페인이다. 아무튼 빅테크 기업의 최근 행보는 RE100이 인정하지 않는 원자력으로 지향점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상 RE100이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지난해 7월 미국 에너지부는 AI 데이터센터에 전력공급이라는 7쪽 분량의 간단한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이는 일반적 검색엔진으로 찾을 수도 있고 내려받을 수도 있다.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AI 데이터센터에 공급되는 전력은 탄력성(Flexibility)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AI 데이터센터는 주문에 따라서 전력수요가 급격히 증가 또는 감소한다. 따라서 이에 전력도 따라주어야 하는데 재생에너지는 이러한 탄력성을 보장하기 어려운 것이다. 두 번째 주목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기업이 가장 고민해야 할 것은 '제품을 어떻게 잘 만들것인가'이다. 그런데 지금 이 기업들은 '전력을 어떻게 공급할 것인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상하지 않은가? 물론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전부터 발생한 일이다. 우리로 치면 삼성전자가 반도체를 어떻게 잘 만들 것이냐가 아니고 전력을 어떻게 공급할 것인지에 대해서 보도자료를 발표한 것과 같다. 최근에 하이퍼 스케일 컴퍼니(Hyper Scale Company)라는 표현이 나온다. 즉 엄청난 전력을 필요로 하는 회사를 말한다. 미국 에너지부는 이러한 하이퍼 스케일 컴퍼니에 대해 기존의 인프라로 전력을 공급하기 어려우니 자구책을 찾으라는 권고를 한 바 있다. 이에 따라 빅테크 기업이 전력에 대해 고민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매우 특이한 뉴스도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사)가 컨스털레이션이라는 전력회사로부터 전력구매계약을 맺기로 했는데 TMI-1호기를 되살려서 그 전력을 공급받기로 했다는 것이다. TMI-1호기는 1979년 사고가 발생했던 TMI-2호기로부터 불과 100미터 떨어진 원전이다. 사고나 사고의 영향은 없었지만 경제성이 나빴기 때문에 세워두었던 원자로이다. 이 원자로를 수리해서 다시 가동하고 그 전력을 마이크로소프트가 사기로 한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원자로를 수리해서 가동하는데 160억 달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신규원전 건설에 100억 달러 정도가 들어가는데 그보다 많은 돈을 들여서 수리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전력의 평준화발전단가도 메가와트시당 100달러로 엄청나게 높다. 2023년 아이다호에 건설하려던 NuScale SMR의 건설이 취소되었던 이유가 너무 비싸다는 것이었고 그 때의 가격은 메가와트시당 89달러였다. 불과 2년 만에 시장이 달라진 것이다. 우리나라도 삼성전자 평택공장과 SK하이닉스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 각각 원전 7-10기분의 전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빅테크 기업이 전기가격이 몇 배가 되더라도 우선 확보하려는 다급한 상황을 목도할 때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또 전통적인 전력인프라가 이런 전기를 공급하지 못할 전망이라면 자구책을 찾을 필요도 있다. 정범진

[EE칼럼] 신재생 에너지 시대와 국제 갈등

이재명 정부는 전임 정부들과 달리 에너지 정책 개편과 보완을 국정 주요과제 중의 하나로 미리 제시하였다. 잠재성장률 3%라는 경제목표 달성을 위한 것이다. 그 추진전략으로 인공지능(AI) 등 신산업 투자와 산업 구조 혁신 등을 강조했다. 에너지 부문에서는 기후 위기대응이라는 글로벌 큰 흐름에 따라 신재생 에너지 중심사회로 전환과 함께 적절한 수준의 원전 활용이 주요 내용이다. 신재생 에너지 증대에 중점을 두는 가운데 기존 원전 활용과 원전 국제경쟁력 복원 등을 고려하는 실용성을 강조한다. 에너지 수입 대체, RE100(신재생 위주 기업운영)과 에너지고속도로 건설 등을 새로 제시하였다. 관세 전쟁, 우크라이나와 중동 분쟁과 물가와 환율 불안에 따른 올해 잠재성장률이 1%를 밑도는 우리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한국은행에 의하면 지난 30년간(1994~2024년) 우리 잠재성장률이 6%p(포인트) 하락했다. OECD는 내년 우리 잠재성장률을 1.98%로 제시하였다. 주목할 사실은 이재명 정부 출범 바로 직전인 지난 5월 우리 수입물가지수(한은 발표)는 전달 대비 3.7% 내렸다는 점이다. 우리 주종 수입원유인 '두바이'유 가격도 5.9% 내렸다. 그러나 이달 들어 '두바이'유 가격은 약 16%나 올랐다. 급변하는 대내외여건 아래 효율적 에너지전략 수립이 다급한 연유이다. 그나마 유럽과 미국 등 전 세계적인 '원전 르네상스' 바람이 불고 있는 점은 다행스럽다. 원전은 반도체, 자동차, 조선 산업의 뒤를 이을 우리 수출 주력 상품로 간주 된다. 최근 26조 규모의 체코 원전 수주를 매듭지었다. 이제 원전과 함께 청정 기술에너지원을 구성할 신재생 에너지에 관심을 키울 때이다. 저성장의 그늘, 원전 르네상스의 부상 최근 국제에너지기구(IEA)는 2025년 세계 에너지 부문 투자 330억 달러 가운데 2/3인 220억 달러가 청정에너지 부문으로 예측한 바 있다. 아직 상대적으로 미(未)성숙 기술/산업에 기반한 신재생 등 청정에너지 부문은 최근의 경제 불안정성 증대와 지정학적 긴장 속에서도 이런 관심을 받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이에 반해 석유 등 화석 연료 부문 투자는 6% 줄었다. 지난 2016년 '코로나' 위기 이래 가장 크다. 따라서 화석 연료에서 청정에너지로의 전환 경쟁이 당분간 세계 에너지 시장변화를 좌우할 것이다. '지속 가능한 성장'이라는 당위론 접근만이 아니다. 새로운 에너지 질서 등장이다. 새로운 지정학적 긴장을 예고하기도 한다. 태양광, 풍력, 수소 등 신재생/청정기술 에너지로의 전환은 단순한 기술 변화만은 아니다. 새로운 차원의 세계적 갈등을 촉발할 수 있는 지정학적 경제사회 구조 재편이다. 녹색 기술과 핵심원료광물 확보 경쟁, 기술과 자원에 대한 접근 분쟁, 그리고 글로벌 공급체인 변화와 경제력 재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알력과 분쟁 소지를 내포하고 있다, 결국 청정/녹색/ 신재생 에너지로 지구를 치유하려는 시도는 인류문명 진전에의 새로운 해결과제가 될 소지가 보인다. 이를 효율적 해결과제 처리와 '글로벌' 경쟁력 확보는 향후 국가발전의 중요한 척도가 될 수 있다. 청정에너지 투자, 세계가 주목하다 이러한 정책설정의 기반인 국제석유 시장의 안정추세가 최근 급변하고 있다. 예의 주시하여야 할 것 같다. 지난 13일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면전 개시 이래 국제유가가 폭등하고 있다. 6월 15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에서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7월물 선물 가격은 74달러 수준에 거래되었다. 주간 기준으로 WTI 가격은 13% 상승해 지난 2월 11일(73.32달러)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월간 기준으로도 약 19% 올랐다. 여기다 이란의 원유/가스 생산과 수출기지까지 피해를 받고 있다.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라는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 해협은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이라크, 이란, 아랍에미리트(UAE) 등 중동 산유국의 수출통로로 전 세계 천연가스(LNG)의 3분의 1, 석유의 6분의 1이 지난다. 국내로 들어오는 중동산 원유도 이 해협을 통과한다. 글로벌 투자은행 JP모건은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현실화하면 유가는 120달러/배럴 수준까지 오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런 극단적 가능성은 적다고들 한다. 중국 등 이란 석유 수입국들의 반발이 크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 질서를 좌우하는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점을 종합하면 글로벌 석유 시장이 OPEC+ 증산, 글로벌 관세 전쟁 등에 따라 공급 걱정은 당분간 적을 것 같다. 따라서 이번 이란-이스라엘 갈등이 완화되면 빠르게 하향-안정세로 진전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신재생에너지가 불러올 새로운 지정학 여기서 우리는 인류문명 발전과정에서 에너지의 역할 변화를 간략히 살펴보자. 석유와 가스 등 화석에너지가 세계 문명기반이 되어온 지난 두(20-21) 세기는 비약적 경제개발과 함께 전쟁 등 세계 갈등도 빈번하였다. 화석에너지와 그 활용체제 확보 경쟁이 그 주요 원인이었다. 1991년 걸프전, 2003년 이라크 전쟁, 그리고 러시아의 유럽에 대한 천연가스 공급제약 등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따라서 화석에너지는 경제사회성장뿐 아니라 군사전략, 동맹 확대/유지, 그리고 전략적 무기 그 자체로 활용되어왔다. 이에 반해 신-재생에너지는 에너지 지정학적 긴장 완화에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왔다. 신-재생에너지는 세계 각지에 분산되어 있고, 지역에너지로서의 생산과 활용이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의 전략 무기화는 더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 않다는 사실이 점차 밝혀지고 있다. 신재생의 청정화와 지속 가능성 확보에도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화석 연료가 지역편중 분포된 것과 마찬가지로, 신-재생 청정/녹색 전략에 필요한 원자재와 기술도 불균등하게 분포된 점에 유의해야 한다. 따라서 에너지 부문은 어디서나 갈등을 유발하게 마련이다. 화석연료의 그림자와 그 전략적 유산 이러한 의미에서 에너지와 국가 산업전략 간에 역사적 변화추이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영국의 저명한 경제지인 The Economist는 6월호에 '세계는 제조업 망상에서 벗어나야 한다.'라는 기사를 게재하였다. 그 주 내용은 '모든 정부의 제조업에 대한 집착은 근거 없는 믿음을 기반으로 하며, 결국 자멸한다.'라고 요약된다. 제조업 육성은 다양한 정치적 목표를 가지고 있다. 선진국의 경우 주로 양질의 제조업 일자리를 되살리고 세계적 차원에서 산업 중심지로서 잃어버린 영광회복이 목표이다. 이에 반해 개발도상국들은 일자리와 함께 경제성장 동력 확보를 도모한다. 결국 산업(특히 제조업) 생산 역량과 그 파급효과가 국가발전의 중심이다. 특히 지금은 중국의 막강한 제조업 비중과 역할이 모방과 답습의 대상이 되고 있다. 중국 사례에서 제조업을 육성하면 성장, 고용, 사회 유연성 등의 국가목표 동시 달성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갖게 한다. 중국이 미국과 함께 세계질서 형성의 두 주역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조업 신화는 현대 경제의 본질에 대한 일련의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Economist지는 설파하고 있다. 주로 제조업 고용행태 변화에 대한 오해 부족 때문이다. 시장경제체재에서 제조업은 경쟁력 유지를 위해 언제나 자동화, 고부가가치화, 집적화 등으로 잘 훈련된 고품질 노동력을 선호한다. 저학력 도시 노동자, 도시로의 이주 농촌 노동자들에 대한 양질의 일자리 제공 기회는 점차 소멸하고 있다. 2024년 세계제조업 일자리는 2013년 대비 6%에 해당하는 2천만 개 감소했다. 같은 기간 제조업 생산액은 5% 증가했다. 현재 생산현장의 양질 일자리는 기술자와 엔지니어 중심이며, 단순 노동자는 아니다. 미국 제조업 일자리 중 생산직은 3분의 1이 채 되지 않는다. 이들은 대부분 학위가 없는 근로자(속칭 Lunch-pail Joes:도시락 지참 노동자)들이다. 미국의 무역 적자를 해소할 만큼을 미국 내로의 제조업 환류 조치를 감행해도, 고작 1%의 신규 생산직 고용만 늘 뿐이라는 분석도 있다. 제조업은 단순 노동자에게 건설업 등 다른 산업보다 더 나은 보수를 못 준다. 제조업 생산성 증가율이 서비스업보다 낮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인식오류는 제조업이 경제성장에 필수적이라는 믿음이다. 인도의 제조업 비중은 GDP 대비 정부 목표치인 25%보다 약 10%포인트 낮지만, 인도 경제는 지금 고속성장하고 있다. 반면, 중국은 재생에너지, 전기차 등 주요 제조업 부문을 장악했음에도 최근 성장률 목표 달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산업과 안보, 제조업 회귀의 함정 그렇다면 '우크라이나'와 중동 등지의 전쟁과 미-중 갈등을 겪는 서방 선진국들이 안보를 위해 제조업을 되살려야 한다는 명제(Agenda)는 타당한가? 미국 '트럼프'의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캠페인 같은 국수주의적 접근에 대한 정당성 논란이다. 우선 해외 공급에 대한 의존위험이라는 점에는 설득력은 있다. '코로나 위기'시기에 일정 수준 공급망 불안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중국의 희토류 정제 독점은 최근 글로벌 자동차 생산에 제약이 되며, 미-중 관세 협상의 관건이 되고 있다. 따라서 서방이 무기와 탄약을 비축하고, 핵심 인프라를 동맹국으로부터 조달하며, 군함과 같이 오랜 생산준비 기간이 필요한 것들의 미리 확보는 타당하다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극도로 전문화된 세계에서 일반적인 제조업 육성은 전시 비상역량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토마호크 미사일을 만드는 것과 테슬라를 만드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오히려 우크라이나 전쟁은 어느 국가나 드론 등 다양한 무기를 빠르게 혁신하고 대량 생산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미국, 독일, 일본, 한국 시장경제 체제 민주국가들은 각기 경쟁력이 입증된 다변화된 공급망구성을 통해 첨단 고부가 가치 부문에서 중국을 압도하고 있다. 이 경우 단일 국가 공급망보다 위기에 대한 회복잠재력이 더 크다. 따라서 동맹국 간 개방적 협력과 규제철폐로 큰 경제 블록을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녹색 전환의 과제와 국제 협력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는 새롭고 다변화된 에너지 공급망인 신재생/녹색 에너지 산업의 글로벌 공급체계와 개별 국가들의 유효 대응체제를 알아보자. 신재생 에너지로의 전환은 깨끗하고 지속 가능한 지구 문명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혁신기술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권력을 재분배하고 경쟁을 유발하며, 자칫하면 갈등을 촉발할 수 있다. 핵심 자원 확보 경쟁과 기술 보호주의, 지정학적 갈등, 인프라 경쟁 등에 따라 기존의 세계 긴장을 더욱 증폭시킬 위험도 있다. 국가정책 입안자들은 이러한 갈등 요인들을 예상하고 대비해야 합니다. 전략적 비축, 다각화된 공급망, 공정한 채굴 관행, 그리고 기술 및 표준에 대한 다자간 공조가 필수적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녹색-신재생 에너지로의 전환이 자연환경에 대한 착취가 아닌 더 나은 가치 있는 전환을 유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재생/녹색 에너지 시대는 에너지 갈등의 종식이 아니라 오히려 녹색 시대로의 전환과정의 새로운 미진함과 부작용만을 남길 수 있다. 최기련

[EE칼럼] 에너지안보와 기후위기 대응의 양날개 : 재생에너지와 에너지효율화

오늘날 우리는 에너지 공급의 안정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기후위기에 맞서야 하는 이중의 도전에 직면해 있다. 에너지안보는 국가의 경제적, 사회적, 군사적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해 충분하고 신뢰할 수 있는 에너지 공급을 확보하는 일이다. 에너지 공급이 끊기는 순간, 공장은 멎고 불빛은 사라지며 도시 전체가 멈춰 선다. 화석연료 사용으로 인한 이산화탄소 배출이 기후위기를 초래함에 따라, 에너지안보의 위협 범위가 환경적 측면까지 확대되었다. 에너지 시스템이 물리적 공급 중단뿐만 아니라, 기후변화, 국제 에너지시장의 불안정, 정치적 지렛대로 사용 가능성 등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 더욱 취약해 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처럼 에너지 대부분을 수입하는 국가에게는 이러한 변화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기후위기 또한 인류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전 지구적 과제이다. 파리협정은 지구 온도 상승을 1.5℃ 이내로 억제하기 위해 전 세계가 함께 노력할 것을 촉구하며, 모든 국가가 자발적으로 온실가스 감축 목표(NDC)를 설정하고 5년마다 상향을 검토하는 구속력 있는 체제를 마련했다. 우리나라 역시 2050년 탄소중립 로드맵과 2030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통해 이러한 국제적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에너지안보와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복합적인 위기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핵심적인 수단이 바로 재생에너지와 에너지효율화이다. 이 둘은 단순히 개별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통해 강력한 시너지를 창출하며 지속가능한 에너지 시스템 구축에 기여한다. 먼저, 재생에너지는 에너지안보를 강화하고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태양광, 풍력 등 자연에서 지속적으로 공급되는 재생에너지는 화석연료 수입 의존도를 획기적으로 낮춰 국제유가 변동성 및 자원부국들의 정치적 지렛대 행사로부터 발생하는 경제적, 정치적 취약성을 감소시킨다. 또한, 재생에너지는 온실가스 배출이 없어 탄소 저감의 핵심 열쇠로 작용한다. 재생에너지는 간헐성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지만, 에너지저장장치(ESS)나 서로 다른 재생에너지를 결합하는 방식 등을 통해 안정성과 경제성을 확보할 수 있다. 다음으로, 에너지효율화는 '지속가능한 글로벌 에너지 시스템의 첫 번째 연료'로 불릴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동일한 에너지를 투입하여 더 많은 서비스나 생산량을 얻거나, 동일한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더 적은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에너지효율화는 에너지 사용량을 줄여 온실가스를 감축할 뿐만 아니라, 가계와 기업의 에너지 비용을 절감하는 경제적 이점도 제공한다. 이에 따라 세계 각국은 제로에너지 건축물, 가전기기 효율기준 강화, 자동차 연비기준 강화 등 에너지효율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재생에너지와 에너지효율화가 서로를 보완하며 시너지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에너지효율화는 전체 에너지 수요를 줄여 재생에너지 발전의 필요 용량을 감소시키고, 간헐성 문제를 완화하여 전체 시스템의 안정성과 경제성을 높인다. 즉, 에너지효율화는 재생에너지 보급 확대 시 발생하는 제약을 극복하고, 궁극적으로 더 높은 재생에너지 비중 달성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인 촉매제 역할을 한다. 재생에너지 공급을 늘리는 동시에 에너지효율화를 통해 에너지 수요를 줄이는 노력이 함께 이루어져야 지속가능한 에너지 전환이 가능하다. 덴마크는 기후‧에너지‧유틸리티부 산하의 에너지청(DEA)을 중심으로 재생에너지와 에너지효율을 통합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덴마크는 세계 최고의 재생에너지 강국이며, 2030년까지 탄소 배출량을 1990년 대비 70% 감축하고자, 전력 소비 전체(100%)와 총 에너지 소비의 50% 이상을 재생에너지로 공급하는 목표를 수립했다. 또한, 전력, 열, 수송 등 다양한 에너지 부문을 연계하는 '섹터 커플링(Sector Coupling)'과 같은 통합적 접근법을 적극 추진하여 에너지안보와 기후위기 대응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새는 양날개가 있어야 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재생에너지와 에너지효율화는 서로의 한계를 보완하고 강점을 극대화하여, 에너지안보 강화와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하는 데 필수적인 상호보완적 관계를 형성한다. 재생에너지가 친환경적이고 자립적인 에너지원을 공급한다면, 에너지효율화는 그 에너지를 낭비 없이 사용하는 방식을 제공한다. 이들을 통합적으로 활용할 때, 에너지 공급과 소비 전반에서 구조적이고 지속가능한 에너지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 박성우

[EE칼럼] AI는 재생에너지와 함께 가야한다.

인공지능이 전 세계 화두어가 된 가운데 우리나라는 유럽에 이어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공지능기본법을 작년 12월에 제정하였다. 현재 정부는 인공지능기본법의 시행령을 준비하고 있는데 여러 쟁점 사안들에 대한 이해당사자 간의 논쟁이 거세다. 대부분의 쟁점사안은 에너지 분야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없지만 초미의 관심사는 어떻게 해야 인공지능이 에너지 분야에 가져올 부정적인 영향은 줄이고 긍정적인 효과는 극대화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올 해 1월 세계경제포럼(WEF)은 '인공지능의 에너지 역설(AI's Energy Paradox)'이라는 흥미로운 보고서를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인공지능의 급속한 확장은 전력수요를 증가시키는 반면, AI 활용으로 에너지 효율성이 개선되어 에너지 소비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언뜻 들어서는 이해가 안가는 내용이지만 천천히 생각해보면 AI의 이용은 에너지 소비를 증가시키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실제 생활에서 ChapGPT와 같은 프로그램이 원활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데이터센터가 필요하다. AI의 핵심요소인 데이터센터는 규모에 따라 전력소비가 다양한데 최대 규모로 건설될 경우 작은 도시 하나가 사용하는 전력량에 맞먹는 전기를 사용한다. 국제에너지기구(IEA)가 올 해 4월 발표한 보고서, '에너지와 AI'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전 세계에는 약 1.1만개의 데이터센터가 운영 중이고, 작년 한 해 동안 전 세계 전력소비의 약 1.5%를 사용했다. 향후 데이터센터의 전력소비는 2030년까지 2.5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는데 이로 인해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량 역시 2035년이 되면 약 3~5억 톤 수준으로 증가가 예상된다. 반면, AI 활용으로 기대하는 온실가스 절감량은 2035년에는 10~15억톤으로, 데이터센터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결국, 에너지 분야에서의 AI 활용은 얻는 것이 잃는 것보다 많다. 그런데 이러한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재생에너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단기적으로는 증가하는 AI와 데이터센터의 전력소비를 석탄과 천연가스 발전이 상당부분 담당하지만 2030년 이후 추가로 증가하는 AI용 전력공급의 절반 이상은 재생에너지로 충당한다는 전제조건을 바탕으로 한 결과다. 우리나라에는 2023년 기준 153개의 데이터센터가 있는데 이중 59%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국내 데이터센터는 계속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는데 2029년에는 지금보다 약 5배 증가한 732개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따라 제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는 데이터센터의 전력소비 전망을 별도로 추정하기도 했다. 이처럼 데이터센터가 필요로 하는 전력을 무엇으로 어떻게 공급할 것인가는 중요한 이슈다. 앞서 언급했듯이 데이터센터의 전력공급은 재생에너지를 통해 우선적으로 공급하는 것이 AI 활용에 따른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사뭇 다르다. 태양광과 풍력을 이용한 재생에너지 기반 데이터센터 유치를 추진하고 있는 전라남도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운데, 최근 SK가 울산에 초대형 AI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곳의 전력공급원은 원자력발전소 1기 규모에 맞먹는 LNG열병합발전소다. 수도권이 아닌 울산에 데이터센터가 설립된다는 점은 매우 긍정적이다. 하지만 필요로 하는 전력을 화석에너지로 공급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겠지만 결국 2030 NDC와 2050 탄소중립 달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불필요하게 낭비되는 에너지를 줄이고 효율성을 개선하여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것은 세계적인 흐름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을 위한 데이터센터의 전력공급원이 화석에너지를 기반으로 하게 되면, AI를 사용할수록 온실가스 간접배출량이 증가하게 되어 AI 활용 효과가 작아질 수밖에 없다. 향후 AI 산업의 확대에 따라 필요해지는 전력은 재생에너지 혹은 최소한 무탄소 전원으로 공급하는 것이 기후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고 AI의 긍정적 효과를 높이는 방법이다. 이제 인공지능은 피할 수 없는 미래이다. 인공지능의 긍정적인 효과가 부정적인 효과를 압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다. 막연하게 잘될 것이라는 기대보다는 냉철한 판단과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 새정부 공약 중 하나인 'AI중심 산업정책' 역시 충분한 논의와 철저한 준비, 공감대 형성을 통해 좋은 결실을 맺길 기대한다. 조용성

[EE칼럼] 에너지 민주주의 2.0: 소비자가 전기를 선택하는 시대

한때 사회적 화두였던 '에너지 민주주의'는 더 이상 한국전력이 대량 생산한 전기를 소비자가 수동적으로 받아 쓰는 방식에서 벗어나 “누구나 에너지를 생산하고 판매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재생에너지 발전 사업자가 크게 늘었고, 이는 에너지 분야에서도 민주주의 이념이 구현된 중요한 변화로 평가받았다. 이를 '에너지 민주주의 1.0'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이상 뒤에 숨은 현실이 하나둘 드러났다. 한국전력은 소규모 재생에너지 생산자를 지원하기 위해 의무 구매제도(RPS 등)를 운영해 왔다. 이 제도는 재생에너지 산업을 키우고 분산형 전원의 수익을 안정적으로 보장하려는 취지였다. 그러나 재생에너지 사업자들은 전력 도매가격(SMP) 외에 신재생에너지 공급인증서(REC)까지 팔아 이중으로 수익을 취했다. 문제는 이 비용이 고스란히 전기요금 청구서에 반영된다는 점이다. 한국전력이 산하 발전 공기업이 구입한 REC 비용을 전액 정산해 주는데, 그 규모가 최근 연간 3조 원을 넘었다. 이런 비용이 누적되며 한국전력의 부채는 200조 원을 넘었다. 2021년 새로 생긴 '기후환경요금'은 단기간에 킬로와트시(kWh) 당 5.3원에서 9원으로 급등하였다. 결과적으로 대다수 국민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불합리한 구조가 고착된 것이다. 분산형 에너지 생산 자체는 바람직하다. 하지만 지금처럼 공급자 중심의 획일적인 지원 정책은 '시장 왜곡'이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이제는 전환이 필요하다. '에너지 소비자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 모든 국민이 동일 비용을 부담해 재생에너지를 간접 지원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가정과 기업이 원하는 에너지원과 요금제를 직접 선택하고, 그에 따라 비용을 부담하는 '에너지원별 차등 요금제' 도입이 필요하다. 일부 선진국은 이미 이러한 변화를 실천하고 있다. 영국과 독일은 다양한 '녹색 요금제'를 소비자에게 제공하고 있다. 일본도 가정용 전력 소비자에게 다양한 요금제를 제공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지난 2024년 여름, 41명의 소비자가 “우리 집 콘센트에도 녹색 전기를 선택할 기본권을 달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한 일은 전기 요금제 선택을 원하는 소비자들이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에너지 민주주의 1.0'이 “누구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는 생산 측면의 민주화였다면, '에너지 민주주의 2.0'은 “누구나 원하는 전기를 소비할 수 있다"는 소비 측면의 민주화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 몇 가지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첫째, 전력 소비 부문 시장 개방과 경쟁 도입이 필요하다. 현재처럼 한국전력이 전기를 독점 공급하는 구조에서는 소비자의 선택권이 봉쇄될 수밖에 없다. 다양한 전기 판매자가 서로 경쟁하며 각기 다른 요금제와 에너지 믹스를 제시할 수 있는 시장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전기사업법 개정과 소매 요금 자유화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어야 한다. 둘째, 에너지원별 차등 요금제 설계가 필요하다. 전기 판매자는 원전, 석탄, 가스, 재생에너지 등 에너지원별 전기 생산 단가와 전력 시설 추가에 따른 전력망 안정화 비용 등을 종합적으로 반영하여 차등 요금제를 설계해야 한다. 이후 가정과 기업이 각자의 이념과 경제적 상황 등에 맞춰 선호하는 전기 요금제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요금제가 효과적으로 작동하려면, 전력 공급원 추적 시스템 구축과 함께 에너지원별 전기 생산에 따른 제반 비용 구조를 투명하게 공개할 필요가 있다. 셋째, 취약 계층 보호를 위한 장치도 병행되어야 한다. 소비자의 선택권 확대가 오히려 에너지 복지의 후퇴나 새로운 불평등을 초래해서는 안 된다. 취약 계층에 일정 수준의 기본 전력은 보조하면서, 선택권의 폭을 점진적으로 확대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에너지 민주주의 2.0은 단순히 요금제를 다양화하는 수준을 넘어 전력 산업의 구조적 변화를 촉진할 것이다. 소비자가 원하는 전기를 직접 선택하는 진정한 에너지 주권의 시대. 이 흐름에 올라타지 못하면, 우리는 또 다른 왜곡과 불균형을 감당해야 할지 모른다. 지금이 소비자 중심의 에너지 체계로 전환할 때다. 문주현

[EE칼럼] 학습하는 기계, 변화하는 교실: AI 교육의 빛과 그림자

김한성 굿프롬프트 대표 2022년 11월말에 ChatGPT가 공개된 순간부터 전 세계 교육 현장은 큰 변화를 겪었다. 불과 5일 만에 100만 명이 가입했고, 2개월 만에 월 활성 사용자 1억 명을 돌파했다. 그런데 이 숫자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교육 현장의 반응이었다. ChatGPT는 하루아침에 등장했지만 교육시스템은 수십 년간 축적된 관성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뉴욕시 공립학교가 ChatGPT 사용을 전면 금지했다가 6개월 후 허용으로 전환했다.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은 모든 과제에 AI 사용 여부 명시를 의무화하였고 이후 부분 허용에 이어 과제별 차별화로 전환했다. 일본은 2023년 7월 '학교에서의 생성AI 이용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발표한 후 여러 차례수정을 거듭했다. 각 국 교육당국이 금지에서 조건부 허용까지 정책을 번복하면서 일관성을 잃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ChatGPT 공개 직후 한국 교육당국의 첫 반응은 “일단 지켜보자"는 소극적 관망이었다(1단계). 2023년 3월 교육부는 'ChatGPT 등 AI활용 대응 방안'을 발표했지만 내용 자체가 모순적이었다(2단계). “AI 활용을 적극 권장한다"하고 하면서 동시에 “학습자 주도성 훼손 우려"를 표명했고, “디지털 역량 강화 필수"라면서도 “무분별한 사용 경계"를 당부했다. 그리고 6개월 만에 교육부가 180도 다른 정책을 발표했다. 같은 해 9월에 '2027 디지털 기반 교육혁신 방안'과 함께 AI 디지털 교과서(AIDT, AI Digital Textbook) 도입을 공식화한 것이다(3단계). 하지만 ChatGPT 등장 이후 우리 교육 현장에서 벌어진 변화는 혁신이라기보다는 혼란에 가까웠다. 학생들의 과제 작성 패턴에 큰 변화가 일어났고, 교육 현장에서는 상당수 학생들이 AI를 활용하여 과제를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기존의 과제 생태계는 붕괴되었고, 교사들의 평가 방식은 무력화되었으며, 기술 격차는 새로운 교육 불평등을 낳았다. 가장 큰 문제는 교육계가 “AI를 교육에 어떻게 도입할 것인가"라는 기술적 질문에만 몰두했다는 점이다. 정작 중요한 “AI시대에 교육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교육의 본질은 지식 전달이 아니라 인간 성장이다. AI가 이 본질을 강화할 것인지, 훼손할 것인지가 지금 우리가 마주한 핵심 딜레마다. 정부가 내놓은 대규모 AIDT 프로젝트는 준비되지 않은 채 새로운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현장에서는 AI 교육에 대한 체계적 연수를 받은 교사가 여전히 부족한 상황이다. 또한 AIDT의 “맞춤형 학습"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단순한 난이도 조절에 그치는 경우가 상당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런 혼란에도 AI교육 분야의 연구성과는 명확한 진단을 내리고 있다. MIT를 비롯한 주요 AI 연구기관들은 AI 교육 시스템이 진정으로 성공하기 위한 3가지 필수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학습자를 정확히 이해하는 능력이다. 현재 AIDT 시스템은 단순 정답률 분석에만 의존한다. 학습자의 학습 스타일, 인지 패턴, 동기 구조까지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사고 과정과 실수 패턴을 다층적으로 모델링해야 의미 있는 적응이 가능하다. 둘째, 즉각적인 반응 능력이다. 현재 교육용 AI는 사후 분석에 머물러 학습 과정의 인지 부하나 이해 어려움을 실시간 감지하지 못한다. 해외 연구는 “학습의 마이크로 모멘트를 놓치면 전체 학습 효과가 급감한다"고 경고한다. 셋째, 교사와의 협업 방식이다. AI가 교사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성을 증폭시켜야 한다. 가장 효과적인 시스템은 “AI가 데이터를 분석하고, 인간이 의미를 부여하며, 둘이 함께 교육적 판단을 내리는" 하이브리드 모델이다. 이 세 조건을 한국의 AIDT 현실과 비교하면, 현장 혼란의 원인이 명확해진다. 우리는 기술 도입에만 집중하고 핵심 조건들을 간과했다. ChatGPT 등장 후 2년 반 기간의 시행착오와 AI 연구계의 통찰을 종합하면, 교육 현장 혼란을 해결할 명확한 방향이 보인다. 첫쨰, AI 교육 안전성 검증 시스템 우선 구축; 전국 일괄 확산을 즉시 중단하고, 권역별 10개 파일럿 스쿨에서 6개월간 집중 실험을 진행해야 한다. ChatGPT 경험 교사들과 AI 연구진이 공동 참여하여 진정한 AI-인간 협력 교육모델을 개발해야 한다. 둘째, 과학적 기준에 부합되는 적응형 학습시스템 구축: 앞서 제시한 세 가지 핵심 조건을 만족하는 시스템으로 전면 재설계해야 한다. 학습자 인지패턴의 다층적 분석, 실시간 모니터링, 교사-AI 협력 인터페이스를 핵심으로 하는 새로운 아키텍처가 필요하다. 셋쨰, AI 시대 교육학 기반 교사역량 혁신: 기기 조작 중심 연수를 폐기하고, 'ChatGPT 시대 교육 철학' 중심의 체계적 연수를 설계해야 한다. “AI를 어떻게 쓸 것인가"가 아니라 “AI 시대에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넷쨰 디지털 격차 해소를 위한 AI 교육 평등 보장: 농어촌과 저소득층을 위한 'AI 교육 바우처' 제도와 지역별 'AI 학습 멘토링 센터' 설치가 시급하다. AI 교육이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도구가 아니라 해소하는 도구가 되도록 적극적 개입이 필요하다. 다섯쨰, 학습자 AI 리터러시와 데이터 주권 확립: 초등학교부터 '프롬프트 엔지니어링'(AI에게 효과적으로 질문하는 기법)과 'AI 비판적 사고'를 교육과정에 포함시켜야 한다. 학생들이 AI 답변을 검증하고 평가하는 능력을 기르도록 해야 한다. 동시에 '학습자 데이터 권리장전' 제정으로 학습 데이터의 투명한 관리를 보장해야 한다. AI는 교육을 구원할 수도 있고, 파괴할 수도 있다. 현재 방향으로는 후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현 AI 교육의 시행착오를 솔직히 인정하고 근본적 재설계에 나선다면, 한국 AI 교육은 여전히 세계 최고의 혁신 모델이 될 수 있다. 핵심은 “기술에 맞춰 교육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본질에 맞춰 기술을 설계하는 것"이다. 파일럿 프로그램의 조속한 시작과 체계적 재설계를 통해 새로운 AI 교육 표준을 하루빨리 확립해야 한다. 김한성

[EE칼럼] 기후에너지부로의 헤쳐 모여...꼭 해야 하나?

유종민 홍익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미국 포틀랜드주립대학 겸임교수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명분 아래 요즘 '기후에너지부' 신설 논의가 한창이다. 산업통상자원부의 에너지 업무와 환경부의 기후대응 업무를 묶어서 이른바 기후 컨트롤타워를 출범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부처를 통합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까? 대선 공약으로는 유용했을 지 모르지만, 결국 장관 자리 하나만 늘리고 부작용만 남기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이 주장이 처음 나온 것도 아니다. 이미 2017년 문재인 대통령 역시 대선 공약으로 같은 구상을 내놨었고, 집권 후 당시 당국자들도 괜히 이 공약을 폐기한 것이 아니다. 그때 실현되지 못했던 일에는 분명 다 이유가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나는가 보다. 환경부 내의 기후 부서 외에도 생태계 보전, 오염 규제, 자원 관리 등 여러 부서가 존재하는데, 이들 업무가 서로 분리해야 할 만큼 이질적이지 않다. 기후문제 하나만 보더라도 단순히 대기 문제로 국한되는 게 아니라 자원 관리나 생태계 보전 업무와도 이미 촘촘히 얽혀 있다. 산업부 역시 마찬가지다. 에너지 정책은 산업, 기술, 안보 등 여러 분야가 맞물려 돌아가는 종합적 사안이다. 그동안 산업부 아래에서 에너지 정책을 펼쳐왔기에 전력 수급부터 산업 경쟁력, 기술 개발, 지역 경제까지 입체적이고 균형 있게 고려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처 간 조합은 시너지를 내는 경우도 있지만 상극인 조합도 있는데, 환경과 산업은 오히려 서로의 상극 성향을 살리는 편이 더 자연스럽고 바람직하다. 사실 부처의 통합은 시너지보다는 내부의 침묵과 한쪽 업무의 사장(死藏)이라는 함정을 품고 있다. 어차피 태생적으로 긴장 관계를 형성하는 분야이니, 숨겨진 부서 내 조율보다는 드러난 충돌과 공개적인 견제가 더 건강하다는 이야기다. 억지로 이들을 한 부처로 합쳐 놓으면 필연적으로 충돌이 발생하고, 결국 한쪽이 완전히 납작 엎드리는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예컨데, 기존 전력 시장의 기득권 구조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기후환경정책이 종속적으로 결정되거나, 반대로 재생에너지 확대나 감축 목표에만 매몰되어 에너지 안보와 산업 경쟁력을 무시하는 경우 모두 문제가 심각하다. 기후든 에너지든 각각의 전문성과 고유의 맥락이 있는 것인데, 모든 것을 한쪽의 논리와 틀로 억지로 끼워 맞추는 접근법은 명백히 균형감각을 상실한 일이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강력한 컨트롤타워 아래서 한 목소리로 밀어붙여야 성과를 낼 수 있다." 그러나 행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대체 무슨 성과, 어떤 성과를 이야기하는 것인가? 이견과 비판적 토론이 살아있어야 정책의 완성도가 높아지는 법이다. 산업부와 환경부처럼 각자 역할이 명확히 다른 부처들이 분리되어 있어야 자연스러운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지고, 정책이 제대로 조율될 수 있다. 환경부가 너무 규제 일변도로 치달으면 산업부가 제동을 걸고, 산업부가 환경을 소홀히 하면 환경부가 견제하는 구조가 훨씬 바람직하다. 그렇다면 부처 간 충돌을 그대로 방치하자는 말인가? 정치는 바로 이럴 때 존재의 이유를 증명한다. 환경부와 산업부가 각자의 본성대로 자유롭게 목소리를 내면서 특정 의제의 허와 실을 낱낱이 드러내게 하고, 이를 조율로 이끌어주는 것이 정치의 역할 아닌가. 현재도 의회나 국무조정 기능을 통해 얼마든지 범부처적 조율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관을 하나 더 만들고 간판을 새로 거는 것은 행정 효율성과는 무관한 보여주기 식 편의에 불과하다. 장관끼리 다투는 모습이 보기 싫다고 정치적 조율 자체를 포기한다면 대통령이나 국회의 존재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공무원 입장에서도 현행 체제가 훨씬 낫다. 각 부처 태생의 존재 이유대로 계속 떠들고, 어떻게 조율하고 채택할지는 정치가 책임질 몫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인사발령도 부처 내에서 이루어지니 후환 걱정도 없다. 오히려 용감히 싸운 공무원이 칭찬을 받을 일이다. 그런데 굳이 기후에너지부로 통합하여 모든 권한을 한데 몰아주면, 조직 내부에서도 자기 검열과 침묵이 확산되어 졸속 결정이 난무할 가능성이 커진다. 오늘은 기후 문제를 강하게 얘기하다가도 내일 인사 발령으로 전력시장 석탄과에 근무하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누가 감히 소신 발언을 하겠는가? 아무리 공무원이 영혼 없는 존재라지만, 이렇게까지 수시로 신념 갈아 끼우기를 강요한다면 결국 향후 인사상 불이익을 의식해 자기 목소리는 내지 않고 위만 바라보며 눈치 보는 조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건강한 내부 토론과 상호 견제는 사라지고, 내부 조율이라는 미명 아래 결국 윗선의 입맛에 맞는 '예스맨'들만 득세할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나 같은 외부 전문가조차 기후에너지부가 설정한 '대세'에서 벗어난 주장을 감히 펼칠 수 있겠는가? 모두가 알아서 입을 다물게 될 것이다. 결국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기후에너지부'라는 간판이 정말 그렇게 절실한가? 없어서 못 하고 있는 일이 대체 무엇인가? 최근엔 신설 부서를 전라남도에 위치시킨다는 소문으로 시끄러우니, 도대체 '뭣이 중헌디'라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새 부처 신설은 필연적으로 조직적 혼란과 비효율을 초래한다. 공무원들은 새 자리를 찾느라 이리저리 분주해지고, 몇 년은 조직 개편에 적응하느라 허송세월을 보낼 게 뻔하다. 우리는 이미 정부조직 개편 때마다 겪을 만큼 충분히 이런 진통을 겪어왔다. 진짜 필요한 것은 부처들의 의지와 협력,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정치권의 책임이지, 부처 간판 교체쇼는 이제 지겹고 식상하기만 하다. 유종민

[EE칼럼] 미래 산업과 민생을 위한 국가전략, 원자력의 재정의

임은정 공주대학교 국제학부 교수 6월 4일, 이재명 정부가 출범하며 기후에너지부 신설을 예고했다. 이 조치는 한국 에너지 정책의 구조와 우선순위를 새롭게 설정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읽힌다. 에너지 정책과 기후변화 대응은 불가분의 관계이기 때문에, 각 부처에 흩어진 권한을 통합하여 보다 일관되고 효과적인 정책을 수립할 수 있다면, 에너지 안보와 에너지 전환이라는 두 목표에 더욱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대만큼이나 우려도 공존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후보 시절 TV 토론에서 원자력에 대한 회의적 입장을 언급한 바 있고, 이는 체코 원전 수주 계약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낳았다. 민주당 정부의 재집권이 문재인 정부 시절의 이른바 '탈원전' 기조를 부활시키는 것 아니냐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2025년의 국제 에너지 환경과 국내 산업 생태계는 과거와 크게 다르다. 기후위기 대응과 에너지 안보, 그리고 AI 산업을 포함한 미래 첨단산업의 전력 수요가 맞물리는 오늘, 한국은 원자력이라는 무탄소 에너지원을 실용적 관점에서 재평가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첫째, 에너지 안보라는 고전적 명제가 다시 중심 의제로 돌아왔다. 우크라이나 전쟁, 홍해 해상 운송의 불안정, 중동의 정세 불안은 에너지 수입국으로서 한국의 취약한 구조를 다시금 드러냈다. 천연가스 가격의 불안정과 선박 운송 리스크는 국내 경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자력은 탄소 배출을 거의 하지 않으면서도 연중무휴로 안정적인 전력을 생산할 수 있어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면서도 에너지 전환에 기여할 수 있는 가장 실용적인 대안 중 하나로 여겨진다. 둘째, 이재명 대통령이 강조하는 '민생'과 '공공성'이라는 국정 철학은 원자력과 충돌하기보다는 오히려 상보적일 수 있다. 전기요금 인상이 가계와 중소기업, 자영업자 등에게 부담을 주고 있는 가운데, 재생에너지 중심의 전력 수급만으로는는 변동성 높은 수요에 안정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 원자력은 '기후위기 대응'과 '전기요금 안정'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중요한 에너지 자산이다. 셋째, 이재명 정부가 한국의 글로벌 AI 및 반도체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자 한다면, 압도적인 전력 공급 역량을 갖추는 것이 필수다. 미국의 엔비디아,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등은 AI 데이터센터 운영을 위해 이미 원자력을 공공연히 지지하고 장기 전력 수급 계획을 확대하고 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대전, 판교, 용인 등지의 데이터센터 수요는 급증하고 있으며, 고성능 연산이 필요한 AI 인프라에는 전력망의 예측 가능성과 안정성이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태양광과 풍력은 간헐성이 크고, 저장 기술은 여전히 경제성과 효율성 측면에서 제약이 크다. 특히 국토가 좁은 한국에서 대규모 재생에너지 개발에는 물리적 한계도 존재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소형모듈원자로(SMR)와 같은 차세대 원전 기술은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SMR은 설치 면적이 작고 안전성이 높아 산업단지나 도심 인근에도 배치 가능하며, 수소 생산 등과 연계되어 새로운 에너지 생태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 전력망의 부담을 분산하고, 분산형 에너지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기후에너지부가 공식 출범하게 된다면, 이 부처는 단순한 행정 통합기구를 넘어, 국가 에너지 전략의 '컨트롤타워'로 기능해야 한다. 원자력에 대한 재평가는 단순히 증설 또는 감축의 문제가 아니라, 그 역할을 재정의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대형 발전소 중심의 기존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SMR, 수소 연계형 원전, 산업단지 특화형 원전 등으로의 기술적 다변화와 공간적 분산이 필요하다. 더불어, 한국은 이미 원자력 수출국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체코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한국형 원자로가 유럽은 물론 중동과 아프리카에서도 건설될 가능성은 지금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는 한국의 산업적 이익을 넘어 전략적 신뢰 자산으로 기능하게 될 것이다. 이재명 정부는 과거의 정치적 유산과 이념적 입장을 넘어서, 2025년의 현실과 미래의 가능성에 주목하기를 바란다. 원자력은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미래 산업의 기반이며, 기후와 안보, 산업이 교차하는 전략 자산이다. 에너지 안보, 산업 경쟁력, 기후위기 대응이라는 세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해서는 실용과 균형, 그리고 책임 있는 전환을 바탕으로 한 에너지 전략이 필요하다. 그것이야말로 민생을 지키고 미래를 준비하는 길일 것이다. 임은정

[EE칼럼] 새 정부의 실용주의적 원전 정책을 기대한다

체코 원전 수출이 우여곡절 끝에 체결되었다. 이번 계약은 우리의 경쟁 상대였던 프랑스 전력공사(EDF)가 제기한 계약금지 가처분 신청을 지방법원이 받아들이면서 한때 무산될 위기에 빠졌으나, 체코 최고법원이 가처분 결정을 취소함으로써 최종 성사되었다. 이번 계약 과정에서 EDF가 보여준 모습은, 유럽을 자기 앞 마당쯤으로 여기며 역외 업체의 원전 시장 진입을 결사적으로 막으려는 억지 그 자체였다. EDF가 문제 삼는 건 크게 두 가지로, 입찰 과정과 건설단가이다. 한수원은 지난 입찰에서 경쟁사였던 EDF와 웨스팅하우스가 도저히 따라 올 수 없는 건설단가를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자 EDF는 한수원의 가격 경쟁력 배후에는 한국 정부의 보조금 있다는 소위 역외 보조금 의혹을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이번 체코 원전 계약 연기는 역설적으로 한국 원전의 경쟁력을 대내외에 입증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한수원의 원전 건설 비용은 킬로와트 당 3,571달러로, 7,931달러인 EDF 건설단가보다 절반 이상 저렴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원전 건설단가는 다른 초장기 대형 공사와 마찬가지로 공사 기간에 비례한다. 원전 건설은 수조 원을 훌쩍 뛰어넘는 거액의 공사비가 들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보다 길어지면 건설 중 이자가 크게 늘고 납품 문제도 복잡해져 이런저런 추가 비용이 급증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원전 건설 공기는 2024년 기준 평균 56개월로, 지난 20년간의 전 세계 평균 공사 기간 190개월의 1/3에 불과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EDF는 수 차례 기한을 못 맞춰 건설 예산이 늘어난 전례가 있다. 2007년 짓기 시작한 프라망빌 원전 3호기도 예정보다 12년이나 늦어 지난해에야 가동이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예산은 4배 이상 늘어났다. 그러면 한국 원전이 압도적 경쟁력을 갖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한국의 원전 기술이 미국이나 프랑스보다 크게 앞선다고 볼 수는 없다.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미국이나 프랑스와 달리 매년 표준화된 한국형 원전을 중단 없이 꾸준히 건설해 왔기 때문이다. 동일한 노형을 반복적으로 건설하다보니, 표준화된 설계를 바탕으로 설계비용을 줄일 수 있고, 공기 관리 노하우가 축적되면서 적기 준공이 가능해진 것이다. 우리나라는 1978년 고리1호기의 상업 운전을 시작한 이래 현재까지 총 30기의 원전을 건설하거나 건설 중이다. 특히, 최신 한국형 원전인 APR1400도 국내에 4기, UAE에 4기가 건설 완료되었고, 새울 3,4호기는 완공이 눈앞에 있으며, 신한울 3,4호기는 최근에 착공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프랑스는 2007년 12월에 착공되어 무려 17년 만에 완공되어 작년 12월에 전력망에 연결된 플라망빌 3호기가 최근 건설된 유일한 신규 원전이다. 미국도 1979년 스리마일섬 원전 사고 이후 건설된 신규 원전은 2024년에 상업 운전을 시작한 보글 3, 4호기가 유일하다. 세계적으로 바야흐로 원전 르네상스가 다가오고 있다. 실제로 전 세계에 걸쳐 잠정 건설 계획 중인 신규 원전은 344기에 이르고, 더욱이 15년 내 건설 계획 중에 있는 원전만 해도 88기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큰 시장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원전은 핵무기와 관련되어 있어 국제 정치적 역학 관계에 민감하다. 최근처럼 진영 대립으로 치닫고 국제 질서에서, 원전 건설을 상대방 진영에 맡기기는 매우 부담스럽게 된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의 원전을 러시아나 중국에게 맡기기 어렵다는 말이다. 결국 서방세계에서 발주되는 신규 원전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 프랑스, 일본 정도가 차지할 공산이 크다. 현재와 같은 경쟁력 분포를 감안하면 우리가 독차지할 가능성도 높다. 우리나라의 원전 경쟁력 유지가 관건이다. 신규 원전 건설이 지속적으로 필요한 이유다.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재생에너지 확대는 명시적으로 언급하였지만, 원전에 대한 다소 애매모호한 입장을 견지했다. 원전은 수출 목적 외에도 대통령 1호 경제공약인 AI 산업 육성과 대선 토론의 독립 주제였던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서도 불가피한 전원이라는 점을 반영한 실용주의적 원전 정책이 하루속히 나와야 할 것이다. 이제는 에너지전환이라는 명분으로 기존 에너지믹스를 급격히 무너뜨리려는 에너지 반달리즘을 끝내야 한다. 국내 원전 생태계를 위기에 빠뜨린 탈원전 정책의 귀환은 기우가 되길 바란다. 그럼에도 대통령 주변을 감싸고 있는 탈원전 인사들이 어른거려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박주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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