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E칼럼] 사라진 태풍 – 기후변화가 보낸 위장된 평화

올여름 역시 폭염과 집중호우로 혹독한 시간을 보냈다. 가을의 시작인 9월의 하순으로 접어든 지금까지도 낮 동안의 무더위는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정적이 하나 있다. 한반도를 찾는 대표적인 여름철 불청객인 '태풍'의 행보가 최근 3년간 극도로 조용하다는 점이다. 2023년 새만금 세계잼버리 기간 한반도를 관통했던 제6호 태풍 '카눈' 이후, 우리나라에 상륙하여 내륙에 직접적인 타격을 준 태풍은 없었다. 평년 한 해 25.1개의 태풍이 발생하고, 그중 3.4개가 우리나라에 영향을 준다. 2024년에는 26개 가운데 2개가 먼바다에서만 약하게 영향을 주었고, 2025년에는 영향 태풍이 하나도 없었다. 올해도 제6호 태풍 '장미'가 남해동부 먼바다에 태풍특보를 발효시켰을 뿐 육상에는 별다른 피해를 주지 않았다. 그렇다면 태풍 자체가 줄어든 것일까. 정반대다. 올해 9월 18일까지 발생한 태풍은 25개로 이미 평년의 연간 발생 수와 맞먹는다. 특히 8월에는 평년 5.6개의 두 배에 가까운 10개가 발생했다. 태풍 자체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한반도로 향하는 길이 막힌 것이다. 태풍은 따뜻한 바다에서 에너지를 얻지만, 진로는 철저히 북태평양 고기압을 포함한 주변 기압계에 의해 결정된다. 올여름 한반도 주변에서는 북태평양고기압이 강하게 발달하고 그 위로 티베트고기압까지 겹치면서 거대한 고기압 장벽, 이중 고기압이 형성됐다. 태풍은 이 견고한 장벽을 뚫지 못하고 남쪽 가장자리를 따라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서진하거나, 동쪽 가장자리를 돌아 일본 동쪽 해상으로 빠져나갔다. 7월 초부터 8월 초까지의 경로가 이를 잘 보여준다. 제9호, 제10호 그리고 제12호, 제13호 태풍이 잇달아 서진 또는 북서진해 중국에 상륙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제11호만 필리핀 동쪽 먼바다에서 발생한 지 하루 만에 소멸됐다. 한반도가 안전해서 태풍이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기압계의 거대한 흐름이 위험을 중국 쪽으로 밀어낸 셈이다. 여기서 원인과 배경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따뜻해진 바다는 태풍이 더 많은 수증기를 머금고 강해질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그러나 올해 태풍이 한반도를 비켜간 직접적인 원인은 북태평양고기압의 위치와 확장 양상이었다. 기후변화가 태풍의 발생 위치와 강도, 이동 경로를 복잡하게 바꾸고 있지만, 몇 해의 경로만으로 “기후변화 때문에 태풍이 오지 않는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북태평양고기압이 언제, 왜, 어느 방향으로 확장했는지를 먼저 정밀하게 분석해야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태풍이 오지 않는 현상을 마냥 기후변화가 준 따뜻한 혜택으로 반길 수 없다는 점이다. 태풍은 파괴적인 강풍과 폭우를 동반하는 복합재난인 동시에, 한반도 수자원 확보 관점에서는 가뭄을 해소하는 핵심 용수 공급원이다. 태풍 한 개가 몰고 오는 강수량은 지형적 조건이나 정체전선과의 결합 여부에 따라 다르지만, 100mm 이상, 조건이 맞으면 수백mm의 비를 공급한다. 최근 6개월간 전국 누적 강수량은 평년(981.8mm) 대비 84.8% 수준에 머물러 있다. 약 150mm에 달하는 수자원이 부족한 상태이며, 이는 대형 태풍 한 차례가 가져다줄 수 있는 수자원 양과 맞먹는다. 올여름의 용수 부족을 오롯이 태풍의 부재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으나, 태풍 실종이 장기화될 경우 가을 가뭄, 저수율 저하, 농업 및 공업용수 부족, 산불 위험 증가라는 또 다른 형태의 2차 재난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피하기 어렵다. 실제로 9월 초 기준 전국 34개 시·군에서 이미 기상가뭄이 관측되고 있다. 기후위기 시대의 재난 대응 프레임은 단선적인 '태풍의 상륙 여부'를 넘어서야 한다. 복합재난인 태풍이 접근할 때는 극한의 강풍과 폭우에 대한 방제 인프라를 철저히 가동하고, 태풍이 오지 않을 때는 가뭄과 수자원 고갈이라는 '건조한 재난'을 선제적으로 관리하는 양면적 대응 체계가 시급하다. 최근 몇 년간의 태풍 공백은 기후변화가 우리에게 준 온화한 선물이 아니다. 언제든 폭우와 가뭄이라는 양극단의 기후 위험이 교대할 수 있다는 엄중한 경고다. 단 3년간의 통계에 착시되어 “한반도가 태풍 안전지대로 접어들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방심이다. 오지 않은 태풍에 안도할 것이 아니라, 그 부재가 불러올 숨은 위험까지 대비하는 통합적 안목이야말로 기후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 지혜로운 방재의 시작이다.

[EE칼럼] 한전 사장의 역할과 자질

2023년 9월 20일, 정치인 출신 김동철 전 의원은 제22대 한전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비장한 취임사를 발표했다. 직전 해인 2022년 한전은 역대 최대인 32조7000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고 2023년에도 적자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런 경영상황에서 '전력 비전문가'였던 그는 글로벌 무한경쟁과 에너지 대전환 시대에 맞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겠다며 KT와 포스코, 이탈리아 전력회사 ENEL을 소개했다. 독점 공기업에서 출발해 민영화와 시장개방, 사업구조 개편을 거치며 글로벌 기업으로 성공한 회사들이다. 약 100일 뒤인 2024년 1월 2일, 김 사장은 신년사에서 또 이 세 회사를 한전의 롤 모델로 들었다. “ENEL처럼 완전히 달라지겠다, 공기업 틀을 벗어나겠다"는 발언이 민영화로 해석될 수 있다는 보도가 나오자 산업통상자원부는 즉각 “한전 민영화는 전혀 검토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김 사장 역시 사업 다각화와 해외시장 진출 사례를 소개했을 뿐이라고 물러섰다. ENEL은 과거 이탈리아의 국영 전력회사로서 시장을 독점했지만, 1999년 전력시장 개방 이후 사업구조를 대대적으로 개편하고 세계적인 전력기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한전의 변화를 말하면서 정작 변화의 핵심인 전력시장 구조와 한전의 역할에 대해서는 입을 닫았다. 정부와 노동조합을 설득하지 못하면서 개혁 동력도 약해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전기요금이다. 코로나19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제 에너지가격이 급등하면서 한전 손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한전은 2021년 1월 모든 용도별 전기요금을 내린 이후 같은 해 10월부터 2024년까지 모두 여덟 차례 요금을 올렸다. 김 사장 취임 이후 두 번의 인상은 산업용에만 집중됐다. 2023년 11월과 2024년 10월이다. 한전 판매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산업용 전기요금이 계속 올라가면서 일부 대형 우량 수요자들은 한전을 떠나 전력거래소에서 직접 전기를 사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앞으로도 이러한 '고객 이탈'은 점점 더 늘어날 수 밖에 없다. 한전에게 유리한 고객은 떠나고 나머지 고객의 부담은 더 커지는 구조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비수도권 산업용 전기요금 인하도 마찬가지다. 비수도권 요금을 낮추면서 그만큼 수도권 요금을 올리지 못하면 한전의 요금수입은 크게 줄어든다. 산업정책과 지역정책의 비용을 한전 전기요금에 얹는 방식이다. 전기요금의 정치요금화가 더 깊어지고 있다. 문제는 전기요금만이 아니다. 재생에너지와 디지털 메가트렌드로 세계 전력산업은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 그러나 우리 전력시장은 한 발짝도 제대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 중심에 한전이 있다. 재생에너지는 지역 편재성과 간헐성, 변동성을 갖는다. 이를 늘리려면 발전량이 넘칠 때는 싸게 쓰고 부족할 때는 비싸게 쓰는 시간대별 가격신호가 필요하다. 저장장치와 수요반응, 분산자원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유연한 시장도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정부가 가격을 결정하고 한전이 판매를 독점하는 틀에 묶여 있다. AI, IoT와 빅데이터를 포함한 디지털 기술은 전력산업의 큰 틀을 바꿀 수 있다. 수요와 공급을 실시간 예측하고 수많은 분산자원을 연결하며 소비자가 가격에 반응하도록 만들 수 있다. 재생에너지의 약점을 보완하는 핵심 수단이다. 그러나 시장이 경직돼 있으면 아무리 좋은 기술도 수용되기 어렵다. 김동철 사장은 한전이나 전력업계에서 일한 경험이 없다. 전기에 관한 한 순백(純白)한 상태에서 사장에 취임했다. 그래서 오히려 기존 전력산업의 고정관념을 깰 수도 있었다. 실제로 그는 두 번이나 ENEL을 언급했다. 그렇다면 '민영화'라는 프레임이 씌워졌을 때 물러설 것이 아니라 왜 ENEL이 변했는지, 세계 전력산업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정면으로 설명했어야 했다. 전기요금도 마찬가지다. 산업용만 반복해서 올릴 것이 아니라 주택용, 일반용, 농사용을 포함해 용도별 원가와 원가회수율을 공개하고 국민을 설득했어야 했다. 정치인 출신 한전 사장이 오히려 전기요금의 정치화를 끊어냈어야 했으나 결과는 반대였다. 이렇게 된 데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김 사장이 전력산업 비전문가였고, 이슈가 발생했을 때 한전과 전력산업의 발전이 아니라 정치적 이해관계자의 반응에 민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차기 한전 사장 공모가 진행되고 있는 지금, 새로운 사장에게 필요한 것은 정무 감각이나 정치권과의 관계가 아니다. 재생에너지와 디지털 전환, 전력시장 개혁을 이해하고 이해관계자를 설득할 수 있는 사람, 한전을 ENEL처럼 세계적인 회사로 키우면서도 대한민국 전력산업의 장기적 목표를 설계하고 추진할 사람이 필요하다. 이번에는 정책과 실무에 정통한 전력 전문가가 한전 사장이 되어야 한다. bienns@ekn.kr

[EE칼럼] 기후관련 법안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낮에는 여전히 덥기는 하지만 그래도 맑은 가을하늘이 유난히도 반갑다. 천고마비(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 우리에는 가을을 대표하는 말 중의 하나지만 옛날 중국인들에게는 풍요로운 계절에 생산한 농산물이 북방 초원에 사는 흉노적들에게 약탈 당할수 있는 계절이라 항상 근심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기업들에게는 천고법비(하늘은 높고, 법은 살찐다)라고 할 수 있는 계절이다. 우선,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법」 개정안과 「기후위기 적응 및 회복력 강화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탄소중립 기본법 개정안은 2035년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NDC)를 2018년 순 배출량 대비 53~61% 감축 범위로 명시하고, 2040년은 69% 이상 ~ 80% 수준, 2045년은 84% 이상 ~ 90% 수준에서 단계적으로 중장기 감축목표를 설정하도록 한 것이 핵심이다. 기후적응법에는 기후영향·취약성·위험정보를 통합 관리하고 공간정보로 제공하는 법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향후 국가·지방자치단체·공공기관의 기후적응 대책과 사업이 해당 정보체계를 중심으로 연계될 것으로 예상된다. 두번째는 에너지 5법이라고 할수 있는 전기사업법·분산 에너지법·재생에너지법·전원개발촉진법·국가기간 전력망법 등의 개정안이 확정되었다. 국가기간전력망법에서는 주변의 1MW 이하 공익적 주민참여형 재생에너지 사업에 우선적으로 계통에 접속하는 권한을 주고 재생에너지법에서는 RPS(의무할당제)를 발전원별 정부 경쟁입찰과 장기 고정가격 전력구매계약 중심의 계약시장으로 전환한다. 2027년 1월 1일부터 신규 설비에는 REC를 발급하지 않되 기존 사업자에게는 REC를 계속 발급하지만 REC 현물시장은 2029년 12월 31일까지 운영한 다. 세 번째는 철강산업 경쟁력 강화 탄소중립 전환을 위한 특별 법 (소위 K-스틸법)이 마련되었다. 이법은 저탄소 철강 인증제와 특구 지정, 재생 철자원 공급망 정비 등을 포함 하고 있으며, 가장 특이한 것은 제38조항의 '공동행위 특례'다. 이 조항은 과잉 공급 상황에서 기업 간 설비 가동률 조정·감산 협의 등을 공정거래법상 담합에서 제외하는 근거를 담고 있다. 다만 수소환원제철이나 전기로 확대에 필요한 투자비를 직접 보전하는 법안은 아니다. 아마도 향후에 탄소차액 계약제를 통하여 보전할지도 모른다. 네번째는 제4차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다. 2026년부터 2030년까지 적용되는 '제4차 배출권거래제 할당 계획'에서는 배출허용 총량이 17% 감소되는데 이는 총 25억 3,730만 톤 정도다. 발전 부문의 유상할당 비율은 2030년까지 단계적으로 50%까지 확대된다. 연관해서 '한국형 탄소중립 인증제도'를 추진하여 대기업이 중소·중견 협력사의 에너지 효율 개선과 탈탄소 전환에 투자하면, 그 감축 실적을 대기업의 탄소중립 이행으로 인정해 주는 상생형 인증 모델을 구체화하겠다는 것이다. 다섯번째는 소형 모듈 원자로(SMR) 개발 촉진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다. 2035년까지 경수형 SMR 상용화를 추진하고 2030년대에는 비경수형 SMR 건설에 착수할 예정이다. 개발 초기부터 민·관이 공동 출자하는 특수목적법인(SPC) 등 사업화 전문기업을 육성하여 국제진출도 도모하겠다는 것이다. 과기부는 5년마다 'SMR 시스템 개발 기본계획'을 수립해야 하고 정책목표, 추진 전략, 이행 방안과 함께 공급망 관련 기술 개발과 SMR 시스템 연구개발특구 지정·운영 등이 포함된다. 'SMR 시스템 개발 촉진위원회'도 구성된다. 여섯번째는 산업 그린전환 (K-GX) 촉진법과 탄소차액 계약제도(CCfD), 자발적 탄소시장 등 법·금융·시장 정책을 추진려고 한다. 탄소 다배출 산업의 기술개발과 실증을 지원하는 '산업 GX 플러스'는 2027년 산업 연구개발 신규 사업으로 추진되고 있다. 그러나 우려되는 것은 중복성이다. 탄소중립 산업법안(기후에너지환경부), 산업 GX 촉진법(산업통상자원부), 중소기업 탄소중립 촉진 법안(중소벤처기업부), 기후테크 법안(기후에너지환경부)등의 법들간에 상호 중복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정말 에너지, 기후변화 관련 법의 홍수다. 법에도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이 적용 된다. 너무 많은 법이 난립하면 제대로 된 성과를 내기가 어려울 수 있다. 두가지만 명심 하면 된다고 본다. 균형잡힌 규제를 해야 한다. 충분한 재원을 확보해야 한다. 법은 제대로 실행될 때 빛난다.

[EE칼럼] 최고가격제의 부담 떠안은 정유사도 명분이 필요하다

지난 7월 국내 휘발유 소비량이 886만 배럴로 역대 7월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지난 4월과 비교하면 소비가 28%나 늘어난 것이다. 가격 신호를 인위적으로 눌러놓은 최고가격제가 만들어낸 황당한 일이다. 휘발유 소비만 늘어난 것이 아니다. 국제선 여객도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지난 7월에는 전년보다 8.1% 늘었고, 8월에는 다시 9.6% 증가해서 월간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더욱이 정부는 지난 7월 1일 공공기관 차량 5부제를 전면 해제했고, 자원 안보 위기 경보를 경계에서 주의로 낮췄다. 대통령까지 나섰다. 지난 12일 엑스(X)에 “유가에 관한 한 전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며 “휘발유·경유 등 정제유 가격은 계속 안정된다"고 썼다. 최고가격제 등으로 국내 가격을 확실하게 지키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세계는 허리띠를 졸라매는데 우리는 요란한 잔치판을 즐기는 것이다. 국제 상황은 더욱 꼬여가고 있다. 중동 전쟁의 전선이 오히려 확대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내륙 횡단 송유관도 전쟁에 휩쓸렸고, 홍해의 관문인 바브엘만데브 해협도 불안해지고 있다. UAE의 후자이라 항구까지 마비되면 세계 원유 공급량의 20%에 차질이 생긴다. 호르무즈와 홍해의 '이중 봉쇄' 위기 속에 브렌트유 가격이 다시 가파르게 치솟으면서 배럴당 105달러를 넘어섰고, 전 세계 비축유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정유사의 부담도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중동 전쟁이 시작되고 2주일 만인 지난 3월 13일 전격적으로 시행한 '석유제품 최고가격제'에 의한 사회적 피로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누적되고 있다. 물론 최고가격제가 서민 경제의 안정에 실질적인 도움을 준 것은 분명한 팩트다. 국제 유가가 배럴당 120달러를 넘나드는 데도 국내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1900원 수준에서 안정적으로 버텨 냈다. 최고가격제 덕분이다. 그러나 부작용도 증폭되고 있다. 위기감을 체감하지 못한 소비자들이 주유소로 몰려드는데도, 정부는 대통령의 트윗만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세상에 공짜는 없다. 최고가격제의 부담은 온전하게 정유사의 몫으로 돌아간다. 정부의 강력한 의지 탓에 휘발유·경유·나프타의 수출도 자유롭지 않다. 지금까지 정유사가 떠안은 기회손실 비용이 5조 원을 훌쩍 넘어선 상황이다. 이제 정부가 정유사에게 진 빚을 갚아야 할 때다. 최고가격제로 인한 정유사의 손실 보전은 정부의 선택에 맡겨진 일이 절대 아니다. 석유사업법 제23조에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는 의무사항이다. 정부가 절대 외면할 수 없는 강제 사항이라는 뜻이다. 정산위원회를 구성해서 휘발유와 경유의 '원가'와 '정제 마진'을 따져보겠다는 산업부의 꼼수는 부끄러운 궤변이고 억지다. 휘발유와 경유는 원유를 정제하는 과정에서 함께 생산되는 연산품(連産品)이다. 등심과 갈비가 소 한 마리에서 함께 나오듯, 휘발유 따로 경유 따로 '원가'를 계산한다는 발상 자체가 회계학의 가장 기본적인 상식을 무시한 것이다. 더욱이 원가 논란은 15년 전 회계사 경력을 자랑하던 최중경 당시 지식경제부 장관이 말끔하게 정리해 놓은 사안이다. 그런 원가 논란을 반복하는 산업부의 모습은 절망적이다. 싱가포르 국제 석유시장에서 경유는 휘발유보다 33%나 비싸게 거래된다. 최고가격제 시행 이후 국내에서는 더 비싼 경유가 오히려 더 싸게 팔리는 역전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원가 개념도 모르는 산업부가 가격 체계까지 뒤틀어놓았기 때문이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정유사에 대한 정산은 공정하고 정의로워야 한다. 정유사의 손실 보전은 싱가포르 석유제품 가격(MOPS)을 기준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다른 꼼수는 없다. 오히려 물가 안정을 위해 막대한 재정적 불확실성을 떠안아준 정유사에 정부가 감사해야 한다. 물론 손실 보전에 따른 정부의 재정 부담은 걱정이다. 어쨌든 최고가격제를 지속가능한 정책이 아니다. 최고가격을 싱가포르 가격에 단계적으로 근접시키면서 연착륙을 시도해야 한다. 정유사가 위기 극복에 기여할 수 있는 구체적인 통로도 열어줘야 한다. 원유와 석유제품을 비축하고, 나프타 공급을 흔들림 없이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사회 공헌이다. 정유사를 무작정 몰아세우는 정부의 낡은 습관을 버려야 그 명분도 살아난다. 정유산업은 국가 경제와 서민 경제를 안정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동반자다. 정유사는 규제와 압박의 대상이 아니라 에너지 안보와 산업 안보의 파트너로 정부와 우리 사회가 끌어안아야 하는 상대다. bienns@ekn.kr

[EE칼럼] 정치와 규제가 합작한 한전의 부실

한전이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에 25조 원어치의 전기요금을 선납해 달라고 제안했다. 삼성전자 20조 원, SK 하이닉스 5조 원에 달하는 전기요금은 작년 기준으로 5년 치에 해당한다. 지난 7월 재정부 국고실장과 국채정책과장이 한전과 삼성전자 그리고 SK 하이닉스의 고위관계자를 만나 논의하였고 청와대에도 관련 보고가 이뤄졌다고 한다.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미납 전기요금을 나중에 내는 경우는 있어도 미래의 전기요금을 선납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전력을 얼마나 썼는지 계량을 한 다음 그 값을 치르는 것인데 얼마나 쓸지도 모르면서 미리 돈부터 내라는 것이다. 양사도 반도체 슈퍼 사이클이 5년 후까지 지속될 지 모르는 상황에서 당연한 결론이다. 어쩌다 한국의 대표 공기업 한전이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한전은 상반기 기준 210조 7,160억 원의 부채를 갖고 있다. 하루 이자 비용이 115억 원, 1년이면 4조 2천억 원에 달한다. 작년 기준으로 한전의 총괄원가는 120조 원 정도 되는데 이 중에서 구입전력비용이 82조 원에 가깝다. 전력망을 건설하는 데에 73조 원 정도 써야 한다. 당연히 쓸 돈이 모자란다. 그래서 사채를 발행하지만 이 또한 자본금과 적립금 합계의 2배 이내로 제한되어 있다. 그런데 2022년에 이를 5배까지 늘려주는 정부의 특례를 한전법을 개정해서 통과시켰다. 이 특례도 2027년말 종료된다. 이제 돈 꾸기도 어려워졌다. 공기업 중 가장 뛰어난 인재와 경쟁력을 가진 한전이 왜 이렇게 적자와 부채의 수렁에 빠졌을까? 한마디로 그 원인은 정부의 지나친 요금규제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전기요금은 '물가안정에 관한 법률' 제4조(공공요금 및 수수료의 결정)에 따른 공공요금으로 규정되어 재정경제부의 협의와 전문가의 자문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사실상 전기요금은 대통령이 결정한다고 보아야 한다. 한국은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와 같은 전국 선거를 때론 매년 또는 격년, 적어도 3년에 한 번씩은 치른다. 선거를 앞둔 정치권에서는 웬만해서는 전기요금을 인상하려고 하지 않는다. 역대 한전 사장들이 두부값이 콩값보다 싸다는 식으로 전기요금이 원가에 터무니없이 못 미친다고 하소연하였으나 정치권은 여지없이 전기요금을 동결하거나 도저히 채산성을 마치기 어려울 정도로 미미하게 인상하곤 하였다. 특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급등한 국제 에너지 가격을 무시하고 한전의 전기요금을 동결하였던 정치권의 무책임은 회복하기 어려운 한전의 부실을 초래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표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정치권은 그렇다고 치자. 공기업 운영과 경제정책을 맡은 재정경제부 엘리트 관료들이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가격 규제를 정당화하고 대표적 공기업을 부실에 빠뜨리는 것을 보면 공무원들의 전문성과 책임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유야 어떻든 한전의 이와 같은 부실은 경제정책을 담당하는 엘리트 관료들이 국민경제보다는 부처 이기주의와 관료 권한을 더 중요시한다는 반증이다. 9월 초 관계부처 합동으로 발표한 「공공기관 기능개혁 추진방안: 공공기관 DIET 2026」에 따르면 정부는 석탄공사를 청산하기로 하였다. 석탄 수요의 감소와 함께 2025년 말 기준 부채가 2조5천9백억 원이고 연간 750억 원 이상의 이자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석탄산업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석탄공사는 청산하면서 이보다 부채는 81배 이상, 연간 이자 비용은 56배가 넘는 한전에 대해서는 왜 한마디 언급도 없는지 이해할 수 없다. 발전소로부터 전기 살 돈과 전력망 깔 돈 그리고 빚과 이자를 갚을 돈이 없어서 반도체 경기 호황으로 돈 벌고 있는 국내 1·2위 재벌에게 5년 치 전기요금을 미리 달라고 구걸하는 한전의 모습은 너무 안타깝다. 한전의 부실 재정은 정치와 공무원들의 규제가 합작한 전형적인 인기영합주의의 비극이다. 조성봉

[특별기고] 대미 원전투자, 두 가지 원칙이 필요하다

정부의 3500억 달러 규모 대미 전략투자 사업에서 미국 원전 건설이 핵심 과제로 급부상했다. 구상 단계를 넘어 구체적인 협상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미국은 인공지능 데이터센터와 첨단 제조업의 급속한 성장에 대응하고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대규모 원전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수십 년간 신규 원전 건설이 정체되면서 이를 뒷받침할 공급망과 전문인력, 건설 역량이 충분하지 않다. 한국은 원전을 계획된 기간과 예산 안에서 건설할 수 있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산업 기반을 갖추고 있다. 설계, 주기기 제작, 시공, 시운전과 운영에 이르는 전 주기 공급망을 갖추고 있으며 국내외에서 풍부한 건설·운영 경험도 축적했다. 미국에는 원전산업을 신속히 재건할 역량이 필요하고, 한국에는 새로운 시장이 필요하다. 대미 원전투자는 양국의 필요와 강점을 결합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다. 그러나 투자의 규모보다 중요한 것은 그 조건과 구조다. 한국이 대규모 자금을 투자하면서도 우리 원전산업의 참여와 미래 시장 진출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성공적인 전략투자라고 하기 어렵다. 대미 원전투자는 다음 두 가지 원칙을 바탕으로 추진돼야 한다. 첫째, 미국 원전사업에 한국 원전산업의 실질적인 참여가 보장돼야 한다. 한국의 자금이 미국 원전사업에 투입된다면 사업 여건과 기업별 경쟁력에 따라 설계, 기자재 제작, 시공, 사업관리 등의 분야에서 투자 규모와 산업적 기여에 걸맞은 역할과 사업 기회를 확보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한국 기업의 참여를 확보하는 차원을 넘어, 검증된 공급망과 건설 역량을 활용해 미국 원전사업의 일정 지연과 비용 상승 위험을 낮추는 길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사업 발굴과 선정 단계부터 양국 기업이 함께 참여하고, 한국 기업의 참여 범위와 합리적인 수익 구조, 그에 따르는 책임과 권한을 정부 간 협의와 사업 계약을 통해 명확히 해야 한다. 미국의 원전산업 기반을 확충하는 동시에 한국의 공급망과 전문인력도 함께 성장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협력이 지속될 수 있다. 둘째, 대미 원전투자의 일부는 한국이 개발한 APR1400의 미국 내 건설로 이어져야 한다. APR1400은 국내외에서 건설·운영 경험을 축적했으며, 이미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의 설계인증을 취득해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한 제도적 기반도 갖추고 있다. APR1400의 미국 건설은 한국의 투자에 대한 단순한 반대급부가 아니라, 미국이 검증된 노형과 공급망이라는 새로운 선택지를 확보해 원전 건설의 속도와 실행력을 높이는 방안이다. 이는 미국 노형과 APR1400 가운데 하나만을 선택하자는 뜻이 아니다. 사업 여건에 따라 미국 노형 사업에서 양국 기업이 협력하는 한편, APR1400을 적용한 사업도 병행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자는 것이다. 두 노형이 각자의 경쟁력을 발휘하며 함께 추진된다면, 미국은 원전사업의 선택지를 넓히고 한국은 새로운 시장을 확보할 수 있다. 양국 원전산업이 함께 성장하는 상호 호혜적 협력은 이러한 구조에서 가능하다. 대미 원전투자는 미국의 원전산업 재건과 한국 원전산업의 새로운 도약을 함께 이루는 산업전략이 돼야 한다. 한국 원전산업의 실질적인 참여와 APR1400의 미국 내 건설이 함께 실현된다면, 미국은 원전 확대에 필요한 공급망과 건설 역량을 확보하고 한국은 새로운 시장을 열 수 있다. 나아가 양국이 이러한 협력을 바탕으로 세계 원전시장에 공동 진출한다면, 대미 원전투자는 한미 산업협력의 대표적인 성공 모델이 될 것이다. chyybh@ekn.kr

[EE칼럼] 부족한 것은 kW가 아니라 km다

지난 20여년간 선진국의 전력수요 곡선은 지루할 만큼 평평했다. 에너지효율 향상과 경제구조 변화가 성장분을 상쇄했다. 지금은 AI 데이터센터와 전기화를 통한 탄소중립이 가속화되면서 전력수요가 크게 늘고 있다. 그러나 발전소를 지어도 전기를 보낼 길이 없다. AI 데이터센터와 재생에너지가 동시에 늘어난 지금, 전력 시스템의 병목은 발전이 아니라 전력망으로 옮겨갔다. 이것은 한 나라의 사정이 아니라 한국과 미국, 유럽에서 거의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로렌스버클리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미국 전력망 접속 대기열에는 8,244개 사업, 2,061GW가 걸려 있다. 이는 미국 전체 전력설비 용량의 두 배에 가깝다. 접속신청부터 준공까지 소요기간은 2008년 22개월에서 지난해 61개월로 늘었다. 그사이 345kV 이상 송전선 신설은 2013년 약 6,400km에서 2025년 약 646km로 쪼그라들었다. 필요량은 연 8,000km로 추산된다. 송전 관련 투자비가 사상 최고수준인 연 250억 달러를 넘겼지만, 90% 이상이 신뢰도 개선과 노후설비 교체 사업에 들어갔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장거리 송전망을 못 짓는 것이다. 유럽도 비슷한 상황이다. 영국은 2025년 풍력 출력제어와 대체발전에 약 14억 파운드를 썼다. 올해는 8월 초에 이미 10억 파운드를 넘겼다. 출력제어의 98%가 스코틀랜드에서 발생했다. 북부 스코틀랜드에서만 8.8TWh가 생산되지 못했고, 생산될 수 있었던 풍력 발전량 중 61%만이 실제로 전력망에 공급되었다. 2025년 독일은 예비발전소와 출력제어 보상을 포함한 계통혼잡관리 비용으로 30.7억 유로를 지출했다. 독일 남북을 잇는 700km, 4GW급 직류선로 쥐드링크는 당초 2022년 준공 예정이었다. 현재 목표는 2028년 말이다. 2015년 정치적 타협으로 지중화가 결정되면서 계획을 다시 짜야 했고 수십억 유로가 추가됐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지난해 12월 내놓은 '유럽 전력망 패키지(European Grids Package)'는 물량과 속도를 내걸었다. 2040년까지 필요한 전력망 투자규모를 1조 2,000억 유로로 잡고, 인허가 간소화와 국가간 전력망 연결사업 우선지원, 금융 및 투자 지원 등의 방안을 담았다. 한국도 이미 그 벽에 부딪혔다. 동해안 지역 발전설비는 17.8GW인데 수도권으로 보낼 송전용량은 14.5GW에 그친다. 이를 풀 열쇠인 동해안~수도권 500kV 초고압직류송전망(HVDC) 건설사업은 당초 목표보다 수년째 밀리고 있다. 송전선로가 지나는 지역의 주민 반발과 지방자치단체 인허가 갈등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재생에너지 쪽도 사정은 비슷하다. 한전은 2024년 광주·전남 103개, 전북 61개, 동해안 25개, 제주 16개 등 205개 변전소를 '계통관리변전소'로 지정해 신규 접속을 제한했다.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이 지난해 9월 시행되면서 국무총리 소속 위원회가 생기고, 인허가 의제가 18개에서 35개로 늘었다. 허수 물량 7GW 중 2GW를 회수해 재배분했다. 제주는 올해 계통관리변전소에서 해제되기도 했다. 배터리 에너지저장장치(BESS)를 지난해 0.1GW에서 2030년 12GW 이상으로 늘린다는 목표도 세웠다. 서남해 재생에너지를 실어 나를 서해안 HVDC 1단계 사업은 2030년 준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태양광은 1~2년, LNG 복합발전소는 3~4년이면 상업운전에 들어간다. 송전선 하나를 놓는 데는 10년이 넘게 걸린다. 전력망 건설이 지연되는 가장 큰 이유는 기술이 아니라 주민 수용성이다. 송전 설비는 사회가 합의해야 지어진다. 수용성을 높이기 위해서 햇빛소득마을처럼 계통소득마을 사업을 추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송전망이 마을의 지속가능한 수익원이 되는 구조적 전환이 필요하다. 일회성 지원사업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수익을 주민 복지와 공동체 사업에 활용하는 것이다. 지금은 전기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전기를 보내는 길이 부족하다. 전기 생산은 바닷가와 비수도권에서 이루어지고, 수요는 수도권과 첨단산업 클러스터에 몰려 있다. 전력망 병목은 산업과 탄소중립을 동시에 제약하는 구조적 리스크가 되고 있다. 이를 해결하지 못하면 반도체도 AI도 재생에너지도 같은 지점에서 멈춰 설 것이다. 막힌 길을 뚫어낼 열쇠는 혁신적인 기술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이익을 공유하는 사회적 혁신에 있다. bienns@ekn.co.kr

[EE칼럼] 공공기관 통폐합...산업 전략 기회로 삼아야

정부는 3일 공공기관 109개 감축을 골자로 하는 “공공기관 기능 개혁 추진 방향 (안)"을 발표했다. 감축이 현실화하면 전체 공공기관은 현재 524개에서 415개로 줄어든다. 이재명 정부가 보수 정권도 시도조차 하지 못한 대대적인 공공기관 통폐합에 나선 이유는 분명하다. 지역·부처 간 이해관계에 따라 우후죽순처럼 늘어난 기관들이 공공부문의 효율성을 떨어트린다는 판단에서다. 서로 비슷한 기능을 하는 기관이 경쟁적으로 신설되다 보니 정부 재정 부담만 늘어났다. 이번 발표의 최대 관심은 에너지 공기업 통폐합의 중심인 한국남동발전 포함 발전 5사 통합과 석유·가스공사 통합이다. 특히 에너지 공기업 개편안의 핵심은 흩어진 자원개발과 발전 기능을 각각 하나로 묶어 “규모의 경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발전사는 2001년 경쟁을 유도하기 위해 쪼갰지만 25년 만에 통합 절차를 밟게 됐다. 정부의 “2024 탈석탄" 로드맵에 맞춰 재생에너지로 전환을 속도감 있게 추진하기 위해서 인적. 물적 역량을 결집하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개별 발전사가 대형 재생에너지 사업을 추진하면 평균 부채 비율이 급증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따라서 정부는 연구개발비, 대형 재생에너지 발전사업을 묶어 투자 효율성을 높이려면 통합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정부는 발전사 통합을 통해 재무구조로 투자 여력을 확보해 에너지 대전환과 탄소중립에 대응하겠다는 취지다. 또 하나의 이슈는 역대 정부에서 여러번 추진했으나 매번 무산된 한국석유공사와 한국가스공사의 통합이다. 정부는 두 공사를 합쳐 “에너지자원공사(가칭)"를 세우고 에너지 공급망 위기를 전략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탐사. 개발 역량과 구매력을 모아 규모의 경제를 확보하고 글로벌 에너지기업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겠다는 취지다. 전국 공공기관 재무구조는 해마다 늘어나는 추세다. 기재부 발표에 따르면 2020년 542조 원이던 공공기관 부채는 2025년 769조 원으로 증가했고 같은 기간 공공기관 인건비 예산은 29조 6000억 원에서 37조 7,000억 원으로 늘어났다. 더 이상 방치할 수준을 넘어섰다. 현재 시점에서 정부의 공공기관 통폐합은 단순한 기관 숫자 줄이기가 아니라 공공부문의 기능과 국가 전략을 다시 설계하는 구조 개혁으로 평가하는데 맞다. 현재 공공기관의 가장 큰 문제는 기관 수가 많다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기능이 지나치게 잘게 쪼개져 있다. 특히 에너지·자원 분야에서는 한국전력을 포함 발전 5사, 한국가스공사, 한국석유공사, 한국광해광업공단 그리고 각종 연구, 지원기관 등이 각각의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국가 에너지·자원 안보라는 큰 그림을 누가 책임지는가가 불분명한 문제가 있다. 따라서 이번 개혁을 단순한 예산 절감이 아니라 국가 전략 기능 중심의 재편으로 추진한다면 상당한 의미와 성과를 낼 수 있다. 정부도 이번 109개 기관 감축을 전략적 구조 개혁, 유사·중복 기능 일원화, 자회사, 소규모 기관 통합의 세 유형으로 구분했다. 그러나 가장 큰 위험은 통폐합 숫자 경쟁이다. 즉 109개를 줄였다는 숫자가 개혁의 성과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A 기관과 B 기관을 합쳐서 기관 숫자는 1개 줄였는데 본부는 그대로 있고, 인력도 그대로이고, 자회사도 그대로이고, 업무도 그대로이고, 임원 자리만 늘어난다면 그것은 통폐합이 아니라 간판을 바꾼 것과 불과하다. 따라서 성공 여부는 기관 몇 개를 없애느냐가 아니라 통합 이후 국가적 성과가 얼마나 커졌느냐로 평가해야 한다. 특히 발전사 통합은 매우 중요한 시험대이다. 단순히 5개 발전사를 하나로 합치는 방식은 위험하다. 먼저 통합의 목표를 정해야 한다. 한국발전을 발전회사->종합에너지기업->글로벌 에너지기업으로 발전시키는 로드맵이 필요하다. 앞으로는 LNG, 원전 연계, 재생에너지, ESS, SMR, 수소, 해외 발전사업, 핵심광물과 에너지자원까지 연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5개 발전사를 합쳐 놓고 거대한 국내 발전회사 하나를 만드는데 그칠 수 있다. 그리고 자원.에너지 공기업 통합은 더 신중해야 한다. 석유공사와 가스공사를 하나의 에너지자원공사(가칭)로 통합하는 방안은 상당히 의미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조직 통합보다 기능 통합이다. 한국은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오히려 해외 자원개발, 에너지안보, 핵심광물, 공급망, 트레이딩을 하나의 국가 전략으로 연결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일본처럼 자원은 부족하지만, 경제 규모가 크기 때문에 자원개발, 에너지, 핵심광물, 공급망을 분절해서 관리해서는 중국·미국·일본과 경쟁하기 어렵다. 따라서 에너지->자원개발->핵심광물->소재.배터리->전력->산업을 하나의 공급망으로 연결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이번 공공기관 통폐합은 조직 개편이 아니라 대한민국 산업 전략을 다시 짜는 기회가 될 수 있다. bienns@ekn.kr

[EE칼럼] 에너지자원 공기업 통합의 성공 조건

한국석유공사와 한국가스공사를 통합하여 가칭 “에너지자원공사"를 설립하겠다는 정부의 공기업 통합안이 발표되었다. 단순히 공기업의 개수를 줄이는 것이 통합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길 바라며 진정한 통합으로 시너지 효과로 국가 에너지자원 안보와 경제 안보에 기여할 수 있는 방향으로 통합이 실현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과 이란의 전쟁으로 중동산 에너지 공급망에 문제가 발생하고 자원보유국의 자원 민족주의가 대두되고 있는 상황에서 국가의 에너지자원 공급망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석유는 액체인 오일과 기체인 가스를 함께 이르는 말인데 일반적으로 오일을 석유라 부르고 있다. 대부분의 메이저 석유회사는 석유와 가스를 함께 개발 생산하고 있다. 석유와 가스는 모두 같은 원리로 지하에서 만들어지고 함께 생산되기 때문에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석유가스산업은 석유가스를 개발 생산하는 상류부문과 생산된 원유를 정제하고 천연가스를 액화하여 판매하는 하류부문으로 구성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메이저 회사는 상류와 하류 부문에 모두 투자하여 사업의 포트폴리오 구성하여 유가의 변동성에 대비하고 있다. 즉, 고유가 시에는 석유생산으로 상류부문에서 수익을 내고 저유가 시에는 정유사업인 하류부문에서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으니 100년 넘게 회사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한국에서는 석유공사와 가스공사와 따로 존재하고 있을까? 두 공기업 탄생의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석유공사는 국내외 석유가스개발과 석유비축을 주요 업무로 하고 있다. 한편, 한국가스공사는 천연가스의 국내 도입과 공급이 주요 업무이다. 즉, 석유공사는 석유산업의 상류만 담당하고 있고 가스공사는 가스사업의 하류 부문을 주요 업무로 수행하고 있다. 여기에 두 회사의 현 업무 특성이 담겨 있다. 이 말은 석유공사는 불확실성과 위험성이 높은 상류부문 사업만 추진하는 회사인 셈이다. 반면 가스공사는 천연가스를 국내로 도입하여 공급하는 하류부문 사업을 운영하는 회사인 것이다. 한국에서는 석유가스산업의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 상류-중류-하류의 수직적 일괄조업 형태가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유가 변동과 같은 외부 환경 변화와 위기에 취약한 구조를 지닌 채 살아왔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석유공사가 하류부문의 정유공장을 갖고 있으면 원유의 생산과 도입 및 정제 분야에 걸친 일괄조업 형태를 갖추어 국내 석유제품 가격 안정에도 큰 기여를 하고 보다 안정적인 회사 운영이 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가스 공사가 과거에 추진했던 것처럼 좀 더 적극적으로 가스전 개발과 LNG 사업과 같은 상류부문에 투자했으면 지금과 같은 에너지 공급망 위기 시 국가 에너지자원 안보에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당장 눈앞에 문제를 해결하려다 미래를 망치기 쉬운 것이 에너지자원 분야이다. 정부에서 계획 중인 석유공사와 가스공사의 통합은 석유가스산업의 특성을 고려하면 당연히 추진되어야 한다. 그러나 통합 전 해결해야 할 선제 조건이 충족되지 못하면 단지 공기업의 개수를 하나 줄이는 겉보기 성과에 그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해결해야 할 전제 조건은 3가지이다. 정부 예산으로 석유공사의 부실자산 처리, 국내외 석유가스 개발과 탄소중립 사업 지속적 추진, 국내 에너지 가격 정상화이다. 현재 수년째 자본 잠식에 빠져있는 석유공사의 부채를 해결하지 않으면 통합이 되더라도 재정의 어려움은 계속될 것이고 국가 에너지자원 안보의 핵심인 석유가스개발은 추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또한 가스공사의 13조가 넘는 미수금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에너지 공급 가격의 정상화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도 정권교체 시마다 석유공사와 가스공사의 통합이 추진되다 좌초되었다. 앞에서 언급한 전제 조건을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정부의 예산 투입 없는 구조조정을 추진하니 통합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번에도 정부가 예산 투입 없는 통합을 추진하려면 그냥 여기서 멈춰라. 겉보기 통합은 국민에게 또 다른 짐이 될 뿐이다. bienns@ekn.kr

[EE칼럼] 글로벌 에너지 투자, 청정에너지 중심으로 재편

넷제로 목표를 모든 나라가 달성하는 낙관적 시나리오에서도 지구 평균기온 상승폭이 1.8도에 이를 전망이라는 UNEP 보고서가 발표된 가운데, 글로벌 에너지 투자 시장의 중심축이 화석연료에서 청정에너지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의 「World Energy Investment 2026」에 따르면, 올해 전 세계 에너지 투자는 총 3조 4천억 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이 가운데 청정에너지 투자는 2조 2천억 달러로 전체의 약 65%를 차지하며, 화석연료 투자(1조 2천억 달러)의 1.8배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글로벌 에너지 투자는 2015년 2조 7천억 달러에서 2020년 2조 2천억 달러까지 감소했으나, 코로나19 이후 경제 회복과 에너지 안보 강화, 기후위기 대응 정책이 맞물리며 다시 가파른 증가세로 돌아서 2024년 3조 2천억 달러를 거쳐 2026년 사상 최대인 3조 4천억 달러에 이를 전망이다. 특히 청정에너지 투자는 2015년 1조 2천억 달러에서 2020년까지 정체되다가 이후 급격히 성장해 2024년 처음으로 2조 달러를 넘어섰고, 2026년에는 2조 2천억 달러까지 확대될 전망이다. 반면 화석연료 투자는 2015년 1조 4천억 달러에서 2020년 9천억 달러까지 줄었다가 에너지 가격 상승으로 일부 반등했지만, 2026년에도 1조 2천억 달러 수준에 머물러 청정에너지와의 격차는 더욱 벌어질 전망이다. 이는 재생에너지와 전력망, 에너지저장장치(ESS), 전기차 등 청정에너지 관련 분야가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에너지 투자의 핵심 경쟁이 단순한 발전설비 확대를 넘어 전력망과 저장장치, 에너지 효율, 전력 시스템의 유연성 확보로 확대될 것으로 보고 있다. 태양광과 풍력 발전 비중이 높아질수록 변동성 전원을 안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전력망과 ESS 투자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글로벌 전력시장도 대세 전환의 임계점을 통과하고 있다. 2025년 신규 발전설비의 85.6%가 재생에너지로 채워졌다는 사실은, 추가 발전원의 거의 대부분이 태양광·풍력 중심으로 설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누적 발전설비 중 재생 용량 비중은 49.4%에 도달해 2026년 말에는 50%를 넘어설 것이 확실시된다. 재생발전량 점유율도 2024년 31.8%에서 2025년 33.8%로 늘었으며, 태양광은 단일 발전원 중 역사상 가장 빠른 성장세로 2025년 발전량 기준 8.8%를 기록했다. Ember에 따르면 2026년 7월까지 재생 점유율은 35.7%(태양광 10.1%, 풍력 9.3%)에 이르렀다. 우리나라도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재생에너지 정책 성과가 가시화되고 있다. 2025년 6월 '재생에너지 중심의 에너지 대전환'이 국정 과제로 선정되었고, 같은 해 10월 기후·에너지·환경부가 출범하여 관련 정책 추진 체계를 강화했다. 2026년 3월에는 재생에너지법 개정을 통해 신재생에너지와 재생에너지를 분리하고, 이격거리 규제를 법제화하여 합리화했다. 2026년 5월에는 제1차 재생에너지 기본계획을 발표하며 2030년 재생에너지 100GW 보급 조기 달성과 2035년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 30% 이상 확보를 목표로 제시했다. 2026년 8월에는 RPS(신재생에너지 공급 의무화) 제도를 폐지하고 장기 고정가격 계약시장 중심으로 전환해 비용을 절감하고 수익 안정성을 높이기로 했으며, 기후에너지환경부의 2027년도 예산은 전년 대비 18.3%(3조 9,737억 원) 증가한 25조 7,319억 원으로 역대 최대 규모로 편성했다. 하지만 3대 메가프로젝트 발표로 대기업과 데이터센터 개발사업자들이 축포를 쏘아 올릴 때, 어렵게 명맥을 이어온 국내 중소·중견 재생에너지기업들은 역대 최악의 경영난으로 도산 위기에 몰려 있고, 소규모 태양광 발전사업자들은 그나마 있던 지원제도인 RPS 폐지로 수익성이 악화될까 걱정하고 있다. 태양광 관련 협동조합들은 4~5년이 지나도 자립 기반을 잡지 못하거나 배당조차 하지 못하는 사례가 다수이며, 한전 접속용량 부족으로 사업 자체를 포기하는 사례도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정부의 야심찬 계획과 정책에도 불구하고 2026년 8월까지 신규 태양광 설치량은 2.38GW로 전년 동기(2.47GW)보다 오히려 줄었다. 중국 역시 2025년 6월 재생에너지 가격 시장화 개혁(136호 문건) 시행 이후 신규 태양광 설비가 1~7월 기준 61.3% 급감(2025 223GW, 2026년 86GW)했다. 신규 프로젝트는 경쟁입찰을 통해 가격이 결정되도록 함에 따라 수익 예측이 어려워지면서 개발업체의 투자 심리가 위축된 결과로 정책이 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결국 관건은 정책의 방향이 아니라 그 방향이 현장 어디까지 미치느냐다. 봇물처럼 쏟아지는 재생에너지 정책이 진짜 성과로 이어지려면, 대형 프로젝트만이 아니라 현장의 중소·중견 기업과 태양광발전협동조합 등이 자립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익 기반과 계통 접속 여건부터 함께 챙기는 세심한 설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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