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인공지능(AI) 기술 성숙도와 잠재력이 세계 2군 수준으로 나타나면서 'AI G3(3대 강국)' 도약이 멀어지는 모양새다. 글로벌 빅테크와 경쟁하기 위해선 기술 인프라를 갖춰야 하는데, 정치적 불확실성이 증가하면서 이를 뒷받침할 법·제도 구축이 기약 없이 미뤄지는 탓이다. 12일 글로벌 컨설팅 기업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의 'AI 성숙도 매트릭스'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관련 기술 성숙도·잠재력은 2군에 해당하는 'AI 경쟁국'으로 분류됐다. AI 선도국으로 선정된 국가는 미국, 중국, 영국, 캐나다, 싱가포르 등 5개국 뿐이다. BCG는 73개 국가를 대상으로 △AI 선도국 △AI 경쟁국 △AI 실천국 △AI 도약국 등 4개 그룹으로 분류했다. 평가 지표엔 △연구개발(R&D) 혁신 생태계 △고급 인재 및 교육 시스템 △글로벌 표준 및 규제에 대한 영향력 △AI 기술의 산업 적용 범위 등이 반영됐다. 한국은 주요 국가들보다 AI 준비 상태가 다소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이른바 '2군'으로 분류된 셈이다. 우리나라와 같은 그룹에는 일본, 대만, 홍콩, 독일, 이스라엘, 스페인, 프랑스, 호주, 말레이시아 등 23개국이 포함됐다. BCG는 이들 국가에 대해 기술 발전 의지 및 정책·규제, 투자 등 지표에선 선도국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실제 보고서를 살펴보면, 한국의 AI 준비 상황에 대해 “높은 수준의 노출도와 준비성을 갖추고 있다"며 “금융과 같이 높은 보안성이 요구되는 부문에 기술을 적용해 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안정적 AI 경쟁국가로 본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경쟁국으로 분류된 이유는 연구개발(R&D) 및 혁신, 숙련도 측면에 대한 지표가 선도국보다 낮은 수치를 보이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그동안 업계에선 기술 개발에 대한 투자와 연구인력이 글로벌 주요 국가 대비 적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NIA)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AI 투자 규모는 1419억달러(한화 약 203조2434억원)로 나타났다. 이 중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 건 미국(874억2000만달러·한화 125조2204억원)으로, 전체의 62%에 달했다. 이어 △유럽연합(EU) 134억9000만달러(19조3230억원) △중국 112억8000만달러(16조1574억원) 순으로 집계됐다. 한국의 AI 투자 비중은 30억달러(4조3000억원)로 전체의 1.5%~2%에 그쳤다. 김소미 NIA 선임연구원은 “한국의 경우 전체 국가 중 10위권 내 포함되며, 투자금액은 일본·캐나다 대비 조금 못 미치는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연구인력 역시 태부족한 상황이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의 '국가전략기술 R&D 인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말 국내 AI 연구자 수는 2만1000명으로 세계 9위, AI 관련 논문 수는 1만4000건으로 세계 12위였다. 1위로 집계된 중국(연구자 수 41만1000명·논문 수 22만건) 대비 전체적으로 20분의 1 수준이다. 더 큰 문제는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것을 계기로 탄핵 정국을 맞으며 법·제도적 기반 마련이 내년으로 미뤄졌다는 것이다. AI에 대한 개념과 산업 육성, 안전성 확보 방안 등을 담은 'AI 기본법'은 지난달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를 통과했지만, 본회의 테이블에 오르지 못하며 표류 위기에 놓였다. 해당 법안은 앞서 지난 21대 국회에서도 상정을 앞두고 있었으나, 임기 종료로 인해 한 차례 폐기된 바 있다. 이번 사태로 인해 다시 추진 동력을 상실할 경우, 시장 환경에 대응할 골든 타임을 놓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최근 AI 분야 투자 방향으로 △차세대 AI 기술개발을 위한 투자 확대 △AI 전환 R&D 사업 효과성 제고 △고성능 컴퓨팅 자원 지원을 언급했다. 그러나 정국 추이에 따라 정권이 교체될 경우, 정책 방향이 전면 수정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업계에선 자칫 빅테크와의 경쟁력이 더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AI 경쟁력을 글로벌 수준으로 높이기 위해선 정부의 역할이 중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근본 기술 혁신 분야에 대한 정부 차원의 R&D 지원을 강화하는 등 기술 발전 기반을 확충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김은진 경기대 소프트웨어경영대학 교수는 관련 연구를 통해 “생성형 AI 환경에서는 소수의 글로벌 및 국내 기업들이 기초 모델을 개발하고, 수많은 스타트업이 이를 토대로 서비스를 개발하는 구조"라며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선 규제 완화와 외국 자본의 유입을 촉진하는 정책 제정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이어 “기업 사용자들의 생성형 AI 수요가 제한적인 만큼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과 맞춤형 솔루션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며 “디지털 격차 해소 및 관련 산업의 에코시스템 내 기업 간 협력을 촉진할 수 있는 정책적 노력도 필요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이태민 기자 etm@ekn.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