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2년이 더 위험하다”…PHP 추가 결함에 北 해킹 의혹까지

전 세계 웹사이트의 약 70%가 사용하는 프로그래밍 언어 PHP에서 치명적인 보안 결함이 발견된 데 이어 새로운 취약점까지 확인됐다. 긴급 보안 패치를 적용한 서버에서도 특정 조건에선 해킹 위험이 남아 있는 것이다. 북한 해킹조직과 연계된 것으로 의심되는 세력이 한국 정부기관과 금융권을 공격 대상으로 검토한 정황도 포착됐다. 26일 정보기술(IT) 업계에 따르면 PHP 개발팀은 지난 23일 기존 보안 패치로 해결되지 않는 추가 취약점(CVE-2026-115560)을 공개했다. 지난 21일 치명적인 취약점 2건을 수정한 새 버전을 배포한 지 이틀 만이다. 새 취약점은 PHP의 파일 업로드 진행 상황을 추적하는 기능과 관련돼 있다. 특정 서버 설정과 프로그램 코드가 결합하면 외부 공격자가 악성 코드를 실행할 가능성이 있다. 앞서 배포된 최신 보안 패치를 설치한 서버도 해당 조건에선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다만 모든 PHP 서버가 새 취약점에 노출되는 것은 아니다. 프로그램이 실행되는 도중 세션 데이터 처리 방식을 변경하는 등 일부 조건이 충족돼야 공격이 가능하다.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은 정식 수정판이 나올 때까지 파일 업로드 진행 상황을 추적하는 기능을 비활성화하도록 권고했다. 설정을 변경한 뒤에는 PHP 작업 프로세스를 재시작해야 한다. PHP 개발팀은 해당 문제를 다음 정기 업데이트에서 수정할 예정이다. ◇2년 전부터 결함 징후…늑장 대응 도마 이번 사태는 지난 21일 PHP에서 치명적인 취약점 2건이 공개되면서 시작됐다. 해커가 이를 악용하면 관리자 비밀번호 없이도 서버에서 악성 코드를 실행하거나 정보를 빼낼 수 있다. PHP 개발팀은 보안 수정판을 긴급 배포했지만, 사전에 취약점 관련 정보가 유출되면서 공격 시도가 잇따랐다. 글로벌 인터넷 보안업체 클라우드플레어에 따르면 취약점 공개 이후 이를 악용하려는 공격 시도가 급증했다. 아마존웹서비스(AWS)는 공식 발표 나흘 전인 지난 17일부터 관련 공격 시도를 포착했다고 밝혔다. 다만 공격 시도가 실제 서버 침투나 정보 유출로 이어졌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보안업계에선 이번 사태가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온다. 매슈 프린스 클라우드플레어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니혼게이자이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최악의 시기는 아직 지나가지 않았다"며 “앞으로 2년간 거의 매주 중대한 버그가 발견되는 상황이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인공지능(AI)을 활용해 과거에는 찾아내기 어려웠던 취약점까지 확인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PHP 개발팀의 대응이 늦어진 사실도 드러났다. PHP 재단에 따르면 이번 취약점의 원인이 된 문제는 2024년 외부 보안 감사에서 처음 지적됐다. 그러나 당시 구체적인 공격 가능성이 입증되지 않았고, 수정 방법을 둘러싼 이견도 이어지면서 조치가 지연됐다. 올해 8월 외부 보안 연구진이 해당 결함을 이용해 서버에서 악성 코드를 실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야 수정 작업이 본격화됐다. PHP 재단은 보안팀의 의사 결정 과정과 인력 부족 등이 대응 지연에 영향을 미쳤다고 인정했다. 문제는 PHP가 전 세계 웹사이트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된다는 점이다. 기업 홈페이지와 온라인 쇼핑몰, 정부기관 웹사이트 등에서 로그인과 검색, 결제 기능을 처리하는 데 쓰인다. 자체 보안 인력이 부족하거나 오래된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기관은 업데이트에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 있다. ◇北 해커 연계 의혹…한국도 공격 대상 PHP 취약점을 이용해 한국을 공격하려는 움직임도 포착됐다. 싱가포르 보안업체 사이퍼마는 지난 23일 보고서를 통해 한국어를 사용하는 해커들이 익명 네트워크에서 PHP 취약점을 활용한 공격 계획을 논의한 정황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들이 공격 대상으로 거론한 곳에는 한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의 정부기관과 은행, 금융회사 등이 포함됐다. 제조업체와 물류회사, 항공 관련 시설 등도 공격 대상으로 검토된 것으로 분석됐다. 사이퍼마는 해당 세력이 북한 해킹조직 라자루스와 연계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다만 라자루스와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중간 수준의 확신을 보였다. 공격을 준비한 정황과 실제 공격 성공 여부도 구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사이퍼마는 지난 23일 8시간 동안 관련 공격 행위가 의심되는 인터넷주소(IP) 17개도 확인했다고 밝혔다. 다만 이들 IP가 모두 북한 해킹조직에 속한다거나 실제 침투에 성공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국내에서도 보안 대응이 이어지고 있다. 정부는 지난 22일 민간 분야 사이버 위기 경보를 '관심'에서 '주의'로 격상하고 주요 기업과 기관에 보안 점검을 요청했다. 보안업계에서는 기존 패치를 적용했더라도 추가 취약점과 관련된 서버 설정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보안 지원이 끝난 구형 PHP를 사용하는 기관은 최신 버전으로 교체하고, 침입 시도가 있었는지도 점검할 필요가 있다. 김나현 기자 knh@ekn.kr

“AI의 옳고 그름 누가 정하나”…빅테크, 종교계까지 손 뻗었다

미국 인공지능(AI) 기업들이 챗봇에 옳고 그름을 가르치기 위해 종교계에 자문을 구하고 있다. AI가 어떤 질문에 답하고 어떤 요청을 거부할지 기준을 정하는 데 종교 지도자와 철학자들의 의견을 듣고 있는 것이다. 다만 종교마다 도덕적 판단 기준이 달라 이를 AI 모델에 반영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26일 AP통신에 따르면 앤트로픽은 지난 5월 15개 이상의 종교 및 문화권 집단에 속한 학자와 성직자, 철학자, 윤리학자 등을 만나 AI의 윤리적 판단에 관한 의견을 수렴했다고 밝혔다. 특정 종교의 교리를 AI에 적용하기보다는 종교와 정치, 세속적 가치관을 폭넓게 검토하겠다는 취지다. 앤트로픽 공동창업자인 크리스 올라 연구원은 지난 5월 바티칸에서 열린 교황 레오 14세의 첫 회칙 발표 행사에 참석해 종교계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는 AI가 직면한 윤리적 문제에 대해 “연구실에서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여러분과 같은 전통이 수천 년 동안 다뤄온 문제"라고 말했다. 실제 앤트로픽의 자문 회의에서는 인간에게 영혼이 있는지, 초등학교 3학년 학생에게 교육용 챗봇 사용을 허용해야 하는지 등의 문제가 논의됐다. 회의에 참석한 메건 설리번 미국 노터데임대 교수에 따르면 앤트로픽은 먼저 종교계 인사들에게 AI 모델의 작동 원리를 설명했다. 이후 참석자들이 기술의 활용과 윤리적 문제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회의가 진행됐다. 설리번 교수는 앤트로픽이 다른 기술 기업들보다 종교적 문제를 진지하게 다뤘다고 평가했다. 오픈AI도 AI 모델에 다양한 도덕적 관점을 반영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챗GPT가 인류의 도덕적 견해를 폭넓게 반영해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메타와 구글, 아마존 관계자들도 바티칸 측과 만났으며 마이크로소프트 역시 종교계와 교류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 AI에 종교 윤리 가르친다지만…학계는 우려 AI 기업들은 모델이 위험한 요청을 거부하고 차별적인 답변을 피하도록 별도의 학습과 평가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어떤 답변을 유해하다고 판단할지, 어느 경우에 답변을 제한할지 등의 기준을 정한다. 종교계 자문을 둘러싼 쟁점은 종교와 문화권마다 도덕적 판단이 다르다는 점이다. 안락사나 낙태처럼 종교별 입장이 엇갈리는 사안에서는 어떤 관점을 AI 모델에 반영할지를 놓고 의견이 달라질 수 있다. 앤트로픽이 종교계로부터 수렴한 의견을 실제 AI 모델의 답변 정책에 어떻게 반영했는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종교 지도자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할 경우 어떤 기준을 채택할지에 대한 문제도 남아 있다. 학계에서는 종교를 일정한 윤리 규칙의 집합으로 보고 AI에 적용하는 방식에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웹 킨 미국 미시간대 인류학 교수는 종교가 교리뿐 아니라 의례와 문화, 신앙인들의 실제 생활과도 연결돼 있다고 설명했다. 종교마다 고유한 도덕 규칙이 존재하고 이를 추출해 AI에 적용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 일부 종교의 관점이 지나치게 강조되거나 다른 전통이 왜곡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종교를 여러 개의 독립된 체계로 구분하는 방식 자체에 대한 문제 제기도 있다. 도모코 마스자와 미국 미시간대 종교학자는 세계의 종교를 서로 비교할 수 있는 개별 체계로 분류하는 관점이 근대 서구 학문을 통해 형성됐다고 설명했다. 불교와 힌두교 등을 독립된 종교 범주로 구분하는 방식이 각 지역의 신앙 전통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메타의 독립 감독위원회 위원인 파올로 카로차도 여러 종교의 가르침을 하나로 결합할 경우 각 전통의 고유한 특성이 사라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서로 다른 종교의 관점을 하나의 기준으로 통합하는 과정에서 각 종교의 차이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 국내 AI 업계 “종교계 자문 사례 드물어" 국내 AI 개발 현장에서는 종교적 교리보다 사회적 규범을 바탕으로 모델의 안전성을 평가하는 방식이 활용되고 있다. 한 국내 AI 업계 관계자는 “모델을 공개하기 전에 별도의 안전 검증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며 “특정 교리나 원칙에 기반하기보다는 사회 규범에 비춰 답변의 유해성, 편향성, 사실 오류 등을 평가하는 일반적인 AI 정렬(alignment) 기준을 적용한다"고 말했다. AI 정렬은 모델이 개발자가 의도한 목표와 인간의 가치, 안전 기준에 부합하도록 작동하게 하는 기술적 과정을 뜻한다. 유해한 정보를 제공하거나 특정 집단에 편향된 답변을 내놓지 않도록 모델을 학습시키고 검증하는 작업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 같은 안전성 검증과 종교계 자문은 서로 배타적인 방식은 아니다. 안전성 검증이 모델의 답변을 평가하는 절차라면 종교계 자문은 그 평가에 활용할 가치관과 판단 기준을 검토하는 과정에 가깝다. 다만 어느 기준을 채택할지에 관한 문제는 두 방식 모두에서 남는다. 국내 업계에서는 해외 빅테크의 종교계 자문이 문화적 배경과도 관련이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앞선 업계 관계자는 “서구권은 한국과 종교에 대한 인식이 다르기 때문에 윤리적 문제를 종교계에 묻는 문화가 상대적으로 익숙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다른 국내 AI 업계 관계자는 “우리 회사도 종교계 자문을 진행하거나 검토하고 있지 않다. 국내에서도 관련 사례는 많지 않은 것으로 안다"며 “해외와 국내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위치나 인식이 다르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김나현 기자 knh@ekn.kr

PHP 사태 이어 또 터졌다…이번엔 Node.js 보안 결함

전 세계 웹사이트에서 널리 쓰이는 프로그래밍 언어 PHP에 이어 서버 개발에 사용되는 'Node.js'에서도 심각한 보안 취약점이 발견됐다. 공격자가 별도의 인증 없이 서버를 중단시키거나 악성 코드를 실행할 수 있는 결함으로, 국내 보안당국도 긴급 업데이트를 권고했다. 26일 보안업계에 따르면 Node.js 개발진은 지난 21일 공식 보안 공지를 통해 데이터 압축 해제 모듈인 '브로틀리(Brotli)'에서 원격 코드 실행을 허용할 수 있는 취약점(CVE-2026-111497)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Node.js는 자바스크립트를 웹브라우저 밖에서도 실행할 수 있도록 하는 소프트웨어 환경이다. 웹사이트 서버와 애플리케이션 개발 등에 널리 사용된다. 이번 취약점은 외부에서 전달된 압축 데이터를 해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공격자가 조작한 압축 데이터를 서버에 보내면 정해진 메모리 영역을 벗어나 데이터가 기록되면서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이를 악용하면 서버를 비정상적으로 종료시키거나 메모리 정보를 빼낼 수 있다. 특정 조건에서는 악성 코드를 원격으로 실행해 서버 제어권까지 확보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 개발자가 작성한 프로그램에 문제가 없더라도 Node.js 자체의 결함으로 공격에 노출될 수 있다. 외부에서 전달된 압축 데이터를 자동으로 해제하는 서버는 별도 점검이 필요하다. 이번 취약점은 오픈AI의 코덱스 보안팀이 발견했다. 오픈AI는 앞서 인공지능(AI) 에이전트의 보안 성능을 시험하는 과정에서 브로틀리의 잠재적 결함을 찾아냈다고 밝힌 바 있다. Node.js 개발진은 취약점 위험도를 '높음(High)'으로 분류하고, 이를 수정한 22.23.4, 24.22.1, 26.12.1 버전을 배포했다. 이번 보안 업데이트에서 수정된 취약점은 모두 10건으로, 이 가운데 4건이 고위험으로 분류됐다. 한국인터넷진흥원(KISA)도 관련 보안 공지를 내고 영향을 받는 버전의 사용자들에게 최신 보안 업데이트를 적용할 것을 권고했다. 국내 보안업체 티오리는 이날 'Node2Shell'로 불리는 이번 취약점의 자체 재현과 검증을 마치고 긴급 대응 방안을 공개했다. 티오리에 따르면 개발자가 압축 해제 기능을 직접 사용하지 않더라도 웹 프레임워크나 외부 라이브러리가 데이터를 자동으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공격에 노출될 수 있다. 티오리는 즉각적인 업데이트가 어려운 기업을 위한 임시 대응 방안도 제시했다. 별도 프로그램 설치 없이 웹사이트 주소만 입력하면 취약점 노출 위험을 확인할 수 있는 무료 진단 서비스도 공개했다. 다만 모든 Node.js 서버가 공격에 노출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 공격 가능성은 서버의 압축 데이터 처리 방식과 운영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이번 취약점으로 인한 대규모 침해 사고도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앞서 PHP에서도 인증 없이 악성 코드를 원격으로 실행할 수 있는 취약점이 발견돼 국내외 보안당국이 업데이트를 권고했다. 당시 보안업체들은 취약점이 공식 공개되기 전부터 공격 시도가 발생했으며, 공개 이후에는 수백만 건으로 늘었다고 보고했다. 김나현 기자 knh@ekn.kr

[CXMT 4F² 해부 ②] EUV 없이 ‘최정밀 바둑판’ 도전…‘수율 10%’의 벽

CXMT가 회로를 가장 정밀하게 그리는 도구 없이 가장 정밀한 설계를 요구하는 구조에 뛰어들었다. 웨이퍼에 회로를 새기는 빛의 파장이 짧아 가장 가는 선을 한 번에 그릴 수 있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미국 수출 규제로 쓸 수 없는 탓이다. EUV 대신 패턴을 여러 번 쪼개 그리는 우회 공정으로 바둑판의 가로·세로를 동시에 맞춰야 해, 발표와 양산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다는 평가가 나온다. ◇ 'EUV 없는 4중 패터닝'의 모순 4F² 구조 자체는 특정 선폭에 묶인 기술이 아니다. F가 선폭을 뜻하는 만큼 60㎚ 공정이든 15㎚ 공정이든 4F² 셀을 만들 수는 있다. 관건은 얼마나 작게 만드느냐다. 26일 업계에 따르면 CXMT가 쓰는 장비는 불화아르곤(ArF) 액침 심자외선(DUV) 노광장비다. 노광은 빛을 회로 원판(마스크)에 통과시켜 웨이퍼에 패턴을 새기는 공정으로, 빛의 파장이 짧을수록 더 가는 선을 그릴 수 있다. DUV는 통상적으로 193㎚ 파장을 쓰는 반면 EUV는 13.5㎚로 DUV의 약 14분의 1이다. DUV로 한 번에 그릴 수 있는 선의 반복 간격(피치)은 약 80㎚다. 패턴을 쪼개 두 번 그리면 40㎚, 세 번 그리면 20㎚까지 내려간다. 선폭 15㎚ 수준에서 4F² 셀을 구현하려면 기둥 사이 피치를 30㎚ 안팎까지 좁혀야 하는데, 두 번 그려서는 이 간격에 미치지 못한다. CXMT가 '자기정렬 4중 패터닝(SAQP)'에 기댈 수밖에 없는 이유다. SAQP는 기준선을 그린 뒤 그 테두리에 얇은 막(스페이서)을 입히는 과정을 두 번 반복해 선 간격을 4분의 1로 쪼개는 기술이다. EUV라면 한 번에 그릴 패턴을 증착·포토·식각·세정을 여러 차례 되풀이해 만들어내는 셈이다. 문제는 이 방식이 4F²와 상극이라는 점이다. 6F²는 공책의 가로줄처럼 한 방향만 가장 촘촘하면 되고, 다른 방향은 3F로 여유가 있다. 그래서 EUV로는 패턴 공정을 한 번씩만 적용하면 된다. 반면 4F²는 가로와 세로가 모두 가장 촘촘한 바둑판 구조다. 줄이 교차하는 지점마다 기둥을 세워야 하기 때문에, DUV로는 패턴을 그리는 작업을 가로로 세 번, 세로로 세 번 적용해야 한다. SAQP는 막 두께가 원자 몇 층만 달라도 선 간격이 넓고 좁기를 번갈아 반복한다. 이 오차가 두 방향에서 동시에 생기면 기둥마다 크기와 위치가 달라진다. 그 위에 커패시터를 정확히 올리기도 더 어려워진다. 기둥 하나의 오차가 곧 셀 하나의 불량이 되는 구조다. 공정 단계도 몇 배로 늘어난다. 단계가 늘면 생산 기간이 길어지고, 결함이 끼어들 여지와 원가도 함께 커진다. CXMT가 SAQP 기반 G4~G5 D램 양산을 추진하고 있지만, 이는 기존 6F² 구조다. 진종문 경남대 반도체부트캠프사업단 교수는 “한 방향으로 선을 쪼개는 것과 가로세로로 엇갈려 쪼개진 바둑판식 선에 기둥을 아래위로 이어 붙이는 것은 난이도 차원이 다르다"며 “노광 해상도가 가장 부족한 회사가 노광에 가장 가혹한 구조를 고른 것이 CXMT 전략의 최대 모순"이라고 진단했다. ◇ 웨이퍼 접합·신소재·수율·데이터 유지…4F² 양산의 '4대 난제' 난관은 셀에서 끝나지 않는다. D램에는 셀에서 읽은 미약한 신호를 키우는 감지증폭기, 워드라인을 움직이는 드라이버 같은 주변회로가 있다. 셀만 작아지고 주변회로가 그대로면 4F²의 효과는 희석된다. 그래서 업계는 셀과 주변회로를 서로 다른 웨이퍼에서 만들어 위아래로 붙이는 방식을 택했다. 삼성전자의 4F² 시제품은 주변회로를 셀 아래로 옮겨 면적 비중을 17%에서 3% 수준으로 낮췄고, 웨이퍼당 칩 수를 20% 넘게 늘렸다. 이 방식의 핵심은 배선이다. 4F²에서는 비트라인이 기둥 아래로 묻히고, 커패시터는 위로 올라가며, 주변회로는 아래 웨이퍼로 내려간다. 예전에 셀 위 배선으로 오가던 신호가 이제 두 웨이퍼의 접합면을 건너야 한다. 1~2㎛ 간격의 접합점을 어떻게 배치하고 얼마나 줄일 수 있느냐도 문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아직 완성 단계가 아닌 메모리용 하이브리드 본딩의 접합 수율이다. 이에 따라 칩의 크기와 원가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CXMT는 웨이퍼를 붙인다는 사실만 밝혔을 뿐, 이 부분은 공개하지 않았다. 웨이퍼를 두 장 쓰면 원가가 늘고 두 웨이퍼의 불량률이 곱해진다는 부담도 적지 않다. 신소재도 변수다. 땅속 비트라인의 저항을 낮추려면 루테늄 같은 새 금속이 필요하고, 기둥 소재로 실리콘 대신 산화물 반도체를 검토하는 흐름도 있다. 하지만 새 재료는 열처리 온도, 오염, 계면 결함이라는 새 숙제를 낳는다. 웨이퍼 본딩까지 더해지면 온도와 물리적 신뢰성 제약은 한층 까다로워진다. 간격이 제각각인 좁은 기둥 사이를 게이트 막과 금속으로 고르게 채우기도 어렵다. 이런 편차는 결국 셀마다 다른 문턱전압과 누설 전류로 나타난다. 가장 높은 벽은 수율과 데이터 저장 시간이다. D램은 수십억 개 셀이 모두 정해진 시간 동안 전하를 함께 유지해야 한다. 몇몇 셀만 새도 칩 전체가 불량이 되고, 24시간 가동되는 서버용은 기준이 더 엄격하다. 진 교수는 “연내 제품이 나오더라도 초기 수율은 10%를 밑돌 가능성이 크고, 의미 있는 물량은 빨라야 2027년 말에서 2028년 상반기에나 가능할 것"이라며 “EUV를 쓰는 회사는 패턴 오차라는 변수 하나를 덜고 이 문제를 풀지만, CXMT는 네 변수를 모두 떠안고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하나 기자 uno@ekn.kr

[CXMT 4F² 해부 ①] 서버용 D램 ‘2년 추월’…성적표는 백지

중국 메모리 업체의 차세대 D램 공세가 거세지는 가운데 '2년 추월론'이 시장을 흔들고 있다. 창신메모리(CXMT)가 삼성전자·SK하이닉스도 아직 양산하지 못한 4F² 구조 D램을 연내 내놓겠다고 밝혔고, 그 여파로 국내외 메모리 업체 주가까지 출렁였다. 다만 발표에서 핵심 정보가 대거 빠진 만큼 기술 추월보다는 상장 이후 이어진 '몸값 띄우기'의 연장선이라는 해석에 무게가 실린다. ◇ '4F² 카드' 꺼낸 CXMT 25일 외신과 업계에 따르면 CXMT는 지난 10일 상하이에서 열린 제4회 집적회로·칩렛 콘퍼런스에서 4F² 구조로 만든 서버용 DDR5 메모리를 연내 출시하겠다고 밝혔다. 국내 업체들은 아직 시제품 단계에 머물러 있다. 삼성전자는 올해 2월 국제고체회로학회(ISSCC)에서 4F² 기반 16Gb D램 시제품의 작동에 성공했다고 발표했고, 2028년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SK하이닉스도 지난해 6월 VLSI 심포지엄에서 4F² 수직 게이트(VG) 기술 로드맵을 공개하는 데 그쳤다. 발표된 일정만 놓고 보면 CXMT가 약 2년 앞서는 셈이어서, “중국이 한국을 2년 앞질렀다"는 평가가 잇따랐다. 발표 이후 첫 거래일인 13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주가는 각각 6.59%, 8.54% 급락했다. 4F² 구조는 D램 셀 하나를 가로·세로 2F인 정사각형 면적 내에 구현하는 방식이다. F는 해당 공정에서 구현할 수 있는 최소 선폭을 뜻한다. 현재 주력인 6F²(가로 2F·세로 3F)보다 셀 면적이 3분의 1 줄어, 같은 면적에 셀을 50% 더 넣을 수 있다. 셀 하나가 이론상 도달할 수 있는 최소 면적이다. 다만 주변회로까지 포함한 칩 전체로 보면 실제 효과는 이보다 작다. 구현 방식도 다르다. 2F×2F의 좁은 공간에는 트랜지스터 단자 3개를 바닥에 나란히 둘 수 없어, 실리콘 기둥을 세우고 전류를 아래에서 위로 흘린다. 기둥 아래에는 비트라인을 묻고, 옆면에는 워드라인을, 꼭대기에는 커패시터를 올린다. 삼성전자는 이를 VCT, SK하이닉스는 VG, CXMT는 VSG라고 부르지만 원리는 같다. 새로운 기술은 아니다. 업계는 20년 넘게 4F²를 연구해 왔다. 삼성전자는 이미 2009년에 테스트 칩을 공개했고, CXMT도 2021년부터 관련 논문을 꾸준히 내놨다. 그런데도 아직 양산에 성공한 곳은 없다. 진종문 경남대 반도체부트캠프사업단 교수는 “4F²는 아이디어가 없어서 못 만든 게 아니라 너무 어렵고 비싸서 아무도 양산하지 못한 기술"이라고 설명했다. 난관은 트랜지스터를 세우는 구조 자체에서 비롯된다. 비트라인을 기둥 아래 땅속에 묻다 보니 저항이 커져 신호가 느려진다. 머리카락 굵기의 수천분의 1에 불과한 기둥 수십억 개를 휘거나 쓰러지지 않게 똑같이 깎아내는 것도 어렵다. 기둥을 데이터가 통과하면서 내부가 밑의 영역과 전기적으로 끊기는 '플로팅 바디' 현상도 생긴다. 셀이 전하를 붙잡아 두는 시간이 짧아지고, 그만큼 자주 다시 충전해야 해 전력 소모가 늘어난다. ◇ '셀 면적 33% 축소'의 함정 다만 발표 내용만으로는 실제 기술 수준을 판단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칩 용량·속도·수율·선폭이 모두 공개되지 않았고, '양산'이라는 단어도 없었다. 4F²를 제품 전체에 적용했는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셀 면적 33% 축소'라는 수치도 따져볼 부분이 있다. 셀 면적 축소 효과는 선폭이 같을 때만 성립한다. 15㎚ 선폭으로 만든 CXMT의 4F² 셀은 약 900㎚²다. 반면 국내 업체가 11~12㎚ 공정으로 제조하는 6F² 셀의 면적은 약 730~860㎚²로, 양산 공정과 이론적 면적을 기준으로 추산하면 오히려 더 작거나 비슷한 수준이다. 2년 뒤 삼성전자가 'D0a' 공정으로 만들 4F² 셀은 361㎚²로, CXMT 셀의 40% 크기에 그친다. 진 교수는 “선폭에서 뒤처진 만큼 구조를 바꿔 얻은 이득이 상쇄된다"며 “4F²라는 이름만으로 더 앞선 제품이라 보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발표 시점을 두고도 해석이 엇갈린다. CXMT는 지난 7월 상하이 증시에 상장했고, 9월에는 주력 미세공정 D램 양산을 알렸다. 이번에는 소비자용을 넘어 진입 장벽이 가장 높은 서버 시장을 첫 무대로 내세웠다. 세계 D램 점유율 10% 안팎으로 4위에 오른 기세를 이어가려는 행보로 풀이된다. 이 점유율 수치 역시 중국 내수 판매 비중과 가격 산정 방식을 따져 정확성을 검증해 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진 교수는 “연내 출시는 대량 양산과 다르고, 서버용 메모리는 고객사의 까다로운 장기 인증을 통과해야 비로소 팔린다"며 “해외 빅테크의 인증 문턱을 넘기 전까지 이번 메시지가 겨냥한 청중은 중국 밖이 아니라 중국 안의 고객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김하나 기자 uno@ekn.kr

“PHP 해킹 시도 수백만건”…취약점 공개 나흘 전부터 공격 시작

전 세계 웹사이트에 널리 쓰이는 프로그래밍 언어 PHP의 보안 취약점을 노린 해킹 시도가 수백만 건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취약점이 공식 공개되기 나흘 전부터 공격이 시작된 정황도 확인됐다. 일본과 유럽에서는 금융사와 항공사, 정부 기관 등이 해킹 피해를 막기 위해 일부 온라인 서비스를 중단했다. 24일 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아마존 최고정보보안책임자(CISO)인 CJ 모지스 보안공학 담당 부사장은 지난 22일(현지시간) 자사 보안 블로그를 통해 PHP 취약점이 공개되기 나흘 전인 17일부터 이를 악용하려는 공격 시도를 포착했다고 밝혔다. 아마존은 자체 사이버 공격 탐지 시스템인 '매드팟(MadPot)'을 통해 관련 공격을 확인했다. 최초 공격은 상업용 익명화 네트워크와 연관된 인터넷주소(IP)에서 발생했다. 취약점 공개 당일인 21일에도 서로 다른 네트워크를 이용한 공격이 추가로 포착됐다. 아마존은 여러 공격자가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다만 공격자가 공개되지 않은 취약점 정보를 어떤 경로로 확보했는지, 실제 서버 침투에 성공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아마존은 취약점이 공개되고 보안 패치가 배포된 이후에도 불과 몇 시간 만에 새로운 공격 코드가 등장했다고 설명했다. 공격 시도는 취약점 공개 직후 급증했다. 글로벌 인터넷 인프라 기업 클라우드플레어의 매슈 프린스 최고경영자(CEO)는 소셜미디어 엑스(X)를 통해 “공식 발표 전 10시간 동안 수천 건의 공격 시도가 관측됐다"고 밝혔다. 프린스 CEO에 따르면 발표 45분 만에 공격 시도가 수만 건, 2시간 만에 수십만 건으로 늘었으며 이후 수백만 건에 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이는 실제 해킹 성공 건수가 아닌 공격 시도 건수다. 이번에 발견된 취약점은 'PHP2Shell'로 불리는 보안 결함 2건이다. 공격자가 별도의 인증 절차 없이 서버에서 임의의 코드를 실행할 수 있어 정보 유출이나 시스템 장악으로 이어질 수 있다. PHP 개발진은 지난 21일 이를 수정한 보안 업데이트를 배포했다. 해외에서는 해킹 피해를 막기 위한 서비스 중단이 잇따랐다. 일본 노무라증권과 전일본공수(ANA), 동일본여객철도(JR동일본)는 일부 온라인 서비스를 일시 중단했다. 일본 재무성과 기상청, 국세청 등 정부 기관도 예방 차원에서 웹서비스 운영을 제한했다. 유럽에서도 긴급 조치가 이어졌다. 프랑스 통신그룹 오랑주는 자회사들이 운영하는 PHP 기반 웹사이트와 애플리케이션의 접속을 차단했다. 핀란드 정부의 정보기술 서비스 제공기관 발토리는 중단된 공공 웹서비스에 보안 패치를 적용한 뒤 접속을 순차적으로 재개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정부가 대응에 나섰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은 지난 22일 민간 분야 사이버위기 경보를 '관심'에서 '주의'로 격상했다. 주요 기업과 기관에 긴급 보안 조치를 안내하고 취약점 점검과 업데이트를 권고했다. 보안 패치가 배포됐지만 모든 웹사이트가 즉시 대응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독일 디지털산업협회 비트콤의 펠릭스 쿨렌캄프 보안책임자는 “대형 업체들은 상당수가 업데이트를 마쳤지만 복잡한 정보기술(IT) 시스템을 운영하거나 규모가 작은 기관은 조치에 더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인공지능(AI) 기술의 발전으로 취약점 공개 이후 공격 도구가 만들어지는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모지스 부사장은 보안 취약점이 공개된 뒤 공격 코드가 개발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크게 줄었다며 기업들이 보안 패치 적용 주기를 기존 7~30일 단위에서 시간 단위로 단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나현 기자 knh@ekn.kr

이재용, UAE서 귀국하자마자 선영行…故 이건희 6주기 추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3일 경기 수원시 선영에서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 6주기 추도식을 지켰다. 아랍에미리트(UAE) 현장 경영을 마치고 귀국한 날 곧바로 선영을 찾았다. 추도식 뒤에는 사장단과 오찬을 하면서, 선대회장이 재임 내내 강조했던 기술 투자가 지금도 중요한 과제라는 점을 짚은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에 따르면 이날 추도식은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 가족 선영에서 열렸다. 외부에 공개하는 공식 행사는 따로 두지 않았고 헌화와 참배 위주로 치렀다. 기일은 25일이지만 올해는 일요일과 겹쳐 이틀 앞당겼다. 이 회장은 오전 8시 40분께 검은색 세단을 타고 선영에 도착했다. 검은 정장 차림으로 묘소 앞에 서서 두 번 절하고 묵례했다. 이어 술잔을 받아 묘소 주변에 뿌린 뒤 10분 남짓 참배를 마치고 8시 53분께 자리를 떴다. 사장단은 뒤이어 도착했다. 오전 9시 40분께 전영현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반도체)부문장(부회장), 노태문 디바이스경험(DX·완제품)부문장(사장) 등 현직 경영진 50여명이 고인을 기렸다. 홍라희 리움미술관 명예관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삼성물산 사장 등 유족들도 각자 일정에 맞춰 선영을 다녀간 것으로 알려졌다. 참배를 마친 이 회장과 사장단은 경기 용인 삼성인력개발원 창조관으로 옮겨 점심을 함께했다. 창조관은 삼성 신입사원 교육시설로, 이 선대회장의 흉상이 놓인 곳이다. 올해 추도식은 이 회장의 회장 취임 4주년을 나흘 앞두고 열렸다. 이 회장은 2022년 10월 27일 회장에 올랐다. 그는 추도식 뒤 별도 메시지를 거의 내지 않았다. 다만 부회장이던 2022년에는 2주기 추도식 후 사장단 오찬에서 “지금은 더 과감하고 도전적으로 나서야 할 때"라며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앞서 준비하고 실력을 키워나가야 한다"고 당부한 바 있다. 6주기를 맞아 이 선대회장이 남긴 도전과 유산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출발점은 반도체였다. 이 선대회장은 1974년 자금난을 겪던 한국반도체에 사재를 넣으며 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국내 전자산업은 핵심 부품을 해외 기술에 기대고 있었다. 1차 오일쇼크로 세계 반도체 기업들이 구조조정에 들어간 때였고, 삼성 안에서도 성공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러나 이 선대회장은 자원이 부족한 나라가 선진국과 겨루려면 고부가가치 첨단산업을 키워야 한다고 봤다. 삼성은 1983년 이병철 창업회장의 '도쿄 선언'을 계기로 메모리 사업에 본격 진출했다. 보통 18개월 넘게 걸리던 반도체 공장을 6개월 만에 지었고, 같은 해 64K D램 개발에 성공했다. 1992년에는 세계 최초로 64메가비트(Mb) D램을 내놨고, 이듬해인 1993년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에 올랐다. 사업에 발을 들인 지 약 20년 만에 미국·일본이 장악하던 시장의 정상을 차지한 것이다. 비결로는 불황기의 선행투자와 과감한 기술 선택이 꼽힌다. 1984년 경쟁사들이 4인치 웨이퍼 라인을 늘릴 때 삼성은 6인치로 갈아탔다. 1987년 일본 업체들이 불황으로 투자를 줄일 때는 오히려 신규 라인을 세웠다. 1990년대에는 8인치 양산체제를 먼저 갖췄고, 닷컴버블 붕괴와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차세대 기술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쌓인 기술·원가·생산능력 격차가 '초격차' 전략의 토대가 됐다. 올해 2분기 기준 삼성전자의 글로벌 점유율은 D램 39.4%, 낸드 29.3%로 두 시장 모두 1위다. 미래 기술을 내다본 혜안도 재평가받고 있다. 이 선대회장은 1987년 회장 취임 무렵부터 컴퓨터 활용의 대변혁과 전자·정보기술과 제조업의 융합을 예견했다. 하드웨어만큼 소프트웨어가 중요하다는 점도 일찍 짚었다. 1990년대에는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면 사람에게 남는 핵심 역할은 창조적인 일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30여년이 지난 지금 이런 전망은 생성형 AI와 AI 데이터센터, 휴머노이드 로봇으로 현실이 되고 있다. 경영의 중심에는 '인재제일' 원칙이 있었다. “한 명의 천재가 10만명을 먹여 살린다"는 인재론을 내세워 국적과 출신을 가리지 않고 최고 인재를 확보하라고 주문했다. 1990년에는 지역전문가 제도를 도입했다. 직원이 해외에서 오래 머물며 현지 언어와 문화, 시장을 익히도록 급여와 교육비, 체류비를 지원하는 제도다. 비서실이 처음 올린 선발안은 20여명이었지만, 이 선대회장이 규모를 키우라고 지시해 200여명을 해외로 보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선언한 신경영은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경영 패러다임을 바꾼 전환점이었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라는 말로 상징되는 이 선언은 제품 품질뿐 아니라 조직과 제도, 기업문화 전반의 혁신을 요구했다. 같은 해 7월에는 오전 7시 출근·오후 4시 퇴근의 '7·4제'를 도입해 퇴근 후 어학과 자기계발에 시간을 쓰도록 했다. 생산현장에는 불량이 나면 원인을 해결할 때까지 라인을 세우는 '라인스톱제'가 들어섰다. 1995년 구미사업장에서는 기준에 못 미친 휴대전화 등 약 500억원어치 제품을 불태우는 '불량제품 화형식'을 열어 품질경영 원칙을 조직에 새겼다. 이 선대회장은 2014년 5월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투병하다 2020년 10월 25일 향년 78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문화예술 유산은 국민의 자산이 됐다. 유족들은 2021년 4월 고인이 평생 모은 문화재와 미술품 2만3000여점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기증했다. 기증품에는 정선의 '인왕제색도', 김홍도의 '추성부도' 같은 전통미술 대표작이 들어 있다. 김환기·박수근·이중섭의 근현대 작품과 모네·피카소 등 해외 거장의 작품도 포함됐다. 서울에서 출발한 기증품 전시는 광주·대구·청주·제주·경남·부산·울산 등 전국으로 이어졌다. 'KH컬렉션' 국내 순회전 누적 관람객은 350만명을 넘어, 단일 컬렉션 전시로는 국내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해외 순회전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11월 미국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에서 시작해 올해 3월 시카고미술관을 거쳤고, 지난 1일부터는 영국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다. 영국박물관이 대규모 한국 미술 특별전을 여는 것은 1984년 이후 42년 만이다. 고려청자와 조선 서화, 근현대미술 등을 통해 2000년에 걸친 한국 예술의 흐름을 소개한다. 삼성은 오는 28일 경기 용인 삼성전자 인재개발원 콘서트홀에서 6주기 추모 음악회를 열고 올해 추모 일정을 마무리한다. 고인이 생전 각별히 아꼈던 문화예술로 그 뜻을 기리는 자리다. 이 회장을 비롯한 오너 일가와 주요 계열사 사장, 임직원이 참석할 예정이다. 이 회장은 음악회에 앞서 인재개발원에서 신임 임원과 우수 직원들을 격려하고, 이후 신임 임원·주요 경영진과 만찬을 함께 할 예정이다. 김하나 기자 uno@ekn.kr

[현장] “비싸도 살 건 사야죠”…329만원 아이폰에 17시간 밤샘

23일 오전 8시 서울 중구 애플 명동 매장. 직원들이 카운트다운을 외치자 매장 앞에 줄을 선 고객들이 박수를 치며 입장했다. 애플의 첫 폴더블 스마트폰 '아이폰 듀오'를 받으려는 사람들이다. 329만원부터 시작하는 가격에도 개점 직전 대기 인원은 100명을 넘어섰다. 가장 먼저 줄을 선 고객은 전날 오후부터 17시간을 기다렸다. 이날 오전 7시 30분부터 매장 앞에는 사전예약한 제품을 받으려는 고객들이 모여들었다. 개점 시간이 가까워지자 줄은 매장 입구에서 건물 끝까지 이어졌다. 고객들은 휴대전화를 들여다보거나 일행과 대화를 나누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가장 먼저 줄을 선 사람은 인천에서 온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박성건(34)씨였다. 박씨는 전날 오후 3시부터 매장 앞을 지켰다. 휴대전화 액세서리 관련 업무에 신제품을 활용하기 위해서다. 그는 촬영할 때 아이폰 듀오를 카메라 모니터 대신 사용할 계획이라고 했다. 박씨는 “절대적인 가격 자체는 높지만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따로 샀을 때 가격과 비교하면 합리적이긴 하다"며 “감독 일을 하지 않았다면 고민했겠지만 업무에 필요하니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하다"고 말했다. 두 번째로 줄을 선 영상 PD 구태영(34)씨도 전날 오후 3시부터 기다렸다. 구씨 역시 휴대전화 케이스 관련 업무를 위해 사전예약한 제품을 받으러 왔다. 오전 8시 매장 문이 열리자 직원들이 박수를 치며 고객들을 맞았다. 고객들은 약 30명씩 나눠 입장했다. 제품을 수령한 뒤 곧바로 매장을 떠나기보다 전시대로 향하는 사람이 많았다. 고객들은 아이폰 듀오를 여러 차례 접었다 펼치며 화면 가운데 주름을 살폈다. 기존 휴대전화와 양손에 하나씩 들고 무게를 비교하거나 펼친 화면에서 두 개의 앱을 동시에 실행해 보기도 했다. 화면을 반쯤 접어 영상을 재생하는 기능에도 관심을 보였다. 제품을 펼치자 작은 태블릿PC와 비슷한 크기의 화면이 나타났다. 접고 펴는 동작은 부드러웠지만 한 손으로 오래 들기에는 무게가 느껴졌다. 접히는 부분의 주름은 정면보다 비스듬히 볼 때 더 눈에 띄었다. 개점 직후 전시대 주변으로 고객들이 몰렸지만 별도의 체험 대기줄은 생기지 않았다. 오전 9시가 지나자 매장 밖 대기줄도 대부분 사라졌다. ◇ “첫인상 만족, 가격 빼고"…최고가 구매자도 이날 매장에서 만난 공공기관 직원 정우덕(46)씨는 아이폰 듀오 최고가 모델을 구매했다. 스타 화이트 색상의 2테라바이트(TB) 모델로 가격은 509만원이다. 정씨는 지난 16일 사전예약을 시작하자마자 주문해 이날 오전 8시 제품을 받았다. 매년 새 아이폰이 나오면 구매한다는 정씨는 제품을 직접 펼쳐 보이며 화면 가운데 접히는 부분을 가리켰다. 그는 “자세히 보면 굴곡이 있기는 한데 굉장히 잘 숨겼다"며 “첫인상은 만족스럽다. 가격 빼고"라고 말했다. 기존에 아이폰17 프로 맥스를 사용하던 정씨는 넓어진 화면에서 사진 편집과 영상 확인을 할 수 있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았다. 무게는 적응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평가했지만, 액션 버튼과 얼굴인식 기능인 페이스ID가 빠진 점은 아쉽다고 했다. 서울 왕십리에서 온 직장인 박덕영(31)씨는 삼성전자 폴더블폰 대신 아이폰 듀오를 선택했다. 사진 관련 콘텐츠를 제작하는 그는 갤럭시 Z 폴드의 화면 필름 질감과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아 구매를 미뤄왔다고 했다. 박씨는 “예전부터 폴더블폰을 사고 싶었는데 삼성 제품은 플라스틱 필름 질감이 싫어 계속 머뭇거렸다"며 “이번에는 제가 원하는 형태에 사용하던 애플 생태계의 제품이 나와 구매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 현장 구매 못 해…배송은 내년 1월 출시 첫날 매장에 고객들이 몰렸지만 사전예약 없이 제품을 바로 구매할 수는 없었다. 애플 명동 매장 직원에 따르면 이날은 사전예약 고객을 대상으로 제품 수령이 이뤄졌다. 매장에서 새로 주문할 수는 있지만 당일 가져갈 수 있는 물량은 없었다. 지금 주문하면 내년 1월에 제품을 받을 수 있다는 안내도 나왔다. 아이폰 듀오는 지난 16일 사전예약을 시작한 직후부터 초기 물량이 빠르게 소진됐다. 이동통신 3사의 1차 사전예약 물량은 1분 만에 동났고, 애플 공식 온라인스토어에서도 예약 시작 약 30분 만에 전 모델의 배송 예정일이 내년 1월로 밀렸다. 구매자는 30~40대에 집중됐다. SK텔레콤이 공개한 사전예약 현황에 따르면 30대가 36%, 40대가 35%를 차지했다. 두 연령대를 합치면 전체의 71%다. 아이폰 듀오는 애플이 처음 내놓은 폴더블 스마트폰이다. 책처럼 안쪽으로 접는 형태로, 접으면 5.4인치 외부 화면을 사용하고 펼치면 7.6인치 내부 화면을 쓸 수 있다. 무게는 254g, 펼쳤을 때 두께는 5.2㎜다. 국내 출고가는 256기가바이트(GB) 모델 329만원, 512GB 359만원, 1TB 419만원, 2TB 509만원이다. 기본 모델 가격은 삼성전자 갤럭시 Z 폴드8보다 101만원 비싸다. 애플은 국내 초기 공급 물량과 전체 사전예약 판매량을 공개하지 않았다. 김나현 기자 knh@ekn.kr, 이수진 인턴기자, 유재호 인턴기자

최태원·이재용 빠진 국감…호남 반도체 투자계획 검증 ‘미완’

호남 반도체 메가프로젝트가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기업들의 구체적인 투자계획을 확인하지 못한 채 주요 검증 과제를 남겼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증인 채택이 무산된 가운데 정부의 기반시설 구축비용은 처음 공개됐지만, 정작 생산시설을 건설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착공 일정과 단계별 투자 집행계획은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양사도 여전히 구체적인 일정에 관한 답변은 밝히지 않고 있다. 23일 국회와 재계에 따르면 전날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의 산업통상부 종합국정감사에서는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의 기반시설 비용과 재정지원 체계, 군공항 이전 문제 등이 집중적으로 다뤄졌다. 산업부는 전력·용수·폐수 등 1단계 기반시설 구축에 5조4000억원이 소요된다는 추계를 처음 제출했다. 그러나 군공항 이전과 도로망, 정주여건 조성 등을 포함한 전체 사업비는 공개되지 않았다. 국회가 추가 자료 제출을 요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정부의 재정 부담과 사업 관리체계에 대한 질의는 이어졌지만 기업들이 실제 어느 시점에 얼마를 투자할 것인지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은 이뤄지지 않았다. ◇ 투자 의지는 확인…실행 일정은 여전히 미공개 정부는 지난 6월 호남권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각각 메모리 반도체 팹 2기씩 총 4기를 구축하는 장기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2030년 첫 양산을 목표로 관련 기반시설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기업들도 사업 추진 의지를 공개적으로 밝혀왔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 9일 광주 군공항 부지를 방문해 반도체 수요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용인과 호남의 생산시설을 병행 건설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전력·용수 공급이 늦어지더라도 여건이 허락하면 공사를 먼저 시작할 수 있다는 입장도 내놨다. 삼성전자 역시 경영진의 현장 방문 등을 통해 투자 준비를 진행하고 있다. 다만 양사 모두 호남 신규 팹의 구체적인 착공 시점과 연도별 투자 집행계획은 공개하지 않고 있다. 본지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호남 신규 팹의 착공 일정과 단계별 투자 집행계획, 공개 시점 등을 확인했으나 양사 모두 구체적인 계획을 밝히지 않았다. 이는 기업들이 투자를 철회하거나 사업 추진을 중단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반도체 생산시설은 시장 수요와 기술 변화, 장비 조달 및 기반시설 구축 상황에 따라 투자 시기를 조정할 수 있다. 다만 정부가 제시한 2030년 양산 목표를 판단할 수 있는 기업별 실행 일정이 아직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다는 점은 남는다. ◇ 용인과 호남 병행 투자…자금·인력 배분도 과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미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대규모 생산시설 확충을 추진하고 있다. 여기에 호남 신규 팹 건설까지 병행할 경우 기업들은 투자 재원뿐 아니라 첨단 생산장비와 전문인력 확보 일정도 함께 조정해야 한다. 특히 반도체 산업은 팹 건설에 장기간이 소요되고 장비 도입에 막대한 비용이 투입된다. 시장 상황에 따라 실제 투자 집행 시점이 달라질 수 있어 정부의 산업단지 조성 일정과 기업의 설비투자 일정이 일치하는지가 중요하다. 호남 클러스터의 경우 군공항 이전과 전력·용수 공급 등 선행 과제도 남아 있다. 이번 국감에서는 기반시설 비용과 재정지원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지만 기업별 투자 일정과 이를 연계한 구체적인 공정표까지 확인되지는 않았다. ◇ 총수 출석 무산…기업 투자계획 직접 확인 못 해 이번 국감에서 야당은 이재용 회장과 최태원 회장을 증인으로 채택해 호남 반도체 투자계획 등을 확인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그러나 여야 간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두 총수의 출석은 무산됐다. 국감에서는 산업부와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정부의 준비 상황과 기반시설 구축계획을 검증했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구체적인 투자 집행계획을 기업 측으로부터 직접 확인할 기회는 마련되지 않았다. 물론 기업 총수의 출석이 투자계획 검증의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사업 책임 임원의 설명이나 기업의 공식 자료 제출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이번 국감에서는 이러한 방식의 직접 검증도 이뤄지지 않았다. 한 산자위 의원실 관계자는 “정부가 제시한 2030년 양산 목표를 실제 투자 일정으로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향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착공 계획과 단계별 투자 집행 일정이 보다 명확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지성 기자 jjs@ekn.kr

[현장] 22만원 바람막이도 품절…한남동에 줄 선 ‘팔란티어 팬들’

22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문을 연 미국 인공지능(AI) 기업 팔란티어의 팝업스토어. 22만5000원짜리 검은색 바람막이는 오후 1시 30분쯤 이미 품절돼 있었다. 한국 한정판으로 나온 흰색 바람막이에도 방문객들의 관심이 쏠렸다. 가격이 부담스러운 일부 방문객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스티커를 살펴보며 구매를 망설였다. 정부기관과 기업에 소프트웨어를 공급하는 미국 AI 기업의 굿즈를 사기 위해 사람들이 몰린 것이다. 이날 낮 12시 55분쯤 행사장 앞에는 사전 예약을 마친 방문객 50여명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디제이(DJ)가 틀어놓은 음악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오후 1시부터 입장이 시작됐다. 1층에는 팔란티어 로고 모양의 금속 벤치가 놓였고, 연기를 활용한 전시 공간이 마련됐다. 2층에는 바람막이와 후드티 등 굿즈를 판매하는 매장이 들어섰다. 팔란티어가 지난해 성수동에 이어 올해 한남동에서 두 번째 팝업스토어를 열었다. 22일부터 이틀간 진행되는 이번 행사에서는 가을·겨울(FW) 신상품을 한국에 먼저 공개했다. 팔란티어는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국방부 등에 데이터 분석 소프트웨어를 공급하며 성장한 기업이다.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제품을 판매하지 않지만, 한국에서는 굿즈를 구매하기 위해 줄을 서는 팬층이 형성돼 있다. ◇ 후드티 3장 사고, 엔지니어 만나러 오고 이날 행사장을 찾은 방문객들의 목적은 제각각이었다. 굿즈를 사려는 사람뿐 아니라 팔란티어 직원들을 직접 만나거나 회사의 기술을 알아보려는 사람도 있었다. AI 전환(AX) 컨설팅 프리랜서인 신유진(20대)씨는 이날 후드티 3장을 구매했다. 지난해 성수동 팝업을 찾았다가 긴 대기 줄 때문에 입장을 포기했던 그는 올해 사전 예약에 성공했다. 신씨는 대학원 졸업 후 스타트업을 공동 창업했으며, 평소 제조기업 컨설팅에 활용할 수 있는 팔란티어의 기술에 관심을 가져왔다고 했다. 신씨는 “IT 업계에서는 콘퍼런스 등에 갈 때 기업 굿즈를 입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팔란티어 채용에도 지원했다는 그는 이날 구매한 후드티를 입고 지원 영상을 촬영할 계획이라고 했다.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는 대학생 이동민(24)씨는 굿즈를 구매하지 않았다. 회사 관계자들을 만나기 위해 행사장을 찾았기 때문이다. 지난 9~10월 팔란티어 엔지니어들과 채용 면접을 진행했다는 이씨는 “면접 과정에서 회사에 더 관심이 생겼다"며 “회사 사람들과 네트워킹하려고 왔다"고 말했다. 이씨는 팔란티어 주식 투자에는 관심이 없다고 했다. 그는 “그냥 회사 자체에만 관심이 있다"며 “국내에서는 AI를 실제로 만드는 기업이 많지 않아 해외 기업에 더 관심이 간다"고 말했다. 굿즈를 구매하지 않은 이유를 묻자 “돈 없는 대학생이라서"라며 “가격이 많이 비싸더라"고 했다. 전직 방송계 종사자인 안상혁(29)씨는 동생의 주식 투자를 계기로 팔란티어를 알게 됐다. 방송계에서 AI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기업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고 했다. 안씨는 “팔란티어는 정보를 많이 공개하지 않는 기업으로 알고 있었는데, 한국에서 팝업을 연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고 말했다. 그는 “제일 싼 게 스티커더라. 스티커라도 하나 사 갈까 생각 중"이라며 구매를 망설였다. ◇ '소버린 AI' 내걸었지만 기술 시연은 없어 올해 팝업의 주제는 '소버린 AI(주권 AI)'다. 기업이 자체 데이터와 AI 시스템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하면서 AI를 활용한다는 개념이다. 행사장 화면과 굿즈에는 '소버린'이라는 문구가 등장했지만, 관련 기술을 직접 체험하거나 작동 원리를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전시보다는 의류와 기념품 판매에 무게를 둔 행사였다. 팔란티어는 굿즈를 통해 소버린 AI에 대한 관심을 높이겠다는 입장이다. 현장에서 만난 채드 월퀴스트 팔란티어 AI 아키텍처 총괄은 “굿즈 자체보다는 소버린 AI라는 메시지가 중요하다"며 “티셔츠에 관련 문구를 넣으면 사람들이 그 의미를 궁금해하고 대화를 시작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많은 사람이 자신의 데이터와 지식이 어떻게 활용되는지 모른 채 AI를 사용한다"며 “굿즈를 소버린 AI에 대한 대화를 시작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팔란티어가 한국에서 2년 연속 팝업을 연 배경에는 높은 굿즈 구매 수요와 국내 사업 확대가 있다. 월퀴스트 총괄은 “한국은 미국을 제외하면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시장 중 하나"라며 “조선과 인프라 등 중요한 산업에서 뛰어난 기술력을 갖추고 있어 팔란티어의 사업과 접점이 많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은 작은 나라임에도 팔란티어 굿즈 구매 규모가 세계 2~3위 수준"이라며 “유럽 등 다른 지역보다 많이 구매한다"고 했다. 팔란티어가 올해 팝업 주제로 소버린 AI를 내세운 것도 한국 제조업의 특성과 관련이 있다. 월퀴스트 총괄은 “소버린 AI는 기업과 기관이 보유한 지식이 외부 AI 모델 회사로 넘어가지 않도록 스스로 지키는 것"이라며 “한국은 특히 조선 등 제조업에서 축적한 기술과 노하우가 중요한 만큼 이를 보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리가 말하는 주권 보호란 모든 기업과 기관이 자체 지식과 기술에 대한 소유권을 갖도록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팔란티어는 국내 기업과의 협력도 넓히고 있다. 지난 1월 정기선 HD현대 회장과 알렉스 카프 팔란티어 최고경영자(CEO)는 스위스 다보스포럼에서 만나 AI 협력을 그룹 전반으로 확대하기로 했다. 기존 조선과 정유, 건설기계에 이어 로봇과 전력기기 분야에도 팔란티어의 AI 플랫폼을 적용할 계획이다. 지난 7월에는 KT와 함께 네트워크 보안 관제와 에너지 운영을 최적화하는 AI 에이전트 개발에도 나섰다. 김나현 기자 knh@ekn.kr, 김윤정 인턴기자, 유재호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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