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헌의 체인지] 투표용지가 모자란 민주주의](http://www.ekn.kr/mnt/thum/202606/news-p.v1.20260416.e74981dbd1234907aa315469fbcafa49_T1.png)
2010년 영국 총선 때 투표소 앞에 긴 줄이 늘어섰다. 일부 유권자는 마감시간까지 기다리고도 투표하지 못했다. 영국 선거위원회는 즉각 조사에 들어갔고, 원인을 부실한 계획, 부족한 인력, 허술한 비상대응에서 찾았다. 이후 “마감시간 전에 줄 선 유권자는 투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제도 개선이 즉시 추진됐다. 민주주의 선진국의 대응은 이렇다. 사고가 나면 사과에서 끝내지 않는다. 제도를 고친다. 매뉴얼을 법으로 바꾼다. 2026년 대한민국 서울의 투표소에서는 투표용지가 모자랐다. 6·3 지방선거 본투표일, 일부 투표소에서 용지 부족으로 투표가 지연됐다. 중앙선관위는 긴급 이송과 투표시간 연장으로 수습에 나섰고, 허철훈 사무총장이 대국민 사과를 했다. 국민의힘은 서울 개표 중단과 재투표를 요구했고, 민주당은 재선거 요구에 선을 그었다. 정치권의 공방은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다. 문제의 본체는 여야가 아니다. 선관위다. 투표용지가 모자란다는 것은 단순 행정 착오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기본 부품이 빠진 것이다. 병원에서 산소가 떨어진 것과 비슷하다. 국민에게 “당신의 주권 행사는 잠시 멈추라"고 말한 것이다. 헌법이 보장한 참정권을 선관위의 안이함이 붙잡아 세운 사건이다. 더 심각한 것은 처음이 아니라는 대목이다. 2022년 대선 사전투표 때는 이른바 '소쿠리 투표'가 있었다. 확진자 투표용지가 바구니, 종이상자, 쇼핑백에 담겼다. 비밀투표와 직접투표 원칙이 흔들렸다. 사과하고 사무총장이 물러났다.이후 바뀐 것은 별로 없었다. 왜 반복되는가. 답은 선관위의 조직 문화에 있다. 선관위는 독립성을 방패로 삼아 왔다. 독립은 정치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우라는 뜻이지, 국민 감시로부터 벗어나라는 의미가 아니다. 선관위는 독립을 무감시로, 중립을 무책임으로, 헌법기관의 권위를 불가침 특권으로 착각해 왔다. 자녀 특혜채용 논란 때도 그랬다. 감사원 감사 문제를 둘러싼 헌법적 논쟁은 별개로, 국민 눈에는 '그들만의 성'처럼 보였다. 헌재도 감사원의 선관위 직무감찰은 독립기관 권한 침해라고 판단했지만, 그렇다고 선관위 내부의 폐쇄성과 부실이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해외 사례는 또 다른 교훈을 준다. 2022년 미국 애리조나 매리코파 카운티에서는 프린터 설정 문제로 일부 투표지가 개표기에 제대로 읽히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공화당 측은 투표시간 연장을 요구했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당국은 해당 투표지를 보안함에 넣어 중앙 개표소에서 집계하도록 안내했고, “유권자가 돌려보내지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핵심은 투명한 설명, 대체 절차, 사후 검증이었다. 한국 선관위에 없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현장에는 위기 대응력이 없었고, 중앙에는 국민을 납득시킬 언어가 없었다. “용지를 이송했다", “기다린 사람은 투표하게 했다"는 책임회피 변명에 불과하다. 어느 투표소에서 몇 장이 부족했는지, 왜 예측하지 못했는지, 사전투표율과 본투표 예상치를 어떻게 계산했는지, 예비 투표용지 비축 기준은 무엇이었는지, 책임자는 누구인지 부터 즉시 공개해야 한다. 대책은 분명하다. 첫째, 전국 투표소별 투표용지 수급 시뮬레이션을 의무화해야 한다. 사전투표율, 과거 투표율, 인구 이동, 접전 지역 변수까지 반영한 위험등급제를 만들어야 한다. 둘째, 예비 투표용지 비축 기준을 법령에 명시해야 한다. 셋째, 투표용지 재고 현황을 중앙 상황실이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넷째, 부족 사태 발생 시 인근 투표소·구선관위·시선관위 간 긴급 이송 매뉴얼을 분 단위로 만들어야 한다. 다섯째, 투표 종료 전 줄 선 유권자의 권리 보장 절차를 법률로 명확히 해야 한다. 여섯째, 사고 지역은 독립 조사단이 원인과 책임을 조사하고 보고서를 공개해야 한다. 더 근본적으로는 선관위의 혁명수준의 개혁이다. 선관위는 헌법기관이자 선거 관련 준사법적 판단을 수행하는 기관이다. 여느 기관보다 더 엄격해야 한다. 외부감사와 내부통제의 헌법적 조화부터 새로 설계해야 한다. 정치권력의 감찰은 막되, 국민이 추천한 독립감사위원회, 국회 보고 의무, 정보공개 확대, 고위직 이해충돌 심사, 친인척 채용 전수공개, 현장 선거관리관 자격인증제 등을 도입해야 한다. 선관위가 스스로 감시하지 못하면 국민이 감시할 수밖에 없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기본적 감수성 부족이다. 헌법 감수성, 주권 감수성, 현장 감수성이 모두 엄청 모자랐다. 국민은 세계 최고 수준의 시민의식으로 줄을 서서 투표했다. 선관위는 그 수준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제 선관위는 선택해야 한다. 또 사과만 하고 넘어갈 것인가. 선진 선관위로 환골탈태할 것인가. 국민이 원하는 것은 국민 주권 앞에 겸손한 선관위다. 민주주의를 관리하는 기관답게, 민주주의 앞에서 가장 먼저 책임지는 기관이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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