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권브이가 도로를 달리면 이런 모습일까. 자동차라기보다 튼튼하고 거대한 로봇의 얼굴이 보인다. 수직에 가깝게 툭 떨어지는 보닛 라인부터 범상치 않은 첫인상을 준다. 아래쪽으로 깊게 파여 각진 헤드램프는 로봇의 날카로운 눈매 같다. 입체적인 전면부에 좌우에 자리한 부메랑 형태의 이중 주행등까지, 강인한 로봇의 얼굴을 완성한다. 정중앙에 자리한 엠블럼은 마치 동력을 품은 심장같다. 시동을 걸자, 모든 조명이 일제히 빛나며 번쩍거린다. 잠들어 있던 로봇이 천천히 눈을 뜨는 순간이다. 운전석 문을 열면 분위기가 또 한 번 달라진다. 거대한 로봇의 얼굴 뒤에는 파일럿을 위한 조종석이 숨어있다. 몸을 단단히 감싸는 버킷같은 시트에 앉으면 푸른색의 엠비언트 라이트가 마치 숨을 쉬듯 은은하게 점멸한다. 주행을 시작하자 거친 첫인상은 사라진다. 전기 모터가 경쾌하게 차를 밀어내고, 가속 페달을 밟는 만큼 민첩하게 몸을 움직인다. 차를 운전한다기보다, 살아 있는 로봇과 호흡을 맞추는 느낌이다. 지난 4월 르노코리아는 새로운 글로벌 플래그십 하이브리드 SUV, '필랑트'를 야심차게 선보였다. SUV는 한국 완성차 시장에서 가장 대중적인 차종이 됐지만, 동시에 가장 까다로운 차종이기도 하다. 넓은 실내와 헤드룸 개방성, 높은 공간 활용도를 원하면서도 세단 같은 승차감을 갖춰야한다. 가족과 함께 타기 편해야 하지만 혼자 운전할 때도 재미를 잃어서는 안 된다. 심지어 하이브리드라면 연비와 정숙성, 자연스러운 동력 전환까지 모두 만족시켜야 한다. 필랑트는 세단과 SUV의 장점을 하나로 묶은 크로스오버라는 해법을 제시했다. 지난 7월 르노 필랑트를 타고 서울 강남역에서 일산 백석동까지 왕복 60km를 달렸다. 강남의 정체 구간부터 올림픽대로와 자유로, 비가 쏟아지는 도심과 일산 외곽의 비포장도로까지 다양한 환경을 두루 경험했다. 내내 컴포트 모드로 주행했고, 연비는 서울에서 일산까지 18.3km/L, 일산에서 서울까지는 20.1km/L를 기록했다. 공인 복합연비(15.1km/L)를 꾸준히 웃도는 수준이었다. ◇ 조종석 같은 실내…12.3인치 파노라마 스크린 차에 타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마치 레이싱카의 조종석 같은 실내 분위기다. 운전석에 앉으면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 시트'가 몸에 딱 맞게 감기며 안정감을 선사한다. 주변에 흐르는 푸른 엠비언트 라이트는 실내 그라데이션과 어우러져 특유의 미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스티어링휠을 수놓은 빨강·하양·파랑 삼색 스티치와 중앙의 파란 스틸 장식까지, 작은 디테일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무엇보다 압도적인 건 디스플레이였다. 운전석 계기판부터 중앙 디스플레이, 조수석 디스플레이까지 세 개의 파노라마 스크린이 하나의 화면처럼 이어진다. 수평으로 낮게 깔린 대시보드와 합쳐져 개방감이 상당하다. 각각의 디스플레이들은 서로 화면을 주고받을 수 있게 설계됐다. 중앙디스플레이를 손가락 세개로 스와이프하니 네비게이션 창이 그대로 계기판 디스플레이로 넘어왔다. 최근 몇몇 차량들이 턴온턴 안내에 의존하는 점을 감안하면, 꽤나 장점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이다. 헤드업 디스플레이(HUD) 역시 운전자 중심으로 잘 설계한 게 느껴졌다. 크고 선명한 데다 따로 조작하지 않아도 좌석 높이에 맞춰 자동으로 디스플레이 위치를 조절해줬다. 주변 환경에 맞춰 여러 모드로 조정도 가능하다. 여기에 차량의 움직임에 따라 함께 움직이는 작은 비행기 아이콘까지 더해져 조종석에 앉아 있다는 느낌을 은근히 살려준다. 그 외 공조나 미디어 등 웬만한 기능은 에이닷 오토로 음성 조작이 가능했다. ◇ 전기차 같은 정숙성, '찰랑' 흘려보낸 충격 출발하자마자 강남역에서 올림픽대로를 타기까지 30분이 넘는 정체 구간이 이어졌다. 필랑트는 그동안 거의 전기차에 가까운 승차감을 보여줬다. 하이브리드가 맞나 싶을 정도로 조용했다. 다만 내내 가다 서기를 반복하다보니 감속이 다소 적극적으로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곧바로 중앙 디스플레이에서 회생제동 강도를 '저'로 설정하자 브레이크가 훨씬 부드럽고 가볍게 밟혔다. 도심 주행에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감속 감각이었다. 고르지 않은 아스팔트의 잔충격도 차분하게 걸러냈다. 군데군데 깊게 패인 물 웅덩이를 여러 번 지났지만 차는 한 번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충격을 '쿵'라고 받아내기보다는 '찰랑'하고 흘려보내는 느낌에 가까웠다. 일산 외곽의 비포장도로에서는 그 안정감이 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양 옆으로 논밭이 펼쳐진 구불구불한 흙길을 달리는데도 차가 들썩이거나 진동이 실내로 전달되지 않았다. 바닥이 거칠어질수록 오히려 차가 한층 단단하게 중심을 잡고 버틴다는 인상을 받았다. 르노는 필랑트에 주파수 감응형 댐퍼(SFD)를 적용했다. 덕분에 노면에서 전달되는 진동의 주파수를 세밀하게 감지해 서스펜션이 충격을 흡수하는 정도를 실시간으로 자동 조절할 수 있다. 시내 도로와 비포장도로에서 느낀 차분한 승차감이 단순히 '부드럽다'는 수준을 넘어 안정적으로 다가온 이유다. 더 놀라운 건 정숙성이었다. 빗방울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왜 빗소리가 들리지 않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르노는 필랑트에 이중접합 차음 유리를 대폭 적용하고, 액티브 노이즈 캔슬링(ANC) 기술을 적용했다. ◇ 세단 같은 크로스오버의 균형감, 엑티브 드라이버 어시스트 자유로에 다다르자 필랑트는 그야말로 자유롭게 달리기 시작했다. 고속 주행 감각은 의외로 조용한 세단에 가까웠다. 필랑트는 1.64kWh 용량의 하이브리드 배터리를 차체 밑바닥에 배치하고, 차체 비율도 비교적 낮고 길게 설계했다. 무게중심이 안정적으로 아래에 깔려 있다는 느낌이 분명했다. 차선을 변경하거나 급감속을 할 때도 차체가 크게 흔들리지 않았고, 속도를 급하게 올려도 세단처럼 부드럽게 치고 나갔다. 시속 60km 안팎부터는 엔진이 슬슬 힘을 내기 시작하는 듯 했다. 내내 전기차처럼 조용히 움직이다가 자연스럽게 엔진이 등장했다. 인상적이었던 건 전환감이다. 일부 하이브리드에서 느껴졌던 아주 미세한 머뭇거림이나 울컥거림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전기 모터로 달리는 것 같은데 계기판을 보면 이미 엔진이 작동하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액티브 드라이버 어시스트'의 존재감도 확실했다. 일반적인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보다 개입도가 한 단계 높은 레벨2 주행보조 시스템이다. 핸들의 반발력과 제어력이 생각보다 강하고 적극적이었다. 차선을 단단하게 붙잡고 간다는 안정감은 충분했다. 방향 지시등을 켜면 차가 머뭇거림 없이 자연스럽게 차선을 바꿨다. 급하게 끼어들거나 타이밍을 놓친다는 느낌은 없었다. 장거리 주행에서는 확실히 피로를 덜어주는 기능이었다. ◇ 정석 같은 패밀리카, 4천만원대 플래그십 주차를 마친 뒤엔 운전석에서 벗어나 뒷좌석과 조수석을 살펴봤다. 패밀리카로서의 완성도도 높았다. 가장 크게 체감되는 건 뒷좌석 공간이다. 2,820mm의 휠베이스 덕분에 앞좌석을 운전 자세에 맞춰 놓은 상태에서도 무릎 앞 공간이 두 뼘 가까이 남을만큼 넉넉했다. 조수석 전용 디스플레이를 보면 게임이나 영상, 차량 기능 조작을 독립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주행 중에는 실제 도로와 연동되는 레이싱 게임도 지원한다. 무엇보다 운전석에서는 이 화면이 거의 보이지 않도록 편광 필터가 적용됐다. 운전자 시야를 산만하게 방해하지 않는다. 실제로 운전석에 앉으면 조수석에서 화면을 켜거나 어떤 기능을 조작하든 디스플레이가 없는 것처럼 까맣게 보였다. 실내 온도와 환기, 시트 위치, 조명 등 개인 설정을 가족 구성원별로 저장할 수 있는 점도 패밀리카로서의 활용도를 높여준다. 필랑트는 테크노 4,331만9,000원, 아이코닉 4,696만9,000원, 에스프리 알핀 4,971만9,000원부터 시작한다. 시승차였던 '에스프리 알핀 1955'는 1,955대 한정 런칭 에디션으로 5,218만9,000원이다. 가장 낮은 트림인 테크노에도 이중접합 차음 유리와 액티브 노이즈 캔슬링, 레벨2 주행보조 시스템 등 핵심 사양이 기본 적용된다. 동급 하이브리드 SUV와 비교하면 상품 구성대비 가격 경쟁력은 충분한 편이다. 박서현 기자 shine@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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