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인사이트] 갈등을 줄이는 비전의 조건

선거철마다 정치권은 '비전'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비전이 정작 사회의 갈등을 줄이기는커녕 키우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 여야를 막론하고 반복되는 이 패턴에는 구조적인 이유가 있다. 문제는 비전의 유무가 아니라 비전의 '설계 방식'에 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아니라 설계가 정교한 사람이 결국 신뢰를 얻는다는 사실을, 정치는 자주 잊는다. 갈등을 키우는 비전과 줄이는 비전은 대개 하나의 질문에서 갈린다. “누가 문제인가"를 규정하느냐, “무엇이 문제인가"를 규정하느냐다. 전자는 결집력은 있지만 필연적으로 상대 진영을 적으로 세우고, 후자는 합의를 만들기는 어렵지만 갈등을 완화하며 지속가능한 정책으로 이어진다. 이 차이는 이념의 좌우 문제가 아니라 정치 기술의 문제에 가깝다. 1987년 재정위기에 몰린 아일랜드는 정부와 노동계, 재계가 함께 '국가회복 프로그램'에 합의했다. 노동계는 임금 인상을 자제하고 정부는 세제 개편과 일자리 창출에 집중하기로 했다. 어느 한쪽이 상대를 굴복시킨 결과가 아니라, 위기의 원인을 특정 계층이 아닌 구조적 문제로 규정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합의였다. 이 협약은 이후 20년 가까이 이어지며 아일랜드 경제 회복의 토대가 됐다. 한국에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1998년 외환위기 당시 노사정위원회는 기업의 정리해고 유연화와 실업급여 확대라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자에게 각각 고통과 안전판을 동시에 제시하는 합의를 끌어냈다. 갈등을 줄이는 비전은 이렇듯 손실을 감수해야 할 집단을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누가 무엇을 양보하고 무엇을 보상받는지를 명확히 밝힐 때 합의의 정당성이 생긴다. 독일의 사례는 반대로 그 대가를 보여준다. 2003년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는 '어젠다 2010'을 통해 노동시장 유연화와 실업급여 축소를 밀어붙였다. 단기적으로는 지지층의 반발을 불렀고 본인은 정권을 내주는 대가를 치렀지만, 이후 10여 년간 독일 경제의 고용률과 산업 경쟁력을 지탱하는 뼈대가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치적 손실을 감수하고서라도 구조적 문제를 회피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역시 '문제를 규정하는' 비전의 한 형태다. 덴마크의 '유연안정성' 모델도 같은 원리다. 기업의 해고는 쉽게 하되, 실업자에게는 관대한 실업급여와 적극적인 재훈련을 제공한다. 노동계와 경영계 모두에게 '내가 손해 보는 정책'처럼 보이지만, 노사가 함께 설계에 참여했기 때문에 30년 가까이 정치적 지형이 바뀌어도 골격이 유지되고 있다. 시간의 축을 정치 주기 너머로 설정하는 것도 중요한 조건이다. 영국은 2008년 기후변화법을 여야의 압도적 지지로 통과시키며 탄소 감축 목표를 법적 구속력으로 못 박았다. 어느 정당이 집권하든 뒤집기 어려운 장치를 만들어 놓음으로써,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이 요동치며 발생하는 소모적 갈등 자체를 원천적으로 줄인 것이다. 싱가포르가 국가 인재 재교육 체계인 '스킬스퓨처'를 5년, 10년 단위 국가계획으로 못 박아 여러 총리를 거치며 흔들림 없이 이어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책이 선거 결과에 따라 매번 원점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신뢰 자체가, 사회 갈등을 줄이는 자산이 된다. 정리하면 갈등을 줄이는 비전에는 네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적이 아니라 문제를 규정한다. 둘째, 손실과 보상의 주체를 숨기지 않고 명시한다. 셋째, 정치적 손실을 감수할 각오로 구조적 문제를 회피하지 않는다. 넷째, 정치 주기를 넘어서는 시간 설계로 정책의 예측 가능성을 확보한다. 지금 한국 정치에 필요한 리더십은 이 네 조건을 실행 설계 수준까지 구체화할 수 있는 능력이다. 누가 더 큰 목소리를 내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정교하게 손실과 이익을 설계하느냐가 비전의 진정성을 가르는 기준이 될 것이다. 그 설계가 구체적일수록 유권자는 막연한 구호와 실질적 정책을 구분할 수 있게 되고, 정치에 대한 냉소도 함께 줄어든다. 여야 어느 쪽이든, 이 능력을 먼저 증명하는 쪽이 다음 시대의 리더가 될 것이다. bienns@ekn.kr

[이슈&인사이트] 발트 3국이 보여준 디지털 혁신과 녹색 전환

발트 3국인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유럽연합(EU)의 회원국으로서 EU의 쌍둥이 전환(Twin Transition) 전략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디지털 전환과 녹색 전환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이 전략은 기술 혁신과 기후 대응을 결합한 통합적 발전 모델로, 단순한 환경 정책이나 산업 정책을 넘어 지속성이 높은 경제 체제 구축하려는 목표를 가진다. 발트 3국은 소규모 국가라는 특성과 단순한 정책 결정 구조, 높은 행정 효율성을 바탕으로 디지털 행정과 친환경 정책을 빠르게 도입하였으며, 그 결과 EU 내에서도 디지털화 수준과 녹색 정책 추진 속도가 높은 지역으로 평가된다. 이는 소규모 국가라도 정책 유연성과 기술 수용력을 통해 높은 실행력을 확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의 쌍둥이 전환 전략은 구체적 정책 사례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디지털 인프라와 에너지 전환 정책이 결합한 형태가 특징적이다. 에스토니아는 정부 데이터 교환 플랫폼 X-Road를 기반으로 전자정부 시스템을 구축하여 공공 행정 전반의 디지털화를 실현하였는데, 이 시스템은 행정뿐 아니라 보건, 금융, 교육 등 다양한 영역에서 데이터 기반의 정책을 실현하였다. 발트 3국은 에너지 안보와 친환경 전환을 동시에 달성하기 위해 공동 전력망 협력과 재생에너지 확대 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며, 특히 Baltic Energy Grid Synchronization 프로젝트는 유럽 전력망과의 동기화를 통해서 에너지 독립성과 녹색 전환을 동시에 추구하는 대표적 사례이다. 이러한 정책은 디지털 기술과 에너지 정책이 상호 보완적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발트 3국의 쌍둥이 전환은 정책 실행력 측면에서 상당한 성과를 보여준다. 디지털 정부 시스템은 행정 효율성을 높이고 정책 집행 속도를 높였으며, 데이터 기반 행정은 정책 설계와 규제 운영의 정확성과 투명성을 강화하였다. 또한 활발한 스타트업 생태계와 IT산업은 디지털 기술 기반의 녹색 혁신을 촉진하는 핵심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산업 환경은 기술 기반 환경 정책의 실험과 확산을 가능하게 하며, 결과적으로 발트 3국은 디지털 혁신과 친환경 정책을 결합한 정책 모델을 일정 부분 성공적으로 구축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발트 3국은 구조적 제약을 동시에 안고 있다. 제한된 인구 규모와 산업 기반으로 대규모 투자와 첨단 기술 개발을 독자적으로 수행하기 어렵고, 특히 고급 기술 인력 부족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재생에너지 인프라와 디지털 인프라 확장에는 상당한 재정 투자가 필요하며, 이는 국가 재정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러한 한계는 쌍둥이 전환 전략의 장기적 지속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발트 3국은 EU 차원의 재정 지원과 국제 협력을 통해 이를 보완하는 전략을 병행하고 있다. 발트 3국은 각국의 디지털 역량과 국가 사이의 긴밀한 지역 협력을 바탕으로 EU의 쌍둥이 전환 전략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이들 국가는 여러 협력 체계를 통해서 전력망 통합과 재생에너지 확대를 공동으로 추진하며 개별 국가의 한계를 보완하고 있으며, 이러한 모델은 EU 내에서도 중요한 정책 실험 사례로 평가된다. 오래전부터 EU가 설정한 환경목표가 아니고 현재 유럽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발트 3국의 쌍둥이 전환 전략의 실천 사례들은 의미가 크다. 이들은 소규모 국가도 디지털 혁신과 녹색 전환을 결합하여 새로운 발전 모델을 구축할 수 있음을 보여주며, 규모가 큰 EU와의 연계를 통해 정책 확장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다른 국가에도 유의미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한국과의 전략적 협력 측면에서는 몇 가지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한국은 높은 디지털 기술력과 산업 기반을 보유하고 있고, 발트 3국은 유연한 정책 실험과 디지털 행정 역량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상호 보완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우선 전자정부 시스템, 데이터 기반 행정, 디지털 신원 인증 등에서 공동 연구와 정책 교류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또한 재생에너지, 스마트 그리드, 에너지 저장 기술 분야에서의 기술 협력은 쌍둥이 전환을 공동으로 심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스타트업 협력과 공동 실증 프로젝트를 통해 디지털-녹색 융합 기술의 상용화를 촉진할 수 있으며, EU-한국 사이의 정책 연계를 활용한 다자 협력 플랫폼 구축도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이러한 협력은 양측 모두에게 기술 혁신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전략적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김봉철

[신율의 정치 내시경] 시대에 맞지 않는 적통 논쟁, 필요한 것은 실용 리더십

우리나라 정당들은 당원 수를 정확히 공개하지 않으면서도, 당원 수가 많다는 사실만큼은 은근히 자부심의 근거로 삼는 듯하다. 또한 거대 양당 모두 '당원이 주인'이라거나 '당원들의 선택'을 강조하는 언행을 자주 한다. 이런 모습은 1990년대 이후 유럽 정당들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오늘날 유럽 정당들은 대부분 포괄정당(catch-all party)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대중 정당은 이념 지향성이 상대적으로 강한 데 비해, 포괄 정당은 이념 지향성이 매우 약하다. 이 때문에 유럽에서는, 일부 극우 정당을 제외하면, 정당 간 이념적 차이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당들은 대중 정당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에, 이념 지향성이 여전히 상당히 강한 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전당대회를 앞두고 민주당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념적 정통성을 둘러싼 논쟁은 우리나라 정당 정치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민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권 주자들은 이른바 '적통 논쟁'에 몰입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과거 누구가 어떤 행동을 했다고 주장한다든지, 스스로를 '노무현 키즈' 혹은 'DJ 키즈'로 규정하는 경우도 나타난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에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이유는, 이 적통 논쟁이 지금 우리 사회에 실질적으로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했던 시절의 정치·사회·경제적 환경은 지금과 확연히 다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가받는 것은 그 시대에 걸맞은 리더십을 발휘했기 때문이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들 두 전직 대통령을 지금의 정치판으로 소환하는 것은, 공허한 외침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점은, 지금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이념 지향성이 아니라 이념적 유연성, 그리고 이에 기반한 실용적 리더십이라는 사실이다. 아직 이재명 대통령에 대해 본격적인 평가를 내리기에는 이른 시점이지만, 지금까지의 행보를 보면 실용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예컨대 민주당의 강성 지지층과 이에 호응하려는 일부 정치인들은 검찰의 보완 수사권마저 완전히 박탈하자고 주장하는 반면, 이재명 대통령과 대통령실, 그리고 정부는 보완 수사권까지 박탈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문제를 우려하고 있다. 이는 이념적 경직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세력과 그렇지 않은 세력 간의 갈등으로 볼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현재 모든 면에서 잘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최소한 과거와는 다른 리더십을 보이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점은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싶은 것은, 현재 일부 당권 주자들이 자신의 적통을 주장하며 끌어들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결코 이념 지향적인 인물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한미 FTA를 성사시켰고, 반대 여론이 거셌던 강정마을 해군 기지 건설도 강행했다. 또한 유엔 주도의 평화유지군이 아니라,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의 일원으로 아프가니스탄에 우리 군을 파병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념적 경직성에 매몰된 인물이 아니었음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그런 노무현 전 대통령을 끌어들여 자신들의 이념적 충실함을 강조하려는 시도는 논리적 타당성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이념보다 국익과 실용에 충실한 리더십을 발휘하기를 바란다. 아울러 민주당의 당권 경쟁도 이념적 선명성을 과시하는 경쟁으로 흐르지 않기를 바란다. 그것은 지금 시대에 걸맞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의 안경으로 지금을 바라보지 않기를 바란다. bienns@ekn.kr

[이슈&인사이트] 올림픽공원 시위로 돈 버는 사람과 피해만 보는 사람

부정선거 의혹을 퍼뜨려 돈 벌어 사는 사람이 늘고 있다. 올림픽공원 핸드볼 경기장 개표소 봉쇄와 관련하여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유튜버들이다. 경남의 한 40대 남성은 6월 중순에 “경찰이 송파구 개표소에 갇힌 선관위 직원을 경찰 제복을 입혀 빠져나가게 하려다 걸렸다"라는 동영상 2개를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올렸다. 순식간에 조회수는 2백만 회를 넘었고 댓글은 7천여 개에 달했다. 경찰은 온라인에서 해당 동영상을 발견한 뒤 10일도 안 돼 용의자를 검거했다. 수사 결과 동영상은 올림픽공원 개표소 안으로 들어가는 실제 제복 경찰의 모습을 선관위 직원이라고 꾸민 것으로 드러났다. 용의자는 가짜 정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온라인에 돌아다니는 동영상을 재편집해 자신의 채널에 게시했다. 그 채널에는 수백 개 영상이 있었고 그 영상마다 수익이 있었을 뿐 아니라 후원 계좌로 모금까지 했다. 이 남성은 결국 해당 영상을 삭제하고 반성한다고 말했다지만 돈벌이 중인 유튜버는 아직 넘쳐난다. 한 언론사가 유튜브 통계분석 사이트 플레이보드를 통해 6.3 지방선거가 끝난 뒤 3주간 국내 유튜버의 슈퍼챗 수익을 분석한 결과는 놀랍다. 극우 성향으로 분류되는 한 유튜버는 3주 동안 무려 4천만 원 이상의 수익을 올렸다. 그는 올림픽공원에서 실시간 현장 방송도 했고 “봉쇄된 경기장 내에서 인신공양이 이뤄지고 있다"라는 말도 했다. 또 다른 유튜버는 같은 기간 동안 2천2백만 원 이상을 벌었는데 세계선거기관협의회(AWEB) 관련 의혹을 집중적으로 제기했다. 그는 “한국과 미국이 부정선거에 대해 공조수사를 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1천6백만 원 이상의 슈퍼챗 수익을 올린 제3의 유튜버는 “재선거 요구에만 집중하자"라고 문제를 제기한 2030에게 '대진연(대학생진보연합)'이냐고 몰아붙이면서 후원금을 끌어모았다. 덕분에 올림픽공원은 순수한 2030이 떠나고 부정선거론자들의 텃밭으로 변질되었다. 같은 기간 동안 슈퍼챗 최상위로 분류되는 김어준의 수익이 2천4백만 원이라는 것을 비교하면 부정선거 의혹 유튜버의 돈벌이는 실로 엄청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반대로 올림픽공원 핸드볼 경기장 입주 9개 체육단체와 3개 사단법인이 추정한 경제적 피해는 1백억 원 이상이라고 한다. 선수들의 경기력이나 사기 저하까지 치면 산정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대한체육회에 따르면 “종목 대표 선수와 지도자, 직원, 실업팀 구성원들만 9개 단체 2000여명에 유망주들과 가족, 직간접 영향권의 동호인, 생활체육 인구까지 더하면 최소 20만명“이 피해자라고 한다. 대표적으로 6월 중순에 열렸던 아시아 펜싱 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는 오상욱 등 펜싱 국가대표팀은 개인 장비 없이 남의 장비를 빌려 출국했다.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아시아 펜싱 선수권대회는 다행히 오상욱 선수가 2관왕에 올라서 문제없이 끝났으나 9월에 일본에서 시작되는 아시안게임 준비는 차질이 뻔해 보인다. 아직 출전 준비나 행정 처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공연이나 행사도 7건씩이나 취소됐고 이에 따른 시설 운영 손실은 2억 8천5백만 원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지난주 현장에서 열린 선관위 국정조사 특별위원회도 선관위가 개표를 위해 부담하기로 한 “7월 10일까지 핸드볼경기장 임차 비용이 2억원에 달한다고 한다"라고 했다. 다 국민의 세금이다. 헌법에는 집회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그런데 표현의 자유가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것까지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집회의 자유도 타인의 자유나 권한을 침해하는 것까지 용인하는 것은 아니다. 올림픽공원 시위가 부정선거 의혹만 퍼뜨리는 것이 아니라 공권력까지 무력화시키는 거 아닌지 의문이 든다. bienns@ekn.co.kr

[이슈&인사이트] 유가가 진정됐는데도 원화가 무너지는 이유

필자는 지난 칼럼에서 1,500원을 넘긴 원화 환율을 “에너지와 지정학의 위험"을 반영한 가격이라 언급했다. 호르무즈 해협이 단층선으로 남는 한, 코스피가 아무리 높아도 원화의 발목은 풀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시장은 얼마가지 않아 곧바로 그 진단을 시험대에 올렸다. 6월 17일 미국과 이란이 종전 양해각서에 서명했고, 호르무즈 통항 재개 소식에 국제 유가는 4% 가까이 빠졌다. 필자의 논리대로라면 에너지 부담이 걷히며 원화도 숨통이 트였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원/달러 환율은 6월 5일 야간시장에서 1,562원까지 치솟았고, 7월 1일에도 장중 1,559원을 찍었다. 원-유로 환율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7년 만에 1,800원을 넘어섰다. 유가는 진정됐는데 원화는 오히려 무너진 것이다. 이러한 환율의 움직임은 하나의 분명한 사실을 전해준다. 에너지는 이번 원화 약세의 방아쇠였을 뿐, 약한 원화라는 병의 본체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병의 본질는 무엇인가. 첫째는 금리와 자본이라는 구조다. 한·미 금리 역전은 2022년 중반 이후 4년째 이어지고 있다. 케빈 워시 연준의장은 물가에 단호한 고금리, 금융에는 관대한 규제완화라는 '강달러 설계'를 밀어붙이고, 미국은 AI 인프라 투자와 기술주로 세계 자본을 빨아들이며 달러는 스스로 수요를 만들고 있다. 그 반대편에서 신현송 한국은행 총재의 첫 금융통화위원회는 “인플레이션 대응에 걸림돌이 적다"는 매파적 동결이었다. 성장을 위해 금리를 내리고 싶어도 1,560원 환율과 수입물가가 한은과 금통위의 손발을 묶고 있다. 결국 원화는 금리 측면이나, 성장 기대로도 방어막을 갖지 못한 채 홀로 강달러의 바람을 맞고 있는 셈이다. 유가가 오르내리든 말든, 이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환율의 중력은 위쪽을 향할 가능성이 크다. 둘째는 정책적 불확실성이다. AI 고점론이 번지자 외국인은 반도체를 중심으로 20조 원 넘게 순매도했고, 그 위에 '국민배당금' 논쟁이 기름을 부었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AI 산업에서 나온 세수를 국민에게 환원하자는 구상을 던지자, 블룸버그는 한국이 'AI 수익 국민배당금' 구상을 띄우며 시장을 흔들었다고 제목을 뽑았다. 취지의 옳고 그름을 떠나, 외국인 투자자에게 이 신호는 “한국이 반도체·AI 호황의 과실을 어떻게 다룰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불확실성으로 읽혔을 수 있다. 정책의 예측 가능성이 흔들리면 자본은 먼저 떠나고, 떠나는 자본은 원화를 팔아 달러를 사들인다. 증시의 정책 충격이 곧바로 외환시장의 매도 압력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지금의 환율은 유가의 잔향이라기보다, 국내 정책 예측 가능성에 대한 시장의 조용한 채점표에 가깝다. 셋째는 시장의 골격 자체가 얇다는 점이다. 개인 신용융자, 이른바 '빚투'는 62조 원 시대에 들어섰고, 증권사는 그 이자만으로 1조 4천억 원을 벌었다. 상승장의 상당 부분이 빚으로 지어졌다는 뜻이다. 외국인이 팔고 환율이 오르면 레버리지에 묶인 국내 자금은 강제로 청산되며 낙폭을 키운다. 여기에 지난 반년간 코스피가 두 배 뛰는 동안 코스닥은 제자리걸음을 했다. 정부가 뒤늦게 코스닥 활성화와 규정 강화로 체질 개선에 나선 것 자체가, 우리 증시가 사실상 두세 개 반도체 종목의 시장이었음을 자인하는 대목일 수 있다. 통화가치는 결국 경제 전체의 폭과 건강을 비춘다. 소수 챔피언의 시가총액이 아니라, 시장의 넓이와 가계·기업의 체력이 환율의 진짜 기초체력이다. 이 세 가지를 겹쳐 보면, “호르무즈만 열리면 유가가 내리고 원화 가치가 회복된다"던 스스로의 위안은 이미 틀린셈이다. 유가 안정이 무역수지 개선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나, 자본수지의 출혈을 막지는 못했다. 우리가 원유를 달러로 결제하는 한, 국제 유가가 안정되어도 환율 상승애 따라 원화 기준 수입 에너지 가격은 상승한다. 즉 약한 원화는 우리가 벗어났다고 안도의 숨을 내쉬는 현재에도 여전히 물가압력 요인으로 남게 된다. 1,560원이라는 환율은 지정학적 불확실성의 남은 여진이 아니라, 한국 거시·금융 구조에 대한 경고로 해석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환율에 대한 처방은 분명하지만 쉽지 않다. 2025년 외환보유고와 국민연금 스와프로 버티다 결국 방어선이 뚫린 경험이 말해주듯, 곳간만으로 환율을 잡을 수는 없다. 지속 가능한 해법은 둘 중 하나다. 하나는 금리 격차를 줄이는 것인데, 성장을 감안하면 이는 매우 험난한 길이며, 현재와 같이 경제의 기초체력이 저한된 현재 고금리가 국민과 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다른 하나는 정책의 예측 가능성과 시장의 폭을 되살리는 것이다. 국민배당금 논쟁은 방향의 정당성과 별개로 시장에 던지는 신호를 정교하게 관리해야 하고, 62조 빚투의 과열은 식혀야 하며, 코스닥 개혁은 구호가 아니라 실제로 시장의 저변을 넓히는 성과로 이어져야 한다. 그때까지 우리가 정독해야 할 성적표는 지수 전광판이 아니라 환율 전광판이다. 유가가 잠잠해진 지금에도 심화되는 원화약세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세지는 지정학적 위험과 같은 외부요인이 아니라 결국 우리 자신의 내부적이고 구조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bienns@ekn.kr

[이슈&인사이트] 호남 반도체 성공 투자에는 타당성 플러스알파가 필요하다

이재명 대통령이 6월29일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를 주재했다. 이번 보고회에서는 한국형 AI 산업혁명 완성을 위해 기업들의 △반도체 △피지컬 AI △AI 데이터센터 등 '3대 메가프로젝트' 투자계획과 정부 지원 방안을 설명하기 위한 자리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계획이다. 내용은 서남권(광주·전남)을 제2 반도체 생산 거점으로 육성하기 위해서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총 895조 원의 기업 투자를 통해서 메모리 팹 4기를 짓는다. 정부 목표는 5년 내 메모리 반도체 생산능력을 배가하고 이를 통해서 반도체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국가 프로젝트다. 실제 투자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전력망과 용수, 부지, 인력 확보 등 기반 시설 문제가 해결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규모 반도체 공장은 막대한 인프라 투자가 필요한 만큼, 향후 정부 지원책과 기업 투자계획의 구체화, 그리고 스피드 여부가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성공의 분수령이 된다.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와 같은 여유가 없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기업 주도형 투자다. 첫 구상은 SK가 2019년, 삼성이 2023년이었다. 삼성전자 클러스터는 시스템 반도체 팹 6기를 짓는 프로젝트로, 부지는 710만 m2로 300조 원이 소요되어 2042년 완공 목표다. SK하이닉스 클러스터는 메모리 반도체 팹 4기를 짓는 프로젝트로, 414만 m2의 부지에 120조 원을 투자하여 2027년 완공을 목표하고 있다. 그런데 먼저 출발한 SK도 2025년, 6년 만에 겨우 공사를 위한 첫 삽을 떴다. 산단 조성에 필수적인 환경영향평가, 토지 수용, 주민 보상 절차의 장기화가 원인이었다. 호남 반도체 투자 성공에는 속도가 절대적이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와 같이 첫 삽을 뜨는 데만 6년이 걸린다면 성공은 없다. 물 들어왔을 때 노를 저어야 한다. 왜냐하면 반도체 수퍼사이클이 5년 이후까지 진행된다는 보장이 없다. 더욱이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사업은 기업 주도형보다는 관제 성격을 갖고 있다. 호남판 국책 사업이 정권에 따라 어떻게 표류하는지 새만금 사례가 입증한다. 새만금 사업은 1991년 사업이 개시되어 20년 만인 2010년 방조제가 완공되었지만, 35년이 지난 지금도 표류하고 있다.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의 속도전 사례로 일본 TSMC 구마모토 공장을 제시한다. 일본 정부의 전폭적인 '원스톱' 지원으로 2년여 만에 완공되었다. 2021년 10월 투자 발표 이후 2024년 2월 준공식을 거쳐 연말부터 양산에 들어갔다. 효율적인 정부 지원, 표준화된 공장설계, 협력사 생태계, 신속한 행정이 결합하면 2년 만에 반도체 공장을 지을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 또 다른 사례로 대만 남부 가오슝시에 있는 TSMC 반도체 클러스터가 있다. 가오슝의 공장용지는 정유공장 자리로 토양오염이 심각했다. 오염제거만 30년이 소요된다고 할 정도로 최악의 조건이었다. 전력원은 노후화된 화력발전소였다. 그런데 4년여 만에 TSMC의 최첨단 반도체 클러스터가 가동할 수 있었던 것은 가오슝시 정부가 '예산 폭탄'을 퍼붓고, 가용 인력을 총동원해 속도전을 벌인 결과다. 환경영향평가에 걸린 기간은 불과 한 달 반, 애초 30년이 걸린다던 오염 정화는 1년 만에 끝냈다. 가뭄으로 공업용수가 부족해지자, 농업용수를 끊고 전국적인 휴경을 단행한 발상의 전환이 있었다. 후보지인 광주의 '첨단 3지구'나 해남의 '솔라시도'가 모두 주거·산업·연구 생태계가 연계되는 기반을 갖추고 있다. 기업·정부의 발상 전환이 있다면 호남클러스터가 용인보다 빠르게 5년 이내에 가시화될 수 있다. 발상 전환을 위해서 반도체 클러스터가 호남을 구조적 낙후에서 구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절실함이 요구된다. 절실함으로 '민주화의 성지'에 덧씌워진 '강성 노조'의 이미지를 제거하고 국민의 공감대를 얻는 일이 타당성 플러스알파 과제다. bienns@ekn.kr

[이슈&인사이트] 홍명보를 위한 변명

대한민국 전체가 고대 로마의 원형경기장으로 변했다. 콜로세움 한복판에 묶인 사냥감은 홍명보 감독이다.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참사에 따른 비난의 화살이 온통 그에게 쏟아지고 있다. 성난 군중은 저마다 손에 돌멩이를 쥐고 그가 얼마나 파렴치한 인간인지, 얼마나 무능한 지휘관인지 침을 튀기며 성토한다. 거의 축제에 가까운 단죄의 에너지가 온 나라를 뒤덮고 있다. 가정을 해보자. 내가 한때 그 바닥에서 이름깨나 날렸던 전문가다. 마침 관련 조직의 최고 권력을 쥔 수장은 나와 친하게 지내는 동문이다. 어느 날, 대학 시절 돈독하게 지냈던 후배 녀석이 찾아와 손을 꼭 잡으며 애절하게 속삭인다. “형님, 형님밖에 적임자가 없습니다. 저희가 판 다 깔아놓을 테니 같이 큰일 한번 도모하시죠." 명예와 수십억 원의 연봉, 그리고 찬란한 미래가 패키지로 눈앞에 흔들린다. 이 짜릿한 유혹 앞에서 침착하게 자기객관화 센서를 작동하며 “허허, 나는 깜냥이 안 되고 도덕적 흠결이 있으니 더 훌륭한 분에게 양보하겠네"라고 거절할 성인군자가 우리 중 대체 몇이나 되겠는가? 자신의 그릇을 모르고 과욕을 부리는 것, 아는 인맥에 묻어가며 이권을 탐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돌아볼 성찰 능력이 부재한 것. 이것은 홍 감독만의 특이질환이 아니다. 거의 모든 나약한 인간이 가진 보편적인 본능이자 유전자에 새겨진 속물근성일 뿐이다. 홍 감독은 그 본능에 충실한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진짜 악마는 그 평범한 탐욕을 제어하지 못하고, 오히려 권력을 동원해 판을 깔아준 무능하고 부패한 시스템이다. 멕시코 현지 베이스캠프에서 들려온 그의 건조하고 짤막한 사퇴 성명과 새벽녘 인천공항 입국장에서 포착된 그의 자태는 이 수준 낮은 드라마의 하이라이트다. 질문도 받지 않은 채 입국장을 빠져나간 그의 굳은 표정과 묘한 태도는 대중의 분노에 다시금 기름을 불렀다. 세상은 또 다시 손가락질하지만, 거대한 시스템의 덫에 걸려 만신창이가 된 한 인간이 쥐어짜 낸 마지막 자존심의 방어기제로도 보인다. 광장에 끌려 나와 돌팔매질을 당하는 제물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존엄은 비굴하게 눈물을 흘리며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 것뿐이다. 사냥터로 등 떠밀린 사냥감이 사냥꾼들을 향해 꼿꼿하게 목을 세우는 그 뻣뻣함 속에서, 이 야만적인 제의가 연출한 씁쓸한 블랙코미디를 목격한다. 르네 제라르는 공동체가 붕괴 위기에 처했을 때 작동하는 희생양 메커니즘을 말한 바 있다. 내부의 혼란과 분열로 위기에 처한 집단은,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가장 만만한 제물 하나를 찾아내 광장으로 끌고 나온다. 그에게 모든 공동체의 죄와 부정을 뒤집어씌우고 돌을 던져 죽임으로써, 집단적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며 가짜 평화를 얻는다. 지금 한국 축구를 두고 벌어지는 일이 이 야만적인 제의를 닮았다. 이재명 대통령이 SNS를 통해 “공사구별을 못하고 공익보다 사익을 앞세우는 엉터리 인사가 가능한 것은 인사권자에 대한 감시 견제 문책이 불가능하거나 어렵기 때문"이라며 뼈 때리는 말을 날린 것은 사태의 은폐된 본질을 정확히 파악한 진단이다. 거버넌스가 제대로 구축되어 있었다면, 애당초 홍 감독이 제 역량을 망각하고 그 자리를 넘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의 지적대로 문제의 핵심은 홍명보라는 불량 상품이 아니라, 그런 불량품을 견제 장치도 없이 백화점 메인 쇼윈도에 진열해 놓은 무너진 거버넌스 그 자체다. 현재의 광기는 홍명보라는 광대를 향한 가성비 좋은 분노에 불과하다. 한국 축구에 광대는 홍명보 하나로 족하다. 광대 죽이기에 몰두해 정작 광대를 만든 거버넌스 개혁을 소홀히 할까 하는 기우에서 하는 말이다. bienns@ekn.co.kr

[이슈&인사이트] 지구촌적 불안의 원인은?

21세기 세계를 설명하는 키워드 가운데 하나는 '불안'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 불안의 중심에 가장 강력한 국가인 미국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대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달러는 국제 금융의 중심이고, 실리콘밸리는 인공지능 혁명의 심장부다. 그럼에도 미국은 지금 어느 때보다 불안해 보인다. 그리고 그 불안은 세계 곳곳을 흔드는 외교와 군사 전략으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미국이 벌이는 AI 경쟁은 단순한 기술혁신 경쟁이 아니다. 반도체와 희토류, 데이터센터, 전력망, 해저케이블, 개발원조, 금융제재까지 모두 하나의 전략 아래 묶여 있다. AI는 기술이 아니라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국가전략이 되었다. 왜 미국은 이렇게까지 서두르는 것일까. 답은 중국에 있다. 중국은 제조업 규모에서 이미 미국을 앞질렀고, 전기차와 배터리, 태양광, 희토류 정제, 일부 AI 응용기술에서도 빠르게 추격하고 있다. 여기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국제사회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군사적 영향력을 유지하며 미국 중심 질서에 균열을 만들고 있다. 미국 입장에서 세계는 더 이상 단극 체제가 아니다. 문제는 미국은 경쟁자를 단순한 경쟁자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은 상대의 성장을 자신의 쇠퇴로 해석한다. 그래서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대신 기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훨씬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한다. 군사동맹을 확대하고, 경제제재를 강화하며, 기술을 안보 문제로 바꾸고, 금융을 외교의 무기로 활용한다. 오늘날 국제정치의 상당수 갈등은 이러한 구조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러시아의 침공이라는 직접적인 원인과 함께 유럽 안보 질서와 NATO 확대라는 더 숨가쁜 상황속에서 전개되고 있다. 중동에서는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확고한 지원이 지역 갈등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된다. 이란과의 긴장 역시 핵문제만이 아니라 중동의 세력균형과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베네수엘라를 비롯한 중남미에서도 제재와 외교적 압박은 오랫동안 미국의 영향력 행사 수단으로 활용돼 왔다. 이들 사안은 각각의 원인이 달라, 쉽게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공통점은 분명하다. 세계 주요 분쟁마다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은 종종 자유와 민주주의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점점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 민주주의는 누구를 위한 민주주의인가. 그 국제질서는 누구를 위한 질서인가. 미국은 스스로를 보편적 민주주의 국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미국은 패권이 흔들릴수록 예외를 만들기 시작한다. 동맹국에는 관대하고 적대국에는 원칙을 적용한다. 국제법은 선택적으로 적용되고, 인권은 외교적 언어가 된다. 규범은 점차 보편적 기준이 아니라 전략적 자산으로 변한다. AI 시대는 이러한 모순을 더욱 극단적으로 만들고 있다. 인공지능은 데이터를 요구하고, 데이터는 전력을 요구하며, 전력은 희토류와 반도체를 요구한다. 결국 AI 경쟁은 광물과 항만, 해저케이블과 전력망, 금융과 군사동맹까지 하나의 거대한 지정학으로 연결된다. AI는 새로운 산업혁명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냉전의 기반이 되고 있다. 패권국이 가장 위험한 순간은 절대적으로 강할 때가 아니라 상대적인 쇠퇴를 자각할 때다. 역사는 이를 반복해서 보여주었다.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국가는 점점 더 많은 자원을 군사와 제재에 투입하고, 경쟁자는 더욱 빠르게 대안을 구축한다. 그 과정에서 국제사회는 진영으로 나뉘고, 중간국들은 선택을 강요받는다.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문제는 단순히 미국과 중국 가운데 누가 승리하느냐가 아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패권 경쟁 자체가 인류가 직면한 기후위기와 빈곤, 난민, 전염병 같은 공동의 문제를 해결할 여지를 점점 좁혀가고 있다는 점이다. AI가 인류를 위한 기술이 될 것인가, 아니면 패권을 위한 무기가 될 것인가는 기술이 아니라 정치의 문제다. 그리고 지금 세계를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새로운 강대국의 등장이 아니라, 자신의 쇠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기존 패권국의 착각 때문일지 모른다. 성일권

[이슈&인사이트] 이란 전쟁 종전 이후 우려되는 미국 리더십 위기

지난 6월 18일 미국과 이란의 이란 전쟁 종결 양해각서 내용이 공개된 이후 국제사회가 동요하고 있다. 미국이 공들여 진행한 합의의 결과가 실망스럽다는 평가이다. 일부 언론은 합의 내용을 보면 오히려 이란이 승전국 같다고 비판하는 기사를 냈다. 이 양해각서를 보면, 1단계에서 전쟁 즉시 종결, 미국 봉쇄 해제 및 이란의 호르무즈 개방, 이란산 원유 제재 해제와 이란의 동결 해외 자산·자금 이용을 허용하고, 2단계에 가서 이란 핵을 영구적으로 불능화한다는 내용이다. 만약 미국이 2단계 목표를 완전히 달성한다면, 우크라이나 등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번 전쟁을 결심한 미국의 선택이 옳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각서에 문제가 있다. 미국과 국제사회가 3,000억 불에 달하는 이란 재건 자금을 지원하는 조항이다. 미국이 이란과 종전 조건으로 이란 자금 동결 해제와 원유 수출 개재 허용 등 당근을 줄 거라는 예상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핵 포기 확정도 하기 전에 3,000억 달러의 재건 자금까지 대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이다. 그동안 국제사회를 대상으로 나쁜 행동을 해 온 이란에 대한 과분한 보상이다. 이스라엘이 사주했다는 등 과격한 주장이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번 전쟁이 이란 핵 능력 불능화 및 수만 명의 자기 국민을 살해하고 주변국에 테러와 혁명을 수출하는 악의 정권 축출이 목표였다. 그러나 미국이 '악의 축'이라고 불렀던 급진 이슬람 정권교체에 실패하고, 오히려 이란 급진 정권에 날개를 달아 줄 동결 자금 해제, 원유 수출 재개 허용, 3,000억 불 재건 자금 지원 등은 납득하기 어렵다. 아무리 나쁜 짓을 하더라도 버티기만 하면 이익을 볼 수 있다는 나쁜 교훈을 주기 때문이다. 미국이 이번 양해각서 체결을 너무나 서둘렀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이유다. 이번 전쟁은 트럼프 대통령의 열성 신봉자인 마가(MAGA)를 중심으로 공화당이 지지했지만, 반대도 많았다. 더군다나 이 전쟁이 초래한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미국 중하층민이 많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들은 트럼프를 지지하는 핵심 세력이지만, 오히려 트럼프의 정책으로 피해를 봤다. 이 전쟁으로 큰 피해를 본 국제사회가 아무리 비난해도 트럼프가 신경을 안 쓰는 이유는 본인을 지지하는 미국민만 바라보면 되기 때문이다. 미국 유권자만 미국 대통령을 선출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지지자만 아우르면 된다. 이런 소수 극렬 추종자만 바라보는 팬덤(열성팬)·인기영합주의 정치는 이미 전 세계에 만연했기 때문에 새로운 것도 아니다. 한국도 좌우를 막론하고 지지자만 바라보는 팬덤 정치에 올인(all-in)하고 있다. 아무리 정치를 못 해도 견고한 팬들의 지지만 있으면 정권 재창출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정책을 내놓기도 한다. 문제는 이번 사태로 트럼프의 마가(MAGA) 기반 팬덤 정치가 동력을 상실할 수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재선된 가장 큰 이유는 급진적인 '정치적 올바름' 사상에 매몰된 바이든의 민주당 정권이 워낙 잘못했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잘해서가 아니라 민주당이 너무 못해서다. 이번 이란 합의가 비겁하거나 즉흥적으로 보인다면 그나마 트럼프 대통령이 민주당에 대해 가지고 있던 비교우위가 무력화될 수도 있다. 9.11 테러 이후 국제사회가 생각하던 강하고 정의로운 미국의 이미지는 퇴색했다. 이미 많은 미국민이 양극화한 정치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관심을 잃었다. 더 이상 미국이 강하고 정의로운 나라라는 믿음이 사라지면, 희망과 기대를 잃은 미국민은 점차 냉소적 고립주의로 회귀할 수 있다. 미국 정치의 실패는 미국의 영향력 훼손으로 그리고 국제사회 미국의 리더십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 미국은 막강한 영향력과 국력을 기반으로 국제사회를 자유민주주의라는 이상적인 질서로 유지했고, 이 때문에 대한민국 같은 많은 나라가 번영할 기회가 있었다. 이번 미국의 성급한 결심이 불확실한 미래를 가속할 수 있는 징조여서 우려된다. 만약 미국 리더십이 이전 같지 않다면 한국도 독자생존의 모색할 수밖에 없게 된다. 지금까지 가보지 않았던 길이다. 그러나 지정학적 위기와 충돌이 확산하는 현재 이는 쉽지 않은 선택이 될 것이다. bienns@ekn.kr

[박영범의 세무칼럼] 묵인되던 관행이 세금 폭탄으로…국세청, 법인 슈퍼카 겨누는 이유

지난 5월 28일, 국세청은 법인 소유 슈퍼 카의 사적 사용 및 관련 탈루 혐의에 대해 대대적인 세무조사에 착수했다고 발표했다. 지난 2024년 8천만 원 이상 법인 차량에 의무화된 '연두색 번호판' 제도가 오히려 부의 상징으로 왜곡되면서 고가 법인 차량 등록이 다시 증가하는 추세를 보인 것이 이번 기획 조사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번 조사는 단순한 차량 사적 사용 적발을 넘어 기업 자금 유출과 편법 증여 전반을 파헤치는 강도 높은 검증이 될 전망이다. 국세청이 타깃으로 삼은 19개 법인은 총 90대(약 300억 원 상당)의 고가 차량을 소유하고 있으며, 적발된 탈루 혐의 금액만 약 3,000억 원에 달한다. 가장 빈번하게 적발되는 사례는 법인 명의로 초고가 슈퍼 카를 취득한 후 사주 일가의 '개인 전용차'로 전락시키는 경우다. 조사에서 법인 명의로 8억 원 상당의 슈퍼 카 3대를 취득해 골프장, 특급 호텔 방문 등에 사적으로 유용한 사례가 드러났다. 또한, 사주 일가의 미술품, 명품 의류 구입은 물론 고급 단독주택의 인테리어 비용까지 법인 비용으로 전가한 심각한 도덕적 해이도 포착되었다. 법인 차량을 사적으로 유용하다 적발될 경우, 법인의 비용(손금)으로 인정받지 못해 법인세가 추징되는 것은 기본이다. 더 큰 문제는 부인된 비용만큼 대표이사의 '상여'로 처분되어 막대한 근로소득세와 4대 보험료까지 연쇄적으로 부과된다는 점이다. 백화점, 골프장, 피부과 등 업무와 무관해 보이는 결제 내역은 국세청의 PCI(소득-지출 분석) 시스템에 의해 즉각 이상 징후로 포착된다. 따라서 접대비나 복리후생비로 처리하더라도 실질적인 업무 연관성을 입증할 수 있는 객관적인 내부 증빙(품의서, 참석자 명단 등)을 반드시 구비해야 한다. 고가 법인 차량 세무조사 시 국세청 조사국에서 가장 엄격하게 교차 검증하는 자료가 바로 '업무용 승용차 운행 기록부(운행일지)'이다. 세법상 임직원 전용 보험에 가입하더라도 운행 기록부를 작성하지 않으면 연간 1,500만 원까지만 비용으로 인정된다. 빈틈없는 기록과 객관적인 업무 운행 사실 자료만이 실무적인 세무 리스크를 완벽하게 방어할 수 있다. 단순히 '업무용', '외근', '거래처 방문'이라고 뭉뚱그려 적는 것은 조사 시 허위 기록으로 의심받을 수 있다. 방문처와 구체적인 업무 목적을 명확히 기재해야 함다. 국세청 조사 요원들은 운행일지 내용과 하이패스 통행 내역, 주차장 영수증, 법인카드 결제 위치(주유소, 식당 등), 나아가 차량 내비게이션 기록까지 대조하여 모순점을 찾아낸다. 주말이나 공휴일 운행, 혹은 골프장, 주요 관광지, 사주 일가의 자택 인근 등 업무 연관성이 떨어져 보이는 장소로의 운행 내역은 조사관들의 1차 타깃이다. 불가피한 주말 업무나 휴일 접대였다면, 이를 명확히 입증할 수 있는 휴일 근무 품의서, 접대비 지출 결의서, 회의록 등의 증빙은 운행일지와 하나의 세트로 묶어 보관해야 한다. 연말 법인세 신고를 앞두고 기억에 의존해 1년 치를 일괄 작성하는 관행은 매우 위험하다. 회사의 경영권을 쥔 사주가 거래 과정에 자녀 회사를 '끼워 넣어' 부당한 통행세 이익을 주거나, 법인 소유의 슈퍼 카를 사주 일가에게 헐값에 저가로 양도하는 방식이 대표적인 세금 탈루 유형이다. 심지어 배우자가 지배하는 특수관계 법인에 가상자산 채굴기 구입 대금 200억 원을 무상으로 빌려주거나, 조세회피처의 페이퍼 컴퍼니에 허위 광고비를 지급해 막대한 자금을 국외로 빼돌려 은닉한 혐의를 있는 법인이 집중 조사를 받고 있다. 법인은 자녀나 배우자가 운영하는 특수관계 법인과의 거래, 혹은 법인 자산(차량, 부동산 등)의 매각 시 반드시 세법상 적정한 '시가'로 거래해야 힌디. 시가보다 낮게 팔거나 높게 사주는 행위는 '부당행위계산부인' 규정이 적용되어 법인세가 엄격하게 추징된다.특히 가공의 광고비나 컨설팅비 명목의 외환 송금은 국세청 국제조사과의 집중 타깃이다. 조사에서 해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자녀의 시기에 맞춰 3억 원대의 수입 스포츠카를 법인 명의로 사주거나, 자금 출처가 없는 미성년 자녀와 180억 원 상당의 빌딩을 공동 매입하면서 50억 원의 취득 자금을 편법으로 증여하고도 신고하지 않은 사례들이 적발되었다. 법인에 실제로 출근하지 않는 자녀에게 수억 원의 가공 인건비를 지급한 악의적 사례도 포함되어 있다.사주 자녀의 재산 취득 시 가장 중요한 것은 명확한 '자금 출처' 확보. 자녀 명의로 부동산이나 주식을 취득할 때는 객관적인 '소득 증빙'이 필수적이다. 법인에서 정당하게 급여나 배당을 받아 자금을 마련하되, 실제 근무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업무 일지나 사내 메일, 결재 명세 등을 반드시 남겨야 가공 인건비 논란과 증여세 추징을 피할 수 있다. 사전 증여로 부를 이전해야 한다면 편법을 동원하기보다, 합법적이고 정당한 플랜을 만들어 사전에 증여세를 납부하는 것이 징벌적 가산세를 피하는 가장 장기적이고 안전한 절세 전략이다.국세청은 이번 세무조사에서 금융계좌 추적과 디지털 포렌식(문서 감정) 등 가용한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며, 장부 조작이나 차명계좌를 이용한 고의적 조세 포탈이 확인되면 조세범 처벌법에 따라 엄정하게 고발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밝혔다. 지금은 과거의 묵인되던 관행이 치명적인 리스크로 돌아오는 시대다. 당장이라도 기업의 회계 처리와 세무 신고 내역, 그리고 사주 일가의 자산 변동 내역을 꼼꼼하게 재점검하고 선제적인 방어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ekn@ekn.kr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