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위 숨겨진 위험, 우주방사선 (하)] 정책·규제를 넘어 ‘안전 문화’로 정착돼야…해법은?

2023년 11월 당시 사무장급이던 대한항공 승무원의 위암 사망이 우주방사선 노출에 따른 '산업재해'로 처음 인정되면서 '하늘 위 숨겨진 위험'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높아졌다. 에너지경제신문은 대한항공 조종사들이 한국항공운항학회에 투고한 '항공 승무원의 우주방사선 피폭 저감에 관한 연구' 논문을 근거로 국내 항공승무원들이 마주한 '우주방사선 피폭'의 실태를 과학적 데이터로 분석하고, 그 원인과 현실적인 저감 방안을 심층적으로 조명해 본다. 기획 내용은 총 3회에 걸쳐 △상편 문제의 심각성 △중편 피폭의 핵심 원인 △하편 구체적인 해법과 미래 과제 순으로 연재한다. 우주방사선 피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항공기 운항을 전면 중단할 수는 없다. 핵심은 위험을 인지하고 데이터를 기반으로 관리하며, 합리적인 수준에서 저감하는 것이다. 대한항공 현직 기장들이 주도한 연구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3가지 저감 방안을 명확히 제시한다. 이는 단순한 제언을 넘어 항공사의 운항 스케줄링과 비행 계획 시스템에 직접 적용 가능한 실행 계획에 가깝다. ①개인별 북극 항로 비행 횟수 제한 특정 승무원이 고위험 노선에 집중적으로 투입되는 것을 막아 단기간에 과도한 피폭이 누적되는 것을 방지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이다. 이는 연간 총 피폭량이 법적 한도에 근접하는 승무원들을 보호하는 데 필수적인 조치다. ②고위도-저위도 노선 균형적 배분 이는 보다 정교한 접근법으로 승무원의 비행 스케줄을 하나의 포트폴리오처럼 관리하는 개념이다. 요컨대 한 승무원이 피폭량이 높은 뉴욕 비행을 했다면 다음 비행은 피폭량이 현저히 낮은 방콕이나 시드니 노선에 배정해 월간 또는 연간 누적 피폭량을 평균화하고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스케줄링 기반의 저감 방안은 이미 대한항공에서도 수용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대한항공 노사는 2021년 7월 협의를 통해 승무원의 비행 노선과 시간을 관리하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개발해 연간 6mSv에 근접하는 피폭량을 기록한 승무원을 북극 항로가 아닌 노선이나 비행 시간이 짧은 노선에 자동으로 배정하는 시스템을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연구에서 제시된 방안이 기술적으로 충분히 구현 가능하고 노사 양측의 공감대를 얻고 있음을 보여주는 긍정적인 신호다. ③고위도 노선 운항 시 계획 비행 고도 하향 항공기는 일반적으로 공기 저항이 적어 연료 효율이 가장 높은 최적 순항 고도로 비행한다. 그러나 이 고도는 우주방사선 노출 측면에서는 가장 위험한 고도일 수 있다. 연구는 비행 계획서상 고도를 의도적으로 낮출 경우, 방사선량이 얼마나 감소하는지를 시뮬레이션 프로그램 'CARI-6M'을 통해 정량적으로 분석했다. 분석 결과 순항 고도를 단 2000ft(약 610m)만 낮춰도 평균 13.2%의 피폭선량 저감 효과가 나타났고 4000ft(약 1220m)를 낮추면 그 효과는 25.6%에 달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저감 효과가 저위도 지역보다 고위도 지역에서 더 크게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이는 가장 위험한 구간에서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데이터는 항공사와 규제 당국, 그리고 노조 간의 논의를 '해야 한다, 말아야 한다'의 이분법적 대립에서 '어느 수준까지가 합리적인가'의 과학적 토론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강력한 근거가 된다. 비근한 예로 4000ft 하강이 연료비 측면에서 부담이 크다면 2000ft 하강이라는 절충안을 통해 여전히 13% 이상의 의미 있는 안전 개선을 달성할 수 있다. 이는 급진적인 변화 없이도 점진적이고 데이터에 기반한 안전성 향상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고도 조절과 북극항로 우회는 필연적으로 경제적 비용을 수반한다. 고도를 낮추면 공기 밀도가 높아져 항공기 저항이 커지고, 이는 곧 유류 소비 증가와 비행 시간 연장으로 이어진다. 이는 항공사의 운영 비용을 직접적으로 상승시키는 요인이며, 탄소 배출량 증가라는 환경적 부담으로도 작용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러시아 영공 폐쇄는 이러한 비용 증가가 어느 정도인지를 현실에서 보여줬다. 북극항로를 이용하지 못하고 남쪽으로 우회하게 된 미주 동부 노선들은 편도 비행 시간이 최대 1시간 40분까지 늘어났고, 이는 고스란히 추가 유류비와 운영비 부담으로 돌아왔다. 결국 이 문제는 '안전'과 '경제성' 사이의 고전적인 줄다리기 문제로 귀결된다. 그러나 최근의 법적 판결들은 이 저울의 균형추를 안전 쪽으로 상당 부분 이동시켰다. 과거에는 추가 유류비가 명확한 '비용'으로 인식된 반면, 승무원의 건강 문제는 잠재적이고 불확실한 '리스크'로 취급됐다. 하지만 이제 우주방사선 피폭으로 인한 질병이 구체적인 '산재'로 인정됨에 따라 승무원의 건강 문제는 수백억 원에 이를 수 있는 법적 배상·기업 이미지 실추·우수 인력 이탈 등 명확하고 측정 가능한 '비용'이 됐다. 따라서 이제 항공사는 단기적인 유류비 절감과 장기적인 법적·재무적 리스크 관리 사이에서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만 하는 입장이 됐다. 연구가 제시한 데이터 기반의 점진적 저감 방안들은 이 균형점을 찾는 과정에서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이는 더 이상 회피할 수 없고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필수적인 경영 과제다. 정부는 항공 승무원의 우주방사선 피폭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관련 규제를 꾸준히 강화해왔다. 과거 국토교통부와 원자력안전위원회로 이원화 돼있 관리 체계는 2023년 6월 11일부터 원안위로 일원화됐고, '생활주변방사선 안전관리법(이하 생활방사선법)' 개정을 통해 항공사의 책임과 의무가 대폭 강화됐다. 개정된 법률과 그 하위 규정인 '항공운송사업자의 우주방사선 안전 관리 규정'은 승무원의 연간 피폭 방사선량 관리 기준을 6mSv로 명시했다. 이는 과거 '5년간 100mSv'라는 복잡한 기준보다 훨씬 더 엄격하고 명확하다. 또한 항공사는 승무원의 연간 피폭량이 6mSv를 초과할 우려가 있는 경우, 즉시 저감 조치를 취해야 할 의무를 진다. 법령이 명시한 조치는 △기존 계획된 국제 항공 노선보다 피폭 방사선량이 낮은 노선으로 변경 △탑승 예정 국제 항공 노선 횟수의 조정 △국제·국내 항공 노선을 탑승하지 않는 근무로 변경 등이다. 이는 앞서 연구가 제시한 스케줄링 기반의 해결책을 법적으로 강제한 것이다. 아울러 항공사는 우주방사선 측정 장비나 검증된 평가 프로그램을 사용해 노선별·개인별 피폭량을 정확히 조사·분석하고, 그 기록을 승무원이 75세가 되거나 마지막 운항 후 30년이 될 때까지 보관해야 하며 관련 내용을 정부에 보고해야 한다. 이 외에도 승무원에게 우주방사선의 위험성과 안전 관리에 대한 정기적인 교육을 실시하고, 이에 관한 건강 진단을 받게 해야 한다. 이러한 규제 강화는 정부 차원의 항공 승무원 안전 관리의 중요한 진일보다. 이는 항공사가 더 이상 재량에 따라 안전 조치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법적 의무로서 승무원의 피폭량을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저감해야 함을 의미한다. 국내에서의 규제 강화는 긍정적이지만 세계 유수의 항공사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체계적인 우주방사선 관리 시스템을 운영해왔다. 이는 국내 제도가 국제 표준에 발맞춰 가는 과정에 있음을 보여준다. 유럽연합(EU)은 이미 1996년 유럽 원자력 공동체(EURATOM) 지침을 통해 항공 승무원을 직업적 피폭자로 간주하고 보호 조치를 의무화했다. 이에 따라 독일은 2001년부터 관련 법규를 시행했고 루프트한자는 연간 피폭량이 1mSv를 초과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승무원을 의무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루프트한자는 독일 항공우주센터(DLR)와 협력해 '항공 경로 선량 계산을 위한 유럽 프로그램 패키지(EPCARD)'와 같은 공식 승인된 계산 프로그램을 사용해 각 비행편의 피폭량을 산출한다. 이 데이터는 승무원 관리 시스템과 직접 연동돼 고피폭 승무원의 스케줄을 조정하는 데 활용된다. 또 정기적인 기내 실측을 통해 계산 프로그램의 정확도를 검증하는 등 과학적 신뢰도를 높이는 데도 힘쓰고 있다. 에어프랑스는 프랑스 항공 당국과 협력해 2000년대 초반부터 '시버트(SIEVERT)'라는 독자적인 컴퓨터 시스템을 개발해 운영 중이다. 이 시스템은 은하 우주방사선뿐만 아니라, 예측이 어려운 '태양 입자 현상(SPE)' 발생 시의 피폭량까지 계산go 실시간에 가까운 위험 관리를 지원한다. SIEVERT 시스템의 계산 결과는 실제 항공기에서 측정한 값과 15% 이내의 오차를 보일 정도로 높은 정확도를 자랑하며, 이는 프랑스 승무원 피폭량 관리의 과학적 기반이 되고 있다. 이들 사례는 20여 년 전부터 정부와 항공사가 함께 과학적 데이터에 기반한 정교한 관리 시스템을 구축했고, 피폭량 계산 결과를 승무원 스케줄링이라는 실질적인 인력 운용에 직접 연동해 '사전 예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공통점을 보여준다. 이는 대한민국 항공업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명확히 제시한다는 평가다. 승무원들의 우주방사선 피폭 문제는 이제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왔다. 한 승무원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시작된 사회적 관심은 사법부의 역사적인 판결과 정부의 강력한 규제 강화로 이어졌다. 대한항공 역시 자동화된 스케줄링 시스템 도입을 약속하는 등 변화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해결은 법적 의무를 이행하는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규제는 최소한의 안전망일 뿐, 승무원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안전 문화(Safety Culture)'가 기업의 운영 철학에 깊이 뿌리내려야 한다. 이는 항공사의 모든 의사결정 과정에 승무원의 건강이라는 변수가 당연하게 포함돼야 함을 뜻한다. 요컨대 비행 계획을 수립할 때 운항 관리사는 단순히 최단 거리와 최적 고도를 계산해 연료 효율성만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해당 항로와 고도의 예상 피폭선량을 함께 비교 평가해야 한다. 만약 약간의 고도 하향이나 항로 변경으로 피폭량을 크게 줄일 수 있다면 추가되는 연료비를 '안전을 위한 투자'로 인식하고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의사결정 구조와 기업 문화가 필요하다. 이는 '가능한 한 낮게(ALARA, As Low As Reasonably Achievable)'라는 방사선 방호의 대원칙을 기업 경영에 체화하는 과정이다. 이제 남은 과제는 대한항공을 비롯한 국내 항공업계의 리더십에 달려 있다. 승무원의 안전을 단순한 규제 준수 항목이나 비용 문제로 여기는 시각에서 벗어나 기업의 최우선 가치이자 지속가능한 성장의 핵심 동력으로 인식하는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하늘길의 안전은 항공기의 안전 외에도 그 길을 만드는 사람들의 건강과 안전이 보장될 때 비로소 완성될 수 있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HD현대중공업, 차세대 이지스 구축함 ‘다산정약용함’ 진수

17일 HD현대중공업은 (수) 울산 본사에서 8,200톤급 최첨단 이지스구축함 '다산정약용함'의 진수식을 거행했다고 밝혔다. 이 함정은 향상된 탐지 및 요격 능력으로 우리 해군의 핵심 전력으로 활약할 예정이며, 최근 주목받는 한미 조선업 협력의 상징으로도 평가받는다. '다산정약용함'은 정조대왕급 구축함(KDX-III Batch-II) 2번함으로, 길이 170m, 폭 21m, 경하톤수 8,200톤에 최대 30노트(약 55km/h)로 항해할 수 있다. 기존 세종대왕급 이지스함보다 기능이 대폭 향상된 최신 이지스 전투체계를 탑재해 탄도미사일 탐지 및 추적 능력이 2배 이상 강화됐다. 또한, 잠수함 탐지 거리를 3배 이상 늘린 통합소나체계를 적용해 수중 위협에 대한 대응 능력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특히, 적 미사일을 요격하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어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하는 '해상 기반 3축 체계'의 핵심 전력으로 꼽힌다. 다산정약용함은 시운전과 마무리 작업을 거쳐 2026년 해군에 인도될 예정이다. 이번 진수식은 미국의 조선업 부활을 목표로 하는 'MASGA(Maintaining and Strengthening the Shipbuilding-supply-chain and Growing industrial Advantages) 프로젝트'가 논의되는 가운데 열려 더욱 주목받았다. 다산정약용함은 미국의 이지스 전투체계를 HD현대중공업이 개발한 함정에 성공적으로 통합한 한미 조선 협력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평가된다. 이날 진수식에는 안규백 국방부장관, 강동길 해군참모총장 등 400여 명이 참석했다. 안규백 장관은 축사를 통해 “다산정약용함은 K-조선 기술력과 우리 해군의 의지가 결합된 결정체"라며 “방산 4대 강국을 견인할 국방력의 원천"이라고 강조했다. HD현대중공업 주원호 특수선사업대표는 “미국도 인정하는 최첨단 이지스함 건조 기술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며 “이를 바탕으로 함정 수출 세계화와 MASGA 프로젝트를 주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HD현대중공업은 2008년 '세종대왕함' 건조를 시작으로, 성능이 향상된 1번함 '정조대왕함'을 2024년 11월 해군에 인도했으며 현재 3번함 건조도 순조롭게 진행하며 이지스함 명가의 입지를 굳히고 있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정기선의 통 큰 결단…HD현대중공업 노사, 업계 최고 대우로 2차 잠정합의

​HD현대중공업이 조선업계 라이벌인 한화오션과 삼성중공업을 뛰어넘는 최고 수준의 대우로 2025년 임금교섭 2차 잠정합의안을 마련하며 미래를 향한 상생의 길을 열었다. 이번 합의는 최근 조선업 회복세 속에서 지속 가능한 성장 동력을 확보하고, 글로벌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기선 부회장의 '통 큰 결단'이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17일 HD현대중공업 노사는 24차 교섭에서 △기본급 13만5000원(호봉 승급분 3만5000원 포함) 인상 △격려금 520만원(상품권 20만원 포함) △특별 인센티브 100% △HD현대미포 합병 재도약 축하금 120만원 등을 골자로 한 2차 잠정 합의안을 도출했다고 밝혔다. ​이는 회사가 제시한 역대 최고 수준이자, 올해 임금 협상을 마무리한 경쟁사들의 타결안을 상회하는 파격적인 조건이다. ​앞서 지난 7월 24일 타결한 한화오션은 기본급 12만3262원 인상과 일시금 520만원 등에 합의했으며, 9월 10일 타결한 삼성중공업은 기본급 13만3196원 인상, 일시금 520만원, 복지포인트 10만원 인상(90만원→100만원)을 결정한 바 있다. HD현대중공업의 이번 제시안은 기본급 인상 폭에서 두 경쟁사를 모두 넘어서며 업계 최고 대우를 확고히 했다. ​이번 잠정 합의는 단순한 임금 인상을 넘어 회사의 미래 성장 동력 확보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HD현대중공업은 최근 마스가(MASGA) 프로젝트 수주와 HD현대미포 합병 등을 통해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이러한 중요한 시기에 노사 갈등으로 인한 생산 차질을 막고, 구성원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글로벌 경쟁력을 한층 더 끌어올리려는 정기선 부회장의 결단이 담겨있다는 분석이다. ​HD현대중공업 관계자는 “노사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두 번째 잠정합의안을 마련했다"며, “동종사 최고 수준의 이번 합의를 통해 글로벌 경쟁력 강화와 지역사회 발전을 이끄는 원동력이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노조는 오는 19일 조합원 총회를 열어 이번 잠정 합의안에 대한 찬반투표를 진행할 예정이다. 업계의 이목이 쏠린 투표 결과에 따라, HD현대중공업이 조선업 '슈퍼 사이클'의 주도권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하늘 위 숨겨진 위험, 우주방사선 (중)] 북극 항로와 비행 고도…피폭의 주범을 파헤치다

2023년 11월 당시 사무장급이던 대한항공 승무원의 위암 사망이 우주방사선 노출에 따른 '산업재해'로 처음 인정되면서 '하늘 위 숨겨진 위험'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높아졌다. 에너지경제신문은 대한항공 조종사들이 한국항공운항학회에 투고한 '항공 승무원의 우주방사선 피폭 저감에 관한 연구' 논문을 근거로 국내 항공승무원들이 마주한 '우주방사선 피폭'의 실태를 과학적 데이터로 분석하고, 그 원인과 현실적인 저감 방안을 심층적으로 조명해 본다. 기획 내용은 총 3회에 걸쳐 △상편 문제의 심각성 △중편 피폭의 핵심 원인 △하편 구체적인 해법과 미래 과제 순으로 연재한다. 항공사에게 북극항로(Polar Route)는 아시아와 북미 동부를 잇는 가장 매력적인 선택지다. 기존 태평양항로에 비해 비행시간을 30분에서 최대 1시간까지 단축하고, 그에 따른 유류비를 절감할 수 있어 경제적 효율성이 매우 높다. 대한항공은 지난 2006년 8월 국내 항공사 최초로 북극항로 운항을 시작했고, 뉴욕·애틀랜타·워싱턴·시카고·토론토 등 5개 핵심 미주노선에 북극항로를 적극 활용해 왔다. 또한, 최근 5년 간 미국 동부노선의 북극항로 이용률은 평균 65%에 이를 정도로 대한항공의 기재운용 전략의 핵심 요소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 '하늘 위 지름길'은 심각한 방사선 노출이라는 대가를 요구한다. 우주방사선은 크게 태양에서 오는 '태양 우주방사선(SCR, Solar Cosmic Ray)'​​과 태양계 밖 은하에서 오는 '은하 우주방사선(GCR, Galactic Cosmic Ray)'으로 나뉜다. 지구는 거대한 자기장을 형성해 이 고에너지 입자들의 상당수를 막아내는 보호막 역할을 한다. 하지만 지구 자기장의 힘은 모든 지역에서 동일하지 않다. 적도 지역에서 가장 강력하고 자기장이 대기로 수렴하는 남극과 북극의 양극 지역으로 갈수록 급격히 약해진다. 따라서, 북극 상공을 비행하는 것은 이 방사선 보호막의 가장 취약한 지점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같은 고도라고 해도 북극항로를 비행할 때의 우주방사선량은 다른 중위도나 저위도 항로에 비해 월등히 높을 수밖에 없다. 대한항공 조종사 노동조합(KAPU) 등 회사 구성원들은 북극항로 취항 초기부터 이 같은 방사선 노출 위험에 대한 우려를 지속적으로 제기해 왔다. 결국, 북극항로가 제공하는 경제적 이익은 승무원들의 건강을 담보로 얻어지는 것일 수 있다는 치명적인 딜레마를 안고 있다. 우주방사선 피폭량은 단순히 비행시간에만 비례하지 않는다. '어디를, 얼마나 높이' 비행하는 지가 결정적인 변수다. 대한항공의 자체 피폭 관리 프로그램(CARI-6M) 데이터를 분석한 연구는 이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연구는 대한항공이 취항하는 런던·로스앤젤레스(LA)·시드니·방콕·뉴욕 등 5개 대표 노선의 지난 2014~2018년 5년간 왕복 피폭선량을 비교했다. 그 결과는 노선별로 극적인 차이를 보였다. 2018년 기준 북극항로를 이용하는 뉴욕 노선의 1회 왕복 피폭선량은 평균 0.174밀리시버트(mSv)에 달했다. 반면, 대표적인 저위도 노선인 방콕 노선은 0.023mSv에 불과했다. 이는 단 한 번의 뉴욕 비행이 방콕 비행 7.5회에 해당하는 방사선에 노출된다는 의미다. 고도 역시 피폭량을 좌우하는 핵심 요인이다. 우주방사선은 지구 대기권에 진입하며 공기 분자와 충돌해 점차 에너지를 잃는다. 따라서 대기층이 두꺼운 저고도일수록 안전하고, 공기가 희박한 고고도로 올라갈수록 방사선량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연구진은 “고위도(북위 50도 이상) 노선에서 고고도(8000m 이상)로 비행하는 경우 고도가 높을수록, 비행 시간이 길수록 우주방사선에 많이 노출되고 피폭선량은 급격히 증가한다"고 결론 내렸다. 항공사들이 연료 효율을 높이기 위해 가능한 한 높은 고도로 비행하려는 경향이 결국 승무원들의 피폭량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는 셈이다.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태양 활동이 활발할 때 오히려 지구에 도달하는 우주방사선은 줄어든다. 이는 '태양의 역설'이라 불릴 만한 현상으로 승무원 피폭 관리에 있어 매우 중요한 변수다. 태양은 약 11년 주기로 흑점 활동이 활발해지는 극대기와 잠잠해지는 극소기를 반복한다. 태양 활동이 극대기에 이르면 강력한 '태양풍'이 발생하는데, 이 태양풍이 마치 방패처럼 태양계 외부에서 날아오는 은하 우주방사선(GCR)을 밀어내 지구에 도달하는 양을 줄여준다. 반대로 태양 활동이 극소기에 접어들면 이 방패가 약해져 더 많은 은하 우주방사선이 지구 대기권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연구진은 태양 활동의 지표인 '태양권 전위(HCP:Heliocentric Potentials)' 값과 노선별 피폭선량을 비교해 이 역설적인 관계를 명확히 입증했다. HCP 값은 태양 활동이 활발할수록 높아진다. 태양 활동이 극대기였던 2014년에 비해 극소기로 향하던 2018년에는 HCP 값이 크게 낮아졌고 이에 반비례해 고위도 노선인 뉴욕과 런던의 피폭선량은 뚜렷하게 증가했다. 반면에 저위도 노선인 시드니와 방콕은 태양 활동주기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는 태양 활동주기에 따른 피폭량 변화가 주로 극지방 항로에서 발생하는 문제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이러한 분석은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우주방사선 피폭은 예측 불가능한 재해가 아니라 11년 주기로 변동하는 '예측 가능한 위험'이라는 것이다. 항공사는 태양 활동주기를 고려해 극소기에 접어드는 시기에는 고위도 노선 운항에 대한 보다 강화된 안전 조치를 적용하는 등 동적인 위험 관리가 가능하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항공승무원 안전관리 차원에서 우주방사선량을 실시해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러한 예측 가능성이 승무원 피폭 저감을 위한 실질적인 운항정책 변화로 이어졌는지는 의문이라는 지적이다. 한편, 2022년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러시아 영공 폐쇄는 의도치 않은 '거대한 실험'이 됐다. 대한항공을 포함한 많은 항공사들은 기존에 북극항로를 통과하던 미주 동부노선을 알래스카와 태평양을 경유하는 남쪽항로로 우회해야만 했다. 이 때문에 비행시간이 편도 기준 1시간에서 1시간 40분가량 늘어나고 유류비가 증가하는 등 막대한 경제적 비용이 발생했다. 이는 역설적으로 북극항로 회피라는 피폭 저감 방안이 가져올 경제적 부담을 현실세계에서 수치로 드러낸 것이다. 러-우크라 전쟁이라는 지정학적 충격은 항공승무원 안전(피폭 저감)과 항공사 비용(유류비 증가) 사이의 균형점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 지에 대한 더 깊은 논의를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하늘 위 숨겨진 위험, 우주방사선 (상)] 대한항공 승무원 죽음으로 드러난 ‘공중산업재해’

2023년 11월 당시 사무장급이던 대한항공 승무원의 위암 사망이 우주방사선 노출에 따른 '산업재해'로 처음 인정되면서 '하늘 위 숨겨진 위험'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높아졌다. 에너지경제신문은 대한항공 조종사들이 한국항공운항학회에 투고한 '항공 승무원의 우주방사선 피폭 저감에 관한 연구' 논문을 근거로 국내 항공승무원들이 마주한 '우주방사선 피폭'의 실태를 과학적 데이터로 분석하고, 그 원인과 현실적인 저감 방안을 심층적으로 조명해 본다. 기획 내용은 총 3회에 걸쳐 △상편 문제의 심각성 △중편 피폭의 핵심 원인 △하편 구체적인 해법과 미래 과제 순으로 연재한다. 지난 2021년 5월, 대한항공에서 26년 간 근무했던 베테랑 승무원 송 모 씨가 위암 4기 진단을 받은 지 한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비극을 넘어 항공업계의 오랜 관행과 승무원들의 건강권 문제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졌다. 2023년 10월, 근로복지공단 서울남부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송 씨가 위암으로 사망하자 우주방사선 노출과 관련된 '산업 재해'로 처음 인정했다. 공단 측은 “고인의 누적 노출 방사선량이 측정된 것보다 많을 수 있고, 장거리 노선의 특성상 불규칙한 식생활 요소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송씨의 위암과 업무 사이에 상당한 인과 관계가 인정된다"고 판정했다. 송 씨는 1995년부터 2021년까지 연평균 1022시간을 비행했고, 이 중 절반 가량은 우주방사선 노출량이 5배 이상 높아지는 북극 항로를 통과하는 미주·유럽 노선이었다. 이 결정은 항공 승무원들이 비행 중 자연적으로 노출되는 우주방사선이 단순한 근무 환경의 일부가 아니라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실질적인 직업적 위험 요인임을 국가 기관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첫 사례로 남았다. 항공사는 더 빠르고 경제적인 운항을 위해 더 높은 고도에서 지구의 자전과 바람을 최대한 활용하는 최단 거리 항로를 비행한다. 특히 북미 동부와 유럽을 잇는 노선에서 시간과 연료를 획기적으로 절약해주는 북극 항로는 항공사의 수익성을 극대화하는 핵심 경로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 효율성의 이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대가가 존재했다. 지구 자기장의 보호가 가장 약한 극지방 상공과 대기의 방어막이 얇아지는 높은 고도는 우주에서 쏟아지는 고에너지 입자인 우주방사선에 가장 많이 노출되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송 씨의 산재 인정은 항공업계, 특히 국내 최대 항공사인 대한항공에 파장을 일으켰다. 회사 운영 효율성과 승무원의 건강권이라는 두 가치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점에서 우주방사선이 불가피한 것인지, 혹은 충분히 관리하고 저감할 수 있는 문제인지에 대해서다. 지금껏 항공 승무원의 우주방사선 피폭은 업무 환경의 일부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이어진 법적 판단들은 이러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우주방사선 피폭을 직업병의 영역으로 편입시켰다. 근로복지공단의 결정은 단일 사례에 그치지 않았다. 지난달 28일 서울행정법원은 2009년부터 근무하다 2019년 백혈병 진단을 받은 전직 승무원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요양 불승인 처분 취소 소송 1심에서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우주방사선에 포함된 전리방사선은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가 지정한 발암 물질"이라며 “방사선은 최소량으로도 잠재적으로 해를 끼칠 수 있고 누적 방사선량이 특정 수준에 도달하지 않았다고 해서 안전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특히 해당 승무원의 총 비행시간 7672시간 43분 중 4600여시간이 8시간 넘는 장거리 비행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평균적인 승무원보다 더 높은 수준의 우주방사선에 노출됐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명확한 '문턱값(threshold)'이 없는 저선량 방사선의 확률론적 위험성을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법적 판결들은 대한항공을 비롯한 항공사들의 기존 입장을 무력화시켰다. 대한항공은 송 씨의 사례에서 “승무원의 누적 피폭 방사선량이 안전기준인 연간 6mSv를 초과하지 않도록 관리했으며, 위암과 우주방사선의 상관 관계는 밝혀진 바 없다"는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그러나 법원과 질병판정위원회는 단순히 법적 기준치인 연간 6mSv를 준수했는지 여부를 넘어 직업 환경 자체가 질병 발생에 '상당한 인과 관계'를 가졌는지를 판단했다. 이는 항공사의 책임 패러다임이 '규제 준수'에서 '실질적 위험 관리'로 전환됐음을 의미한다. 2009년 미국 우주 기상 워크숍에서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항공 승무원의 연간 평균 피폭선량은 3.07mSv로 원자력 관련 종사자 1.87mSv, 방사선 의료 종사자 0.75mSv를 크게 상회했다. 이는 일반인의 연간 선량 한도인 1mSv의 세 배가 넘는 수치다. 2018년 기준 1회 이상 국제선 비행을 한 대한항공 직원의 연평균 피폭선량은 운항직 2.321mSv, 객실 승무원은 2.970mSv에 달했다. 개인별 최고 피폭량은 연간 법적 한도인 6mSv에 근접하는 5.648mSv(운항), 5.392mSv(객실)를 기록한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 객실 승무원의 평균 피폭량이 운항 승무원보다 높은 점이 주목할 만하다. 연구진은 그 원인으로 객실 승무원이 특정 기종에 고정되지 않고 다양한 항공기에 탑승하며, 고위도·장거리 노선인 미주·유럽 노선 비행 횟수가 많고, 연평균 비행 시간도 899시간인 조종사들보다 긴 1014시간에 달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는 피폭 문제가 특정 직책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항공사의 인력 운용·스케줄링 정책과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음을 시사한다. 항공 승무원이 노출되는 우주방사선은 한 번에 대량의 방사선을 쬐는 급성 피폭과는 성격이 다르다. 비행 때마다 비교적 낮은 선량의 방사선에 장기간에 걸쳐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만성 저선량 피폭'에 해당한다. 저선량 피폭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과학적으로 명확히 규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라는 것이 연구진의 입장이다. 10mSv의 방사선 노출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통계적으로 유의미하게 밝혀내려면 500만명, 1mSv의 경우 5억명이라는 비현실적인 규모의 연구 대상이 필요해서다. 그러나 과학적 인과 관계 입증의 어려움이 위험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저선량 방사선 피폭의 가장 큰 우려는 암이나 유전적 돌연변이와 같은 '확률론적 영향(stochastic effects)'이다. 이는 피폭선량이 높을수록 질병 발생 확률이 증가하지만 발병 여부를 단정할 수는 없는 특성을 가진다. IARC는 우주방사선의 주성분인 전리방사선을 '사람에게 암을 일으킨다는 증거가 확실한 물질'이라는 이유로 '그룹 1(Group 1)'로 분류하고 있다. 프랑스 식품환경산업안전보건청(ANSES)를 포함한 제반 연구 기관들도 항공 승무원 집단에서 편평세포암·흑색종을 포함한 피부암과 백혈병 등 특정 암의 발병률이 일반인에 비해 높게 나타나는 결론을 도출해냈다. ANSES는 문헌과 IARC 논문을 언급하며 태양과 우주방사선이 원인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비행 경력 20년 이상, 연간 900시간 이상 비행하는 승무원의 경우 추가적인 암 발생 위험이 최대 140명당 1명꼴로 평가되기도 했다. 이는 일반적인 암 발생 빈도인 평균 5명당 1명보다는 낮지만 특정 직업군에서 관찰되는 분명한 위험 증가 신호라는 분석이다. 최근의 산재 인정 사례들은 이러한 의학·통계적 개연성을 법적 인과 관계로 인정한 결과물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항공사는 더 이상 과학적 불확실성을 방패 삼아 책임을 회피하기 어려워졌다. 이로써 항공사는 단순히 법적 한도를 넘지 않도록 관리하는 소극적 대응을 넘어 예방 원칙에 입각해 피폭량 자체를 합리적으로 달성 가능한 가장 낮은 수준으로 줄이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입증해야 하는 새로운 법·사회적 책무를 안게 됐다는 평가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당사는 법에 의해 정한 기준으로 우주방사선 노출량을 철저히 관리 중이며 건강 상담 등 필요한 의료 지원을 제공하고 있다"며 “아울러 근로복지공단의 산재 판정을 위한 자료 제공과 역학 조사에도 적극 협조하고 있고 판정 결과를 따르고 있다"고 전했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美관세협상 지연에 MASGA 참여기업 ‘마이웨이 전략?’

대미투자 방식을 두고 한·미 간 관세협상이 늦어지면서 조선협력 프로젝트 '마스가(MASGA)'도 진행 속도 여파를 받을까 조선업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투자 방식과 항목 등이 나와야 국내 조선사들도 독자적인 대미 진출 전략을 구체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세협상의 지연으로 당분간 미 해군성을 비롯한 주요 기관의 러브콜을 받아온 한국 기업들의 '개인기'에 의존하게 될 것이라 전망이 우세하다. 이 기회에 한미 조선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전략을 정부와 업계가 재점검해야 한다는 주문마저 나온다. 15일 조선업계에 따르면, 한미 조선협력의 한 축인 마스가 프로젝트는 양국 관세협상 지연과 맞물려 구체적인 투자 방향과 금액을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관세협상 쟁점으로 부상한 3500억달러 규모의 대미투자 안에 1500억달러 규모 마스가 프로젝트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지난 7월 관세협상 타결을 전후로 HD현대와 한화오션, 삼성중공업 등 조선3사와 한국조선해양플랜트협회가 대미 진출 준비를 위해 꾸린 태스크포스(TF)가 논의를 진전시킬 변수도 여기에 달려있다. 관세 협상 당시 마스가 프로젝트는 한국 조선사들이 미국 조선소를 현대화하기 위해 1500억달러 규모의 펀드를 조성하고 현지 조선 인력을 양성하는 방안 등을 담았다. 구체적인 펀드 조성 방식부터 투자 내용을 정해야 마스가를 시작할 수 있는 상황이다. 양국 조선업 협력은 지난 7월 말 관세협상 과정에서 핵심 카드로 부상했다. 미국의 주요 동맹국 중 한국 조선사들의 선박 건조 기술·생산 경쟁력을 대체할 곳이 사실상 없기 때문이다. 중국은 2020년부터 미국보다 더 많은 함정을 보유했고, 2030년에는 435척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될 정도로 미국과 해양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도 우수한 자체 함정 설계 기술을 바탕으로 해군 함정을 늘리기 원하지만, 미국 내 조선소가 20곳도 안되는 데다 인프라가 충분하지 않아 함정 신조를 제때 인도받지 못해왔다. 조선업계는 마스가가 거론되기 전부터 양국 조선협력에 직접 공을 들여온 만큼 관세협상 진행 과정에서 협력 속도가 더뎌질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한미 관세협상을 계기로 조선업 협력이 제조업 전반에 걸친 정부 간 협력 관계로 성격이 바뀐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지난해부터 미 해군의 주요 인사들이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 조선소를 직접 찾았던 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직접 한국 정부에 한미 조선업 협력 메시지를 던졌다. 이런 가운데 대미 투자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협상이 지지부진해 협력 분위기가 경색될 우려가 있다. 협력 분위기 경색이 장기화되는 경우 존스법과 번스-톨레프슨법 등 미 현지의 법적 허들을 해결하는 과제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존스법은 미국 내 항구를 오가는 선박을 미국에서만 건조하도록 규정한다. 번스-톨레프슨법은 미국 군함을 해외에서 건조할 수 없게 정한 법이다. 두 법안을 개정하는 것을 넘어 동맹국의 미 선박 건조를 허용하는 '미국을 위한 조선업과 항만시설법(SHIPS Act)'도 필요하다. 미국이 한국 조선사의 도움을 절실히 원하기 때문에 미 상·하원 의원들이 법안을 발의했지만 의회를 통과하기까지는 아직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다. 일단 마스가가 본궤도에 오르기 전까지는 조선3사의 '개인기'가 협력 추진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HD현대는 방산 조선소 헌팅턴 잉걸스와 상선 중심의 에디슨 슈에스트 오프쇼어 등 미 현지 조선사들과 손잡고 공동 건조와 공급망 강화, 인력 양성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 미 대학들과도 연구개발과 기술인재 육성 등을 협력하기로 했다. 한화는 1억달러를 들여 필라델피아 소재 필리조선소를 인수한 뒤 선박 건조 능력을 현재 연간 1.5척 수준에서 2035년까지 8~10척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설비를 고도화하고 있다. 필리조선소에 한화오션 기술 인력을 직접 보내 교육도 진행 중이다. 미 함정 유지·보수·건조(MRO)의 경우 한화오션과 HD현대중공업이 각각 3척과 1척씩 수주했다. 이 같이 미국 내 수요와 한국의 기술력이 만들어낸 조선업 협력의 동력을 이어가기 위한 전략을 재점검할 때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마스가를 통해 미국 현지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해 얻는 장밋빛 효과를 막연하게 기대하기보다, 조선사들이 관련 공급망과 가치 사슬을 확대하고 정부 차원에서 동맹의 토대를 다지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한미 조선업 협력의 정부 간 소통 창구도 정부와 대통령실 차원으로 격상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조언도 나온다. 이신형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학과장(교수)은 “조선업 협력 측면에서 보면, 한국 정부가 미국에 마스가 프로젝트를 제안한 이후 실제 진전된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다"며 “한국 정부와 조선사들이 미국 조선업 재건의 핵심 파트너로 참가했을 때 미국 시장에서 대형 수주를 기대하기보다 더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세일즈 마케팅 관점에서 보면 한국은 우수한 조선업 역량으로 미국의 '핫 버튼'을 눌렀기 때문에 유리한 입지에 있다"며 “미국의 함정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이기 때문에 조선업 협력은 한미 군사동맹 어젠다를 과학 기술 협력으로 확장할 기회를 모색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 교수는 “미국 상무부에 한미 조선 협력을 논의할 카운터파트가 없기 때문에 정부는 관련 조직을 대통령실 산하에 두고 종합적인 협력 방안을 세우기 위해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승현 기자 jrn72benec@ekn.kr

화물운수법·최저 임금·노란봉투법…기업 공시 뒤흔드는 노동 이슈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DART)에 새로운 경고 메시지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재무 건전성이나 시장의 변동성 같은 전통적인 리스크를 넘어 '노동 이슈'라는 새로운 암초가 기업의 항로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기업들 역시 더 이상 노동 문제를 부수적인 인력 관리 영역이 아닌 사업의 존폐를 가를 수 있는 중대한 경영 리스크로 인식하기 시작한 모습이다. 14일 업계에 따르면 종합물류기업 ㈜한진은 최근 공시한 투자 설명서를 통해 노동 이슈가 단순한 비용 문제를 넘어설 수 있음을 직접적으로 경고했다. 한진은 먼저 육상 운송 시장의 구조적 문제를 지적했다. 업계를 특성을 설명하며 화주-주선 업체-운송 업체-개별 차주 간 복잡한 거래 구조와 위수탁제 위주의 시장 구조로 인해 운송업자의 화주에 대한 운임 교섭력이 매우 낮은 편이라고 언급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2002년 출범한 화물연대의 파업 가능성을 핵심 위험 요인으로 명시했다. 특히 구체적인 정치적 상황을 언급하며 리스크의 현실성을 부각했다. 투자 설명서에는 “2025년 7월21일 이재명 대통령의 대선 후보 당시 공약이었던 일부 화물 자동차에 안전 운임제를 3년 간 한시적으로 재도입하는 '화물자동차 운수사업법 일부개정법률안'이 국회 국토교통위원회를 통과했고 해당 법안은 과거 이슈가 됐던 '3년 일몰제'를 다시 포함시켜 노동계의 반발이 일어나고 있다"고 적혀있다. ㈜한진은 공시를 통해 '최저 임금' 불확실성도 지적했다. 회사는 “물류 산업의 특성상 도급비나 위탁 작업료 등 인건비성 원가가 비용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며 최저 임금 변동성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내년 최저 임금 인상률인 2.9%가 비교적 평이했다면서도 예측 불가능한 정부 정책 자체가 경영 리스크임을 분명히 했다. 투자 설명서에는 “향후 정부의 정책이나 경기 상황에 따라서 최저 임금이 급격하게 상승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일례로 2018년과 2019년 최저 임금은 전년대비 각각 16.4%, 10.9% 인상되며 급속하게 상승했다"고 썼다. ㈜한진은 원가 상승에 대응하기 위해 자동화를 확대하고 있지만 최적화와 효율화가 지연되고 원가 상승이 판가의 지속적인 인상으로 이어지지 못할 경우 수익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도 함께 공개했다. 최근 가장 첨예하게 부각된 이슈는 지난달 24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노란봉투법)이다. 이 법은 사용자의 범위를 원청까지 확대해 책임 범위를 넓히고 노동 쟁의 대상을 경영상 결정에까지 포함하며 쟁의 행위에 대한 기업의 손해 배상 청구를 제한함을 골자로 한다. 법안이 공포 6개월 후 시행될 예정인 가운데 주요 기업들은 투자 설명서를 통해 이 법이 초래할 구조적 위기를 경고하고 나섰다. SK㈜는 1700억원 규모의 사채 발행 투자 설명서에서 해당 법안이 손자회사인 SK지오센트릭의 석유화학 부문 사업 재편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명시했다. 이 회사는 “노동조합법 개정안은 회사의 사업 경영상 결정이 근로 조건에 영향을 주는 경우 노동 쟁의 행위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라는 구체적인 이유를 들며 경영상의 전략적 결정이 노조의 쟁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공식화했다. 복잡한 원하청 구조가 얽힌 건설업계도 마찬가지다. 법이 시행되면 현장 곳곳에서 노사 갈등과 잦은 파업이 빚어져 공기 지연과 비용 증가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현대건설은 3100억 원의 사채 발행 증권 신고서에 “노동 쟁의의 범위를 임금과 근로 조건뿐 아니라 경영상 결정과 구조조정, 정리 해고 등으로 확대했다"고 지적했다. 자유기업원 관계자는 “노란봉투법은 △노사간 쟁위 행위 빈번화 △사회 갈등 장기화 우려 △죄형 법정주의 명확성 원칙 위배 △기업의 법적 위험 예측 불확실성 증대 △폭력·파괴 행위에 대한 면책과 손해배상 제한에 따른 불법파업 억제력 약화 △사용자 재산권의 과도한 침해 및 법치주의 근간 훼손 등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파라타항공 가세, 이스타항공 매각설…‘LCC 지각변동’ 예고

대한민국 저비용 항공(LCC) 시장이 전례 없는 구조적 대격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폭발했던 여행 수요가 점차 안정화되고 고질적인 공급 과잉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나는 가운데, 시장의 근본적인 판도를 뒤흔들 네 가지 핵심 동인이 동시다발적으로 작용하며 업계의 미래를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신규 사업자인 파라타항공은 항공 운항 증명(AOC)을 취득하고 본격적인 상업 운항에 돌입하며 이미 포화 상태인 시장에 새로운 경쟁의 불씨를 지폈다. 여기에 사모펀드 VIG 파트너스는 성공적으로 회생시킨 이스타항공을 시장에 매물로 내놨다는 설이 파다해 LCC 업계의 지각 변동을 촉발할 것으로 점쳐진다. LCC 1위 사업자인 제주항공을 보유한 애경그룹은 핵심 계열사 매각을 통해 확보한 자금으로 이스타항공 인수에 나설 가능성이 제기된다. 또한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통합 과정에서 파생되는 독점 노선의 재분배는 기존 LCC들에게는 성장의 기회이자 새로운 경쟁의 장을 열고 있다. 11일 항공업계에 따르면 파라타항공(옛 플라이강원)은 지난 8일 국토교통부로부터 AOC를 재발급받는 데 성공하며 상업 운항을 위한 모든 법·행정적 절차를 마무리했다. 이는 수개월에 걸친 김포·청주·양양·제주 등지를 오가는 시험 비행을 성공적으로 완료한 결과물이다. AOC 발급 직후인 11일부터 파라타항공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항공권 판매를 개시하며 본격적인 시장 경쟁에 뛰어들었다. 파라타항공의 초기 기단은 A330-300 1호기와 A320-200 2호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LCC 업계에서 비용 효율성을 위해 단일 기종을 선호하는 전통적인 전략과는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협동체인 A320과 광동체인 A330을 동시에 운용하는 혼합 기단 전략은 단거리 노선뿐만 아니라 중장거리 노선까지 염두에 둔 포석으로 해석된다. 윤철민 파라타항공 대표는 “안전 운항을 최우선 원칙으로 삼아 합리적이고 차별화된 서비스를 통해 고객에게 사랑받는 행복한 여행 파트너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러나 치열한 가격 경쟁이 지배하는 LCC 시장에서 이러한 비전이 어떻게 구체화될지는 지켜볼 필요가 있다. 파라타항공의 첫 노선은 거점 공항인 양양과 제주를 잇는 국내선이다. 이는 인천과 김포 등 수도권의 극심한 경쟁을 초기에 회피하고, 강원도라는 지역적 기반을 활용해 안정적으로 시장에 안착하려는 전략적 선택으로 분석된다. 틈새 시장을 공략해 초기 운영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그러나 파라타항공의 장기적인 비전은 단순한 국내선·단거리 국제선 사업자에 머무르지 않는다. 회사 측은 과거부터 북미 노선 운항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공공연히 밝혀왔고 이는 1호기로 광동체인 A330을 도입한 배경을 설명해 준다. 이는 파라타항공이 전통적인 LCC 모델을 넘어 에어프레미아와 같이 합리적인 가격에 장거리 노선을 제공하는 하이브리드 항공사 모델을 지향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단기적으로는 틈새 시장에서 생존을 도모하고, 장기적으로는 고부가가치 장거리 노선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해 기존 LCC와 하이브리드 항공사 모두와 경쟁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다. 파라타항공의 진입은 이미 좌석 공급 과잉 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국내 LCC 시장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파라타항공의 가세로 국내 LCC 사업자는 총 9개로 늘어났다. 이는 세계 최대 항공 시장이자 국토 면적이 훨씬 넓은 미국의 LCC 사업자 수와 동일한 수준으로, 국내 시장 규모에 비해 과도하게 많은 플레이어가 경쟁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문제는 이러한 공급 확대가 수요 증가 속도를 앞지르고 있다는 점이다. 항공정보포털시스템에 따르면 국내 LCC들의 총 좌석 공급은 약 12% 증가한 반면, LCC 이용 여객 수 증가는 8.6%에 그쳤다.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은 필연적으로 '출혈 경쟁'으로 이어지며 모든 시장 참여자의 수익성을 악화시킨다. 파라타항공의 등장은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더욱 심화시키는 촉매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파라타항공의 강점은 모기업 위닉스의 지원을 전폭적으로 받는다는 점이다. 이 같은 조건이 유지된다면 이미 한계에 다다른 시장에 새로운 충격을 가해 재무적으로 취약하거나 차별화에 실패한 경쟁자들의 퇴출을 앞당길 것으로 예상된다. 사모펀드(PEF) 운용사 VIG파트너스는 2023년 1월 약 400억원 상당의 구주 인수 대금과 1100억 원의 유상증자를 포함한 대규모 자본을 투입해 회생 불가능에 가까웠던 이스타항공 지분 100%를 인수했다. 그 결과 2년여 만에 이스타항공은 괄목할 만한 운영 및 재무적 회복을 이뤄냄으로써 LCC 시장에서 가장 매력적인 매물 중 하나로 탈바꿈하는 데에 성공했다. 운항 재개 당시 3대에 불과했던 항공기는 현재 15대까지 늘어났고, 내년까지 총 27대의 기단을 확보한다는 공격적인 확장 계획을 추진 중이다. 매출액은 2023년 1467억원에서 이듬해 4612억원으로 3배 이상 급증했으며 , 같은 기간 영업손실 폭도 크게 줄이며 흑자 전환의 가시권에 들어섰다. VIG 파트너스가 희망하는 이스타항공의 매각 가격은 6000억원 수준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는 최근 LCC 시장에서 이루어진 다른 M&A 사례와 비교했을 때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평가된다. 대명소노그룹이 티웨이항공의 경영권을 확보하는 데 투입한 총비용이 약 2500억원 수준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스타항공의 희망 매각가는 두 배 이상이다. VIG파트너스가 인수 후 2년 7개월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 투자금 회수를 모색하는 것은 현재가 이스타항공의 기업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최적의 시점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그러나 업계 관계자는 “티웨이항공은 대형 기재를 보유했고 유럽과 호주를 넘어 북미 운수권을 따냈다"며 “6000억원은 너무 비싼 가격"이라고 지적했다. 애경그룹은 최근 그룹의 핵심 현금 창출원이던 애경산업을 태광그룹 컨소시엄에 매각하기로 결정하고 우선 협상 대상자로 선정했다. 시장에서는 이번 매각을 통해 애경그룹이 4000억원을 상회하는 넘는 막대한 현금을 확보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 결정은 단순한 재무 구조 개선을 넘어 그룹의 미래를 건 중대한 전략적 선택이라는 게 재계 중론이다. 애경그룹은 애경산업 매각 대금을 항공과 화학 양대 축에 집중 투자하는 '뉴 애경' 전략을 구체화할 계획이다. 이는 사실상 그룹의 자원을 재배치해 다가오는 항공 시장의 패권 경쟁에 대비하기 위한 체력을 비축하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애경그룹과 제주항공이 이스타항공 인수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합병으로 탄생할 '메가 LCC'의 압도적인 위협 때문이다. 진에어-에어부산-에어서울이 통합해 출범한 거대 LCC는 출범과 동시에 약 43~50%에 달하는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며 십수년간 업계 1위를 수성해온 제주항공을 단숨에 2위로 밀어낼 것으로 전망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주항공에게 이스타항공 인수는 선택이 아닌 필수에 가깝다. '메가 LCC'와 대등한 수준에서 경쟁하기 위해서는 M&A를 통한 '몸집 불리기'가 유일한 현실적 대안이기 때문이다. 2020년 이스타항공 인수를 추진했다가 막판에 무산된 경험이 있는 제주항공으로서는 이번 기회를 놓칠 경우 시장에서의 주도권을 영원히 상실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김이배 제주항공 대표가 “사모펀드가 투자한 항공사들은 언젠가는 매각 대상이 되며, 향후 M&A 기회가 왔을 때 어떻게 대응할지가 중요하다"고 언급한 것은 이러한 전략적 고민을 명확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는 공격적인 확장이 아니라 시장 지위를 지키기 위한 절박한 방어적 조치인 셈이다. 제주항공과 이스타항공은 보유 기종도 동일해 통합이 성사되면 기단 규모 확대에 따른 '규모의 경제'를 실현함으로써 각종 분야에서 원가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시장에서 거론되는 6000억원 상당의 인수 자금은 애경그룹 전체의 재무 구조에 상당한 부담을 줄 수 있다. 또한 작년 12월에 무안국제공항에서 발생한 참사의 여파를 수습하고 내부 안정성을 다져야 하는 시점이라는 점도 M&A 추진의 부담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여 쉽지 않을 것이라는 반론도 제기된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통합은 LCC 시장에 전례 없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양사 합병에 대한 공정거래위원회의 승인 조건에 따라 통합 항공사는 독과점이 우려되는 노선의 운수권과 특정 시간대 공항 이착륙 권리인 슬롯을 다른 항공사에 이관해야 한다. 재분배 대상은 일본·중국·인도네시아 등을 포함한 국제선 26개 노선과 국내선 8개 노선에 달한다. 이 귀중한 자산을 차지하기 위한 LCC들의 물밑 경쟁은 이미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번 재분배 과정에서 합병의 당사자인 한진그룹 LCC인 진에어·에어부산·에어서울은 배제될 가능성이 있어 나머지 항공사들에게는 더 큰 기회가 열릴 전망이다. 현재 시장에서는 이스타항공과 티웨이항공이 가장 유력한 수혜자로 거론된다. 특히 티웨이항공은 이미 대한항공으로부터 유럽 4개 노선을 이관받아 성공적으로 운항한 경험이 있어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다는 평가다. 반면 LCC 1위인 제주항공은 최근 무안공항에서 발생한 사고로 인해 이번 재분배 심사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변수가 존재한다. 노선 재분배는 단순히 LCC들의 운항 노선 수를 늘리는 것을 넘어 그들의 사업 모델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고수익 비즈니스 노선과 독점 관광 노선을 확보하게 된 LCC들은 저마진의 출혈 경쟁이 만연한 단거리 레저 노선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보다 안정적이고 다각화된 수익 포트폴리오를 구축할 수 있게 된다. 업계 관계자는 “당국의 노선 배분 기준이 뭔지 알 수 없고, 항공은 규제 산업이기 때문에 정부의 정책적 결정이 각 기업의 미래를 좌우하는 '킹메이커' 역할을 하게 된다"고 전했다. 그러나 장거리 노선 확장이 반드시 수익성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고가의 광동체 항공기 도입과 복잡한 승무원 자원 관리, 막대한 유류비 등은 LCC의 근본적인 사업 모델을 위협해서다. 실제로 티웨이항공은 유럽 노선 취항으로 매출은 크게 늘었지만 비용 부담이 가중되며 영업손실 폭이 확대되는 등 수익성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는 장거리 노선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따기 위해 나선 LCC들이 자칫 '승자의 저주'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고하는 사례다. 이들은 풀 서비스 캐리어(FSC)만큼 높은 운임을 받기는 어려우면서도 비용 구조는 이에 가까워지는 딜레마에 직면할 수 있어 꾸준한 재무 관리가 요구된다. 박규빈 기자 kevinpark@ek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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