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9월 22일(일)



[박원주 칼럼]ESG는 ESG(지속가능)할까?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24.09.22 10:00

박원주 전 청와대 경제수석

박원주

▲박원주 전 청와대 경제수석

ESG는 환경, 사회, 거버넌스의 관점에서 기업의 경영행태, 운영, 성과 등을 평가하는 프레임워크이다. 쉽게 말하면 기업이 환경을 보호하는지, 주변 이해관계집단과 잘 지내는지, 법과 윤리를 지키는지 보겠다는 말이다. 당연히 좋은 말이다. 그렇게 해주면 고맙겠지만, 그러라고 강요하기도 어려운 '선한 기업'의 이야기인 것 같다.


그런데 이 '당연한' ESG가 더 이상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2015년 폭스바겐이 디젤차의 배출가스 센서를 소프트웨어적으로 조작했던 '디젤 게이트'가 발각되었다. 회사는 300억불의 벌금과 소송 비용을 내야 했다. 주가가 급락했고 기업의 전 세계적 평판이 땅에 떨어지는 댓가도 치러야 했다. 2016년 미국의 웰스파고은행에서는 창구 직원들이 매출을 늘리려 고객 동의 없이 계좌를 개설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결과 30억불이 넘는 비용을 벌금과 합의금으로 써야 했다. 기업 가치와 고객신뢰도 한꺼번에 잃어버렸다. 애플의 조립업체로 유명한 중국의 폭스콘은 근로자들의 열악하고 위험한 작업환경과 장시간 노동, 저임금 등이 문제되면서 고객사들의 집중감사와 임금 인상, 작업 환경 개선 등 대대적인 개혁을 겪어야 했다.


국내에서도 이런 사례가 적지 않다. 국내 2위의 우유 업체였던 N사는 대리점에 대한 상품 강매, 비정규직 위주 고용, 과장 광고, 사주 일가의 비윤리적 행태 등으로 거센 비난을 자초했다. 사주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기업 이미지는 극도로 악화되었고, 그 결과 주가가 70% 이상 빠지고 만성적자에 시달리게 되었다. 대기업에만 이런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BMW, 볼보 등 글로벌 자동차 회사들이 한국에 자동차 부품을 주문하면서 RE100 이행을 요구하는 탓에 수출계약이 위태로워졌다는 보도도 있었다. 최근에는 지방의 작은 재래시장에서까지 식재료 오염, 바가지 요금 등 고객상대 갑질이 도마 위에 오르면서 가게문을 닫는 일도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 기업 경영자, 장사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억울한 부분도 많겠지만 '선하지 못한' 기업은 과거 어느 때보다 매섭게 질타당하고 있다.


ESG가 도대체 뭐길래 이렇게 강력한 구속력을 갖기 시작한 것일까? ESG는 2004년 UN Global Compact 보고서에 등장하면서 힘을 받기 시작한다. 당시 보고서 제목에 '금융시장을 변화하는 세상에 연계'한다는 말이 들어 있다. 금융시장의 투자행태를 바꾸어 인류 생존을 위한 통합적 사회개혁을 이루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ESG를 추구하는 기업에 우선 투자하고, 그런 기업의 주가를 올려 주겠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서 제도권 은행, 증권사, 펀드 등 시장에 자금을 공급하는 금융권 기업들부터 자발적으로 생각과 행동을 바꾸도록 요구했다. 이러한 금융권 정화 운동에 본격적인 쓰임새가 생긴 것은 기후변화로 인류의 생존이 심각하게 위협받는 상황에서 각국 정부의 대처가 미흡했던 탓이 적지 않다.


정부 규제가 움직이지 않으니 금융권이 주도하여 ESG에 강한 기업들이 경쟁력을 갖도록 시장의 룰을 다시 쓴 것이다.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ASML과 같은 글로벌 수퍼갑들이 워낙 착해서 ESG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ESG에 뒤처지면 자기 회사의 금융리스크가 더 커질 수 있기 때문에 삼성과 같은 벤더 기업에 RE100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종전의 '착한' 기업과 돈이 만나게 된다. 착하지 못한 기업은 적시에 필요한 투자를 받지도 못할 뿐더러 시장도 열리지 않으며 필요한 장비, 소재도 살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ESG에 대한 반발도 만만치 않다. 2023년 3월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및 뱅크런 사태는 이 은행이 ESG 펀드에 주력 투자했다는 점에서 ESG가 시장에서 통하지 않은 대표사례로 꼽히곤 한다. 2023년 미국 주정부중 3분의 2 이상이 ESG에 반대되는 입법을 발의했고 그중 절반이 통과되었다. 여러 나라 보수 정부들이 ESG 조류를 무시하거나 그에 반하는 정책, 입법을 반복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젠 ESG의 확산 흐름에 족쇄가 채워지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SVB의 파산 사태는 기업의 위험관리 과정에서 거버넌스(G) 요건을 지키지 못한 것으로 지적될 소지가 크다. 각국 정부의 규제조치 흐름은 혼란스럽지만 그래도 ESG의 원칙이 정부 정책에 하나하나 반영되는 방향으로 이행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금융회사의 지배 구조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시행되면서 올 7월부터는 금융권 내부통제 기준을 강화하기 위한 책무구조도 제출이 의무화되기 시작했다. 금융업계의 중대재해처벌법이라는 아우성이 빗발치고 있지만 결국 ESG의 거버넌스 원칙이 우리 규제체계에도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시장에서도 ESG는 자생적인 성장의 기반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펀드들이 ESG에 부합하는 기업 활동에 투자를 집중하면서 과거 경제성이 떨어졌던 재생에너지, 친환경기술이 급속하게 성장했다. 이젠 공적 지원이 줄어든다 하더라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ESG 비즈니스 모델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S&P, 무디스, 피치 등 글로벌 신용평가사들도 ESG를 기업신용도에 반영하기 위해 ESG 평가기관들을 인수합병하는 등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글로벌 ESG 투자비율도 2016년 27.9%에서 2020년 35.9%로 성장했다.


현장에서 ESG는 지속가능경영과 거의 같은 말로 쓰인다. 그래서 'ESG가 지속가능하냐'는 질문은 웃자는 말로 들린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하는 답은 비장하다. ESG는 이미 글로벌 트렌드가 되었다. 이에 적응하고 기회로 삼는 기업과 국가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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