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논산훈련소 28연대에서 함께 복무했던 후배로부터 오랜만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형! 충청도에서 서울 가는 게 쉽지 않지만, 다가오는 주말에 초등학교 6학년 딸과 함께 광장 집회에 참여하려고 해요. 언니, 오빠들이 참여하는 민주주의 현장에 딸이 관심을 보입니다. 저도 미래를 위해 이런 나라를 물려주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후배 전화를 받으며 비상계엄이 선포되던 날, 장갑차를 막고 본회의장을 침탈하는 특전사 대원에 저항했던 시민과, 소화기를 분사하며 저항했던 국회 보좌진이 떠올랐습니다. 또한 1987년 4월13일 전두환의 호헌(護憲) 조치 발표 후 명동성당에서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선배와 시민도 기억났습니다. 이분들 덕분에 저와 후배의 가슴도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44년 만의 비상계엄 선포는 두려움과 고통을 안겨줬지만 이번 탄핵시위는 과거의 4.19 혁명과 5.18 광주항쟁, 1987년 6월항쟁과 2016년 촛불시위를 거치며 대한민국 민주주의 품격을 높이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MZ세대 참여는 국민의힘 의원들이 국민보다 당론을 우선시하는 태도를 성찰하게 만들고, 민주주의를 위한 시민 저항문화를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MZ세대는 M세대와 Z세대를 묶어 부르는 신조어입니다. M세대는 1980년 초반에서 1990년 중반 출생자로 새 천 년이 시작된 2000년 즈음 성인이 되고, 알파벳 마지막 글자인 Z세대는 1990년 중후반에서 2010년 초반 출생자입니다. MZ세대는 일반적으로 인터넷과 모바일, 소셜 미디어에 익숙한 디지털 원주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탄핵 표결 촉구에 앞장서는 MZ식 집회문화에 대해 뉴욕타임즈는 “아이돌 콘서트에서 보던 응원봉을 흔들며 축제 같은 분위기에서 집회를 시작했다"고 묘사했고, 프랑스 AFP통신은 “직접 만든 깃발과 K팝, LED 촛불을 흔드는 시위가 마치 댄스파티를 연상케 한다"고 보도했습니다. 영국 BBC는 “집회가 콘서트로 바뀌었다"고 전했습니다.
강력한 항의를 넘어 풍자를 담은 집회문화 변화를 보며 MZ세대의 신박함을 느낍니다. 이들의 저항문화 특징은 첫째, 팬덤 상징인 응원봉을 흔들고 K팝을 개사해 집회를 즐긴다는 점입니다. 소녀시대와 로제의 음악이 울려 퍼지며,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제 안녕"이라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가사는 MZ세대의 새로운 저항가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둘째, 정치색을 배제한 해학을 담은 이색 깃발들이 다양하게 등장합니다. '강아지발냄새연구회', '나라가 평안해야 양이도 행복하다', '법야옹 연대', '전국 집에 누워있기 연합' 등 깃발은 동지애 확장을 느끼게 합니다.
김성수 대중문화 평론가는 MZ세대의 저항문화에 대해 “내가 어디에 속해있고, 누구와 함께하고 있는지를 선언하는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MZ세대의 감성이 스며들면서 탄핵 촉구 집회 풍경은 과거의 엄숙하고 비장한 모습에서 벗어나, 함께 소통하고 즐기는 축제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44년 만의 비상계엄 선포를 이겨내며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진화하고 있습니다. “MZ세대와 함께 민주항쟁을 할 수 있어서 감격스럽다"라는 시니어(베이비붐 세대, X세대)의 소회 속에서 4050세대는 원활한 촛불문화제를 위한 사전학습 '탄핵 플레이리스트(노래모음)'를 돌려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세대 소통과 민주주의 회복력을 봅니다.
'호모사피엔스' 저자 조지프 헨리는 “인터넷 확산과 함께 우리의 집단두뇌는 극적으로 확장될 잠재력을 갖게 됐다. 자유롭게 상호작용하고, 의견을 교환하며, 이의를 제기하고, 서로에게 배우고, 힘을 합치고, 낯선 사람을 신뢰하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들의 거대한 연결망으로 혁신을 성취한다"라며 우리 인류의 성공 비밀은 '우리 공동체의 집단두뇌'라고 강조했습니다.
불의가 깊어지며 분노가 깊어지는 대한민국 위기 속에서, 기성세대의 비분강개를 MZ세대의 활기와 신명으로 이어가고 있는 민주주의의 문화적 학습과 집단두뇌의 혁신을 바라보며 대한민국 미래의 희망을 보았습니다.
김상호 전 하남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