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들어 가계대출 총량이 초기화되면서 은행권이 대출금리를 완화하며 가계대출 문턱을 낮추고 있다. 다만 작년과 같은 시장 혼란을 막고, 분기별·월별로 가계대출을 안정되게 관리하라는 당국의 지침에 따라 실수요자 위주의 자금공급 중심으로 규제를 완화하는 분위기다. 은행권은 다주택자 대상 대출 규제는 그대로 유지하고, 추후 부동산 시장 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대출 규제를 관리할 방침이다.
전문가들은 그간 은행권이 가계대출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수차례 학습효과가 있었던 만큼 작년처럼 가계대출 총량이 급증할 가능성은 낮다고 조심스럽게 전망했다.
대출금리 낮추고 주담대 거치기간 운영 재개
14일 금융권에 따르면 SC제일은행은 이달 13일부터 부동산담보대출 상품인 '퍼스트홈론'의 영업점장 우대금리를 0.1%포인트(p) 인상했다. 우대금리가 오르면 실제 대출금리는 그만큼 하락한다.
이달 20일부터는 다자녀 우대금리 조건도 완화된다. 기존에는 3자녀만 우대금리를 받을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2자녀 이상이면 0.1%포인트의 금리우대를 받을 수 있다.
신한은행도 이날부터 금융채 5년물 한정 주택담보대출 주택구입자금 가산금리를 0.1%포인트 낮추고, 생활안정자금 가산금리를 0.05%포인트 인하했다.
금융채 2년물 한정 주택금융공사 전세자금대출 가산금리는 0.2%포인트 낮추고, 서울보증보험 전세자금대출 가산금리도 0.3%포인트 인하했다.
타행들도 올해 들어 가계대출 규제를 일부 완화했다. 국민은행은 이달부터 주택담보대출 거치기간 운영을 재개하고, 생활안정자금 목적의 물건별 연간 대출한도를 해제했다. 기존에는 2억원까지만 대출이 가능했다. 타행에서 대환하는 용도의 전세자금대출 신규 취급 제한조치도 해제했다. 하나은행도 이달 2일 신청건부터 신규 주택담보대출의 모기지보험(MCI, MCG) 적용을 재개했다. 모기지보험 적용이 재개되면 사실상 대출 한도가 늘어나는 효과가 있다.
우리은행은 생활안정자금 대출 최대 한도를 기존 1억원에서 2억원으로 확대하고, 전세자금대출의 경우 유주택자 대상 수도권 소재 목적물 취급 제한 조치를 해제했다. 이에 따라 1주택자도 전세자금대출을 받을 수 있다.
한은 금리 인하에도 버텼지만...'사회적 비판' 부담
은행권은 한국은행이 지난해 10월과 11월 두 차례 연속 기준금리를 인하했음에도 가계대출 관리를 이유로 그간 대출금리 인하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올해 초부터 가계대출 총량이 재설정되면서 은행권이 가계대출 한도를 관리하는데 여유가 생긴데다, 예금금리 인하로 결국 예대금리차가 확대됐다는 사회적 비판이 거세지면서 결국 대출문턱을 완화한 것으로 해석된다.
지난달 24일 개최된 제25차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에서도 일부 위원들이 대출 규제로 인한 부작용을 우려한 바 있다. 한 위원은 “성장의 하방위험이 증대되고 있는 만큼, 가계대출에 대한 건전성 규제가 가계신용을 과도하게 제약하는 건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위원은 “금리 인하기 가계부채 급증에 대응하고자 거시건전성 규제 강화 외에도 가계부채의 근본적인 디레버리징(부채 축소)을 위해 리츠(REITs) 활용과 같은 구조적인 대책도 함께 강조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서울 아파트 가격이 2주째 보합을 유지하고 있는 점도 은행권의 가계부채 관리에 숨통을 트이게 하는 요인이다. 향후 아파트 가격이 다시 상승할 경우 가계부채도 증가세로 전환할 가능성이 있어 은행권은 다주택자 대상 대출 규제는 유지하고, 실수요자 위주의 제한적인 형태로 규제를 완화한다는 방침이다.
은행권 관계자는 “기존에 없었던 대출규제 조치를 작년 7월부터 차츰 강화하다보니 실수요자들의 불편이 커졌고, 한국은행마저 기준금리를 인하하면서 은행권도 대출금리 인하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었다"며 “현재도 투기수요, 부동산 과열을 막기 위한 대출 정책은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실수요자 대상 금융비용 부담을 일부 완화했다는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금융당국의 가계부채 관리 기조가 계속되는 한 가계대출 총량이 급증할 가능성은 낮다고 전망했다. 5대 시중은행(KB국민, 신한, 하나, 우리, NH농협)의 가계대출 잔액은 작년 말 734조1350억원으로 전년(692조4094억원) 대비 41조7256억원(6.03%) 늘었다. 그러나 이달 들어서는 가계대출 잔액이 약 3000억원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익명을 요구한 전문가는 “금융당국이 꾸준히 가계대출 총량을 규제하겠다는 기조인 만큼 중장기적으로는 가계대출이 큰 폭으로 증가할 가능성은 낮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문가는 “최근 은행권의 규제 완화는 기존에 강화한 조치들을 서서히 푸는 걸로 봐야 한다"며 “올해도 가계대출 총량 관리가 금융당국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어젠다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