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의 '종말'을 지켜보면서 지구 반대편의 마크롱을 떠올려본다. 두 사람은 여러모로 닮아 있다. 두 사람은 모두 아내의 적극적인 '조언'을 받아 대통령이 되었다. 윤석열은 52살 때에 결혼한 12살 아래의 아내 김건희가 논문표절, 주가조작, 뇌물수수. 장모 최모씨 구속 등 온갖 비난을 샀으나 '윤건희 공동정권'이라는 말이 나올만큼 그녀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고, 마크롱은 30살 때 24살이나 많은 친구의 엄마 브리지트와 사랑에 빠져 그녀와 결혼한 뒤 그녀의 내조에 상당부분 의존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황의 시대에 가장 성업하는 직업이 이혼 전문 변호사들이라 할 만큼, 배우자 불신의 시대에 두 사람은 아내의 말을 잘 듣는 '상남자'의 진면목을 보여준다(적어도 외형은 그렇다). 하지만 정치권에서는 두 사람은 은혜를 원수로 갚은 '배신의 화신'이었다는 점이 비슷하다. 자신을 요직에 임명한 진보좌파 정권의 뒤통수를 치고 뛰쳐나가, 자유주의를 주창하며 자신을 대선 후보로 만들어준 우파 보수당까지도 궤멸시키고 극우로 돌아선 과정이 희한하게 비슷하다.
3년 전, TV 대선토론 때마다 손바닥에 굵은 펜으로 임금왕(王)를 쓰고 나온 윤석열은 대통령이 되고 나서 아무런 논의나 토론도 없이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가 붙어있는 경복궁 뒤편의 청와대를 떠나, 집무실을 용산으로 옮기고, 관저를 한남동으로 옮긴 뒤 많은 무리수(? )를 두었다. 재직 2년 6개월, 그는 자신이 26년 동안 재직했던 검찰의 후배들을 동원해 오로지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이나, 심지어 자신을 등용한 인사들을 괴롭히는데 몰두했다는 지적도 받는다. 한미일 안보동맹이라는 미명아래 남북관계를 파탄냈고, 미국을 대신하여 중국을 악마화하고, 숭미친일 굴종외교로 미국과 일본을 즐겁게 했다는 야당측 공격을 받았다. 또 국가보훈부, 독립기념관, 진실화해위원회, 심지어 인권위원회 등 국가기관에 노골적인 친일 사관 논란을 야기한 인사들을 기용했다. 그런 그가 스스로의 함정에 빠져, 반란수괴 혐의로 감옥살이 운명이지만, 태극기와 성조기, 이스라엘기를 앞세운 극우 시위대는 법원을 부수는 폭동을 일으키며 그의 부활을 주장하고 있다.
지구 반대편의 프랑스에서는 잇단 선거에서 패배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다수당인 야당과 충돌하며 윤석열의 실패를 연상시킨다. 사상 최저치의 지지율로 유럽의회 선거와 총선에서 연이어 패배한 마크롱은 소수당 전락 이후 자신이 내세운 후보의 총리 임명이 무산되자 2017년 대선에서 자신의 당선을 결정적으로 도왔던 정치인 프랑수아 바이루의 총리임명을 강행했다. 프랑스에서 대통령의 집권당이 총선에서 과반수를 얻지 못하면 야당에 총리직을 내주고, 내각 구성권을 양보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마크롱은 고집을 부린다. 과거 미테랑 좌파 대통령은 총선 패배후 우파 시라크를, 시라크 우파 대통령은 좌파 조스팽을 총리로 임명하고, 내각 구성권을 넘긴 적이 있다. 집권당은 소수당으로 전락했으나 비교적인 국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은 동거정부(Cohabitation) 덕택이었다. 하지만 마크롱은 선례를 무시했다. 마크롱은 자신의 국정 비전에 비협조적인 좌파 연합에 맞서, 극우와 중도좌파 사이를 오가며 사탕발림을 하고 있다. 극우를 설득할 때는 안보법이나 반이민법을 미끼로 삼고, 중도좌파를 대상으로는 비례대표제 도입을 약속하거나 국회 표결 없이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는 법률 조항을 제안한다. 야당과의 실랑이에 지친 마크롱은 불과 1년 전에 엘리제궁에서 부부끼리 만난 윤석열의 구속뉴스를 접하면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적어도 난 후진국형 쿠데타는 일으키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