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국회가 특별법 통과를 포함해 반도체 산업 지원을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내놔야 한다는 목소리가 업계 안팎에서 커지고 있다. 미국이 시작한 글로벌 무역전쟁으로 경영 관련 불확실성이 높아진데다 중국의 공세까지 거세져 자칫 경쟁력을 상실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4일 업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반도체 기업들은 '트럼프 리스크'에 대비해 다양한 시나리오를 점검하고 있다. 멕시코, 캐나다, 중국 등과 관세 기싸움을 벌이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다음 타깃으로 '반도체', '철강', '유럽연합(EU)' 등을 직접 언급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상무부 등 관련 부처에 오는 4월1일까지 무역 불균형 해소를 위한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상태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은 미국으로 향하는 메모리 반도체 등에 관세 장벽이 생기는 상황을 염려하고 있다. 중국산 전자제품 수출길이 막히는 것도 현지에 반도체를 다량 수출하는 우리 기업들 입장에서는 악재다. 다른 나라가 보복 조치를 시행해 '글로벌 무역 난타전'이 벌어질 경우 전체 교역 자체가 위축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도 조성돼 있다. 양사가 미국에 공장을 지으며 받기로 한 보조금이 없어지거나 축소될 수 있다는 걱정도 있다.
중국도 신경 써야 한다. 정보통신(IT) 기기 수요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 가운데 중국 메모리 반도체 업체들이 '저가 공세'를 펼치고 있어서다. 중국산 레거시(범용) D램 공급 과잉 현상이 나타나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수익성도 떨어지고 있다.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 푸젠진화(JHICC) 등은 DDR4 8Gb D램을 시중 가격의 절반 수준으로 밀어내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PC용 D램 범용 제품(DDR4 8Gb 1Gx8)의 고정 거래가격은 지난 7월 평균 2.1달러에서 11월 1.35달러로 넉 달 사이 35.7% 급감했다.
'중국산 반도체' 기술력은 무섭게 향상되고 있다. CXMT는 최신형 제품인 DDR5 D램 양산을 최근 시작해 시장을 놀라게 했다. 화웨이는 지난 2023년 중국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 SMIC 7나노 공정에서 제조된 칩셋을 최신 스마트폰에 탑재하기도 했다.
미국 눈치를 보고 중국에 쫓기는 가운데 기업 실적도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삼성전자는 작년 4분기 반도체 부문 영업이익이 2조9000억원에 그치는 '어닝쇼크'를 기록했다. 첨단 파운드리 공정에서 조단위 적자가 지속되는 가운데 범용 제품 마진율이 떨어지며 시장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올해 1분기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부가 적자를 낼 수 있다는 비관론까지 나온다. 우리나라 반도체 업계가 정부·국회에 '구조신호'를 보내고 있는 배경이다.
기업들은 당장 '반도체 특별법' 통과를 기대하고 있다. 이 분야 연구·개발 노동자들이 노사 서면합의로 주52시간 상한제를 초과하는 기준을 적용하도록 허용하는 게 핵심 내용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전날 국회에서 열린 '반도체 특별법 노동시간 적용제외 토론회'에서 법안 통과 가능성을 거론하며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다. 민주당은 내부 검토를 거쳐 조만간 입장을 밝힐 예정이다. 다만 노동계 반발이 거세 주52시간제 자체를 거스르지 않는 '절반뿐인 특별법'을 여당에 제안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안기현 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해당 토론회에서 “반도체 산업은 기술 중심의 산업으로 첨단 기술이 바탕이 된다"며 “이 중심에 기술 개발이 있고, 그 중심에 연구자가 있는데 시간을 기준으로 연구·개발을 하면 성과가 나기 쉽지 않다"고 주장했다.
업계에서는 특별법 통과는 물론 우리 정부·국회가 보다 파격적인 지원책을 의논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미국이 노골적인 '자국 우선주의' 정책을 펼치는 만큼 우리 역시 경제 버팀목이 반도체 육성에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다. 연구개발(R&D) 세액공제 수준을 넘어 투자금을 직접 환급하거나 반도체 및 소재·부품·장비 기업에 보조금을 주는 재정지원책 등이 거론된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의 전체 수출(6838억달러)에서 반도체(1419억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은 20.7%에 달한다. 업계 한 관계자는 “국제 정세 변화에 대응해 '한국판 칩스법'을 만드는 방법 등을 고민할 시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