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전 공언한 대로 행정명령을 쏟아내며 미국의 정책 방향을 급격히 뒤집고 있다. 특히'친환경에서 다시 화석연료'로 급선회시킨 소위 미국 에너지 해방 행정명령(Unleashing American Energy)은 바이든 행정부의 에너지정책 방향을 완전히 뒤집었을 뿐만 아니라, 화석에너지로부터 멀어지는 에너지전환(transition away from fossil fuels)을 선언한 유엔기후변화협약과도 상반된다. 트럼프 대통령에게 기후변화는 “녹색 신종 사기"일 뿐 애초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실제로 취임 첫날 파리기후변화협정 탈퇴에 서명함으로써 자신의 에너지정책 방향성을 대내외에 분명히 과시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에너지정책은 에너지 상황 인식에서 시작된다. 그는“미국은 에너지 생산, 운송, 정제, 발전의 부족으로 경제, 안보에 비정상적이고 특별한 위협에 직면했다."라는 인식 아래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연방 정부 차원의 에너지 비상사태 선포는 미국 역사상 처음일 정도로 충격적이다. 더욱이 세계 최대 석유, 가스 생산국이자 에너지 순 수출국이 될 정도로 에너지가 풍부한 미국에서 전쟁 때나 발동할 수 있는 에너지 비상사태를 선포한 것은 법률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지나치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초 프리미엄을 활용해, 현시점에서는 체감되지 않지만 이대로 가면 큰 에너지 위기와 미국의 리더십 상실을 초래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미국 사회에 각성시키기 위해 정치적 초강수로 비상사태를 선포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세계 질서는 미∙중 간 신냉전 체제로 요약할 수 있다. 소련이 붕괴한 1991년 이후 약 30년간 조성된 미국의 일극 체제가 중국의 급부상으로 위협받고 있는 현재 상황은 미국으로서는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선택한 신냉전 승리 전략은 미국의 제조업 경쟁력 회복을 통한 위대한 미국의 재건(MAGA)이다. 특히 AI를 비롯한 4차 산업혁명에서 완벽한 승리를 통해 국제 사회에서 미국의 리더십을 확고히 지키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AI를 포함한 4차 산업혁명의 성패는 저렴한 에너지의 안정적 확보에 달려 있다는 사실은 이제 상식이다. 왜냐하면 AI를 비롯한 4차 산업혁명의 기재들은 모두 전기 먹는 하마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하루 전 캐피털 원 아레나에서 열린 집회에서 “우리는 지금의 두 배, 그 이상의 에너지가 필요하다"며 “비상 권한을 사용해 대형 공장과 AI 시설을 건설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목소리 높였다. 또한 미국 내무부 장관으로 지명된 더그 버검 후보자는 좀 더 구체적으로 “전력량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다면 중국과의 AI 군비 경쟁에서 패배해 국가 안보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은 비상한 각오로 AI 산업을 뒷받침할 수 있는 에너지를 모두 끌어모을 태세다. AI 산업이 필요한 에너지는 한순간도 끊기지 않고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전기다. 자연 여건에 따라 간헐적으로 발전되는 태양광, 풍력 등과 같은 재생에너지에 미국의 안보를 맡기기는 역부족이다. 미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석유와 가스를 보유하고 있는 국가다. 기후변화 이슈를 후순위로 밀어낸 트럼프 대통령의 에너지정책이 화석연료 생산 확대, 재생에너지 지원 축소, 파리기후협약 탈퇴, 원자력 발전 활성화 등으로 집약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우리나라도, 대개의 전통 산업이 중국의 거센 추격으로 경쟁력을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운 현 상황을 고려할 때, AI를 포함한 4차 산업혁명 성패에 미래가 달렸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당연히 충분하고 안정적인 전기가 필요하다. 우리나라 4차 산업혁명의 첨병이라고 할 수 있는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서만 필요한 전기가 10GW를 넘을 전망이다. 현재 수도권 전력 수요의 25%에 해당하는 막대한 양이다. 수도권 신규 LNG 발전소 건설과 동해안과 서남해안에서 원전과 재생에너지 등으로 생산된 전기를 송전선로로 끌어오는 방안이 계획 중이지만, 탄소중립 목표, 송전선로 건설 지연, 한전의 재정 악화 등으로 비상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에너지 비상사태는 오히려 우리에게 더 필요해 보인다. 에너지 비상사태가 미국에서는 부자 몸조심이라면, 우리나라에서는 생존의 몸부림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작년에 벌써 확정해야 할 11차 전력수급계획조차 거대 야당 눈치를 보며 차일피일 미루는 한가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