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지시간으로 지난 1월 8일 미국 워싱턴 D.C. 에너지부 회의실에서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제니퍼 그랜홈 미국 에너지부 장관 등이 임석한 가운데 원자력 협력 원칙을 재확인하고 수출 통제 협력을 강화하는 약정(MOU)을 체결했다. 산업통상자원부
한국수력원자력이 사실상 유럽 신규 원전 시장에서 철수했다. 이는 지난 1월 웨스팅하우스(WH)와 지적재산권 분쟁에 합의한 것에 따른 조치로 분석된다. 한수원은 반대급부로 웨스팅하우스의 수주 시 시공사 파트너로 참여하기로 했을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이와 관련해 1월에 미국 에너지부가 한국을 민감국가로 지정한 것은 이 같은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한 협상용이었을 것이란 추측이 제기되고 있다. 이후 합의가 이뤄졌지만, 미국 정권의 교체 시기가 겹치면서 지정 해제가 늦어진 것뿐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20일 원전업계에 따르면 한수원은 최종 계약 체결을 앞둔 체코와의 원전 건설 건을 제외하고 이후로는 유럽지역의 신규 수주에 참여하지 않을 계획이다.
이에 따라 한수원은 최근 네덜란드 신규 원전 건설을 위한 2차 기술타당성조사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으며, 지난해 말에는 스웨덴, 올해 2월에는 슬로베니아의 원전 수주에도 불참하기로 한 바 있다. 체코원전 이후 가장 근접한 수주 건인 폴란드 원전 건설에도 참여하지 않을 예정이다.
한수원이 유럽지역의 원전 수주를 포기한 것은 지난 1월 미국 원전기업인 웨스팅하우스와 지적재산권에 합의한 것에 따른 조치로 풀이된다.
한수원은 웨스팅하우스의 APR1400 원전 특허기술을 활용해 국내에 다수의 원전을 건설하고 운영하고 있다. 한수원은 이 경험과 역량을 바탕으로 한전과 함께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로부터 원전 4기를 수주했고, 지난해에는 체코 신규 원전 건설의 우선협상자로 선정돼 곧 최종 계약 체결을 앞두고 있다.
한수원이 원전을 수주할 때마다 고배를 마신 곳이 웨스팅하우스다. 웨스팅하우스는 체코 원전 수주까지 빼앗기자 한전과 한수원을 특허 침해 협의로 미국 법원에 제소했다. 원전 수출에 모든 역량을 쏟고 있는 한수원으로서는 재판 결과에 따라 해외 진출이 원천적으로 막힐 수 있게 된 상황이다.
결국 지난 1월 17일 한전·한수원은 웨스팅하우스와 지재권 분쟁에 합의했다. 앞서 현지시간 1월 8일에는 산업통상자원부와 외교부가 미국 에너지부 및 국무부와 '한·미 원자력 수출 및 협력 원칙에 관한 기관 간 약정(MOU)'을 체결했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는 “(지재권 분쟁 합의)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유럽 시장에서 한국의 수주는 체코가 시작이자 끝이 될 가능성이 높다"며 “한수원이 웨스팅하우스로부터 하청을 받더라도 수익성 약화는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유 교수는 이어 “중동에서 한국의 수주 기회가 있지만, 지금 수입하고 있는 중동산 LNG를 미국산 LNG로 대체하면 이마저도 흔들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웨스팅하우스는 시공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한수원이 시공사 파트너로 협력할 수밖에 없다는 긍정론도 있다. 업계 관계자는 “한수원이 유럽 시장의 직접 수주는 포기한 대신, 웨스팅하우스가 수주를 하면 한수원이 시공사 파트너로 참여하는 것으로 합의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민감국가 지정 해제와 협력 전략이 관건
미국 에너지부가 한국을 민감국가(Sensitive Country)로 지정한 시기는 1월 초로 알려졌다. 한전·한수원과 웨스팅하우스가 지재권 합의를 하기 며칠 전이다.
이 때문에 미국이 한국을 민감국가로 지정한 것은 지재권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한 압박용이었을 것이란 추론이 나오고 있다.
원전업계 한 관계자는 “웨스팅하우스 대주주는 캐나다 사모펀드지만, 본사라든가 기술에 대한 승인 권한은 미국에 있다. 웨스팅하우스의 이익은 미국의 이익과 직결된다"며 “미국이 한국에 민감국가 지정을 통해 협상력을 강화했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향후 민감국가 지정 해제와 웨스팅하우스와의 협력 전략이 한수원의 해외 원전 수주의 미래를 좌우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지재권 합의가 이뤄졌음에도 미국이 민감국가를 해제하지 않은 것은 당시 미국 정권이 교체되면서 발생한 미국 정부 측의 착오라는 분석도 있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미국이 협상을 앞두고 지정했다가 협상 후 해제했어야 하는데, 정권교체기가 겹치며 착오로 그냥 넘어간 듯하다"며 “미국에서 실수를 인정하면 모양새가 이상하니,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미국과 대화를 통해 해제하는 형태로 마무리되지 않겠느냐"고 관측했다.
정 교수는 이어 “정부는 민감국가 지정 해제를 위해 미국과의 협상을 강화하고, 웨스팅하우스와의 협력을 통해 한수원이 시공사 파트너로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며 “또한 중동 시장 등 새로운 원전 수주 기회를 모색하는 동시에, 미국과의 협력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전략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한수원이 글로벌 원전 시장에서의 입지를 회복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