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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헌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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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주머니 차는 재계③] 상법 ‘묻지마 개정’에 힘 빠지는 기업들

에너지경제신문   | 입력 2025.08.07 08:33

3%룰, 이사 주주충실, 상장사 전자주총 등 의무화
집중투표제 의무화 등 ‘더 센 상법’ 이달 통과 앞둬
경제계 “경영권 방어에 체력 낭비, 성장에 직격탄”

미국발 관세 전쟁, 중국산 제품의 품질·물량 공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인한 유가·물류 불안, 요동치는 환율, 내수 경기 위축. 국내 기업의 경영 불확실성을 높이는 대내외 요소들이다. '복합위기'에 허우적대는 재계가 설상가상 '모래주머니'까지 발목에 찰 처지에 놓였다. 정부·국회가 각종 반(反)기업성 정책과 규제를 쏟아내면서다. 노조법과 상법은 기업에 불리하게 개정되고 법인세는 오른다. 주52시간 근무제, 중대재해처벌법 등은 보완 대신 더 강력해질 전망이다. “산업 생태계가 무너지고 청년 고용이 줄어든다“는 재계 목소리는 허공을 떠돌 뿐이다. 에너지경제신문은 사면초가에 빠진 기업의 상황을 진단하고, 한국 경제의 지속 성장을 위한 방향성을 짚어본다. <편집자주>


글 순서

정부·국회가 상법을 지속적으로 손보면서 기업 경영에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는 목소리가 재계에서 나오고 있다.


경제계와 의견을 전혀 조율하지 않고 '묻지마 개정'을 계속하고 있다는 게 이들 목소리다. 정치권에서도 법안 도입 취지에는 대부분 공감하지만 숙의 기간 없이 무분별하게 개정안을 처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판이 제기된다.


출처=챗GPT

▲출처=챗GPT

'3%룰'·'이사 주주충실 의무 확대' 시행···경제계 “소송 남발 우려"

6일 정·재계에 따르면 대통령실은 지난달 국무회의를 열고 '3%룰'과 '이사 주주충실 의무 확대'를 골자로 한 상법 일부개정 법률 공포안을 의결했다.


기업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 및 주주로 확대한 게 개정안의 핵심이다. 이로 인해 이사가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주주의 이익을 보호하고 전체 주주의 이익을 공평하게 대우하도록 했다. '3%룰'은 감사위원 선임·해임 시 최대 주주와 특수 관계인의 의결권을 합산 3%로 제한하는 것이다.


개정안에는 상장회사 전자 주주총회를 의무화하고 사외이사를 독립이사로 전환하는 내용도 담겼다. 독립이사의 이사회 내 의무 선임 비율은 기존 4분의 1 이상에서 3분의 1 이상으로 확대된다.




이사의 충실 의무 대상 확대는 공포 후 즉시 시행된다. 3% 제한 규정은 공포 1년 뒤부터 적용된다. 전자 주주총회 의무 개최 규정 등 일부는 2027년 1월1일부터 시행된다.


이같은 상법 개정은 자본시장의 숙원이었다. 증권가에서 '코리아 디스카운트' 논란이 일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기형적인 대기업 지배구조 문제가 거론됐다. 무분별한 중복상장, 주주 가치를 훼손하는 기업 분할 또는 합병이 '이사 주주충실 의무'에서 비롯했다는 시각이다. 상법 개정이 지난달 3일 여야 합의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배경이다.


재계는 반발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영자총협회, 한국경제인협회 등 경제단체들은 지난 3월 상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처음 통과했을 당시 공동성명을 내고 “개정안은 이사와 회사의 위임관계에 기반한 회사법의 근간을 훼손해 경제계는 물론 대다수 상법학자들도 법리적 문제가 크다고 지적해 왔다"고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이어 “주요국도 이사 충실의무를 회사로 한정하고 있어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상법 개정안은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국회를 통과했다가 대통령 권한대행이던 한덕수 전 국무총리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로 폐기됐다.


재계 주장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사 충실의무 관련 주요국 동향을 보면 미국, 일본, 영국, 독일 등 대부분 국가에서 '이사가 회사의 이익을 위해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전자주총 의무화도 해외 입법 사례가 아직 없다.


경제단체들은 또 “상법이 바뀌며 이사에 대한 소송 남발 우려도 크다"고 걱정했다. 현재 주주대표소송은 회사 손해를 전제로 회사에 배상하나 주주보호의무 위반 관련 소송은 주주손해를 전제로 주주에게 배상하는 것인 만큼 소송 제기 가능성이 주주대표소송보다 훨씬 크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론은 소액주주 권익 강화,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가 중요하다는 데 손을 들어줬다. 경제단체들이 논리적인 주장을 펼치긴 했지만 일부 기업인들의 상식 밖 행동들에 국민 감정은 '재벌 규제 강화'로 돌아선 것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한국 경제를 위해 대기업은 성장해야 하지만 경영 능력이 없는 총수 일가가 '재벌' 지위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 같다"며 “자식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사례가 새삼 주목받고 있는 배경"이라고 말했다.


진보성향 단체인 경제개혁연대는 지난 3월 상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상법 처리는 첫 단추를 꿴 것"이라며 “정부와 국회는 자본시장 개혁 과제를 본격 추진해야한다"며 환영 의사를 밝혔다.


한경협 등 경제8단체는 “경제계와 지속적인 소통을 통해 필요 시 제도를 보완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만큼 경영판단원칙 명문화, 배임죄 개선, 경영권 방어수단 도입 등에 대한 논의가 조속히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제인협회 등 경제8단체 관계자들이 지난달 24일 서울 중구 대한상의회관에서 '상법개정 관련 경제8단체 간담회'를 열고 충분

▲대한상공회의소, 한국경제인협회 등 경제8단체 관계자들이 지난달 24일 서울 중구 대한상의회관에서 '상법개정 관련 경제8단체 간담회'를 열고 충분한 논의 시간을 확보해달라고 국회에 호소했다.

'더 센 상법' 8월 통과 유력···자사주 의무소각 등 '묻지마 개정' 우려

향후 쟁점은 이른바 '더 센 상법'이 국회 문턱을 넘을지 여부다. 자산 2조원 이상 상장사에 집중투표제 도입을 의무화하고 감사위원 분리 선출 인원을 현재 1명에서 최소 2명 이상으로 늘리는 게 골자다.


개정안은 지난 1일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했다. 7월 임시국회 본회의 마지막날 안건으로 상정되긴 했으나 야당인 국민의힘이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진행해 의결되지는 않았다.


재계 일각에서는 '집중투표제만은 안된다'는 얘기가 들리는 상황이다. 기업들은 '더 센 상법'이 시행되면 경영권 방어가 힘들어져 외국계 투기자본의 공세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로 인해 신규 투자와 고용이 위축되고 중장기적으로 한국 경제 발전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의견이다.


기업들은 상법 2차 개정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대한상의가 지난달 상장기업 300개를 대상으로 실시한 '상법개정에 따른 기업 영향 및 개선방안 조사'에 따르면 응답 기업의 76.7%는 2차 상법 개정안이 자산 2조원 이상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 기업의 성장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응답했다


집중투표제 의무화와 감사위원 분리선출 인원 확대를 동시 개정하는 경우 경영권 위협 가능성이 있는지 여부에 대해 상장기업 74.0%는 '그렇다'고 답했다. '가능성이 없다'는 답은 26% 나왔다.


또 상장기업 39.8%는 감사위원 분리선출 인원을 현재 '1명 이상'에서 '2명 이상'으로 확대하는 경우 “외부세력 추천 인사가 감사위원회 주도해 이사회 견제 심화되는 점이 가장 우려된다"고 했다.


집중투표제 의무화와 분리선출 감사위원 확대 등이 기업 지배구조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가 자산총액 2조원 이상 206개 기업의 주주총회 이사 선임 과정을 시뮬레이션한 결과를 보면 이사 수를 7명으로 가정했을 때 최대 주주 및 특수관계인이 확실하게 확보할 수 있는 이사 수는 2~3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상 206개 기업의 이사 수가 평균 7.5명이고 최대주주 측 평균 지분율이 42.9%라는 조사 결과를 토대로 시뮬레이션한 결과다. 반면 2대 주주 이하 주주들이 선임할 수 있는 이사 수는 최대 4~5명으로, 최대 주주 측의 의사에 반해 주요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구조가 된다.


앞서 1차 상법 개정 때 강화된 합산 3%룰에 따라 1대 주주는 본인과 친인척 지분을 합해 3%까지만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2대 주주 이하 주주들은 집중투표를 통해 추가 2~3명의 이사 자리를 확보할 수 있게 되면서다.


일각에서는 상법을 계속해서 개정해 나가려면 기업들이 주장하는 '경영권 방어' 관련 보완점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기업 지배구조가 불투명하고 비상식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당장 해결할 수는 없는 만큼 실제 외국계 자본의 공격에 재계가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03년 'SK-소버린 사태' 후폭풍도 아직 남은 상태다. 당시 영국계 헤지펀드 소버린은 SK 주식 약 15%를 매입해 경영권을 위협했다. 2006년 미국계 칼 아이칸 등이 KT&G를 공격했던 사례,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삼성물산과 현대자동차를 위협했던 사례 등도 있다. 대부분 펀드들은 '액션'만 취하다 매매차익을 실현하고 떠나갔지만 상법이 계속해서 개정되면 행동주의 펀드들이 대주주를 위협할 확률이 더 높아진다는 게 재계 입장이다.


전문가들은 상법 개정 '방향'이 아니라 '속도'가 문제라고 비판한다. 거대여당이 기업 경영 활동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법안을 수정하면서 정작 이해당사자들과는 대화를 단절하고 있다는 것이다. 야당인 국민의힘 역시 지난 5일 기자회견을 열고 상법 개정에 공식적으로 반대한다고 밝혔다.


재계 한 관계자도 “사회적 혼란 탓에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다"면서 “상법 개정은 국회가 하는 일이지만 정치 논리로 접근하면 안된다"고 일침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오는 21~24일까지 본회의를 열고 '더 센 상법 개정안' 등 쟁점 법안을 처리한다는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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