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승 정치경제부 부동산팀 기자.
2023년 중소·벤처기업 분야를 취재하던 시절, 윤석열 정부가 과학기술 분야 연구개발(R&D) 예산을 대폭 삭감해 스타트업들의 경쟁력이 무너지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봤다. 이번 체코 원전 수주 계약을 둘러싸고 터져 나온 '매국 계약' 논란에서 당시의 데자뷔를 느꼈다. 두 사건은 정권의 치적을 쌓으려다 국내 산업의 기초를 무너뜨렸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과 한국전력(한전)은 체코 원전 최종 계약을 앞두고 올해 초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충격적인 내용의 합의문을 작성한 것으로 확인됐다. 1기당 무려 6억5000만 달러(약 9000억 원) 규모의 물품·용역 구매 계약을 몰아주기로 했다. 1기당 1억7500만 달러(약 2400억 원)의 기술 사용료도 따로 준다. 원전 1기를 수출할 때 웨스팅하우스에 약 1조 원을 지불하는 셈이다.
수수료나 물품 구매 등 금전적 대가는 그렇다 치자. 한국형 원전은 웨스팅하우스의 원천 기술을 기반으로 개발된 만큼 지식재산권(IP) 분쟁 해소를 위해 어느 정도 대가를 지급해야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심각한 것은 해외 원전 수주와 기술 독립의 길을 막아 놓았다는 것이다. 합의문에 한국 기업이 개발하는 차세대 원전(SMR) 수출 시에도 웨스팅하우스의 '기술 자립 검증'을 받도록 한 것이 대표적이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넘겨 주고 싶지 않은 웨스팅하우스에게 사실상 기술 주권을 넘겨 주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SMR은 안 그래도 대형 원전에 비해 수익성이 낮다. 웨스팅하우스의 간섭으로 국내 기업의 이익이 크게 줄어들면 해외 사업에 뛰어들 이유가 없어진다. 대형 원전도 북미·유럽·우크라이나 등에서 신규 시장 개척이 어려워졌다.
여당 등에서는 이번 계약이 정권의 치적 쌓기를 위해 지나치게 성급히 협상을 진행해 결국 원전 기술 주권을 팔아 먹은 '매국 계약'을 체결했다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한수원과 한전은 이미 웨스팅하우스와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출 당시 한차례 지재권 협상을 했었고, 이번보다 나은 조건에 합의한 바 있다. 이번 협상에서 이렇게까지 많은 것을 내주면서 급히 계약을 체결했어야 했는지는 분명히 의문이다. 정권의 단기적 성과를 위해 한국 원전 산업의 미래를 담보로 잡은 셈이다.
이미 원전 건설 기업 주가가 출렁이는 등 파장이 크다. 철저한 사실 확인과 냉철한 대차대조표를 작성해 '매국 계약'인지 아닌지 진상을 파악하고 책임을 추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