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토교통부. 사진=대한민국 정책 브리핑
국토교통부가 국내 항공 안전정책의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일대 전환을 위해 항공 안전사고의 실수를 자발적으로 보고하고 공유하는 '공정문화(Just Culture)' 실행 방안 마련에 착수했다.
항공 안전사고 발생에 따른 처벌이 두려워 잠재적 위험을 보고하지 못하게 만드는 항공업계의 관행적 침묵이 오히려 대형사고 초래 및 국민과 항공종사자의 안전을 위협한다는 문제 의식에서다.
14일 본지 취재에 따르면, 국토부 항공안전정책과는 최근 '항공 분야 공정문화 실행 지침 마련 연구' 용역을 발주한 것으로 확인됐다. 관련 예산은 4400만원이며, 과업 수행기간은 오는 12월 31일까지다.
국토부 관계자는 “지난 4월 발표한 항공안전 혁신 방안의 일환으로 제도 개선을 추진 중"이라고 확인해 줬다.
이 관계자는 “현행법에는 항공 종사자들이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보고할 수 있도록 행정 처분 면제 등을 규정하고 있지만 관련 세부 기준이 없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고의·중과실 외 의도하지 않은 실수나 구조적 문제 등에 대해 처벌보다는 재발 방지를 위한 학습 기회로 활용토록 하는 지침 마련이 필요하다"며 공정문화 실행 방안 추진 배경을 설명했다.
이같은 정부의 움직임은 단순한 행정 절차를 넘어 대한민국 항공안전정책의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모색하는 중대한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정부가 직접 나서 '공정문화협의체'를 운영하며 공정문화의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연구한다는 자체가 현재 국내 항공 안전문화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했다는 문제 의식을 인식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공정문화는 항공교통 관제사·조종사·정비사 등 일선 운영요원이 고의나 중과실이 아닌 자신의 훈련과 경험에 따라 내린 조치나 결정으로 인해 처벌받지 않는 문화를 뜻한다. 이는 실수를 처벌하고 책임을 추궁하는 데 집중하는 전통적인 '처벌문화(Punitive Culture)'와 대척점을 이룬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질 때 현장의 종사자들은 비로소 잠재적 위험 요인이나 아차사고(near-miss)를 자발적으로 보고할 수 있게 된다는 판단이다. 이렇게 수집된 방대한 안전 데이터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로 작용한다.
하지만 국내 항공업계의 현실은 이같은 이상과 거리가 멀다. 한국항행학회의 '국내 항공사 운항승무원의 안전문화가 안전 행동에 미치는 영향'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공정문화와 자율보고의 활성화가 미흡해 안전 행동에 유의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현장의 종사자들이 잠재적 위험을 인지하더라도 처벌이 두려워 보고를 꺼리는 '침묵의 카르텔'이 형성돼 있음을 시사한다. 후진적 시스템이 사고를 예방하는 데 가장 중요한 눈과 귀를 스스로 막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침묵의 근본 원인은 뿌리 깊은 처벌 위주의 정책에 기인한다. 항공학계는 그동안 안전 토론회를 열어 “과도한 처벌 위주의 정책이 자율보고 기피 문화를 만들고 있다"고 꾸준히 지적해 왔다. 문제가 발생하면 시스템의 허점을 보완하기보다 개인의 책임을 묻고 징계하는 손쉬운 방식을 택해 온 결과 현장에서는 '보고하면 나만 손해'라는 인식이 팽배해 졌고, 결국 더 큰 위험을 방치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는 설명이었다.
국토부가 2022년 실시한 항공사 안전 수준 평가 결과는 이같은 구조적 문제의 심각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당시 평가에서 대한항공을 포함한 일부 대형 항공사들이 평균 이하의 평가를 받았다. 주요 위해 요인으로는 △경직된 조종실 안전문화 △기장과 부기장 간 소통 문제가 지목됐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기량 문제가 아니라 조직 전체에 만연한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문화가 안전을 직접적으로 위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지적받았다.
특히, 한국 특유의 존비어 문화와 서열문화는 비상상황에서 원활한 의사소통을 저해하는 치명적인 요인으로 과거 대한항공 801편 추락사고 등 대형참사 원인의 하나로 지목됐다. 항공사들이 조종실 내 영어사용 의무화 등 여러 개선 노력을 기울여 왔음에도 국토부의 최근 평가에서 여전히 같은 문제가 불거졌다는 점은 해당 문제가 얼마나 고질적인지를 방증한다.
이 같은 이유로 국토부의 이번 공정문화 연구 용역 발주는 축적된 데이터와 경고를 통해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된 시스템의 실패를 인정하는 '지연된 반응'이라는 평가다. 처벌이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이 침묵을 낳으며, 침묵이 결국 더 큰 위험을 키우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한다면 정교한 규정과 첨단 장비를 도입하더라도 하늘길 안전 보장은 이뤄질 수 없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베넷 앨런 월시 대한항공 항공안전전략실장(전무)이 한국항공대학교 항공안전센터 개원식에서 '현대적 안전 시스템의 영향력(Impact of Modern Safety Systems)'을 주제로 진행한 특별 강연의 핵심 요약. 사진=대한항공 항공안전전략실 제공
인간 행동의 본질을 반영한 미국식 공정 문화
미국연방항공청(FAA)은 2개의 상호보완적인 프로그램을 통해 공정문화를 구현하고 있다. 이는 협력과 비밀보장이라는 두 가지 핵심 원칙에 기반한다.
우선 항공안전 활동 프로그램(ASAP:Aviation Safety Action Program)은 항공사·조종사·정비사 등 현장 종사자들이 비(非)의도적인 실수나 안전저해 요소를 자발적으로 보고할 수 있도록 설계된 비처벌적 시스템이다. 공정문화가 책임감 있는 전문가들의 정직한 실수는 용납하되, 안전을 의도적으로 위협하는 행위는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분명하게 규정한 것이다.
항공안전 보고 시스템(ASRS:Aviation Safety Reporting System)은 사내 프로그램인 ASAP조차 신뢰하지 못하는 경우를 대비한 '최후의 안전망'이다.
특징은 FAA가 아닌 미항공우주국(NASA)이라는 완전히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제3의 기관이 운영을 맡고 있다는 점이다. 규제나 처벌 권한이 전혀 없는 NASA가 보고서를 접수·처리하기 때문에 보고자는 자신의 신원이 규제기관에 노출될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고 '제한적 면책특권'이 주어진다.
이처럼 미국의 공정문화 시스템은 자신에게 불이익을 줄 수 있는 기관에는 결코 솔직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인간행동의 본질을 꿰뚫고, 이를 시스템 설계에 반영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법제화된 유럽식 공정 문화
유럽의 접근 방식은 미국과는 다르다. 강력한 법적 구속력을 기반으로 한 하향식(Top-down) 모델이다. 유럽항공안전청(EASA)은 EU 규정 376/2014를 통해 공정문화의 원칙을 모든 회원국이 준수해야 하는 '법률'로 명문화했다.
이 규정은 항공사·공항·관제 기관 등 제반 항공 관련조직에 의무적으로 사건 보고 시스템(Occurrence Reporting System)을 구축하고 운영하도록 강제한다. 여기에는 특정 유형의 사건을 의무적으로 보고하는 시스템과 그 외 잠재적 위험요소를 자발적으로 보고하는 시스템이 모두 포함된다. 나아가 각 조직은 직원 대표와 협의해 공정문화 원칙이 조직 내에서 어떻게 보장되고 실행되는 지를 명시한 내부 규정을 채택해야 한다.
EASA 규정의 가장 강력한 부분은 보고자에 대한 법적 보호장치다. 회원국은 보고 시스템을 통해 알게 된 '비의도적이거나 태만에 의한 위반 행위'에 대해 소송을 제기해서는 안된다고 못박았다. 종사자들의 보고할 권리를 단순한 정책적 권장사항이 아니라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법적 권리로 격상시킨 것이다. 다만, 유럽의 규정 역시 중과실이나 고의적 위반, 파괴적 행위는 보호 대상에서 제외한다.
미국과 유럽의 모델은 방법론은 다르지만 '신뢰의 제도화'라는 동일한 목표를 추구한다. 이들의 성공은 공정문화가 데이터 수집과 처벌 기능을 제도적으로 분리하고 명확한 원칙과 경계선을 설정하며, 모든 이해관계자의 참여를 보장하는 정교한 시스템 설계의 결과물임을 보여준다.
K-공정 문화의 항로는?
우리나라에서는 국토부가 안전 증진과 처벌 집행 기능을 모두 갖고 있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꼽힌다. 때문에 현장 종사자 입장에서는 구조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환경이 조성된다.
따라서 성공적인 한국형 공정문화 모델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법적 기반 강화 △협력적 실행 체계 도입 △중립적 안전 지대 마련 등의 접근법이 필수적이라는 제언이 나온다.
'저스트 컬처-항공 안전과 공정 문화'의 저자 안주연 한국재난안전정책개발연구원 연구이사(박사)는 “안전 정보의 남용과 처벌의 두려움 탓에 항공 실무자가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게 되면 결국 위태로운 상황을 초래한다"며 “공정문화는 이런 악순환의 반복에서 적절한 균형과 타협을 통한 실행 방안을 찾고자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