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업계는 올 한해 입찰시장 도입 등 다양한 변화가 있었다. 다만 여야의 극한 대치 속 한국전력공사의 재무위기와 송전망 확충, 전력업계의 시장기능 강화와 같은 시급한 과제들은 해결되지 못한채 내년을 맞이하게 됐다.
한전은 올해도 김동철 사장을 중심으로 전기요금 인상과 전력망 확충을 정부와 정치권에 호소했지만 산업용 요금 소폭 인상 외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기업들은 한전을 통하지 않고 자가발전, 전력시장 직접구매 시도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28일 한전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전체 요금 평균을 100이라고 할 때 우리나라의 가정용 전기요금은 54, 산업용 요금은 66 수준에 불과하다.
적자에 허덕이고 있는 한전은 지난해 말 발전자회사들로부터 3조2000억원을 긴급 수혈 받았다. 이를 통해 올해 채권발행 한도초과 위기는 넘겼으나 여전히 누적적자를 해결하지 못했다. 지난 4년간 한전의 누적적자는 여전히 40조원이 넘는다. 채권을 포함한 누적부채도 200조원이 넘어 하루 이자만 약 70억원이 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 송전망 확충도 지지부진하다. RE100(기업생산에 사용하는 전기를 100% 재생에너지로 충당하자는 캠페인)과 CFE(재생에너지 외에 원전과 수소 등 무탄소 전원을 포함한 개념)를 두고 어느 쪽에 더 많은 무게중심이 필요한 지 치열한 논쟁이 이어지고 있으나 정작 생산한 전기를 실어나르지 못하고 있는 현실적인 고민은 정부와 여야 모두 손을 놓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정치권이 에너지 문제까지 지지층을 향한 선거 구호로만 활용할 뿐 정작 여론에 민감한 송전망 확충이나 전기요금 정상화 등은 외면하고 있다"며 “내년에 정권이 바뀌든 유지되든 이같은 문제는 똑같이 반복될 것 같아 걱정"이라고 지적했다.
입찰시대 본격화, 한전 적자 줄이기 위한 방안이지만 사업자들은 어려움 가중
올해 LNG 용량시장과 청정수소입찰, 재생에너지 입찰이 본격 시작됐다. 탄소배출 저감과 송전망 여건을 고려한 결정이지만 또 다른 배경은 전기요금 인상 여력이 부족한 한전이 발전사로부터 전기를 사들이는 비용인 전력구입비를 낮추기 위한 목적도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올해 한국형 LNG용량시장 1.1기가와트(GW)에 대한 시범입찰을 실시했다. 집단에너지사업자들은 기존에 신청만 하면 발전사업 진출이 가능했는데 이제는 LNG용량시장 도입으로 불가능해졌다.
한 업계 관계자는 “용량시장을 도입한 정부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총량 규제만 있고 수익성을 담보하기 위한 보상 방안은 전무하기 때문에 사업자들은 낮은 가격을 써내 물량을 받는다 하더라도 결국 적자에 시달릴 것"이라며 “혹은 낙찰 받아도 시중에서 프로젝트파이낸싱(PF)이 되지 않아 사업을 접게 되는 상황도 초래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결국 한전의 전력 구입비를 줄이는 데만 초점을 맞추면서 국가 전체적으로는 열과 전기의 공급 안정성을 훼손하고 온실가스와 미세먼지도 더 배출되고 말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전은 2036년까지 송전, 변전, 배전 등 필수분야에 약 100조원을 투자해야 한다.
40조원이 넘는 누적적자를 보유한 한전의 재무상태를 감안해 투자가 불발될 경우, 상당기간 동안 동해안 석탄화력발전소들은 물론 호남지역 재생에너지 발전기들의 계통 부족의 문제가 해결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내년부터는 신규 소형모듈원전(SMR)·액화천연가스(LNG)·수소·재생에너지 등 모든 무탄소 전원 발전설비들은 경쟁입찰을 거쳐 전력시장에 진입할 전망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최근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에 '무탄소전원통합용량시장 T/F'를 발족했다. 올해까지 가격/비가격 요소를 포함한 입찰 관련 기본설계를 마치고 2025년 하반기부터 입찰을 진행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11차 전기본 실무안에서는 2035년부터 2036년까지 2.2GW의 신규 발전설비가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전기본 실무진은 이 기간 동안 현재 개발 중인 SMR의 상용화 실증을 위해 0.7GW 분량을 할당하고, 나머지 1.5GW는 추후 수소전소 등 다양한 무탄소전원 간의 경쟁이 가능한 무탄소 입찰시장을 도입해 최적의 전원을 결정하라고 권고했다.
산업부는 권고대로 11차 전기본 실무안 발표시기와 맞물려 즉각 T/F 회의가 열고 내년부터 입찰을 하기로 결정했다.
T/F 관계자는 “특정 전원, 기술을 가리지 않고 2050탄소중립, 2030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달성을 위해 탄소 저감에 기여할 수 있는 모든 발전설비를 기술중립적으로 반영하겠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현재 무탄소전원통합용량시장 T/F에는 포스코인터내셔널, 한국수력원자력, 한국동서발전, 한국남동발전 등이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무탄소전원통합용량시장은 당장 올 하반기 부터 도입되는 LNG용량시장과 유사한 개념이다. 산업부 측은 11차 전기본 발표 당시 앞으로는 대형발전설비를 정부의 계획대로 건설하기 보다 발전설비 총량을 제시한 뒤 발전 사업자들이 입찰을 거쳐 진입하는 방식으로 바꿔나가겠다는 방침을 강조한 바 있다.
더 이상 대형 발전설비를 추가하기 힘든 국내 여건과 NDC와 탄소중립 등 목표 달성을 위해 신규발전 설비 규모로 통제하기 위해서다.
발전시장 입찰기준은 가격요소 60%, 비가격요소 40% 정도로 알려졌다.
산업부 측은 “입찰 평가 항목 중 가격 요소는 상한가가 될 것이 유력해 낮은 가격으로 입찰하는 사업자의 낙찰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 “비가격 요소는 다양한 항목들을 고려하고 있다. 주로 사업 이행성에 관한 항목들, 사업 신뢰성이나 재무 계획, 회사의 안정성이 포함될 예정"이라며 “이는 수소입찰이나 재생에너지 등 기존에 늘 해오던 기본 항목들"이라고 설명했다.
실제적으로 경쟁이 붙으면 여러 가지 비가격적인 요소를 평가해 적정한 설비를 진입시키겠다는 게 정부의 방향으로 풀이된다. 업계에서는 향후 신규사업권 확보가 전보다 어려워 질 가능성이 큰 만큼 제도 설계 방향을 예의주시 하는 분위기다.
업계 관계자는 “앞으로는 결국 모든 신규 설비가 입찰을 거쳐야 한다. 이전까지의 사업 진출과 완전히 새로운 제도가 적용되는 것"이라며 “물량, 비가격요소 등으로 민간 사업자들의 신규 사업을 통제하는 것은 다소 불합리한 면이 있지만 탄소감축이라는 전제가 있는 만큼 적응하고 새로운 사업기회를 적극 모색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도 독특하게 고금리, 고환율, 고물가, 고유가의 4중고를 동시에 겪고 있기에 에너지기업들의 생존과 성장 전략 마련이 절실하다"며 “한전과 한국가스공사의 대규모 적자는 단기간에 해결이 쉽지 않고, 정부는 긴축 건전재정을 추진하고 있어 에너지기업의 투자 환경도 상당히 열악하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