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세 회사원 오 과장은 최근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훗날 은퇴 시기에 국민연금이 고갈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는 데다, 노령 인구가 증가하면서 연금 부담금이 늘어날 수 있다는 뉴스 때문이다. 노후를 대비하고 싶지만 각종 생활비 부담에 추가로 저축이나 투자가 어려운 오 과장은 문득 퇴직연금을 떠올렸다.
오 과장의 퇴직연금은 10여년 전 입사 당시 가입한 한 은행 퇴직연금 상품으로, 매월 전액을 정기예금에 투자하고 있다. 원리금 보장형에만 투자하는 소위 '묻어두기'만 한 퇴직연금 수익률은 원금 유지 수준 정도에 불과했다. 수익률이 아쉬워진 오 과장은 지금부터라도 실적배당형 상품에 투자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가입자(근로자)가 직접 투자 상품을 선택할 수 있는 DC형 퇴직연금과 개인형퇴직연금(IRP) 내 277조원의 적립금 중 137조원은 정기 예금 등 원리금 보장형에 투자되고 있다. 80%에 달하는 수준이다. 퇴직연금은 절대 손실이 나면 안 되는 존재로 인식되면서, 가입자들은 대부분 원리금 보장형 상품만 투자해 왔다. 이렇다 보니 수십 년간의 수익률이 한 자릿수에 그치기도 하는 등 자산 증식에는 한계가 있었다.
다만 최근에는 조금씩 변화하는 추세다. 고용노동부의 '2023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 현황 통계' 및 2024년 9월 퇴직연금 공시 등에 따르면 2020년말 27조4천억원원 규모에 그쳤던 퇴직연금 적립금 내 ETF 등 실적배당형 상품 규모는 2021년말 40조2천억원, 2022년말 37조9천억원, 2023년말 기준 49조1천억원으로 빠르게 증가했다. 올해 9월말 기준으로는 67조3천억원으로, 2020년 대비 145%가량 증가했다. 이에 비해 원리금보장형 상품 규모는 2020년말 228조원에서 올해 9월말 기준 323조8천억원으로 약 41% 증가했다.
안정성보다 수익성을 선호하는 이 같은 흐름은 보수적인 투자자가 많은 은행 퇴직연금에서도 드러난다. 주요 은행 퇴직연금 사업자에 따르면 은행 퇴직연금 내 대표적인 실적배당형 상품인 ETF투자 규모의 경우, 2021년말 총 2123억 원 수준에서 2023년말 1조원을 넘어섰다. 올해 10월에는 3조원까지 대폭 증가했다. 대표적으로 하나은행은 퇴직연금 내 ETF 규모가 10월 말 기준 1조670억원을 기록하는 등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실적배당형 상품에 대한 투자자들의 관심이 늘어나면서 은행은 퇴직연금 시장의 새로운 성장 동력을 놓치지 않기 위한 대응에 나섰다. 현재 은행 퇴직연금에서는 증권사와 달리 상장된 모든 ETF를 매매할 수는 없지만, 라인업을 점차 확대하는 추세다. 10월 말 현재 은행에서 거래 가능한 ETF는 평균 120여개 수준으로 대부분의 자산과 테마 ETF에 투자 가능하다.
특히 최근 퇴직연금 실물이전 제도 시행으로 가입자가 기존에 퇴직연금으로 투자하고 있던 상품을 매도·해지하지 않고 사업자(은행·증권·보험 등 금융회사)를 바꿀 수 있게 되면서, 고객 유치를 위한 은행권의 적극적인 변화가 시작될 전망이다.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최근 정치적 변동성과 노후 대비와 수익률 증대를 위한 실적배당형 상품에 대한 수요 증가 등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ETF는 연금 자산 운용에서 점차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며 “ETF가 연금 자산 운용의 주요한 투자 수단으로 인식하는 투자자가 늘어나는 만큼, 판매사인 은행들의 적극적인 대응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