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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 대전대학교 정치외교학 전공 교수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가장 먼저 추진하고 있는 외교·안보 정책 중 하나는 우크라이나 전쟁 신속 종결이다. 이에 미국은 유럽과 국제사회의 우려에도 우크라이나를 배제하고 러시아와의 종전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2월 18일에는 미국과 러시아 사이 큰 틀에서 종전 합의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이 독재자이며 수백만 명의 사람을 죽인 무모한 전쟁광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러시아의 불법 침공을 받고 국토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젤렌스키에게는 충격적인 발언이었을 것이다.
미국이 이렇게 러시아와의 종전을 서두르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미국 군사력을 인도·태평양 지역에 집중하여 중국을 견제하려는 의도다. 미국은 유럽보다는 인·태 지역이 미래 미국의 핵심 이익이 달린 곳으로 무서운 중국의 질주를 막지 못하면 미국이 패권을 상실할 수 있는 심각한 상황이란 인식이다. 미국은 유럽 주둔 미군 병력을 줄이지 않으면 미국의 역량을 중국 견제에 집중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냉전 이후 유럽이 국방비를 삭감하고 미국에 의존해 온 게 사실이다. 실제로 주유럽 미군이 10만 명에 달하는데 유럽 국가 대부분은 GDP 대비 2% 미만의 국방비를 지출하다 보니 10만 명 이상 상비군을 운영하는 나라가 몇 없는 상황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벌어진 최대 규모 전쟁이고 만약 우크라이나가 점령되면 유럽이 다음 전쟁터가 되는 상황에서 나토 회원국들은 국방력 개선 노력을 미루고 있다. 더군다나 유럽이 종전 이후 평화 유지를 위해 우크라이나에 파병하는 대안을 놓고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고 있다. 미국은 이런 무책임한 유럽의 태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최근 국방비를 5% 이상 올리라는 요구를 하며 윽박지르고 있다.
유럽의 이기적인 판단이 큰 비극을 초래한 과거가 있다. 1991년 발생한 유고슬라비아 내전은 유럽의 치부를 잘 드러낸 사례다. 특히 1995년 7월 보스니아 도시인 스레브레니차에서 발생한 세르비아의 대학살극으로 8,000명의 남자 성인과 어린이가 살해되었지만, 유럽은 나치 독일 수준의 인종청소가 재현되는 걸 막지 못했다. 이후 1998년에 발생한 코소보 전쟁에도 유럽은 계속 무기력했다. 당장 이익이 없다 보니 적극적인 개입을 주저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과격한 언동이 일견 폭주로 보일 수 있다. 지나치게 미국 중심적이고 이기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냉정한 현실은 유럽이 이런 상황의 원인을 제공한 책임이 크다는 사실이다. 덴마크, 폴란드 정보기관 등이 향후 수년 내 러시아가 유럽을 침공할 것이란 관측을 했다. 그러나 변화의 속도는 더디다. 유럽의 선두 주자인 독일은 러시아 에너지 의존, 탈원전 등 파퓰리즘 정책을 남발하다 경제가 망가졌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도 인기영합주의 마약을 끊기 어려워한다.
지금까지 안일한 사고에서 벗어나 시급히 국방력을 확충해야 하지만, 유럽은 한국산 무기를 구입하지 말고, 유럽산을 사야 한다며 이 급한 와중에도 자기 밥통을 지키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유럽의 근시안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에 실망이 크다. 비록 버틴다지만, 유럽은 결국 트럼프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한다.